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추락의 해부> 가 관객을 해부하는 방식
영화를 읽어보기 전, 해부라는 단어부터 시작해 보자. 우리는 생물체의 내부구조나 사인(死因)을 갈라헤쳐 연구하는 것이나, 사물이나 사건을 자세히 분석하고 연구하는 과정을 해부라고 칭한다. 이 영화의 제목은 추락의 해부이지만, 단순히 죽은 사무엘의 추락사만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이 영화가 해부하고자 하는 것은 법정에 참여하는 모든 등장인물과 이를 지켜보는 우리 의 삶, 다시 말해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해부다. 영화 <추락의 해부>는 거대한 해부대인 셈이며, 진실은 파편화된 인간성 사이를 유희하듯 빠져나간다.
법정은 근거를 겹겹이 쌓아 무죄 혹 유죄라는 결론에 도달해야만 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나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치부를 드러내고, 소모적인 싸움과 삶을 스스로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가공해야 하는 폭력적인 상황에 처해야만 한다. <추락의 해부> 속 법정의 방향은 왜인지 파헤치는 것(해부) 이 아닌 어떤 답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원하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찾아내거나 만들어지는 근거는 진실을 흐리고 진상을 외면하게 만든다. 이 법정에서는 산드라(산드라 휠러)를 표적으로 삼고 있다.
법은 과연 모두에게 동등히 적용되는가? 당장 영화 속 산드라만 봐도 법정은 전적으로 여성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공공연하게 아웃팅을 당하고, 자신이 쓴 책은 검사에 의해 ‘새로 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인함을 놓지 않는 산드라를 바라보는 배심원들의 표정은 싸늘하고, 법정은 더욱 가혹해진다.
산드라는 능력 있는 작가이며, 동시에 양성애자다. 사회적 지위와 성지향성은 공교롭게도 여성이란 존재를 공격하고 깎아내리기 좋은 허점이다. 여성으로서 ‘일반적’인 길을 걷고 있지 않다는 것은 존재 자체로 ‘일반적’인 가치를 위협하기에 끌어내림의 대상이 된다. 물론 산드라가 결백하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부부싸움을 하다가 팔에 든 멍을 부엌에서 부딪친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남편인 사무엘(사무엘 테이스)을 몰아세우고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으며, 결혼생활 도중에 외도를 하기도 했다. 다만 설령 산드라가 부도덕한 행위를 더 많이 했다고 한들 우리는 그녀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도덕성만으로 개인의 범죄성을 판단하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결코 법정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위의 모든 정황은 근거로 변모하여 전적으로 산드라에게 불리하게 적용된다. 법정은 이 여성을 ‘괴물’로 빚어내기 위해 정성을 다한다.
산드라는 남성중심 사회를 구성하는 데 있어 ‘유해한’ 여자다. 드세고 이성적이며, 냉철하고 냉혹하다. 이 존재는 잔뜩 부풀린 풍선을 터트릴 날카로운 바늘과 같다. “저는 남편이 자신의 고통을 다니엘에게 투사하는 것이, 네, 가끔은 미웠습니다.” 산드라는 남편의 자기 연민과 나약함을 솔직한 진술 한 마디만으로 폭로한다. 남편이 ‘미웠다’라는 말이 자신을 살인자로 몰고 가는 장소에서 얼마나 위태롭게 작용할지 알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는다. 산드라의 ‘숙이지 않음’이 바로 산드라가 ‘유해한’ 지점이다. “법정에서는 진실보다 남들이 당신의 행동을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해요”. 변호사 뱅상의 말은 정확히 산드라에 의해 뒤집힌다. 세상은 유해한 여 자의 추락을 바란다. 영어를 쓰는 산드라에게 불어를 강요하고, 과거의 행적을 과장하며 잔인하게 몰아세운다. 법정의 아들은 어머니의 치부를 지켜본다. 산드라의 권위를 끌어내리는 일련의 요구는 그녀가 가정에 충실하고, 얌전하며, 순종적이길 바라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남편의 죽음 이후의 감정을 대처하는 산드라의 태도 역시 주목할 만하다. 산드라는 변호사 뱅상(스완 아를로)과 맥주를 마시며 선을 넘을 듯 말 듯 위태로운 분위기를 즐긴다. 무죄를 선고받고 난 후의 뒤풀이에서는 뱅상과 묘한 기류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껴안는다. 