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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이 Apr 18. 2019

[김호이의 사람들] 피자의 아버지 성신제 대표를 만나다

1부



- 미국 피자헛 한국에서 점포 52개까지 키웠지만, 하루아침에 경영권 뺏겨- 1998년 성신제 피자 창업해 2007년 36개까지 점포 늘렸지만, 법적 문제로 문닫아


여러분 안녕하세요 <김호이의 사람들>의 발로 뛰는 CEO 김호이입니다. 여러분이 일으킨 회사가 다른 곳에 경영권이 넘어간다면 어떨 거 같으신가요? 
저는 상상 만으로도 힘들고 다시는 못 일어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번 인터뷰는 10번 이상 실패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도전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성신제 지지스코리아 대표의 인터뷰입니다. 이번 편은 내용이 길어서 2부로 나누어서 올리겠습니다.


Q. 창업을 처음 시작한지 오래되신 것 같은데 얼마나 되셨나요?
A. 제가 무역으로 처음 사업을 시작한 게 79년인데 약 40년 정도 됐어요.

Q. 미국에서 피자헛을 한국에 들여왔다가 경영권을 다시 미국에 넘겨줬던 걸로 알고 있는데 그때의 상황을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A. 점포를 하나에서부터 시작해서 쉰 두 개까지 키웠는데 하루아침에 변호사를 통해서 자기들이 경영권을 다시 가져가겠다는 연락이 와서 참 어처구니가 없었죠. 그때는 굉장히 서운했어요. 요즘은 프랜차이즈 외식업들의 가맹점 수가 많지만 약 20여년 전에 점포가 쉰 두 개였으면 그 당시에 외식업체 전체로 봤을 때 제일 컸어요. 

Q. 피자헛에 경영권이 넘겨지고 많이 힘들었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신제 피자를 창업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A. 그렇게 자식같이 키웠는데 가져 간다고 하니까 섭섭하고 화가 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리 넘겼어요. 그렇게 했던 이유는 그 당시에 내가 젊기도 했지만 “새로 시작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성신제 피자를 창업했던 거예요. 1998년에 명동에 1호점을 열면서 굉장히 폭발적으로 인기가 있었는데 그러니까 더더욱 자신이 있었죠. 그래서 “아 이 상태로 몇 년만 더 하면 피자헛을 따라 잡겠다”하는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했고 2007년에 법적으로 문제가 생겨서 서른여섯 개 점포까지 갔다가 문을 닫았어요.




[사진= 성신제 대표 제공 ]


Q, 성신제 씨를 말하면 대부분이 피자헛의 아버지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맞나요?

A. 그런 셈이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피자라는 말을 몰랐을 때 시작을 했고 피자가게가 몇 군데 있긴 했지만 정확히 얘기하면 피자집이라고 얘기하기에는 조금 곤란했어요.


Q. 사람들이 알고 있기에 피자 기구까지 성신제 대표가 들여왔다고 알고 있는데 그런 건 다 어떻게 들여온 건가요?

A. 제가 피자에서 만큼은 바닥부터 출발을 했어요. 1981년도에 무역을 하면서 피자를 만드는데 필요한 도구, 피자를 파는 레스토랑에서 필요한 프로모션 아이템 이런 것들을 전부 제가 수출을 했었어요. 그 당시에 피자헛에 수출하는 걸 다른 사람들이 와서 봐도 이게 뭐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 않은 것 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그 당시만 해도 미국에 무역으로 출장을 갈 때 항상 피자헛 주방에 먼저 들어가서 “내가 수출했던 도구를 가지고 이 사람들이 어떻게 쓰고 있나” 이런 걸 항상 검토를 했기 때문에 피자에 관해서는 제일 오래한 셈이죠.



Q, 최근 피자 무한리필 등 피자 역시 예전과 많이 달라졌을텐데 이를 보면 한국 피자의 아버지로서 어떠한 생각이 드시나요?

