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에 영적인 파트너가 있다면 그는 바로 조니죠. - 스티브 잡스
ProfilesFEBRUARY 23, 2015 ISSUE
The Shape of Things to Come
How an industrial designer became Apple’s greatest product.
BY IAN PARKER
“So much of our manufactured environment testifies to carelessness,” Ive says. Things are “developed to be different, not better.”
CREDIT
PHOTOGRAPH BY PARI DUKOVIC
10대 시절 럭비를 즐겨하고 지금도 다부진 몸을 갖고 있지만 마치 남의 몸인 양, 조너선 아이브 경(47세, 애플디자인실 수석 부사장)은 최근 스스로를 “정말, 정말 피곤하다”거나 “항상 걱정스럽다”는 말을 달고 다녔다. 애플 디자인실의 알루미늄 의자나 국가원수급을 위한 자동차 Bentley Mulsanne의 아이스크림빛 의자에 앉을 때, 그는 부드럽지만 절반은 아이러니한 한숨을 지었다. 완전히 인정받는 자의 부담이 드러난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애플을 떠날까 고민하던 때도 있었지만 그는 잔류했고, 스티브 잡스의 돈독한 친구가 되어 아이맥과 맥북, 아이포드, 아이폰, 아이패드를 만들고 마감했다. 그러다가 이제 그는 세계에서 제일 가치 높은 회사의 가장 강력한 두 인물 중 하나로 올라섰다.
종종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실리콘밸리 애플 사무실로 오는 기나긴 통근길에서 CNBC 라디오를 듣곤 하지만, 수백수천 애플 직원들이 아이브의 디자인 결정, 디자인 취향에 의존하고 있으며, 갑자기 은퇴라도 하면 애플 주주들에게 어떤 피해가 끼칠지 깨달을 때 불편하기만 하다. (수치로 말해보겠다. 애플 주가가 10% 빠질 경우 71억 달러가 사라진다.) 역시 아이브 및 아이브 가족과 가까운 사이인 스티브 잡스의 과부인 로린-파월 잡스는 조니가 예술가 기질을 가진 예술가이며, “예술가라면 이런 짓을 책임지지 않는다고 제일 먼저 말해줄 양반”이 남편이었으리라 말했다.
9월의 한 아침, 라이브는 Coldplay의 크리스 마틴(Chris Martin) 및 영국의 작가이자 배우인 스티븐 프라이(Stephen Fry)와 함께 애플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한 지방 대학교의 뜰에서 만났다. 창백하지만 넓은 바지에 요리사라도 된듯한 모양새, 그리고 그을린 Clarks 가죽 신발 차림의 아이브는 머리를 짧게 하고 있었다. 그는 몇 년 전 그에게 디자인팀에서 성탄절 선물로 준 아이브-플레이모빌 인형과 같은 표정이었는데, 이 7인치짜리 아이브는 선글라스를 끼고 황백색의 Valextra 가방을 들고 있었다. 이 플레이모빌 인형의 사진이 아이브 아이폰의 잠금 화면이었다.
아이브는 머리 위에 손을 문지르며 조용히 얘기 중이었다. 그는 나무랄 데 없이 세심하게, 단정치 못함과 늦었음을 사과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의 20인승 걸프스트림 GV 비행기(스티브 잡스 사망 이후 2011년 파월 잡스로부터 사들였다) 승무원들에까지 그는 자신의 톤을 모두에게 확대시키는 듯해 보였다. 영국의 패션 디자이너이자 친구인 폴 스미스(Paul Smith)는 아이브와의 대화를 이렇게 묘사했다. “‘lovely’와 ‘special’, ‘so nice’라 적힌 카드를 하나씩 꺼내 드는 것처럼 대화했어요. 그의 친절함을 특히 나타내는 언어입니다.”
그날 오전 늦게, 신제품과 서비스를 마치 패션기업처럼 일 년에 몇 차례씩 발표하는 행사가 예정돼 있었다. 천여 명의 참가자 중 십 수명이 이 무대 뒤의 뜰까지 초대됐으며, 개중에는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과 Oklahoma City Thunder의 케빈 듀랜트(Kevin Durant), 야후의 매리사 메이어(Marissa Mayer), Beats의 지미 아이오빈(Jimmy Iovine), 래퍼이자 사업가인 션 콤스(Sean Combs, 프라이는 나중에 그에게 술을 엎질렀을 때도 자애로웠던 그를 가리켜 친밀하게 “스누프셔니션”이라 불렀다) 등이 포함돼 있었다.
그날 중국 정저우(鄭州)의 조립라인 100여 개는 여전히 비밀스러운 아이폰 신형을 시간당 7,500개의 속도로 만들고 있었으며, 시계를 포함, 애플의 새로운 제품에 대한 루머가 아이폰 제조속도와 비슷하게 온라인에 나돌고 있었다. 팀 쿡 애플 CEO는 홀에 가득 찬 팬과 기자들, 그리고 온라인의 수 백만 명에게 발표를 준비 중이었지만, 아이브의 역할은 안개가 낀 오전에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국한돼 있었다. 아이브가 대중에 나서지 않아도 되도록 잡스는 그를 배려했었고, 그 권리를 아이브는 계속 누리고 있었다.
아이브는 런던 억양으로 자기가 수줍음을 탄다고 말했다. 거의 20년 이상 그 상태로 있었다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항상 실제 업무에 집중합니다. 제가 할 그 어느 연설보다도 여러분이 더 신경을 써야 할 일을 묘사할 수 있는 훨씬 더 간결한 방법이 있다고 봐요.” 침착한 어조였지만 그의 손가락은 마치 손가락 끝에서 검이라도 떼어 내려는 듯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아이브 뒤 저만치에는 마치 스스로 유배라도 간 양, 스티브 워즈니악이 서있었다. 1976년 잡스와 함께 애플을 공동 창업했던 그는 거의 재떨이 크기의 검은색 스팀펑크 시계를 차고 있었다. (나중에 아이브가 놀리듯이 “그게 뭡니까?”라 물었다.) 한 동료가아이브에게, 지난 간밤에 사람들이 애플스토어 바깥에 줄을 길게 섰노라 말했다. 발표날 새 제품이 나오리라 지레짐작한 것이었다. 아이브는 자기가 긴 줄을 섰던 첫 번째 경험을 말해줬다. 다섯 살 때 부모가 데려갔던 대영 박물관의 투탕카멘 전시회였다.
그날 애플 이벤트에는 10분짜리 영상도 포함돼 있었고, 무대 위에 서기 싫어하는 아이브가 대신 이 영상 안에 등장했었다. 영상 안에서 아이브는 마치 픽사의 유명한 램프처럼 자세를 하고 진심 어린 억양으로 말했다. (“너무나 단순하고 직관적이어서 자연스럽게 쓰게 됩니다”라고 IKEA에서 패러디한 광고까지 낼 정도로 유명한 램프다.) 이런 영상은 잡스의 무대 메시지를 강조하는 데에 쓰였으며, 잡스가 없는 지금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 쓰인다.
현재 애플 임원진에게 연설 기술이 없지는 않지만, 잡스의 카리스마까지는 역시 무리다. 잡스의 카리스마는 섣불리 따라 했다가 회사 단체연수에 나오는 어색한 꼭두각시 춤이 되어버리기 쉽다. 이와 반대로 화면 속의 아이브는 똑같이 질서 있고 애플 제품처럼 무균 처리된 장소에서 “rational”과 “inevitable”을 거론한다. 애플 웹페이지의 임원소개 사이트를 봐도 마찬가지다. 14명의 남녀 임원들 모두 활짝 웃고 있는데, 회사 내의 아웃사이더인 아이브만은 유독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다.
새 영상이 아이브 얼굴을 비추지는 않고 내레이션을 아이브가 맡았으며, 거의 감독과 편집도 아이브가 했다. 애플의 디자인실 19명의 디자이너들이 여기에 참여했으며, 그들의 면면은 특허 관련 서류에 등장하는 이름 외에 거의 대중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무한대의 마케팅 자원을 갖고 있는 애플과 같은 기업에서 아이브가 영상을 직접 감독했다 함은 아이브의 작업이 지닌 매혹에 대한 결벽증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작업은 잡스 스스로도 아마 좋아했을 것이다. 애플 디자이너들은 오랜 기간 동안 애플 내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으며, 다른 기업들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다. 애플에서의 일자리를 아이브에게 소개했고, 90년대 초반 애플 디자인 그룹 책임자였던 로버트 브러너(Robert Brunner)에 따르면 스티브 잡스가 그 권력을 직접 디자인팀에 건네줬으며, 회사의 문화가 됐다고 한다.
다만 90년대 초반은 아직 그 문화가 뿌리 박지 못 했던 때였다. 몇 년 전 애플 인턴이자 엔지니어였으며, 최근 커피머신 스타트업을 차린 제레미 퀨펠(Jeremy Kuempel)은 애플 내 회의에 디자이너가 참가한다 함은, 마치 “성당 안에 있는데 신부가 걸어 들어오는” 느낌이라고 한다. 브러너는 “지금은 조니가 애플의 창조력 영혼을 맡고 있다고 봅니다”라 말했다.
아이브의 친구이자 영화 제작자인 에이브람스(J. J. Abrams)는 런던에서 “Star Wars: The Force Awakens” 촬영 중이었기 때문에 9월 발표에 갈 수 없었다. 그는 나중에 아이브가 애플 소식을 미리 좀 알려줬으며, “서로 작업 중인 것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무엇이 기대할 만하고 무엇이 터무니없는지 알려줬죠”라 말했다.
발표 전 언론의 호들갑(훔친 부품 사진과 상상한 제품의 실물 크기 모형 등) 대응법을 배운 점이 있다면, 에이브람스는 그런 현상을 즐길 줄 안다는 점이다. 캘리포니아의 한 이벤트에서 그는 #AppleWatch 해시태그를 붙여서 트위터에 이미지를 하나 올렸다. 그 이미지는 손수 쓴 카드였다. (“Why do I suddenly have this desperate need to own a WATCH? Damn you, Apple!!!”) 그런데 이 사진을 자세히 보면 새로운 데스 스타의 내부를 얼핏 알아볼 수 있게 돼 있다.
