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O 공항 (San Francisco International Airport) 국제터미널 G97번 게이트. 막 늦은 점심 식사를 터미널 내 일식집에서 간단하게 해결했고, 곧 스칸디나비아 항공 여객기에 올라탈 준비를 하고 있다. 코펜하겐을 거쳐 취리히로 가는 여정. 모든 게 순조롭진 않았지만, 어찌 됐든 게이트 앞까지 제시간에 도착하여 탑승을 기다리고 있으니 마음이 좀 놓인다. 다행히 돌 지난 딸아이도 상태가 나쁘지 않은 편이다.
늘 그렇지만 아이를 가진 후 어디로 여행을 가던 비행하는 날이 제일 정신없고 힘이 든다. 미국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짐을 처리하고 집 정리도 겨우 마친 후, 친구의 라이드로 공항에 잘 도착했다. 짐 처분은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치지 못하게 했다. 침대 매트리스와 스탠드 램프 및 몇몇 자질구레한 용품들은 끝끝내 팔리지 않아 떠나는 당일 오전에 무료로 풀었다. 그래도 꽤 가격이 나가는 물품들인데 공짜로 넘기자니 아까웠지만 별 수 없었다. 집 정리는 생각보다 대단히 고생스러웠다. 하나하나 다 버리고 정리하고 치우고의 반복. 땀을 너무 많이 쏟아서 말미에는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정리가 마무리될 즈음의 집 거실 아직 5년 동안 살았던 미국 생활을 정리한다는 실감 내지는 새로운 나라로 이주한다는 실감은 전혀 나지 않았다. 아직 넘어야 할 더 큰 산 - 16시간 정도의 비행 (경유시간 포함) 때문이었으리라. 돌 되기 전 아이를 데리고 샌프란시스코 - 인천 비행을 했었는데, 11시간 비행 중 1-2시간 밖에 자지 않은 아이 때문에 정말 힘들었던 비행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심지어 경유를 해야 하는 장거리 비행이었으니 아내와 나의 긴장감은 최고조였다.
두 시간도 채 자지 않은 딸내미 곧 탑승시간이 되었다. 회사의 지원 덕택에 경유지만 비즈니스 좌석을 예매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처음 타보는 비즈니스 좌석이었는데, 이코노미와 비교해서 훨씬 쾌적했고, 다행히 아이도 쭉 펴고 누울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이코노미 비행보다 훨씬 수월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은 비행이었다. 잠자리에 민간한 딸아이는 역시나 2시간도 채 자지 않았고, 모두가 잠든 비즈니스 섹션에서 아이가 크게 울음을 터뜨릴 때마다 조마조마한 마음을 붙잡으며 아이를 달래야 했다.
경유지였던 코펜하겐에 도착하니 캘리포니아와는 확연히 다른 공기와 분위기를 느꼈다. 11시간 비행 동안 한숨도 못 잤으니 정신은 몽롱, 딸아이는 품에 안겨 이제야 잘랑 말랑하고 있었고, 짧은 경유 시간 탓에 부지런히 탑승 게이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덕분에 비즈니스 클래스에게 주어지는 혜택인 라운지 이용은 아주 짧게 십오분만 즐겼다.
두 번째 비행기는 매우 비좁았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국내선 비행기와 비슷한 크기였다. 비즈니스 클래스였음에도 이코노미 클래스와 별반 차이 없는 좌석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이것만 버티면 이제 목적지에 도착이니 좀 더 힘을 내었다.
코펜하겐 공항의 경유 탑승 게이트
1시간 반 정도의 비교적 짧은 비행을 어찌어찌 마치고 드디어 취리히 공항에 도착했다. 7개나 되는 캐리어와 유모차를 겨우 택시에 싣고 회사에서 제공해주는 취리히 내 임시 거처로 향했다. 택시 창문 너머로 보이는 낯선 풍경, 이정표 위의 낯선 글자들. 이제야 내가 가족을 이끌고 연고가 전혀 없는 아주 낯선 땅에 이주해왔음이 실감되었다. 그리고 4개월 전 내가 내린 결정의 무게가 갑자기 실감되었다. 내가 갑자기 어쩌다 이 나라에 와있게 된 거지? 불과 올해 초만 하더라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스위스라는 나라에 정착하기 위해 여기에 와있다니. 잘한 결정이었을까? 잘할 수 있을까? 우리 가족들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이곳에선 어떤 일들이 나와 가족을 기다리고 있을까? 걱정 반 기대 반, 피곤함 한가득. 그렇게 나와 우리 가족의 스위스 생활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