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존재한다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속 비로소 존재하는 것들

by 박자아


‘낯섦’을 보는 눈




대개 영화는 강한 몰입을 대중에게 선사하며 그 힘을 입증한다. 영화의 몰입도는 관객의 만족도와 직결되기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졌다. 다시 말해, 카메라 숏은 관중의 눈이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영화로서 분명한 흡입력을 가졌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독보적인 카메라 숏은 주의를 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객을 영화 속으로 내던지는 듯하다. 우리는 땅 와사비 와 사슴 뼈의 시점으로 영화 속 인물을 바라보고, 별안간 자동차 트렁크의 시선으로 길바닥을 누비게 된다. 잃어버린 하나(니시카와 료)를 찾기 위해 뛰는 주민의 눈이 된 것처럼 카메라는 불안하게 흔들린다.


영화는 지극히 관음적인 관객의 시선을 반영한다. 우리는 영화를 시청하면서 인물들을 관찰하고, 허구의 세상을 엿보며 이내 그것을 현실이라고 여기게 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시점을 경험하면서 우린 마치 그 사물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감독은 결코 이 시야를 몰입의 장치로 사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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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 들어가 그 사물이 된 것이 아닌, 사실 그저 땅 와사비의, 사슴 뼈의 눈을 흉내낸 카메라 숏일 뿐이라는 걸 인식하게 될 때 관객의 몰입은 깨진다. 여기 너무 나도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있다: 카메라는 굉음과 함께 통나무를 써는 타쿠미(오미카 히토시)를 비춘다. 사방으로 튀는 나무파편과 함께 우리는 썰리는 통나무의 시점으로 타쿠미를 바라본다. 그러나 이내 카메라는 위로 천천히 움직이면서 이 시점은 사실 통나무의 시점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며, 지금까지 보여준 이 장면은 그저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건조하게 드러낸다. 영화의 몰입을 깨는 순간의 낯섦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때때로 아주 대담하게 카메라를 응시하며 대화한다. 영화 속 주인공이 관객을 빤히 쳐다볼 때, 관객과 영화의 위치는 전복된다. 관객이 영화를 바라보듯, 영화도 관객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가 눈이라고 여기는 공간에는 사실 카메라가 있다. 몰입이 깨지고 낯섦이 드리울 때, 카메라는 비로소 그 자리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현실과 환상, 그 모호함 사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보며 가장 의아함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은 마지막 장면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하나의 아버지 타쿠미는 사슴과 함께 있는 하나를 목격하고 뛰어가려는 연예기획사 직원과 몸싸움을 벌이고, 목을 조르는 과정에서 직원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직원의 죽음을 확인한 타쿠미는 살인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하나를 향해 달려간다. 무엇을 위한 몸싸움이고, 무엇을 위한 살인인지 우리는 영영 알 수 없다. 직원이 실제로 죽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결말은 기괴하고 모호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모든 상황은 아주 몽환적이라는 사실이다.


타쿠미의 기이한 행동은, 그가 앞서 차 안에서 운전을 하며 던졌던 대사를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야생 사슴은 사람을 공격하지 않아, 공격한다면 그건 총에 빗맞은 사슴이거나 그 어미 혹 아비야.’ 직원을 공격하는 타쿠미의 모습은 그저 딸이 위기에 처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고픈 아버지일 뿐, 직원의 생사는 사실 그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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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나는 이 장면에 다시금 의문을 품어본다. 이 장면은 과연 진실일까? 누군가의 상상 혹은 꿈일 뿐인 건 아닐까? 사슴은 사람을 보면 도망친다는 타쿠미의 말을 떠올려보자. 해가 맑게 떠있고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활동을 하는 현실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사슴의 발자국이나 죽은 사슴의 뼈 따위다. 사람을 봐도 도망치지 않는 ‘진짜’ 사슴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은 하나의 꿈에서나, 환상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는 안개 자욱한 엔딩에서나 존재한다. 안개처럼 보이는 형상은 하나의 곁에서 머물다가, 차차 직원들과 타쿠미까지 덮쳐온다. 농무 속에서 우리는 눈앞의 상황을 확인할 수 없다. 눈앞에 보이는 것을 현실이라고 믿는 것조차 어렵다. 결국 코피를 흘리며 쓰러진 하나도, 거품을 물고 죽은 직원도 이 공간에 실재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는 것이다. 현실과 환상의 모호함 사이에는, 마치 비웃기라도 하는 듯 그 경계를 자유자재로 드나드는 사슴이 있다. 사슴이 사라지고 안개가 물러설 때, 비로소 모든 것이 현실에 존재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많은 지점에서 다양한 사유의 가능성을 이끌어낸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우리는 다시 한번 근원적인 물음에 도달한다. 악은 과연 존재하지 않는가? 악은 무엇인가? 악은 진정으로 악한가? 영화는 자연 대 인간, 도시 대 시골, 직원들 대 마을 주민을 보여줌과 같이 끊임없는 이분법적 함정을 전시하지만, 감독이 결론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선도 악도, 그 어떤 대립도 아니다. 그저 태어나 살아가고 어떤 이유로 죽어가는 비좁은 삶 속에서 인간만이 악을 정의하지만, 예로부터 우리는 악을 잘못 정의하는 실수를 적지 않게 범해왔다. 그렇기에 우리는 악이 과연 인간에 의해 정의될 수 있는 것인지 이 영화를 통해 재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악에 대한 도전과 재정의가 이루어질 때, 악은 비로소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