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함의 무덤>- 무덤은 찬란한가? 찬란함은 결국 무덤으로 향하는가?
욕망의 재현
<찬란함의 무덤>을 관통하는 것은 ‘욕망’, 특히 여성의 욕망이다. 영화에서는 여성들의 성적인 농담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잠자는 군인들이 뭐 재밌는 거라도 하면 몰라도......”라는 대사부터, 잠든 잇 앞에서 화장품 냄새가 정액 냄새와 같다고 하는 장면, 발기한 군인의 성기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장면 등이 그 예다. 영화에서 성적인 농담 이 나오는 것은 으레 자연스럽지만, 이 장면들이 유독 당혹스럽고 불쾌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디어에서 성적인 농담을 던지는 주체는 주로 남성이고, 농담의 대상은 자연히 여성이 된다. 이 농담의 주체가 전복될 때 우리는 익숙하지 못한 상황에 대한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정부가 남성인 군인들을 대동해 땅을 파고 있다는 영화적 배경과 달리, (의사를 제외한) 잠든 군인을 돌보는 대다수의 인물은 여성이다. 그만큼 영화 속엔 여성이 등장하는 비율이 높고, 이는 기존 영화 체계와는 반대되는 특성을 가진다.
더불어 영화에서는 두 번의 ‘어루만짐’이 등장한다. 한 번은 잠든 군인 잇의 가슴을 마사지하는 젠의 장면, 나머지 한 번은 잇의 영혼에 빙의한 영매 껭이 젠의 다리를 낫게 해 주겠다면서 손으로 마사지하고, 입으로 핥는 장면이다. 이 어루만짐 또한 에로틱한 정서와 욕망을 드러내고 있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위무하는 성격을 가졌다.
뭇 영화에선 종종 억눌린 현실을 성적인 것으로 표출하곤 하는데, 로우예 감독의 <여름궁전>이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찬란함의 무덤>도 이와 같은 문법을 따르고 있다. 몸이 아픈, 고통스럽고 불완전한 몸을 가 진 중년 여성 젠의 군인 잇에 대한 욕망과, 저급한 농담에 동조하며 함께 웃는 여성 인물들의 모습, 살을 위무하듯 만지고 핥는 행위는 암담한 현실에 대한 불완전한 표출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감독은 현실적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시대적인 상황을 직접적으로 부정하기보단,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성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우회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욕망은 비단 등장인물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욕망을 촉발시키면서 영화는 비로소 완성된다. 잠든 군인들을 깨우고픈 욕망, 영매 껭이 보는 세계를 함께 보고 싶은 욕망,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예고편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욕망 등......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다양한 욕망의 갈래에 사로잡히지만, 감독은 그 어떤 해답도 내놓지 않는다.
찬란한 환상, 꿈의 무덤
우리가 영화를 통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현실뿐이지만, 젠과 껭은 눈으로 보이 지 않는 초현실적 환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껭은 잇의 영혼에 빙의한 이후 젠을 데리 고 눈에 보이지 않는 왕국을 거닐지만, 동시에 나무에 남아있는 홍수자국, 젠이 돌보는 난꽃 등에 함께 시선을 돌리는 것처럼 껭이 보는 세상은 현실세계와 중첩되는 모습을 보인다. 영매 껭이 보는 것은 전생이고, 과거다. 두 사람은 과거의 왕궁을 떠도나 사실은 깨진 조각상의 파편이 난무하는 현실세계를 걷고 있다. 이처럼 영화 속 과거와 현실은 뒤섞인다.
‘엄청 큰 개미는 눈에 띄지만, 산만큼 큰 거지는 보이지도 않는다.’
‘천국을 향한 굶주림은 지옥으로 이끌 것이다.’
‘남는 시간이 제일 지겨운 법.’
‘타인을 공격할 때 우린 용서받고 싶어 하지만, 우리가 공격할 때는 용서하는 법을 잊어버린 다. ’
젠과 껭은 눈에 보이지 않는 왕궁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나무에 걸린 문구들은 그들의 환상이 그저 눈에 보이지 않는 꿈일 뿐이라는 것을 생경하게 보여준다. 군인들은 계속해서 잠에 빠지고, 젠과 껭은 계속해서 환상 속을 거닌다. 사람들은 환상과 신화적 존재를 서슴없이 받아들이고, 구름이 떠 있는 푸른 하늘에는 커다란 세포의 형상이 드리운다. 현실은 직시하기엔 너무나도 괴롭고 피곤하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꿈과 환상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달갑지 않은 도피의 끝은 결국 무엇일까. 껭이 안내하는 환상을 따라가면서도 ‘꿈에서 깨고 싶다’는 젠은 흙더미에서 뛰어노는 현실의 아이들을 보며 눈을 크게 뜬다. 젠의 눈앞에 놓인 것은 과연 현실일까, 환상일까? 무엇이 되었든 젠은 분명히 꿈에서 깨어나 그 자리를 도망치듯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군인들은 깨어나 일 상생활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 마치 버튼을 누른 듯 잠에 들어 버린다. 잠든 군인들을 비추는 LED조명의 빛이 조각난 도시의 일부를 물들이는 것처럼, 환상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아가 현실의 영역까지 침범한다. 영화 속 환상과 현실은 시간이 지날수록 혼재하지만, 꿈의 무덤은 현실이다.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삶이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찬란한 법이다. 우리는 그의 영화가 분명하다고 착각하게 되지만 실로 모호하다. 태국 현실에 대한 거대한 알레고리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는 ‘태국적’이지만, 한 편으론 ‘내 영화는 스토리가 없다’는 그의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듯 그의 실험적이고 초현실적인 도전은 결코 ‘태국적’이지 않다.
태국은 현재까지도 빈번한 군사 쿠데타와 시위로 골머리를 앓는 중이다. 영화가 개봉한 2015년과 가장 가까운 2014년 역시 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났다. 태국 국민들은 수없이 많은 민간인의 희생과 확대되는 불안감, 극심한 분열에 혼란과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찬란함의 무덤>은 이 공포와 불안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비록 직접적이진 않으나, 이 시대를 겪는 아픔의 편린은 껭으로부터 다리 마사지를 받는 젠의 눈물처럼 상처를 비집고 새어 나온다. 마지막으로 다시 영화의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찬란함의 무덤은 찬란했던 시절을 뒤로한 채 현실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사람들의 환상통이다. 희생과 외로운 싸움으로 공고히 다져진 이 무덤이 헛되이 무너지지 않길, 언젠가 방 안의 코끼리를 해방시킬 수 있는 날이 오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