몇 주일 전, 아이브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Jaeger-LeCoultre 시계를 차고 있었다. 그와 그의 오랜 친구인 호주 태생의 디자이너 마크 뉴슨(Marc Newson)이 보노(Bono)와 공동 창업한 자선조직인 Project Red 경매용으로 제작한 시계다. 그들은 시계를 3개 만들고 각각 하나씩 가졌으며, 세 번째 시계를 36만 달러에 팔았다. 하지만 지금 억만장자들이 모인 뜰에서 아이브는 아무것도 안 찼으며, 몇 시간은 계속 안 찬 상태로 있을 터였다.
그는 “우리가 해낸 이 보기 드문 때, 이제 얘기를 할” 때가 곧 온다고 말을 꺼냈다. “좀 이상하죠. 우리가 서있는 지금은 아직 한 번도 안 들어봤거늘,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수 억 명이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매우 거대한 보호본능, 그러니까 소유했다는 느낌을 가졌다가 갑자기 내 것이 아니고 다른 모두의 것이라는 느낌 말이죠. ‘악몽과 같은’ 단어는 좀 과장됐지만 정말 지금은 중요한 때입니다.” 그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정말 가슴 아픈 때라는 말이죠. 너무나 디지털, 그러니까 너무나 2 진법스럽습니다.”
뉴슨이 와서 아이브, 그리고 파월 잡스와 한참을 속삭였다. 실내로 들어가기 전, 아이브는 파월 잡스의 23살 된 아들, 리드(Reed)와 인사를 나눴다. 리드는 이제 그때 나이의 아버지를 빼다 닮은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아이브는 그를 안아주고 “아!”라 외쳤다.
홀 안에서 아이브는 앞자리에 앉았고 왼편에는 마크 뉴슨, 오른쪽에는 크리스 마틴이 앉았다. 팀 쿡이 무대 위에 올랐고, 청중은 새로 디자인한 두 가지 아이폰 및 새로운 터치스크린 지불 시스템에 환호했다. Tupperware나 정원 호스를 갖고 씨름하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정보광고처럼, 이 영상은 주머니로부터 신용카드를 꺼내어 쓰는 어려움을 보여줬다. 그러고 나서 쿡이 전임자의 유명한 발언, “One more thing”을 외쳤다. 그러자 눈앞의 하얀 공간을 통해 보석이 등장했고, 아이브가 “그 기능 만큼이나 너무나 단순하고 순수한, 아름다운 물건”이라 얘기하고 있었다.
몇 주 전 어느 날 아침, 애플 본부에서 아이브는 1997년의 애플이 어떻게 죽어가고 있었는지를 회상했다. “출근하기 전 읽는 기사가 모두, ‘포위된 컴퓨터 기업, 애플’을 제목으로 달고 있었어요.” 당시 서른 살이었던 아이브는 애플에서의 업무가 이제 5년째 되던 해였으며, 산업디자인 책임을 맡고 있었다. “커다란 애플 로고에 가시관을 씌우고 밑에다가는 ‘기도합시다’라 적은 Wired 표지기사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속상했는지 지금도 기억이 나요. 그냥 죽거나 인수나 당해라는 의미였죠.”
그가 거론한 Wired 기사는 6월호 기사였으며, 12년 전 애플을 떠나 Pixar와 NeXT를 창업했다가 애플 CEO로 돌아와 길버트 아멜리오(Gilbert Amelio)를 몰아냈던 잡스가 돌아왔다. 잡스와 아이브는 첫 만남부터 강렬했다. 아이브의 말이다. “그런 만남이 이전에도 있었는지 전혀 기억 안 납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 딱, 손가락을 튕겼는데요. 이거 참 기묘하더군요. 우리 둘 다 어느 정도는 좀 특이했으니까요. 그런 거에 익숙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사실 더 안 좋은 상황을 대비하여 아이브는 주머니 안에 사직서를 품고 있었다. 실제로 잡스의 첫 반응은 새로운 디자이너 영입이었다. 그는 IBM에서 ThinkPad를 디자인했던 리처드 새퍼(Richard Sapper)에게 검정 시가 박스를 건네며 접근했었다. (새퍼는 끌렸다고 말했지만 그는 IBM 자리를 떠나서 “작고도 작은 회사”에 들어가기가 좀 꺼려졌기 때문에 거절했고, 그 결정을 좀 후회했다.) 잡스는 또한 80년대 애플의 산업 디자이너였던 하트무트 에슬링거(Hartmut Esslinger)와도 만났었다.
이메일 인터뷰에서 에슬링거는 아이브를 포함한 애플의 기존 팀이 “큰 재능을 갖고 있으며, 올바른 리더십만 있으면 경쟁력을 지닐 것”이라 잡스에게 말해줬다고 한다. 아이브보다도 더 디자인 권위자임을 과시하는 에슬링거는 잡스에게 애플이 보다 “디지털-소비자 트렌드를 발전시키는 데에 재집 중”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이후에 일어난 일에도 한몫했다는 얘기다.
당시 디자인팀을 방문했던 잡스를 아이브는 이렇게 기억했다. “잡스가, ‘제기랄. 당신 별로 효과적이지 않지?’라 말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칭찬이었다.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했다 하더라도 디자인팀의 작업에 가치가 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방문하는 동안 잡스는 점차 더 느긋해했고, 같이 할 수 있다는 점을 정말 기뻐했었다고 한다. 아이브에 따르면 그날로 그들은 아이맥이 될 컴퓨터 디자인 작업을 시작했다.
곧 애플은 “Think Different” 캠페인도 시작했고, 아이브는 “Think Different” 캠페인을 “델이 한 일에 대한 대응이 아닌 과감한 방식”으로 여겼다고 한다. “제 직관은 좋지만 제가 느끼는 바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안타깝지만 지금도 별로죠. 그 점이 어려워요. 스티브가 지금 여기 있지 않아서요.” (잡스 추모식에서 아이브는 잡스를 “나의 가장 가깝고, 나의 가장 충성스러운 친구”라 불렀다.)
애플의 1층 디자인실의 한 구석, 나무 그림자 밖에 안 보이는 투명한 창문 앞에 아이브가 앉아 있었다. 그의 사망 이후 손을 대지 않고 있는 꼭대기의 스티브 잡스 사무실은 4층짜리 평범한 건물 여섯 채로 이뤄진 애플 캠퍼스 안에 있으며, 주변에는 잔디밭이다. Infinite Loop 거리에 세워진 애플 캠퍼스는 1990년대 초에 세워졌으며, 잡스의 사무실이 있는 One Infinite Loop와 아이브의 연구실이 있는 One Infinite Loop 사이가 복도로 연결돼 있다.
아이브가 처음 스튜디오로 안내했을 때, 그는 빌딩 모두가 다 비슷하게 연결돼 있다고 언급했다. 그랬더니 옆자리 동료가 아이브의 말을 수정했다. 원하고 투만 그렇다고 말이다. 아이브는 정말이냐 물었는데, 이 광경이야말로 애플 세상에서 디자인실의 위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새로 근교에 짓고 있는 캠퍼스(반지 모양의 원형이며 직경 1,600 피트이다)는 아마 함께 일하는 장소로서 거대한 상징적인 연결망을 가지리라 예상할 수 있다.
애플 디자인실 방문 초대는 흔치 않은 일이고, 심지어 애플 직원들조차 방문하는 일은 거의 없다. 건물 내부에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지고 시각적인 에어로크와 같은 10 피트 길이의 대기실이 놓여 있다. 들어가 보면 사무실장인 하퍼 앨릭젠더(Harper Alexander)의 책상만 보이는데 과묵한 애플 기업 문화와는 달리 그는 활발한 트위터 사용자이기도 하다. (그의 트윗 사례: “애플 디자인실에서 COUNTING CROWS와 HOOTIE를 틀고 있습니다. 여기서 멍청한 유로팝 좋아하면 말 그대로 죽은 목숨이에요..”)
그날 아침, Yaz와 The Rapture를 포함한 바로 그 유로팝이 낮게 울렸고, 스니커즈를 신은 직원들은 조용히 움직이며 소곤거렸다. 그날 디자이너인 유진 황(Eugene Whang)을 만났는데, 그는 자기의 두 번째 커리어가 DJ이자 음악 기획자(promoter)이며 자기와 친구가 뉴욕 맨해튼의 미트패킹 거리에 있는 Standard Hotel, Le Bain에서 공연했던 음악을 듣고 있다고 일러줬다.
호주 태생의 서퍼인 줄리안 호닉(Julian Hönig, 그는 람보르기니를 디자인했었다)도 그렇고 동료들 모두 아이브처럼 조용했으며, 그들의 명성은 디자인실 바깥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들의 국적은 다양하고 개개인의 삶은 풍족했으며 명성도 나누고 있었다. 마치 유럽의 유명 축구 클럽과 같았다. 애플에는 디자이너를 지명하여 영입하는 역할만 맡은 고용 전문가 세 명이 있으며, 거의 1년에 1명 꼴로 찾아낸다.
얼마 전, 황은 온라인에 예쁜 하얀 헬리콥터 사진을 하나 올렸다. 사진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나리타에서 도쿄까지 움직이는 새로운 Mori City Air Service, 총 30분 걸리며 고가이지만 가끔은 그 가치가 있다. 좌석은 전통적인 캔버스 천에 에르메스(Hermès) 에디션이 겉 천으로 둘러져 있으며,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의자의 주름이 잘 잡혀 있다.”
