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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id 시대의 대탈출극 (교토, 오사카)

미국에서부터 가족과 함께한 교토, 오사카여행 시리즈-1

by 민킴

강렬했던 2023년 여름, 도쿄와 한국을 오가며 보낸 여정은 단순한 여행 그 이상이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도쿄에서 찍은 사진들을 볼 때마다 골목길 이자카야의 아늑한 불빛, 센소지 새벽의 고요함, 그리고 몬자야끼 불판 위에서 피어오르던 열기가 내 안에 작은 불씨처럼 타올랐다.


미국에서 일본을 다시 방문하기란 쉽지 않기에, 그때의 감정은 기대와 미련이 교차하는 묘한 기운으로 남아, 만나는 이들에게 “이번 여름에 어디 다녀왔어?”라는 질문 한마디에 대답도 전에 나는 설렘이 오롯이 입밖으로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온몸에 전해졌다. 도쿄는 내게 무기력을 씻어내고 잃어버린 색을 다시 불러온 도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캘리포니아에 사는 동서와의 통화에서 그들이 아이들 겨울방학 전 오사카에 들르겠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화를 끊은 후, 머릿속엔 자연스레 ‘우리도 가볼까?’라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일 년에 일본을 두 번이나?”라는 이성의 한마디에 잠시 멈칫했지만, 가족은 만날 수 있을 때마다 함께해야 한다는 마음, 그리고 미국에서 느끼던 모두가 행복한 크리스마스에 우리가족만 보내는 웬지 모를 서늘함을 (풍요속 빈곤이랄까) 생각하니 어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결국 결심했다.


“아 몰라, 우리도 가자!” 그리하여 동서네와 함께 휴가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이미 오사카행 항공권을 예약해둔 그들과 일정을 맞추어 도쿄대신 대신 이번엔 오사카를 본격 일정으로 잡기로 마음먹었다.



도쿄 여행 때처럼, 이번에도 나의 유일한 가이드는 유튜브였다. 관광지나 한국인이 많이 모이는 곳에 국한하지 않고, 짧은 시간 안에 일본의 정취를 마음껏 느끼고 싶었다. 동서네가 오사카에 도착하기 4일 전, 우리는 일찍 출발해 도착하자마자 교토로 발걸음을 옮겼다. 교토는 도쿄와는 달리, 고즈넉한 전통미와 현대가 섬세하게 어우러진 도시로 항상 궁금증을 자아내던 곳이었다. 짜여진 계획 대신 그날의 기분에 맡기는 자유로운 여정에, 가슴 한켠에서는 설렘이 잔잔히 넘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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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오사카까지의 긴여정의 기작. 마지막은 도착전 사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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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비행 후 간사이 공항에 발을 내디뎠을 때, 피로보다는 설렘이 먼저 밀려왔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유튜브에서 보던대로 교토행 하루카 열차에 몸을 실었다. 1994년 간사이 공항 개항과 함께 운행을 시작한 하루카 열차는, 단순한 교통수단을 넘어 일본의 현대와 전통이 만나는 상징처럼 느껴졌다. 열차에 오르자마자 미리 준비한 오니기리와 음료, 스낵을 꺼내며 창밖으로 스치는 작은 마을, 논밭, 그리고 멀리 우뚝 선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열차 안에서 간식을 나눠 먹으며 웃음을 터트렸고, 나는 창밖 고요한 풍경 속에서 이번 여행이 어떤 새로운 감정을 선사할지 기대감에 설렜다.


유튜브에서 대략적인 정보를 얻었지만, 이번에는 세세한 일정에 얽매이지 않기로 했다. 도쿄 여행에서 배운 교훈처럼,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늘 예기치 않은 변수들로 가득하니까. 그러던 중 문득 떠오른 건, 교토에 있는 국제만화박물관이었다. 어릴 적 즐겨 읽었던 만화들이 주는 따뜻한 추억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어우러질 그곳에서의 만남이 설레임을 더욱 배가시켰다. “여기서부터 시작해보자.” 라는 마음으로 첫 목적지를 정했다.


교토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 반, 호텔에 짐을 풀고 나면 3시쯤. 국제만화박물관의 운영 시간에 딱 맞춰, 2시간의 여유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을 나서자마자 눈앞에 우뚝 선 교토 타워가 반겨주었다. 1964년에 건립된 이 타워는,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교토의 상징적 랜드마크로, 한때 일본 경제 부흥의 상징이기도 했다. 잠깐 사진을 찍으며 감탄한 후,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교토의 겨울은 미국의 혹한과 달리 상쾌한 공기가 감돌아 여행의 시작을 한층 경쾌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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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의 첫 만남. 국제만화박물관과 추억의 재회


짐을 풀고 나서 다시 택시에 몸을 싣고 국제만화박물관으로 향했다. 2006년 개관한 이 박물관은, 옛 초등학교 건물을 리모델링해 탄생한 공간으로 그 자체가 레트로한 매력을 풍긴다. 일본 만화뿐 아니라 한국어로 번역된 만화책들이 진열된 모습을 보자, 어린 시절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듯했다. 내가 사랑했던 소년탐정 김전일, 20세기 소년 등 눈에 띄는 제목들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이곳에서 다시 그 시절의 감성을 느낄 수 있다니!” 아들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이들은 만화책 더미 속에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벽에 걸린 오래된 만화 포스터 하나하나가 내게 과거와 현재를 잇는 소중한 다리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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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교토, 따스한 저녁과 니시키 시장의 매력


박물관에서 나오니 해가 일찍 저물어 어둑어둑한 겨울 교토의 풍경이 펼쳐졌다. 그 어둠 속에서도, 한낮의 분주함과는 다른 잔잔한 감성이 스며들어 있었다. 우리는 교토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니시키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4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시장은 ‘교토의 부엌’이라 불리며, 신선한 식재료와 오랜 전통의 먹거리가 가득하다. 도쿄의 화려한 시장과는 다른, 한결 소박하면서도 진한 맛의 세계가 펼쳐졌다. 좁은 골목마다 풍겨오는 음식 냄새는 마치 시간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듯 감각을 자극했고, 어디서부터 맛을 즐겨야 할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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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초입의 작은 식당에서 자리를 잡고 쿠시카츠, 우동, 그리고 하이볼을 주문했다. 바삭하게 튀겨진 쿠시카츠와 따뜻한 우동 국물이 겨울의 서늘함을 녹여주고, 한 모금의 하이볼에 긴 비행의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했다. “역시, 일본 여행의 진수는 먹거리다.” 도쿄에서 첫날 몬자야끼를 맛보던 그 감동이 다시금 생생하게 다가왔다. 다만, 겨울의 니시키 시장은 일찍 문을 닫는 여유로움 속에 살짝 아쉬움을 남겼지만, 내일 또 찾으면 되리라는 위로가 스스로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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