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아 페레즈>는 헐겁다
여성연대, 그 묘한 긴장
<에밀리아 페레즈>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맥락에서 명확하다. 연대와 용기. 리타(조 샐다나 분)는 재판 승소 이후 군중 속에 섞여 들어가 익명의 여성에게 탐폰을 빌리고, 여성은 당연하다는 듯 내어준다. 여성의 연대란 이런 것이다. 때론 소소하지만 그 안에는 ‘네가 안전하길 바란다’는 안온의 기도가 있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여성 연대의 확장을 이뤄내긴 하지만 정곡을 날카롭게 찌르는 것은 실패하고 만다. 영화 후반부의 중심으로 흘러가는 에밀리아(칼라 소피아 개스콘 분)와 리타의 연대가 어디로부터 쌓아져 왔는지에 대한 기원은 소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에밀리아로 성전환 하기 전 마니타스 델 몬테(칼라 소피아 개스콘 분)는 리타를 자본으로 고용한다. 리타는 마니타스로부터 연락을 받는 순간부터 폭력에 노출된다. 자신의 신원을 밝히지 않고 다짜고짜 스토킹 식의 전화를 건 것부터 납치까지, 리타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위해 일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타를 감시하며 협박하는 마니타스는 자신의 폭력을 고스란히 리타에게 행사한다. 흔히 떠올리는-목적을 위해선 그 어떤 폭력과 죽음도 마다않는-조직 두목의 모습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폭력을 저질러온 사람에게 친근감을 느낄 수 있다. 폭력과 애정의 형태는 형용하기 어려울만치 다양해서 쉬이 정의내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에밀리아와 리타가 정서적으로 가까워지는, 흔히 말하는 ‘친구’가 되는 기점이 에밀리아가 성전환을 한 이후부터라는 점이다. 물론 리타는 에밀리아를 런던의 연회자리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두려움에 떤다. 에밀리아가 마니타스로 살아오며 리타에게 행한 폭력이 이어질까봐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에밀리아는 진심을 내비치는 도움을 청한다.“하지만 언젠가 이해하겠지, 모든 걸 뒤로하고 삶을 바꾸는 게 어떤 것일지”라는 말을 앞세우며 아이들과 함께 살게 해달라고 한다. 그리고 그 진심이 꼭 가닿길 원하듯 에밀리아는 리타의 손을 잡는다. 관계의 변화는 이때부터 일어난다. 두 사람은 노포에서 술을 마시고, 함께 ‘라 루세시타(비영리단체)’를 세운다.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어떤 관계에 있어 이게 가능한가?
리타는 마니타스의 피해자였다. 마니타스가 성전환 수술을 받아 에밀리아가 되더라도, 에밀리아가 다정다감한 사람이 되더라도, 에밀리아가 비영리단체의 사장이 되어 과거를 청산하더라도 리타에게는 제거될 수 없는 공포가 있다. 새로운 삶은 없다. 성이 바뀌고 피부가 바뀌어도, 삶에 대단한 발달과 발전이 있어도 ‘환골탈태’된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은 지워질지언정 한 사람이 삶을 살아가며 만들어내는 기록은 퇴적되기 때문이다.
영화의 기묘한 또 한 가지 포인트는 에밀리아와 그의 연인 에피파니아(아드리아나 파즈 분)의 관계다. 에피파니아는 가정폭력을 저지르던 남편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라 루세시타’에 방문한다. 혹여 그의 남편이 죽지 않았을 것을 대비해 그를 살해하려고 칼을 들고 말이다. 다행히도 에피파니아의 남편은 죽었고, 에피파니아는 안도의 눈물을 흘리며 “제가 오죽하면 칼을 들고 왔겠어요”라며 에밀리아에게 털어놓는다. 에밀리아는 떠나는 에피파니아에게 진짜 칼을 들고 왔냐고 묻고, 에피파니아는 칼을 꺼내 보인다. 곧이어 에밀리아도 자신이 숨겨놨던 권총을 꺼내 보이며 웃는다. 두 사람 사이의 애정이 싹트는 순간이다.
에피파니아에게 칼을 드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지만, 에밀리아에겐 아니다. 그 차이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같은 여성이라 할지라도 억압의 층위는 동일하지 않으며, 생존을 위한 무기의 의미 역시 각기 다르다. 에피파니아가 칼을 든 순간은 단순한 분노의 표출이 아닌 생존 그 자체를 위한 필사적인 선택이었다. 반면 에밀리아에게 총은 과거의 권력에 대한 은유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사용되지 않지만 여전히 ‘소지’할 수 있는 힘, 폭력의 기억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증표이기도 하다. 이 장면은 두 사람이 처해 있는 생존의 조건이 얼마나 이질적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여성 연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연대란 서로가 똑같은 고통을 겪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고통을 이해하고, 그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함께 맞설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여성 연대는 ’너도 힘들지?’라고 손을 잡는 제스처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억압받아온 이들이 자신을 둘러싼 구조를 이해하고, 그 구조에 균열을 내기 위해 함께 위치를 점하는 ‘정치적 실천’이다. 말하자면 연대는 감정의 교환이 아니라 위치의 공유다. 에밀리아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 어떤 여성과도 위치성을 공유하지 못한 채, 자신이 기존에 쌓아온 위계 관계를 처리하지 못한 채 경계에 위태로이 서있다.