유진 황, 그의 부인인 후지카와 마키코, 조너선 아이브 (SFMOMA에서 개최한 아이브강연 때 촬영)
로열블루 티셔츠를 입고 있는 아이브는 상냥했지만 영국인다운 아이러니는 찾을 수 없었다. “그건 좀 나중을 위해 아껴두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전문적이지도 않기는 하지만요.” 대화중 그의 매너는 좀 불안할 때도 있었다. 다정한 정중함이 자살방지 상담가처럼 들릴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정말 운이 좋았어요.”라든가 “좋은 비행이기를 정말 바랍니다.”와 같은 말은 특정한 주제에서 일반적인 주제로 옮길 때 나왔다. 생각을 내뱉은 다음 안전한 근거를 찾으면서, 그는 자기 답변을 고르고 또 고르거나 한숨을 쉴 때도 있었다. 첫 시도에서 그는 자신의 첫 25년 인생을 60개의 단어로 표현했다. 그리고 오프 더 레코드를 확인받고서야 자기가 읽고 있던 소설이 뭔지도 알려줬다.
아이브는 잡스가 아멜리오를 대체하기 전, 애플 디자인실에서 아이맥과 같은 기기를 작업해도 회사로부터 전혀 흥미를 받지 못했다고 그날 아침에 말했었다. 놀라운 말이었다. 아이브는 자신의 고용주들에 대해 항상 공손했기 때문이다.
(1997년에 나온 한 책에서 아이브는 이런 말을 했었다. “길버트 아멜리오는 애플 역사상 그 어느 CEO보다도 산업디자인에 더 많은 지원을 주고 있습니다.”, “디자이너로서 지금 순간 애플에서보다 더 흥미로운 곳은 없으리라고 봅니다.”) 그의 대중적인 이미지는 기업의 충성 서약의 산물일 뿐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노출을 불편해하고 진중한 사람답게 사소한 이야깃거리에 대해 저항하는 타입이다. 하지만 효과는 같다: 아이브의 기준에서 볼 때, 개인적인 이야기는 말할 가치가 없다. 그의 과장스러운 겸손은 최근, 그 어느 때보다도 아이브 자체가 애플이라는 진실 때문에 좀 복잡해졌다.
대기실을 지나자 아이브는 한 번 더 강조해야겠다며 말을 꺼냈다. “우리가 얼마나 실용적인지에 대해 정말로, 특별한 뭔가가 있다고 봐요. 시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 예전 방식이나 전통적인 방식이라 하실 수 있을 테고, 혹은 매우 효율적이라고도 말씀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자 탁자와 벤치가 있는 개방형 부엌이 나왔다.
왼편에는 빈티지 Faema 에스프레소 머신과 “100 Superlative Rolex Watches”, Kartell 카트 디자인으로 유명한 조 콜롬보(Joe Colombo) 연구서와 같은 책 100여 권이 꽂혀 있는 서가가 있었다. 부엌은 개별 작업실로 연결됐고, 오른편에는 십여 개의 오크로 만든 작업대가 잘 정돈된 채로 놓여 있었다. 바닥도 물론 반짝반짝한 콘크리트였다.
방은 대략 3,000 제곱피트 정도였지만 외부로 알려진 명성을 통해 이 방은 “동굴”로 알려졌다. 끝에는 유리벽과 함께 8피트 높이의 CNC 밀링머신 3대가 놓여 있었다. 이 머신이 플라스틱과 금속을 갖고 모델과 프로토타입 일부를 만든다. 아이브가 21세기 초, 이 공간을 디자인했을 때, 그는 이 머신들이 작업실 안에 소음과 먼지를 들여 보내면서 디자인실과 통합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실제 물건을 만들죠. 이게 우리 하는 일이잖습니까.” 밀링머신은 디자인실을 작업실로 바꿔주는 효과를 낸다. 아이브가 볼 때 한 재료가 뭘 할 수 있고 뭘 할 수 없는지 모를 때 질 낮은 산업 디자인이 시작된다고 한다.
작업대는 책상보다 높지만 그들이 디자인한 애플스토어 테이블보다는 약간 낮았다. 한참의 연구 끝에 나온 이 높이는 앉아서 하는 연구와 서서 둘러보는데 모두 어울린다. (후에 아이브는 셀프-패러디를 감수하고 “단순함과 단정함”의 결과라 언급했다.) 삼성전자는 휴대폰은 물론 진공청소기도 판매하며 천여 명의 디자이너를 고용하고 있지만, 애플의 의도는 방 하나에서 다 알아볼 수 있다.
탁자 하나당 제품, 혹은 제품의 일부나 재품 개념 하나이며, 제조 일정이 맞춰진 것도 있고 3년에서 5년 이후에나 나올 예정인 것도 있다. 아니, 아예 안 나올 수도 있다. 전직 람보르기니 디자이너인 호닉은 탁자가 여러 가지, 혹은 아주 많은 아이디어를 올릴 수도 있다고 말한다. 특정 기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그럴 수 있다면서 말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문제가 해결된다. 호닉은 활짝 웃었다. “기본적으로는 승자가 생긴 겁니다.
집단적으로 뭐가 최고인지 정하니까요.” 디자이너들은 모델과 재료를 만지며 많은 시간을 보내며, 종종 애플 엔지니어들을 방문하기도 한다. 잡스는 거의 매일 디자인실에 들리곤 했다고 한다. 한 시간 전에라도 들이닥쳤다면 아마 미래를 봤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몇 개 탁자에 회색 실크 천이 덮여 있었고, 미래는 전자 주전자보다 더 크지 않으리라는 점만 알고 있다.
다만 문 근처의 탁자를 덮고 있는 천은 이상하리만치 팽팽했다. 아이브가 천을 만지며 얘기했다. “사실은 좀 복잡한데요. 나중에는 그러려니 할 겁니다. 지금은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군요. 장담해요.”
장식 없는 벽과 먼지가 묻어 있는 환경을 지나자, 선반 위에 놓여 있는 Whole Foods 너츠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방의 미니멀리즘은 비밀주의라기보다는 그저 비밀정책에서 나왔지 싶었다. 아이브의 미학은 소박함이 아니다.
파워 어댑터의 자석 접촉부처럼 화려함의 아이디어를 억누르지 않을까 싶으시겠지만, 아이브를 알고 지내는 영국의 디자이너, 리처드 시모어(Richard Seymour)는 아이브가 “감정적으로 따뜻한 모더니즘”을 갖고 있노라 말했다.
역시 친구이자 아이브와는 런던에서 같이 일하기도 했었던 클라이브 그린여(Clive Grinyer)도 “아이브는 항상 좀 화려했다(bling)”고 말했다. 수많은 애플 제품을 미술관 컬렉션에 추가했던 MOMA의 디자인 및 건축 수석 큐레이터인 파올라 안토넬리(Paola Antonelli)는 노트북 뚜껑을 닫았을 때, 1분에 12번 씩 편히 숨 쉬는 것처럼 표현되는 빛을 혁신이라 칭찬했다.
“조니는 제가 소름 끼치게 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침대 탁자에 놓았을 때 사람들을 깨게 만들어버릴 정도니까, 포기해야 했겠죠.” (애플은 이 설명에 대해 반박했다.) “동그랗게 고동치는데, 정말 놀라웠습니다.”
문이 열리자 벽에 붙어 있는 화려한 색상들이 보였다. (나중에 아이브가 설명해줬는데, 이곳은 애플워치 영상 스토리보드 작업을 했던 회의실이었다.) 그리고는 아이브 사무실에 도착했다. 유리벽으로 구분된 12 제곱피트 넓이였다. 선반에는 선물로 받은 아이브-플레이모빌과 다른 선물들이 놓여 있었고 옆에는 파란 천으로 덮어 놓은 스케치북과 실버 에칭이 있었다.
바닥에는 마크 뉴슨의 책상 뒤로 럭비공이 있었다. 벽에 기대어 놓여 있는 액자들은, 침팬지 얼굴을 한 여왕이 그려진 뱅크시(Banksy) 프린트와 디자인 전문가들 사이에서 잘 알려져 있는 포스터였다. 이 포스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Believe in your fucking self. Stay up all fucking night.” 마지막 글귀는 사뭇 경고성 문장이 쓰여 있었다. “Think about all the fucking possibilities.”
디터 람스 Dieter Rams
바우하우스(Bauhaus)로부터 영향을 받고 핼쑥하지만 깔끔한 디자인으로 유명한 독일 디자이너, 디터 람스(Dieter Rams)가 세운 디자인 원칙의 부록이라 생각할 수 있는 글귀다. (아이브는 람스를 대단히 존경하지만, 람스에 대한 빚은 종종 과장된다. 제조 규모의 차이점을 지적해야겠다. 람스의 브라운은 수 천 개 정도의 제품을 종종 백만 단위로 생산하지만, 애플의 경우는 제품 하나에 15억 개가 나온다.)
람스의 공식에서 보면, 새로운 제품은 혁신적이고 유용해야 하며, 미학적이고 이해가 쉬우면서 불필요하게 화려하지 않고 솔직하며 오래가야 하고 완전해야 한다. 또한 환경-친화적이어야 하고, “최소한의 디자인”이어야 한다. 아이브는 스케치북을 넘겨 보여줬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그는 종종 갈색 잉크를 사용했다.
걸쇠처럼 보이는 스케치도 있었고, 길고 얇은 서체로 “가식(pretension)”과 “스마트”를 적은 페이지도 있었다. 애플 경쟁자들이 좋아할 만한 다른 페이지에서는 아이브가 “Airbug”라는 단어를 썼다.
방 뒤편에서 아이브는, 아폴로 프로그램에 대한 Discovery Channel의 “Moon Machines”을 보고 있었다면서, 우주복을 개발해야겠다고 깨달은 순간이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목표가 뭔지 알기도 어렵잖아요.” 그리고 나서 그는 디자인실의 작업을 NASA에 비유했다. 아폴로 프로그램처럼 애플 제품은 “인식도 못 할 정도로 발명에 발명을 거듭해야” 한다면서, 다만 새로운 뭔가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자멸의 공포로 인한 자기 선전을 너무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힘들이지 않게 살아남았다고는 하지만, 정말 “엄청난 수고”를 들였다는 얘기다. 신재료를 찾는 수년 간의 조사와 아시아 공장에서 제조 방법을 찾는데 들인 수많은 세월 모두 인정받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우리는 스튜디오 구석의 더 낮은 탁자로 옮겨갔다. 젊은 컴퓨터-디자인 기술자들이 앉아 있었고 잠깐 침묵 끝에 아무 말없이 자리를 피해야 함을 알아차렸다. 우리는 특히 낮은 벤치에 앉았는데 아이브의 동료 디자이너 둘이 합류했다. 30대의 조디 아카나(Jody Akana)는 색상이라는 특이한 전문 분야를 갖고 있었다. 50대의 바트 안드레(Bart André)는 애플 직원들 디자인 특허에서 매번 톱에 오르는 인물이다. (둘 다 저널리스트와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아이브가 안드레에게 “지난밤 우주복을 봤지”라 말했다.