A. 한국의 피자업계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탈리안 피자가 피자의 오리지널인데 지금 세대들은 피자라고 하면 위에 뭔가 엄청나게 올린 게 진짜 피자라고 알고 있어요. 예를 들어 밀가루 반죽하고 토마토도 올려놓고 치즈 올리고 토핑만 단순하게 얹고 나서 피자라고 하면 믿지 않아요. 그래서 오리지널 피자로 돌아가야 된다고 생각해요.


Q, 그렇다면 처음의 피자는 어땠나요?

A. 처음에 피자는 단순하고 지금보다 굉장히 담백했어요. 밀가루 도우도 그렇고 토핑도 기껏해야 많이 들어가는 게 페퍼로니를 포함해서 위에 6개 정도의 슈퍼 프리미엄 정도였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내가 봐도 이게 무슨 피자인지 정확히 뭔지 모르겠어요. 소스를 엄청나게 뿌리고 칠하고 일부 업체의 피자 같은 경우 “저게 피자라고 할 수 있나?”라는 생각도 들어요.



Q. 현재는 컵케익 공방을 운영 중이신데 피자에서 이제는 왜 컵케익 공방을 하게 되었나요?

A. 성신제 피자가 미국계 리이징 컴퍼니 제2 금융권 회사와 싸움이 일어났었는데 그때 소송에서 졌어요. IMF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외환은행을 집어 삼킨 론스타 라는 투기자본이 있었는데 그 회사에서 우리나라에 있는 중소기업들에 대해서 소송을 걸어서 우리나라 기업들을 후려쳤어요. 그 와중에 말려 들어서 엄청나게 돈을 뜯기고 결국은 파산하고 말았죠. 그래서 문을 닫았던 거예요.


그 후에 컵케익을 다시 하려고 했는데 컵케익을 시작하자마자 몇 달 되지도 않아서 미국 본사가 다른 회사에 M&A(인수합병)이 돼서 “코리안 비즈니스는 자기가 안 하겠다” 하는 바람에 붕 떠서 지금 현재 이렇게 쪼그라들었어요.


Q. 피자가게가 망하고 여운이 남으면 다시 새로운 피자가게를 창업했을 수도 있는데 피자가게를 다시 하지 않은 이유가 있으신가요?

A, 사실은 망할 때 너무 처참하게 망했어요. 아침에 일어날 때 집사람이 부엌에서 음식을 하느라 딸그락 딸그락 하는 소리가 들리면 “아 오늘은 아침을 먹을 수 있구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어려웠어요. “그렇게 크게 하던 사람이 뒤에 숨겨 놓은 게 있겠지” 하겠지만 제 성격상 그러지 못했어요.

집에 있는 애들 돌반지, 집사람 결혼 반지 등 몽땅 다 내다 팔고 끝까지 버티고 하고자 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막상 망하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날 아침 못 먹을까봐 걱정할 정도로 처참하게 망했어요.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피자를 어떻게 해요. 무슨 돈으로, 할 수 없죠.



Q. 그래서 컵케익을 하게 된건가요?

A. 미국에 가서 미국에 있는 컵케익 회사에다가 단판을 지었어요. 단판을 지으면서 “당신네 컵케이크 회사를 한국에서 하고 싶은데 내가 돈이 없다” “그러나 이런 먹는 쪽에는 내가 누구보다 자신 있다“ ”열심히 한다, 그러니까 날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줬으면 좋겠다” 그랬더니 그쪽에서 “오케이 좋다, 도와주겠다”해서 그쪽에서 돈을 대서 컵케익을 시작한 거예요. 컵케익을 시작할 때도 내가 뭐 돈이 있었겠어요.(웃음)


Q, 그렇다면 컵케익들은 어디서 판매를 하나요? 공방에서 판매하는 건 아니죠?

A, 공방에서 판매하지 않고 꽃 배달 하는 업체에서 축하 케익도 같이 판촉을 하는데 거기서 “오늘 주문 몇 개 들어 왔습니다” 하면 부랴부랴 만들어서 갖다 주고 하는 거예요.



[사진= 김호이 기자 ]


여러분 혹시 이번 성신제 대표의 인터뷰 어떠셨나요? 저는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실패란 끝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라는 걸 다시한번 느꼈는데요.

2부 인터뷰에서는 성신제 대표만의 실패 극복법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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