이쯤 되면 영화 밖의 관객은 산드라가 뱅상과의 관계에서 과연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또한 누군가는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산드라를 비난하거나, 죽은 남편을 애석히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과연 산드라의 잘못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사람은 언제나 슬픔과 절망에 잠겨있지 않는다. 남편을 잃은 여성은 반드시 홀로 충실히 가정을 지키는 ‘과부’ 여야만 할까? 가정을 지키는 일은 가정을 이루는 구성원 모두의 몫이다. 소모적이고 외로운 싸움을 1년간 지속하고 있는, 특히 마지막으로 남은 아들마저 자신을 ‘괴물’로 볼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산드라에게 가정을 지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가벼운 정신적 일탈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힘든 상황에서 슬퍼해야만 한다는 이상주의적이고 단편적인 사고에 스스로를 가둔다면 산드라는 어디까지나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다니엘(밀로 마차도 그라너)의 성장이다. 과거의 과오를 더듬는 어른들의 틈에서 다니엘만이 현재와 미래를 탐색한다. 이는 다니엘의 피아노 실력을 통해 상징적으로, 때로는 다니엘의 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두려움과 잔인함을 눈앞에 놓고 더 나은 선택을 위해 외면하지 않는 것, 아버지의 죽음을 해부하기 위해 다소 무모한 방법으로 실험을 해보는 것, 소리와 감각에 의지하며 자신의 판단을 확인하는 것은 매도에 가까운 진실에 혈안이 되어있는 어른들보다 현실적이며 이성적이다. 시각장애를 앓고 있는 다니엘에게 세상은 아주 세심하게, 가까이 해부하고 현미(顯微)해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이다. ‘이미 상처받았어요. 그래서 더 필요해요, 다 듣고 극복하려고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근거가 미약할지라도 아버지의 죽음 그 자체를 스스로 받아들이기 위해 기억을 더듬는 다니엘은 노골적인 사실의 상처를 뒤로한 채 용감하게 성장한다. ‘아무도 이 상황을 이해 못 해’라고 말하는 대모의 말을 등지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앞에서 진정으로 죽음을 이해하고자 했던 것이다.
<추락의 해부> 속 청각적인 정보는 영화를 구성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듣는 사람을 괴롭히는 듯 지긋지긋하게 울려 퍼지는 50 cent의 P.I.M.P는 죽은 사무엘의 목소리로서 영화 초반을 장악하고, 첫 번째 플래시백이 등장하기 전 우리는 부부싸움의 내용을 귀로 먼저 접하게 된다. 아버지를 떠올리는 다니엘의 마지막 증언에서도 관객은 대화라는 청각적 요소에 집중하게 된다. 폭로도, 혐의도, 추측도 말로써 재구성된다.
소리로 재구성되는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본디 사람은 다양한 기관을 동원하여 무언가를 감각하고 판단한다. 한 가지 감각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것은 쉽지도 않거니와 객관적이지도 않다. 감독은 왜 이런 상황을 영화 속에 들이밀었을까. 첫 번째 플래시백은 부부싸움이 극으로 치달을 때 끝난다. 누군가 맞는 소리, 물건이 깨지는 소리, 비명 소리는 모두 청자의 상상에 맡긴다. 다니엘이 증언하는 마지막 플래시백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닌 다니엘의 목소리로 이어진다. 이처럼 영화 속에는 청각이 선사하는 ‘상상의 영역’이 존재한다. 애초에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감독은 사운드를 관객에게 맡기며 ‘판단은 당신의 몫’이라고 외친다. 결국 결론은 다수가 선택하는 주관으로 판단될 뿐, 진정한 진실은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는 결론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방향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끊임없이 보는 사람들의 생각을 헤집는다. 과연 이것은 살인인가, 사고인가, 자살인가? 해답을 얻으려고 하는 순간 <추락의 해부>는 납작하고 가벼워진다. 당신이 판단을 어디에 위치하는지에 따라 영화의 가치는 변화하기 때문이다. 절대 당신이 원하는 결론으로 흘러가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감독 쥐스틴 트리에가 관객을 해부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