전임 애플 디자인 책임자였던 로버트 브러너는 애플 디자인 팀이 같이 놀고 같이 작업하며, 서로를 보호한다 말했었다. 우리 회의에서도 아이브는 Bono가 자기에 대해 Time에 기고한 짧은 기사를 알려줬다 이 기사는 “애플의 디자인 연구실이든 밤거리이든, 성스럽고도 성스러운 아이브와 동료들을 보면, 매우 보기 드문 조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상사를 사랑하고 상사도 그들을 사랑한다. 경쟁자들은 이해할 수 없을 텐데, 이 똑똑한 사람들을 그저 돈만으로 끌어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라 쓰여 있었다. 보노의 친구인 아이브는 이 내용을 “놀라울 정도의 통찰”이라 평했다. 듣기 힘든 칭찬이며 허투루 한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팀의 단합에서 나오는 힘과 전문성은 아이브가 반복하는 테마이기도 하다. 다만 디자인실이 보기만큼 단합 안 돼 있다는 주장이 나올 때는 아이브가 악역을 자처할 때도 있다.
2008년 애플을 떠나 현재 인텔에서 산업디자인을 이끌고 있는 더그 새츠거(Doug Satzger)는 Fast Company에서 “자기 위치에 대해서 조니는 대단히 정치적인 의도를 갖고 있다. 스티브를 만날 때면 언제든 자기에게 알려달라고 말했었다.”라 주장했었다. (새츠거는 코멘트를 거절했다.)
아이브는 15년 동안 단 2명의 디자이너가 애플 디자인실을 떠났다고 말했다. 개중 하나는 건강상의 이유였으며, 단결력의 결정적 증거가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 것이, 행복하지 않은 사무 환경이라도 참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새츠거의 발언도, 크게 보면 애플 디자인실을 칭찬하는 발언이었다. 고요한 열정이 밀실 공포증이나 까다로운 환경을 만들리라 상상하기는 쉬우며, 회사 내 협상 과정에서 차가운 의도를 가진 조용함 때문에 나오는 불안감도 있다.
(아이브를 예전에 상사로 모셨으며 부드럽게 말하는 영국인인 리처드 호워스(Richard Howarth)는 아이브가 일을 주도적으로 하며 거칠다고 말했다. 다만 절반은 농담조로 “무서워서가 아닐까”라 덧붙였다.) 하지만 초조하고 자기-의식적이라 하더라도 아이브가 좋은 사람임은 거의 모두 인정하고 있다. 아이브는 인기투표에서 한 표 빼고 모두를 차지했었다.
팀원들은 하루 12시간 일하며 친구들에게 일을 말할 수 없다. 각 프로젝트에는 리드 디자이너가 있지만 모든 프로젝트에 거의 모두가 참여하여 기여하고 공유한다.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누가 냈을까요? “팀”) 아이브는 자기 역할을 디자인 리더십의 양극단 사이에 놓여 있다고 평한다. 모든 창조력의 근원은 아이브가 아니며, 그는 단지 동료들의 제안을 평가할 뿐이다.
큰 아이디어는 종종 그로부터 나오기도 하며, 모든 디테일에 대해 그도 의견이 있다. 팀 회의는 일 주일에 두세 번 정도 부엌에서 열리며, 아이브는 허심탄회하게 논쟁하기를 권장한다. “우리는 뭣보다도 제품을 먼저 놓고 봅니다. 제가 못나고 비율도 안 맞는 뭔가를 만들었다고 해 보죠. 그러면 우리 모두를 믿기 때문에 제가 옛날 것에서 아름다운 뭔가를 꺼내고… 괜찮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래요. 종종 반복해서 하기도 합니다. 드라마처럼 시즌을 거치죠.”
아카나가 지난주에도 한 건 있었다고 말하자 아이브가 물었다. “포장 있잖아요.” “아, 맞아.” 아이브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나빴지.”
아카나는 애플워치 골드 버전용 상자 안에 있는 Ultrasuede 가죽이 오렌지-브라운이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아이브는 너무 과장됐다고 반대했으며, 오렌지-브라운을 학생 아파트의 카페트에 비유했었다. 그런 즐거운 분위기에서 아카나는 당시 아이브에게 물었었다. “그래서, 싫다는 얘기죠?”
가차 없는 비판이라는 잡스의 취향은 악명 높다. 아이브도 기억한다. 몇 년 전 동료들을 완전히 부수는 광경을 보자, 아이브는 잡스에게 따졌었다. 잡스의 답변이 걸작이다. “왜 그리 애매하게 말해?” 모호함은 이기심의 한 형태라는 말이었다. “저들이 어떻게 느끼는지는 상관할 바가 아니야! 널 쓸데없이 좋아하기만 바라느냐?” 아이브는 격분했었지만 이내 잡스에게 동의했다.
“남들이 저를 좋아하게끔 하고 싶은 깊은 욕구 때문에, 분명한 피드백을 안 줬으니 저 스스로가 한심해지더군요.” 아이브는 잡스의 신랄함에 대해 너무나 많은 얘기가 있다면서 한탄했다. “그의 의도와 동기는 그리 고통스럽지 않았습니다.”
설사 잡스가 그를 모호함으로부터 구조했다 하더라도 이 이야기를 지금 꺼내는 것이 좀 이상하기는 하다. 아이브가 상대방 마음 상하지 않게 색상을 거절했다는 사실을 막 알았기 때문이다. 로린 파월 잡스는 남편에게 아이브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웃었다. “조니가 크게 좌절한 광경이야 봤었죠. 하지만 그가 그렇게 분노해서 화낸 건 한 번도 못 봤습니다.”
(잡스가 아프기 한참 전부터 그러했듯, 아이브가 장애인용 주차장에다 주차하는 광경 또한 상상하기 힘들다.) 아이브도 남들이 자기를 좋아해주기 바란다. 이 이야기는 자아-비판으로서 잡스에 대한 선제적인 방어로 보인다. 또한 2011년 월터 아이작슨(Walter Isaacson)의 전기에 대한 간접적인 대답이기도 하다.
전기는 적대적이지까지는 않아도 잡스의 불친절한 사례를 담고 있다. 나중에 아이브는 전기의 일부만 읽었다면서, 그 정도만 읽어도 충분히 싫을 만하다 말했다. 부정확한 면 때문이었다. 흔치 않은 수준으로, 아이브는 “제 평가는 더 이상 낮을 수 없습니다”라 말했다.
월터 아이작슨
아이브는 전화를 하러 나갔고, 안드레가 자신의 일과를 묘사했다. 아침 5-6시 정도에 출근해서 기하학적으로 좀 복잡한 물건을 디자인한 다음, 밀링머신에 보내서 만든다. 그는 이게 취미라 말했지만, 아카나는 다르게 답했다. “배면의 스피커 구멍 패턴에 대한 회의가 곧 있거든요. 조니라면 ‘바트, 네가 만든 패턴 상자 좀 가져 올래?’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안드레는 책상에서 자기가 컵 받침대로 사용하던 납작한 판을 가져오기로 했다. 하얗고 단단한 합성수지(레고의 재료이기도 하다. 애플 스튜디오는 1년에 천여 개의 모델을 만든다)로 만들었으며, 균등하게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안드레의 설명이다. “한쪽에서는 재료에서 뺀 음각 모양의 육각형 패턴이 있고, 동일하지만 다른 쪽의 재료에서 뺀 패턴도 있죠. 둘이 상쇄되기 때문에, 둘의 접점은 흥미로운 모양이 됩니다.” 안드레는 셔츠로 커피 얼룩을 닦아서 판을 보여줬다.
3년 전부터 아이브는 하드웨어는 물론 소프트웨어 책임까지 맡았다. 서체와 아이콘, 스와이프, 탭 등 애플이 휴먼 인터페이스라 부르는 소프트웨어 디자인까지 책임을 맡았다는 얘기다. 2013년 애플은 아이폰 및 아이패드용 iOS 7 운영체제를 출시하면서 전화, 텍스트, 이메일용 사운드를 새로 포함하는 등 전반적인 개수를 단행했다. 이전의 경고음은 Doorbell이나 Duck, Choo Choo처럼 실제 생활에서 나오는 경고음들이었다. iOS 7은 전자적으로 만들어낸 사운드들을 부분적으로 휘호 페르베이(Hugo Verweij)가 바꿨다.
휘호 페르베이(Hugo Verweij)
페르베이는 네덜란드 출신 사운드 디자이너로서 아이브에게 고용되기 전에는 “미니멀리스트 벨소리”를 판매하는 웹사이트를 운영했었다. (자기 블로그에서 페르베이는 애플의 “시끄럽고 허접한” 사운드에 질렸음을 표현했었다.) 새로운 벨소리가 너무 유행을 따른다고, 혹은 너무 유럽스럽다고 싫어하는 소비자들도 있지만 더 아래쪽에 있는 “전통적”인 사운드로 되돌아갈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은 새로운 사운드가 아이폰을 더 일관성 있게, 유리와 알루미늄, 그리고 헬베티카 노이에(Helvetica Neue) 서체에 더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해준다는 느낌을 가졌다.
아이브는 새로움을 관리한다. 그는 기술 혁신을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되, 못생겼다거나 유치하지 않게 대중시장에 나설 수 있도록 균형을 잡는다. 물론 애플도 실수를 저질렀지만 애플의 제일 큰 디자인 비밀은 아마 모욕을 피하기가 아닐까. MOMA의 안토넬리에 따르면 애플의 디자인 개념은 “존중의 신호”이다. “오브젝트에 스며들어 있는 우아함은 모두에게 옳습니다. 그리고 추한 것보다 더 비용이 들어서도 안 되죠.”