타오르는 마니타스, 해방되지 못한 리타
의사의 붉은 수첩에 파란 잉크로 기록된 마니타스의 고통은 그 어떤 장황한 독백보다 날것이다. 마니타스의 고백은 어떤 면에서는 너무 늦은 고백이다. 삶의 궤적 대부분을 폭력과 지배로 살아온 자가 마지막에 남긴 단 하나의 ‘정직한 기록’이자, 유일하게 음률이 아닌 문장으로 전해지는 고뇌의 파편이다. 그리고 그것은 리타의 손에 쥐어진다.
리타는 이 수첩을 불에 태운다. 격렬한 불길은 마니타스의 육체와 함께, 그의 고통 또한 태워 없앤다. 리타에게 그 불길은 안도이자 해방이다. 더 이상 과거의 그림자에 시달리지 않으리라는 자기위안. 더는 위협받지 않는, ‘안전한 세계’로의 이행. 그러나 이 순간의 안도는 곧 깨진다. 마니타스는 연기가 되어 사라지지만 리타는 에밀리아라는 현실에 다시 묶인다.
불에 태워 없앨 수 없는 것은 리타의 기억이고, 두려움이며, 구조다. 에밀리아가 아무리 다정하고 손을 붙잡으며 애원해도 이가 리타의 평화를 의미하진 않는다. 그것은 용서의 감정이 아닌 생존의 본능에 가까운 긴장의 지속이다. 이 긴장은 영화 말미까지 리타의 표정, 리타의 말투, 리타의 침묵 속에서 쉼 없이 이어진다. 에밀리아에게 진정하라고 소리치고 제시(셀레나 고메즈 분)를 어르고 달래는 동안, 그리고 에밀리아의 두 아이를 껴안는 마지막 엔딩까지 리타의 삶은 좀처럼 이완되지 않는다. 관계의 위계는 해체되지 않는다. 의사의 수첩에 푸르스름한 글씨로 쓰인 고백의 수취인은 누구였을까?
에밀리아가 새 삶을 시작하며 관계의 재정립을 시도할 때, 리타에게는 애초에 선택지가 없다. 에밀리아는 이제 다정하고 사회적 책임을 고민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 ‘새로운 에밀리아’는 리타에게 너무도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다. 카르텔의 수장, 스토커, 납치범, 협박자. 리타는 그 모든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자, 그 과거를 온몸으로 살아낸 증인이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여기에 있다. 에밀리아가 ‘새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전히 자신이 자본과 권력을 쥔 주체였기 때문이다. 수술의 경로도, 신분 세탁도, 제도 밖에서 이루어지는 정체성 재구성도 그녀가 쌓아온 권력의 혜택 위에서 작동한다. 마니타스는 여성으로 다시 태어나고, 과거를 지우며, 서사를 재편할 수 있는 선택지를 가진다. 그러나 리타는? 그는 여전히 에밀리아가 만들어낸 세상의 구조 속에 묶여 있다. 비영리단체의 공동 설립자라는 타이틀로도 그 트라우마를 무효화할 수는 없다.
리타가 수첩을 태운 장면은 그래서 묘한 역설로 가득하다. 마니타스는 불에 타오르며 사라졌고 에밀리아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는다. 그러나 리타는 사라지지 못한 마니타스의 흔적을 끌어안고 계속 그 곁에 있어야 한다. 심지어 ‘라 루세시타’라는 이상적인 연대의 공간 안에서조차 말이다. 이 연대는 정말 자발적인가? 아니면 구조적으로 강요된 공존인가?
<에밀리아 페레즈>는 트랜스 여성의 주체성, 그리고 여성 연대의 확장을 다룬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 있는 시도다. 그러나 영화는 동시에, 폭력과 권력의 문제를 성전환이라는 “변신의 서사” 안에 함몰시켜버리는 위험을 피하지 못한다. 영화는 “누구든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이상에 기대지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선 누군가의 기억, 누군가의 상처, 누군가의 진실이 망각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애써 흐린다. 다시 한 번 묻는다. 진정한 해방은 누구의 것인가? 그리고 누구의 해방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억압이 되는가? 리타는 여전히 감정적으로도, 구조적으로도 해방되지 못한 채 망령처럼 남는다. 그리고 영화는 그녀의 그 ‘남겨짐’을 충분히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리타의 고통은 에밀리아의 변화적 서사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처럼 작동한다.
에밀리아에게, 그리고 영화에게
<에밀리아 페레즈>는 해소되지 못한 찜찜한 여운을 남긴다. 영화는 여러 첨예한 키워드를 한데 모아 대담하게 펼쳐 보이지만 끝내 그 어느 것도 말끔히 해결하지 않는다. 정체성의 변신은 해방이 되었는가? 연대는 진정한 이해와 치유로 이어졌는가? 죄는 청산되었는가? 이곳에서 열거되는 어떤 질문도 의문도 완결된 답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오히려 영화는 질문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영화는 해답을 제시하는 장치가 아니라, 우리가 회피하거나 망설이던 질문들을 다시 직면하게 만드는 거울이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바로 그 점에서 유의미하다. 이야기의 중심을 흐르는 불균질함, 연대의 위태로움, 구원의 모호함은 오히려 영화가 관객에게 위임한 몫으로 남는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어둠의 군중 사이에서 노래하는 리타의 얼굴로 출발하여 잘린 손에 붉은 천을 두른 여인의 형상이 행진의 찬양 속에서 신화화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수미상관의 구조 속에서 영화는 하나의 결론 대신 수많은 감정과 가능성을 남긴다.
그렇다. 어떤 영화는 끝내 답을 내놓지 않는다. 한 편으로 잘 만든 영화는 꼭 대답을 가져야 할 필요가 없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말한다. 여기, 모든 것이 남아 있다고. 모든 것이 질문이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라고. 그리고 그 미완의 서사가 바로 이 영화가 우리에게 도착한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