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엄마... 엄마가 살고 있는 구름 위는 어떤 모습이야?
살아계시는 동안, 그동안 한 번도 써보지 못한 편지를 오늘에서야 문뜩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퇴근 후, 자기 전 노트북을 켜. 지금 살아계셨다면 좀 더 편하게 엄마에게 인생 상담도 하고, 쓴소리도 듣고, 칭찬도 많이 들으면서 살고 있었을까. 그때는 용기 내어 엄마에게 고민을 털어놓기는커녕, 살가운 말 한마디 못하는 아들 만도 못한 딸이었네.
유년시절 유난히 엄마 껌딱지였고, 지긋지긋하게도 혹독한 시어머니의 시집살이와 그런 홀어머니 밑에, 6.25 전쟁둥이 아들이었던 아빠는, 선에 나온 엄마에게 한눈에 반해, 3남매를 낫고, 엄마가 나를 임신하고 있을 때에는 돈을 벌러 중동에도 나가, 건축일을 배웠다고 했지. 그런 아들은 한없이 강하기만 했던 그의 엄마를 넘어설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연고도 없이 서울로 시집온 엄마를 보호는커녕, 무심하게도 엄마보다 백배 못생긴 여자에게 정을 주고, 두 집 살림을 했던 것이었나.
그런 엄마가 급작스럽게 췌장암 선고를 받았다는 도대체 믿을 수가 없는 남동생의 전화를 광고 대행사 회의실에서 불현듯 받고, 뛰쳐나와 회사 앞 횡단보도에서 울부짖던 기억이 나.
이후, 엄마가 3개월 선고를 받고, 투병하시던 그 짧은 시간에는 뭐 그리 담담하게 엄마에게 단호하고 차디차게 냉정한 말들만 내뱉었던 는 지,
돌아가신 지 벌써 10년이 넘긴 2025년 6월, 하나밖에 없는 딸은 직장생활 20년을 넘긴 40대 중반을 훌쩍 넘긴 중년이 되었어.
엄마가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말라며, 보내주신 유학 생활 덕에 영어를 쓰는 글로벌 회사에서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일도 하고 있고, 엄마가 부러워하던 비행기 타고 멀리 가는 출장도 자주 다니고 있지.
엄마 투병 생활 때 만나 엄마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에, 엄마가 휠체어를 타고 결혼식 참석한 그 아이와 아직 살고 있어. 엄마가 꼭 하나만 낳으라는 딸은 못나았고, 본의 아니게 아이가 없는 부부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야. 아마도 살아계셨다면 제일 속상해할 일이 이 것이었을까?
중학교 1학년 언저리였나, 무슨 일이었는지, 하교해서 굽은 등으로 집에 들오니, 시퍼렇게 멍이 들어, 서럽게도 울고 있는 엄마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엄마 왜 그래라고 물으니 엄마는 수치스럽고, 들키면 안 된다는 듯한 겁먹은 목소리와 아주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나에게 저리 가라고 소리쳤었어.
그 모습이 내가 그 집에서 엄마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던 것 같아. 엄마는 단출한 짐을 싸서, 엄마의 고향인 전라도로 내려가, 여수 바닷가 차디찬 시장 한 골목에서 생선을 다듬고, 물건을 팔아, 어떻게 버티고 살았는지 모를 세월을 혼자 견뎌내고, 삼 남매에게 집 한 채씩 유산상속을 남기고, 그 시퍼런 60살에 우리 곁을 떠났지.
비로소 50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서야, 엄마의 행적 및 마음을 조금이라도 유추해 나갈 수 있을 것만 같고, 또 감히 그렇게 살아낸 엄마의 담대함과 단단함을 흉내 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내 마음이 힘들 때마다 엄마를 떠올리곤 해.
그렇게도 자랑스러워하던 딸이 당당하게 잘 살아야 할 텐데, 가끔은 나도 무너지고 한없이 여전히 아이같이 허공에 대고 울고, 엄마 없이 지내던 불안에 벌벌 혼자 떨던 그 어린 시절같이, 지금도 가끔 어찌할 바 모르게 허우적대는 딸이네. 그래도 잘살고 있다고, 잘하고 있다고,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고 이쁜 딸이라고 지금이라도 당장 구름 위에서 뛰어 내려와 얘기해 줄 것만 같은 엄마의 목소리가 아직 생생해.
살아보니 인생이 그리 녹녹하지만은 않고, 결혼 생활도 내 맘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엄마가 살아낸 그 60년에 비할까 싶어. 그래도 엄마를 닮아 악바리 같이 직장생활을 버텨왔지만, 또 엄마를 닮아 감성적인 성격은 못 버려, 가끔은 한없이 소녀같이 약해지고, 누군가에게 의지를 하고 싶어 질 때가 있어.
엄마가 무일푼으로 집을 나가 새로운 세상을 개척했던 순간처럼 나도 용기 있는 여자로, 언제든지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을 시작해보려고 해.
내가 해나가는 과정 엄마에게 편지로 얘기할께~ 아낌없는 칭찬과 잔소리 기대해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