어느 초저녁, 쿠퍼티노로부터 샌프란시스코 중심가의 한 언덕 꼭대기로 갔을 때 아이브는 “우리의 제조 환경의 너무나 많은 부분이 부주의함을 알려 줍니다.”라 말했다. 아이브는 그곳의 침실 2개짜리 집에서 영국인 부인이자 예술 경영 쪽에 있었던, 헤더(Heather), 그리고 10살짜리 쌍둥이 아들과 같이 살고 있다.
그들 모두 “알루미늄”을 영국식으로 발음하며 전자제품 사용 시간을 엄하게 따르고 있다. (몇 년 전, 아이브는 Pacific Heights의 황홀한 전망을 갖고 있는 1920년대식 맨션을 구입한 적 있었다. 앤 게티(Ann Getty)와 래리 엘리슨(Larry Ellison)이 이웃인데, 현재 이 집은 상당한 리노베이션을 하는 중이다. 아이브 가족은 또한 하와이 Kauai에도 해안가 집을 한 채 갖고 있다.)
우리는 낮은 햇빛을 맞으며 I-280 고속도로를 타고 갔다. 디자인의 부주의함에 사례가 있는지 묻자, 아이브는 대화 주제를 다시 애플로 돌렸다. 제일 무분별함을 피한다는 원칙이 있기는 하지만, 그 노력을 항상 숨기지는 못한다고 한다.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들리겠지만, 저는 어느 정도, 그러니까 보살핀다는 감각을 갖고 있어요. 우리가 인류를 위해 봉사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죠. 멍청한 믿음이라고들 생각하겠지만, 그것이 목표입니다.
우리가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 가능하다는 것. 바로 문화에 대해 작게나마 기여한다는 얘기죠.”
아이브는 런던에 기반을 둔 직원으로서 최근에 애플에 들어온 마크 뉴슨과 자신이 디자인 고민으로 “우리 스스로 극한까지 밀어붙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일정과 비용에 맞춰서 개발한다거나 더 나아서가 아니라 달라 보이려고 개발한다는 불평이 있습니다.” 그와 뉴슨은 원래 자동차 애호가이며 그들 모두 현대의 자동차 대부분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다.
여름마다 그들은 빈티지 스포츠카 전시회가 열리고 실제로 몰아볼 수도 있는 영국 남부의 Goodwood Festival of Speed에 참가한다. “충격적인 자동차가 좀 있어요. 누군가의 차는 다른 누군가의 풍경입니다.” 밑에 입술 부분이 튀어 나온 은빛 세단이 오른쪽에 있었는데, 아이브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저게 사례입니다.” 우아하지 않은 그 차가 뒤쳐지자, 아이브에게 디자인을 비판해 보라 요청했다. “당황스럽죠. 안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죠. 안 그래요? 전혀 맛이 없습니다” 그는 모델 이름도 말하기 거절하며 중얼거렸다. “몰라요. 몰라. 공격하고 싶지 않아요.” (도요타의 Echo였다.)
도요타 Echo
우리는 아이브의 검정 Bentley에 타고 있었다. Bentley는 눈에 잘 띄는 럭셔리 자동차 치고는 수수하다. 후드가 거의 기울어져 있지 않으며, 견고한 모서리에 맞물려 있는 차의 전면부를 보면 아이브의 왼손에 있는 아이폰 6가 생각날 정도다. 우리는 사실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아이브는 마지 못해 운전 서비스를 받아들였었다. 아이브가 그에게 말했다. “이제 막 1년 지났잖나? 진?”
아이브라면 눈에 띄지 않는 삶을 선호하겠지만, 그도 멋진 건 좋아한다. 그는 Aston Martin DB4도 갖고 있으며, 2 도어 짜리 첫 Bentley는 10년 전, 스스로의 의심과 정당화를 왔다 갔다 하며 구매했었다. “전 항상 예전 방식 그대로의 Bentley를 좋아했습니다. 이유는 전적으로 디자인이에요. 그렇지만 제가 저항하고 또 저항했으며, 생각도 많이 했던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제일 기묘한 형태의 허영심이죠. 이런 식으로 저를 알아보도록 할 수 있잖을까 싶어서요. 그런데 제가 또 그렇진 않죠. 그래서 저는…” 잠시 그는 말을 멈췄다. “그래서 좀 불편했습니다.” 애플의 운영실 수석 부사장인 제프 윌리엄스(Jeff Williams)는 오래 된 도요타 Camry를 끌고 다닌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아이브가 말하는 이유는 “하느님 맙소사”이다.
제프 윌리엄스
Bentley로부터 보는 전경은 건조하고 노란 들판이었고, 아이브는 아름답지 않느냐 물었다. “긴 그림자에 해가 나무 끝에 걸려 넘어가고 있어요.” 샌프란시스코 북녘의 Marin County 전경이었다. 이곳은 영국 남서쪽과 비슷해 보였다. “데번(Devon)과 좀 비슷해요. 그렇지 않아요? 콘월(Cornwall). 엑스무어(Exmoor) 같기도 하고요.”
아이브의 부모가 현재 그곳에 살고 있으며, 아이브도 전에 그 동네에 집을 갖고 있었지만 그는 런던 중산층이 거주하는 북동쪽 교외의 칭포드(Chingford)에서 자라났다. 집에는 람스가 디자인한 Braun MPZ 2 Citromatic 주스 기계가 부엌에 있었다. 아이브는 “어느 부분도 숨겨졌다거나 튀어나오지 않았습니다.”라 묘사했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공구가 익숙했다. “제작소에서 자라난 것이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그는 고속도로, 다리, 도요타 등 모든 것이 여기서 만들어진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터득했었다.
그의 뿌리는 노동자 계급이었다. 그의 친할아버지와 증조 할아버지는 숙련된 금속공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마이클은 현재 은퇴했으며, 중학교에서 디자인과 기술을 가르쳤었고, 디자인 교육에 대한 정부 자문관이기도 했다. 아이브의 어머니는 신학 교사였으며 나중에는 치료사가 됐고, 그의 여동생은 런던의 비영리재단의 컨설턴트가 됐다.
마크 뉴슨은 아이브의 성장 환경이 자신과 경제적으로 유사했다고 말한다. “우리 둘 다 딱히 특권층의 배경이 없었습니다. 제가 한 많은 일들이 어렸을 때 못 가져본 것을 가지려는 노력이었죠.” 뉴슨은 자신이 디자인한 6천 달러 짜리 Louis Vuitton 배낭을 갖고 다녔다. 제트기 소유자인 아이브는 21살이 되어서야 비행기를 타 봤었다.
마이클 아이브는 아들의 재능이 어렸을 때부터 나타났다고 말한다. 그는 나무와 판자로 만든 기발한 햄스터용 장애물 코스를 기억했다. “놀라운 움직임 감각으로 대단히 정확한” 스쿠바 다이버 그림도 있었다. 조너선이 13살일 때 가족은 Midlands에 있는 Stafford로 이사 갔고, 당시 아이브의 별명은 Tiny였다. “그때 키가 다 자라서요.” 그는 동네 대표 럭비 선수로 뽑혔고, 필요할 때면 공격적일 수 있었다.
아이브는 웃으면서 설명했다. “예의 바르게 경기를 하지는 않죠. 하지만 팀원으로서 움직여야 합니다. 열심히 뛰지 않으면 팀이 다치니까요.” 학교에서 그는 미래의 부인인 헤더 페그를 만났으며, 당시 그의 헤어스타일은 포스트-펑크였다.
쌍둥이를 안고 있는 아이브 부부
1985년 아이브는 Newcastle Polytechnic(현재는 Northumbria University)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으로 맥을 사용하면서 엄청난 느낌을 받았었다. “맥을 만든 사람들의 가치를 알아 봤죠.” 그는 런던의 한 디자인 사무소에서 반년씩 두 번의 인턴을 거쳤고, 그의 뛰어남은 곧 분명해졌다. 그 사무실에서 아이브를 만났던 클라이브 그린여에 따르면, 아이브는 회사에서 제일 중요한 업무도 맡았었다고 한다.
그린여는 Newcastle에서 아이브를 만났을 때를 기억했다. “그의 거실에서 밤을 보냈는데, 수 백 가지 발포 고무 모델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당연히 모두 하얀색이었죠. 굉장히 작은 차이점이 있었죠. 제가 만난 사람 중에 아이브는 제일 집중하는 인물이에요.” 그런데 이 말은 아이브가 잡스를 묘사할 때 아이브가 했던 말이기도 하다.
아이브는 어렸을 때 “일에 빠져들었다”고 말했다. 비록 크고 나서 댄스 뮤직에 대한 취향을 기르기는 했지만(게다가 그는 영국 DJ이자 Massive Attack의 멤버인 존 디그위드(John Digweed)와 친구가 됐으며 요요마(Yo-Yo Ma)하고도 친구이다) 어렸을 때 본 영화와 책, 나이트 클럽에 대해 묻는 것은 소용없었다. 1987년 여름, 대학에 다니던 중, 아이브는 Newcastle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던 헤더와 결혼했다.
그는 전국 대학생 디자인 경진대회에서 두 번을 연속으로 우승했는데, 한 번은 하얀 탁상용 전화기(길다란 핸들을 갖고 있었다)로 상을 받았었다. 1989년 여름, 두 번의 연수 장학금을 받고 최고 학위도 받은 그는 미국으로 여행을 갔었다. 마침 당시 로버트 브러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Lunar라는 디자인 자문사를 차렸었고, 사실 브러너는 아이브를 만난 후, 그를 고용하고 싶어 했었다.
아이브는 열정적이면서도 상냥한 인물이며 그의 포트폴리오가 너무나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그가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있더군요.”의 이유도 있기는 했다. 브러너의 설명이다. “비록 산업 디자인을 컨셉과 렌더링, 그리고 모델과 온갖 창조적인 것들로 여기기는 하지만, 산업 디자인은 결국 뭔가를 전달하는 겁니다.” 아이브는 탁상용 전화기 모형을 가져 왔고, 전화기를 분해하여 내부 부품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었다. 이 모형의 외각은 모형을 토대로 완성할 전화기 정확히 일치했다. 브러너는 “학생들 작품 중에 이런 건 절대로 못 봅니다.”라 말했다.
