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코로나 19는 백해 일익이었다. 그 한 가지 유익은 다름 아닌 드라마를 시청할 시간이 생겼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여성호르몬이 마구 분출하는지 잔뜩 감정 이입해서 보다가 종종 눈물을 훔치곤 했다. 딱히 슬픈 장면에서 우는 것도 아니다. 너무 잘됐다는 안도감에 울고, 등장인물의 마음이 너무 잘 이해돼서 울고, 때론 과거의 내가 오버랩되어 울고, 또 그리운 누군가가 떠올라서 운다. 열거하다 보니 그냥 울고 싶어서 우는 것 같기도 하다.
최근에는 아이유와 이선균이 주연한 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넷플릭스에 탑재돼서 아주 재미있게 봤다. 물론 각티슈를 옆에 끼고 봤다. 그런데 이 감동적인 드라마를 '은교'의 드라마 버전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꽤 많아서 새삼 사람들의 생각이 다양함을 느꼈고,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의견이 불편했다. 영화 '은교'를 폄하함이 아니다. '은교'도 나름의 가치를 지닌 멋진 작품이지만 '나의 아저씨'와는 결이 같지 않다는 말이다. '은교'의 감정선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리는데, 혹자는 나이는 들었지만 어린 여자 은교를 탐하는 음란함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자신에게는 사라져 버린 젊음에 대한 동경이라 한다. 그 어떤 것이라 해도 이지안씨(아이유 역)를 아끼는 박동훈 부장(이선균 역)의 감정과 결이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 키다리 아저씨가 주디를 후원한 이유가 어린 소녀를 탐욕하는 음란함 때문이었다 해석한다면 아주 많이 불편할 것이고, 자신의 젊음을 동경하는 마음이었다 해석해도 여전히 불편하단 말이다.
'너희들은 걔 안 불쌍하냐? 경직된 인간들은 다 불쌍해. 살아온 날들을 말해주잖아. 상처 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 그게 보여. 그래서 불쌍해.'
팀원들과 술 한잔을 기울이던 중 화제에 오른 '싸가지 없는 파견직 이지안'의 뒷담화를 듣고 박동훈 부장이 한 말이다. 박동훈도 잘 나가는 인생이 아니다. 억울하기로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인생인데 상처 받은 아이 이지안을 위해서는 기꺼이 어른이 되어준다. 제대로 된 어른이라면 응당 미성숙한 아이를 아끼고 돌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정상이다. 이지안 씨는 물론 성인이지만 성장과정에서의 상처들로 인해 온전하지 못하다. 박동훈 부장은 이지안 씨 내면에 있는 상처 받은 아이를 알아보고 불쌍히 여긴다. 그래서 마음을 쓴다. 아무리 봐도 애욕이 아니다.
'가족상담은 한 가족 구성원에게 나타난 역기능적 행동이나 증상을 가족체계가 불균형을 이루는데서 오는 가족 전체의 문제로 보고 개인뿐만 아니라 가족이라는 체제에 관심을 둔다. 따라서 상담 중에 나타나는 가족 구성원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어 가족의 체계를 변화시켜 가족 구성원들의 증상을 제거하거나 문제를 개선시키려 한다. 치료의 기본적 방법은 집단 면접이며 치료 단위는 증상을 나타내는 개인(IP: identified patient)이 아니라 가족이 된다.'
가족상담의 이론적 배경의 일부이다. 상담 현장에서 내담자 개인을 IP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Identified Patient 즉, 가족 구성원이 병들었는데 그 병을 '드러낸 환자'란 뜻이다. 가출과 비행을 일삼는 아이들은 예외 없이 어떤 형태로든 병든 가정에서 자라났거나 현재 자라나고 있다. 소년 재판 법정에 서는 아이들 대부분이 결손 가정 아이들이란 것도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이다. 결손 가정이든, 폭력이든, 중독이든 그게 뭐든 가족 구성원 가운데 가장 약자를 통해 그 가족 체제 전체가 가진 병리를 드러내게 되는데 그게 IP다. 바꾸어 말하면, 그 IP가 건강한 가정에서 자라났다면 다른 삶을 살았을 거란 말이다.
아마 누군가는 이 글을 읽다 불편한 마음이 슬금슬금 솟아오를지도 모르겠다. 가령 '조커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말이냐?' 더 나아가 '조커가 잘했단 말이냐?', 혹은 '촉법 소년법에 문제가 없다는 말이냐?' 더 나아가 '애들은 지 마음대로 막 범죄를 저질로도 된다는 말이냐?'라는 식의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이 정도로 예민한 반응은 아닐지라도 조금은 불편한 마음이 들 수 있다. 일각 당연한 반응이기도 하다.
아이들의 비행을 모두 부모 탓 사회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죄가 있다면 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고, 다만 적합한 처벌을 하기 위해 성인과는 조금은 차별되는 소년법이 필요할 뿐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이 적합한 처벌이냐에 대해서는 법조계에 계신 훌륭하신 분들이 매일매일 고민하고 개선하여 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법조계와는 무관한 나로선 처벌과 관련하여서 이 이상의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상담 전공자로서는 하고 싶은 말이 조금은 더 있다. 아이들이 잘 자라나려면 건강한 어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은 나 홀로 성장할 수 없는 존재이다. 톨스토이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통해 말했듯, 인간이란 사랑 없이 온전할 수 없는 존재다. 안타깝게도 고통받는 아이들은 대게 음지에 있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병이 들고, 곪을 대로 곪은 뒤에 사회로 나온다.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데 당신이 어떤 식으로든 상처 받은 영혼을 만나게 된다면, 싸가지 없는 새끼라고 욕하고 싶은 충동은 잠시 접어 두고, 대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면 좋겠다. 물론 "너 참 불쌍하다."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아야 한다. 여기까지 성공하고도 마음의 여유가 남아있는 건강한 당신이라면 상처 받은 아이를 위해 '어른'이 되어주면 좋겠다. 용돈을 주라는 말도 따뜻한 위로나 조언을 해주란 말도 아니다. 그저 응당 받아야 할 존엄하고 존귀한 존재로서의 대우를 해주면 좋겠다는 말이다. 박동훈 부장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