다만 그때 아이브는 캘리포니아로 이주할 수 없었다. 이미 인턴으로 있던 회사에서 일하기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린여가 런던에서 공동 창업한 디자인 사무소, Tangerine의 세 번째 파트너가 된 아이브의 프로젝트 중에는 상고머리용으로서 이가 긴 이발사용 빗도 있었다. 아이브는 자신이 영업사원으로는 영 아니라고 여겼다 한다. 하지만 디자인 사무소는 새 작업을 영원히 찾아야 하며, 내부 디자이너처럼 회사 디자인을 좌지우지할 일이 없었다. 따라서 일도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세상이 또 다른 전자레인지를 필요로 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90년대 초, Tangerine에서의 시간이 끝나갈 무렵, 아이브의 핵심 고객이 둘 있었다. 영국의 화장실용 세라믹 제조업체인 Ideal Standard가 욕조, 타월, 세면대 디자인을 의뢰했었다. Bentley 안에서 아이브는 내 노트북에 세면대를 그려줬었다. 타원형의 상단이 점점 가늘어지는 구조였으며, 벽에서 약간 각도가 져 있었다. “정말, 정말 단순한 통입니다. 테두리가 두껍기는 하지만 비틀어져 있죠. 전면에서 볼 때는 좀 열려 있고요.”
아이브는 태블릿 컴퓨터도 디자인했었다. 1989년 브러너는 애플에 들어가 디자인 팀을 이끌게 된다. 1991년 애플은 첫 번째 랩톱 컴퓨터인 파워북 100을 출시하기 직전이었고, 브러너는 Tangerine에게 모바일 컴퓨팅 컨셉을 디자인해달라 의뢰했다. 실제로는 아이브를 애플로 모셔오기 위한 일환이었다.
라이브는 Ideal Standard와 애플 본사를 각기 방문했고, 두 회사 간의 차이가 분명히 느껴졌다. 싱크대의 경우, “형태가 기능을 따르지 않았습니다”였다. “형태 자체가 기능이었죠. 모양 때문에 물받이로 기능한다는 말입니다.” 아이브는 형태가 기능이라는 말을 제한적이고도 고상하게 만들었다. “아주 옛날 학교 다닐 때는 정말 진정한 감각이 있었죠. 문제에 대해 순수함이 있었으니까요.”
“애플 제품들은 정말 복잡하더군요. 이렇게 아찔한 자유가 있다는 점도 깨달을 수 있고요. 물론 아키텍처와 형태, 기능의 특정 문제 모두를 다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단 애플 제품은 여러 가지 다른 형태를 가질 수 있고, 이 물건이 뭔지 이해하는 데에 완전히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어요.
비록 비-전문가를 혼란스럽게 만들 도구와 머신은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만, 집적회로는 새로운 수준의 수수께끼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나서 이게 뭔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차릴 수가 없으니까요.” 그의 태블릿 컨셉인 Macintosh Folio에는 스타일러스와 함께 조절 가능한 화면이 있었고, 갖고 다니는 제도판의 개념이었다.
1992년 봄, 13년간의 보수당 통치 후 노동당이 승리하리라 예상했던 총선 전, Tangerine은 Hull에 있는 Ideal Standard 본사에 화장실을 소개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린여는 지금도 약이 올라 있었다. 세면대 지지대가 무너지면 아이를 죽일 수 있다는 이유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린여가 볼 때는 다른 커다란 세라믹 세면대도 다 마찬가지였다.
Tangerine 파트너들은 캘리포니아의 애플도 방문했다. 런던에 되돌아오자 보수당이 승리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그린여는 더욱더 풀이 죽었다. “조니는 날씨 좋다고 정말 좋아하더군요.”
아이브는 그해 9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얼마 안 있어 그는 노란색 Saab 컨버터블을 사들였다. 실리콘밸리는 완전히 자연스럽고 완전히 낙관적이었다. 미국에서 뭘 발견했는지 아이브는 스티븐 프라이에게 “냉소와 회의론이 정말 없다”고 말했었다.
집에 도달하자 태양이 졌다. 아이브는 운전사인 진에게 너무 감사하다 말했고, 나무로 된 문을 열면서 방이 어둠을 사과했다.
애플에 들어온 이후에도 아이브는 외부 프로젝트를 몇 개 맡았었다. 2001년 그는 폴 스미스의 책을 위해 하얀 폴리스티렌 상자를 만들었었다. 2013년에는 아이브와 뉴슨이 Project Red 경매를 위해 170만 달러에 낙찰된 알루미늄 책상을 디자인했다.
한 번은 뉴욕의 한 저녁 술파티에서 제이 제이 에이브람스와 동석했었는데, 에이브람스는 아이브로부터 광선검 디자인에 대해 “매우 특별한”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에이브람스는 “Star Wars: The Force Awakens에 그의 제안이 반영될 겁니다.”라 말했지만 어떻게 반영될지는 물론 언급하지 않았다. 불타는 십자가를 방불케 하는 새로운 광선검이 나오는 첫 번째 예고편이 나간 이후, 아이브에게 혹시 저 크로스-가드가 붙은 광선검이 아이브의 아이디어인지 물었었다.
아이브는 그냥 대화일뿐이었다고 답했다. “크로스-가드에 대해 말한 적은 없어요. 다만 매끈하지 않게 만드는 걸 말했습니다. 덜 정밀하고 그냥 꼬챙이처럼 생기면 재밌겠다 싶었거든요. 다시 디자인한 무기는 보다 옛스럽고 원시적이겠지만 그만큼 뭔가 더 불길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린 파월 잡스
그동안 로린 파월 잡스는 안경과 식기, 적절한 조리대의 높이에 대해 아이브와 상담했었다. “그는 비율과 치수 감각이 뛰어나요. 정말이에요. 디자인할 단추나 문, 전등이 필요하다면 그랑 얘기하면 됩니다.” 그녀와 대화했던 곳은 그녀가 근무하는 팔로알토의 교육 관련 비영리재단인 Emerson Collective의 사무실이었다. 그곳에는 Arne Jacobsen의 컨퍼런스용 탁자에 컵받침 2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그녀의 커피 컵용이고 다른 하나는 컵의 플라스틱 뚜껑용이었다.
아이브와 마찬가지로 스티브 잡스 또한 뭔가 만드는 아버지와 함께 자라났었다. 잡스는 자신의 제조 환경에 대해 안목을 갖추고 날카로운 비판을 했다. 개방적이고 즐거운 매너의 파월 잡스는 스티브를 만나기 전에는 결코 전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스티브라면 천장에 대해 정확한 관점을 가졌을 거예요. 전 문설주에 대해서도 배웠죠.” 그녀는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문설주들이 좀 두껍고 아마 과도하게 두꺼웠을 겁니다.”
잡스 가족의 팔로알토 집은 오랫동안 가구가 없었다. 잡스는 잡지나 책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진을 찢기는 했어도 책을 사지는 않았다. 파월 잡스에 따르면 그는 종종 “알고 싶지 않을 거야”라 말했다고 한다. 메르세데스를 모는 느낌을 망치는 스위치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그는 행동 변경을 강요하지 않는 제품을 갈망했으며, 파월 잡스의 표현은 이렇다.
“삶을 더 쉽게 만들어주는 방식으로 누군가에게 실제로 감사를 느끼는 제품”이다. 파월 잡스는 스티브가 언제나 찾던 것이 바로 그런 제품이었다고 한다. “조니랑 같이 일하기 전까지는 찾지를 못 했었죠… 그들은 정말 행복했어요. 서로를 대단히 좋아했습니다.”
삶의 막바지에 이르면서 잡스는 월터 아이작슨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애플에 영적인 파트너가 있다면 그는 바로 조니죠. 조니와 저는 제품 대부분을 같이 생각했고 그다음에 다른 이들에게 보여줘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습니다. 각 제품의 사소한 디테일 대부분은 물론 그는 큰 그림도 이해합니다. 게다가 애플이 제품 회사라는 점 또한 깨닫고 있죠. 그는 디자이너만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저를 위해 일하는 겁니다. 그는 저를 빼고는, 애플 내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권력을 갖고 있어요.” 영국 디자이너인 리처드 시모어는 잡스와 아이브 사이의 유착을 “현자(賢者)-수준의 탐미주의자와 믿을 수 없으리만치 실제로 만들어내는 실천가 간의 결합”이라 묘사했다.
파월 잡스에 따르면 이렇다. “스티브는 스케칭을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자기가 뭔가 실제로 디자인한다는 느낌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 둘 다 그들 둘이 있었기 때문에 일을 해낼 수 있었다고 봐요.” (잡스와 아이브는 기질이 달랐지만 아마 사교성이 부드럽지 못한 점만은 닮았으며, 그들이 같이 이룬 제일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서로 인사하지 않아도 되도록 디지털로 시선을 분산시켜줬다는 점이다.)
애플 제품을 ThinkPad나 책과 구별해주는 데 도움이 되는 동그란 모서리와 가장자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애플 제품의 범위는 평평한 사각형으로 좁아졌으며, 이러한 변화는 살아남은 순수 산업 디자인이 되었다.) 하루는 아이브가 너무나 피곤해서 대화중에라도 잠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그는 “원시적인(primitive)” 디자인 기하학을 설명하자 활기를 되찾았다. 컴퓨터 시대 이전에는 흔한 디자인으로서 본질적으로 두 개의 직선이 원 조각에 교차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재료가 허용할 때 한 선에서 다른 선으로 잇는 더 우아한 경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얘기했다. 그는 tangency breaks와 Bézier 표면을 거론했다. 이 사실을 파월 잡스에게 말하자 그녀는 깜짝 놀라 외쳤다.
“맞아요! 바로 그게 전환점이었죠. 잊고 있었네.” 각 제품마다 잡스와 아이브는 “몇 시간이고” 모서리를 논쟁하곤 했었다. 나중에 그녀는 자신과 아이브가 오스트리아-스웨덴 디자이너인 요제프 프랑크(Josef Frank)의 취향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요제프 프랑크는 곡면형 가구와 꽃무늬 천 디자이너이며, 강의에서 다음과 같은 발표를 한 적이 있었다. “딱딱한 모서리는 안 됩니다. 인간은 부드러우니 모양도 부드러워야 합니다.”
클라이브 그린여
클라이브 그린여는 90년대 중반, 잡스가 돌아오기 이전의 애플을 방문했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아이브는 “프린터 뚜껑의 디테일”을 작업 중이었다. “그는 거의 떠나기 직전이었어요. 오, 하느님. 그가 정말 떠났다면 세상은 상당히 달라졌을 겁니다.” 마이클 아이브도 이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잘됐다, 아들을 다시 집에서 볼 수 있겠군’이라는 생각도 했었죠.” 조너선 아이브는 이 시기를 별로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너무나 열심히 일해서 브러너는 그의 건강을 우려할 정도였다. 브러너는 뉴튼 PDA의 두 번째 세대와 20주년 맥 등 그의 디자인을 칭송했다. “표현적이기도 하지만 꽤 견고하고 산뜻하기도 합니다.” 1996년 초, 브러너는 애플을 떠나 국제적인 디자인 사무소인 Pentagram으로 들어갔다. 그는 후계자로 아이브를 권유했지만 나중에는 그도 데려 나오려 했었다. “Pentagram에서 파트너로 같이 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리 말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어떻게 될지 일단 좀 기다려보겠다더군요.”
아이브는 아이맥이 등장했던 1998년 여름까지 총 2년 반을 디자인 책임자로 있던 상황이었다. 나중에 아이맥 개념의 명성을 대부분 잡스가 가져갔지만, 아이브를 포함하여 대부분은 디자인실이 잡스의 복귀 이전에도 아이맥과 유사한 뭔가를 작업 중이었다고 한다. 아이브에 따르면 잡스는 “핥을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라”고 했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실 수석 부사장, 크레이그 페더리기(Craig Federighi)는 아이맥의 최신 프로토타입을 보여준 임원회의에 참석했었다. 아이브가 한창 본체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스티브가 이음매를 지적하더니 만조니에게 ‘아마 모서리를 좀 더 가다듬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었다고 한다.) 아이맥 디자인은 사면된 죄수처럼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브라운에서 디터 람스는 소비자 가전제품을 가구화 돼야 한다는 부담을 덜어줬었다. 라디오는 그냥 하나의 상자이면 됐다.
이때 애플의 본능은 그와 반대로 한다였다. 머신을 길들이려면 여전히 기술적인 작업과 사무실이 있어야 했다. (몇 년 전, 올-인-원 컴퓨터 디자인 컨셉에서 아이브는 화면을 진열장 문 뒤로 숨겼었고, 하드웨어가 시계에서 나오는 오리와 같았었다.) 아이맥은 푸른 식용색소와 손잡이, 그리고 거추장스러운 주요 부품인 브라운관을 쾌활하게 감싸는 커브로 이뤄져 있었다.
아이맥은 애플을 뜨게 하고 아이브도 떴다. 10년 이상 잡스와 아이브는 점심을 함께하고 여행을 함께했으며, 잡스는 대영제국의 망상이라며 그를 놀리기 좋아했었다. 파월 잡스는 “외화내빈(all hat and no cattle)”이라 정리했다. 아이브에 따르면 한 번은 잡스와 같이 영국 찰스 왕세자의 별장인 Highgrove에서 아침을 찰스 왕세자와 같이 보낸 적이 있다고 한다.
전임 수석 하드웨어 엔지니어이자 절반쯤 은퇴한 상태인 밥 맨스필드(Bob Mansfield)는 최근 그때 당시 다들, 아이브가 잡스에게 특별한 접근권을 갖고 있다고들 느꼈다고 한다. 그의 말은 이렇다. “아버지의 관심을 끌려고 경쟁하는 것과 같습니다만, 아이브가 잡스를 정말 멋지게 다루더군요. 잡스는 기쁘게 하기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조니가 아주 많이 참더군요. 덕분에 저 같은 사람들이 잡스를 상대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아이브의 지배는 즉각적이지 않았다. 마이클 아이브는 2001년 아들과 나눴던 대화를 기억했다. “저한테 이게 노래 천 곡 들어간다더군요. 그래서 천 곡 씩이나 누가 원하니라 물었더니, 아시게 될 거예요라 말합디다.” 최근 Fast Company의 인용에 따르면 전직 애플 엔지니어이자 아이포드 기능을 많이 담당했던 토니 퍼델(Tony Fadell)은 아이포드를 조니에게 줘서 외양을 맡겼다고 한다.
즉, 아이브의 기여는 배터리와 디스크 드라이브, LCD 화면, 트랙 휠 등 엔지니어와 다른 이들이 결정한 요소를 최대한 우아하게 결합 시키기였다는 얘기다. 퍼델은 애플을 나가 Nest를 창업했으며, 구글이 나중에 Nest를 인수했고, 퍼델은 최근 구글 글래스를 맡았다. 그런데 그의 말은 전략적인 불손함일 수 있다. 팀 쿡이 내게 뭐든 껍데기 씌우기를 하지 않는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부분적인 사실만 담고 있을 뿐이라는 의미다. 아이브는 아이포드에게 저항할 수 없을 하얀-은색 형태를 선사했고, 이후로 수많은 디자이너들은 이것저것의 “아이포드 버전”을 만들어달라는 고객의 요구에 시달려야 했다. (런던의 리처드 시모어는 모이스처 크림의 아이포드 버전 회의가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산업 디자인실은 당시 아직 애플의 중앙 작업소가 아니었다.
아이패드 프로토타입
몇 년 후인 2004년, 한 방문객이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우스우리만치 커다란 터치 반응형 화면을 발견한다. 아이브에 따르면 이 화면을 매우 대충 만들었으며 프로젝터를 포함하고 있었다고 한다. 디자인실이 기초 기술을 발명하지는 않았지만(애플의 발명도 아니었다), 몇 년 후 결국 시장에 내놓게 만들었다. 맨스필드의 표현에 따르면 아이브는 당시 “제품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만드는지와 기술, 어떻게 냉각 시키는지와 같은 제품의 근본적인 부분”에 포함돼 있었다.
아이브는 자기가 처음에는 태블릿을 먼저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휴대폰이 먼저 나와야 한다는 잡스 주장에 동의했다고 한다. 태블릿은 새로운 범주의 머신이면서 새로운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을 한꺼번에 나타냈을 것이다. 2007년 아이폰이 나왔을 때, 맨스필드에 따르면 아이브는 “운명의 중심(hub of the wheel)”이 됐다.
로버트 브러너는 디자인이 제품 제작에 있어서 “연속적인 이벤트에서 (한 번 끼는) 수직 줄무늬(vertical stripe)”와 같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애플에서는 “긴 수평 줄무늬가 되어 모든 대화에 디자인이 참여했다. 다른 디자이너들에게는 길을 터준 셈이다. 2007년 브러너는 자신의 디자인 사무소, Ammunition을 차리고 지미 아이오빈과 닥터 드레(Dr. Dre)가 창업한 헤드폰 기업 Beats와 일을 같이 하기 시작했었다.
브러너의 사무소는 Beats의 헤드폰 제조와 통합돼 있었는데, 브러너에 따르면 애플이라는 사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브러너는 아이브가 “그 이전에는 결코 없었던 수준까지 우리의 일을 그가 단독으로 올려 놓았다”고 말한다.
아이브의 스튜디오는 제조만이 아니라 엔지니어에 대해서도 권력을 갖고 있다. 초기 아이맥 업데이트에 대해 제프 윌리엄스가 한 말이 있다. “아이맥을 발표했고, 아름다웠죠. 하지만 어떻게 생산할지 이해를 못 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브와 댄 리치오(Dan Riccio, 현재 애플 하드웨어 엔지니어링실의 수석 부사장)가 한국의 컴퓨터 제조업체인 LG 전자에서 8주일을 보냈었다. 리치오는 LG 사람들이 애플을 위해 아주 많은 디자인을 해줬다고 말한다. “현재는 100% 우리가 다 합니다.”
애플 디자이너들은 지금도 공장을 방문하지만, 본사의 최종 프로토타입이 대화의 시작은 아니며 일부일 따름이다. 아이브는 유리 뒤에 있는 곳도 구경시켜줬다. 그곳에는 밀링머신 외에 색상 연구실도 있었다. 아이브의 말이다. “몇 년 전에는 형태를 올바르게 정의 내리는 경우 디자이너로서 책임을 다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로잉이나 모델링을 하면 끝이죠. 하지만 지금은 형태 정하기부터가 시작입니다.”
애플이 현재 제조업체로 보내는 데이터에는 툴의 트래킹 경로와 속도, 적절한 윤활유 수준 등이 다 들어가 있다. 아이브는 디자인실의 프로토타입 제조 능력이 오히려 아름답지만 멍청한 아이디어의 이론적인 위험도를 만든다고 지적했다. “근본적으로 못생겼지만 디테일에 대한 힌트를 주면서 매력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3차원 모델도 잘못된 판단으로 이끌 수 있다. “우리가 노력하는 것은 구현할 수 있다는 정도보다 더 높아요. 디테일에 대한 우리의 능력 이상입니다.”
어느 날 오후, 아이브와 바트 안드레는 맥북 노트북의 아래 패널을 제거했다. 그러자 검정 서킷보드 위에 검은색과 은색의 부품이 정렬돼 있었다(불필요할 정도로 질서 정연했다). 아이브는 행복한 모습으로 바라봤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죠.” 안드레는 경쟁사 컴퓨터의 경우 보드가 녹색이라 지적했다. 다른 머신을 말할 때는 좀 쑥스러운 느낌이었다. 탁자 위에는 골프 드라이버 크기의 기존 애플 헤드폰(EarPod) 플라스틱 모델도 있었다.
무한정한 자금으로 가능해진 애플의 제조 공정과 공급업체 및 제조업체들에 대한 무자비한 압박 또한 애플에게 철갑옷을 둘러주는 꼴이다. 파올라 안토넬리에 따르면, 애플 제품을 베끼기가 어렵게 제조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 점이 바로 천재적이에요. 형태의 효과만이 아닙니다.” 2007년 로버트 브러너가 전례 없는 맥북의 “유니바디(unibody)” 제조 공정(알루미늄 블럭으로 만든다)을 처음 봤을 때 그는 황홀할 정도였다.
“애플은 자기들이 이런 경험을 원한다고 결정 내리고는, 1만 대의 CNC 밀링머신을 사들였습니다.” (애플은 이 수치를 확인해주지 않았지만 브러너가 과장하지는 않았었다.) 곧 아이폰이 데뷔했고 “대단히 큰 한국의 한 기업”이 터치스크린 경쟁자를 만들어달라고 자기 회사에 접근했다고 한다. 브러너는 웃으면서 말했다. “6주 안에 만들어내기를 바라더군요. ‘정말 모르시네, 이건 몇 주 단위가 아니라 몇 년은 걸립니다. 아주 능력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년에 걸쳐 만든 것이라고요.’의 입장이었습니다.”
하루는 디자인실 부엌의 애플 디자이너들에게 다가가서 자기 제품에 대한 세상의 찬사를 어떻게들 알고 계시는지 물어봤다. 그들은 인정하기조차 꺼리는 분위기였다. 디자인실이 행복한 고립 상태, 그러니까 사우나나 북유럽 감옥 같다는 의미다. 영국 디자이너인 리처드 호워스는 “세상의 무게가 우리 어깨 위에 놓여 있다는 건 아니죠”라 말했다. “조니가 다 잘 해 놨으니 그리 무겁지 않습니다. 상상하시는 것보다 더 자유로워요.”
맨 왼쪽이 에반스 행키
디자인팀 멤버인 에반스 행키(Evans Hankey)가 덧붙였다. “제가 볼 때, 그 압박 대부분은, 우리 스스로에게 주는 압박입니다.” 그녀는 기존 제품을 잠재적인 후계 모델과 나란히 높을 때가 종종 있다고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즐겨왔던 제품이 갑자기 오래되어 보이고 더부룩해 보이는 거죠.
새 제품은 정말 놀라운 느낌이고요.” (디자이너 들과 제품 고객들의 시간은 같지 않으며, 디자이너들에게 낡아 보이는 아이템이 바로 지금 스토어에서 팔리는 제품들이다.) 행키는 새 모델이 “필연적”이라 느껴지면, 할 일이 매우 많음을 알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적어도 기반은 단단하죠.”
행키의 말은 오래가는 디자인에 대해 디터 람스의 계명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드러낸다. 1973년 소니의 한 광고를 보자. “증손자에게 남겨줄 테이프 플레이어가 될 수 있습니다.” 파텍 필립(Patek Philippe) 광고와 비슷한데, 바라는 바이기는 하겠지만 소비자 가전제품에 대해서라면 당시 기준에서 그리 터무니없는 얘기도 아니었다.
오늘날 애플 디자이너들은 경쟁사들처럼 화면 깨짐이나 프로세서 속도 등, 거의 일회용 제품을 만든다. 이점이 불편한지 묻자 잠시 침묵이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DJ이자 황은 친구 한 명이 여전히 1세대 아이폰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아이폰이 종군기자의 흠집 난 라이카인 양 “험하게 쓰긴 했지만 절대적으로 괜찮습니다”라 말했다. “그러니까 이건 절대적으로 오래 가죠.”
아이브는 영원히 쓸 수 있도록 만든다는 목표를 포기하진 않으리라 말했었다. 디자인실의 끊임없는 진보는 “수억 명의 삶의 질”을 개선시켰기 때문이다. “속도를 줄이면, ‘바로 거기서 됐다’는 말이죠. 직업 생활이 더 단순해지기는 하겠지만, 정말 이기적인 겁니다.”
애플워치가 이전의 애플 제품보다 더 순수한 아이브의 작품인지 애플 수석 부사장인 제프 윌리엄스에게 물었다. 25초 정도 침묵이 있었다. 애플이 5만 달러의 이윤을 벌어들이는 시간이었다. 그의 답변은 예스였다.
아이폰이 나왔던 2007년, 아이브 팀은 영국 서쪽, Somerset 시골의 호수가 있는 17세기 양식의 저택(침실만 11개이다)을 사들였다.
아이브는 15년 동안 애플에 있었으며, 애들도 이제 취학 연령에 이르렀다. 아이브와 아내가 샌프란시스코 자금 조성 파티의 잘 그을린 손님들 사이에서 사진이 찍혔을 때, 창백한 아이브 가족들은 잘생기기는 했지만 좀 놀란, 그러니까 제인 오스틴 소설에서 바로 빠져 나온 듯 한 표정이었다. 당시 마이클 아이브는 서머셋의 집이 완전한 귀향으로 이어지기를 희망했었다. “3가지 질문을 하지 않는 법을 배웠소. 영국에 언제 돌아올래? 지금 무슨 작업 중이니? 애 더 나을 생각은 없니?”
맨 왼쪽이 마이클 아이브, 맨 오른쪽은 클라이브 그린여
클라이브 그린여에 따르면 아이브는 당시 영국으로의 귀향을 고려했었다. “상당히 이른 퇴직”을 해서 “마크와 함께 럭셔리 아이템”작업을 꿈꿨다는 얘기인데, 애플의 성공과 잡스의 건강 악화 때문에 아이브가 계획을 바꿨다고 한다. 애플은 첫 해에만 600만 대의 아이폰을 판매했고, 2012년에는 한 해에 1억 대 이상의 아이폰을 판매했다. 동기간 동안 애플은 아이패드와 맥북에어를 선보였고 회사의 가치는 네 배 이상 올랐다.
그린여는 아이폰이 전 세계를 막 바꾼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그 부담이 그에게 내린 거죠.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불쌍한 아이브. 그는 정말 자리를 지켜야 해요. 그게 그의 계획이 아닌 걸 압니다. 그 또한 즐기고 있기는 하지만요.” 2011년 봄, 서머셋 집은 다시 매물로 올라왔다. (석회석 바닥에 두 대의 Neff 오븐이 있는 이 집은 단기 임대도 가능하다.)
내게 아이브는 이사 갈 계획을 세운 적이 없다고 말했다. 자신과 부인이 그 집을 매입했던 이유는 가족 휴가 때문이었으며, 이용을 안 해서 팔았다는 얘기였다. 그렇지만 그는 2011년 초, 애플 이사진이 재배치의 희망을 좌절시켰다는 London Times의 부정확한 기사와 집의 매각을 연결시키기도 했다. 그는 가십의 중심에 서 있기를 바라지 않았다. 2012년 아이브는 버킹엄 궁전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때 그와 부인은 영국 여권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미국 시민이 됐었다.
기사 작위를 받는 조너선 아이브
잡스는 2003년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 아이작슨에 따르면 2009년 잡스가 간이식을 위해 입원하고 거의 말을 못 했을 때조차 그는 산소 마스크 디자인을 비판했다고 한다. 잡스는 업무에 복귀하고 아이패드도 선보인다. 그러나 2011년 그는 다시 떠났고 그 후로는 되돌아오지 못했다. 아이브는 잡스의 집에 자주 방문했고 10월 한 오후에 잡스가 사망할 때에도 잡스 집에 있었다.
Infinite Loop의 잔디밭에서 개최된 잡스 추도식에서 아이브는 스티브가 자기에게 이 말을 자주 했다고 전했다. “‘이봐, 조니. 멍청한 아이디어가 하나 있어’ 정말 멍청한 아이디어일 때가 종종 있었죠. 정말 끔찍할 때도 있었습니다만, 가끔은 정말 몸이 떨릴 정도일 때도 있었어요.
그러면 우리 둘 다 조용해졌죠. 과감하고 미친, 위대한 아이디어였습니다. 아니 그 미묘함 속에서 조용하고 단순한, 그 디테일하며, 정말 심오할 때도 있었죠.” 아이브가 내게 한 말은 이렇다. “잡스가 정말 항상 생각날 수밖에 없죠. 우리의 개인적인 관계도 그렇거니와 제가 지금도 같은 장소의 같은 탁자에서 일하고 있잖아요. 15년을 같이 앉았었는데 어떻게 생각이 안 나겠습니까?”
아이브에 따르면, 애플 창업자 혹은 그 디자이너보다 오랜 디자인 역사를 가진 최초의 애플 제품인 애플워치는 잡스의 사망에 가까워서 고안했다고 한다. 사실 이것저것 애플 제품을 언제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규명하기란 어렵다. 애플은 미래는 물론 과거조차도 지식재산권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1년에는 신제품 검토가 전례 없이 많았던 모양이다.
회의적인 언론(The Onion의 기사 제목은 이렇다: “애플, 아이디어 없이 공포에 빠진 사람을 출시하다”)과 시장의 요동, 비탄함을 염두에 두고 임원진들이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쿡은 애플이 여러 범주의 제품을 알아보고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고 말한다.
애플은 아이패드 미니 개발부터 시작했다. 그해 말이 가기 전 아이폰 6의 조상뻘 되는 프로토타입이 디자인실에 등장했고, 4인치에서 6인치가 넘는 크기까지 모든 크기별로 모델을 만들었었다. (처음에 디자인실에서는 아이폰 4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더 큰 아이폰을 디자인했었지만, 아이브는 “투박”하고 “매력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애플워치 프로젝트와 소프트웨어에서 아이브의 역할이 아이브에 대한 감사인 동시에 아이브를 옭아매려는 것 아닐까 하고 물었었다. 옐로 골드와 로즈 골드로 만든 수갑인 셈이다. 쿡은 “솔직히 그렇게는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라 말했다. “조니는 정말 애플을 사랑해요. 여기 있는 걸 사랑하고 애플 제품을 사랑하죠.
그 동기는 우리 제품이 훨씬 더 좋아야 한다입니다.” 잡스와 아이브가 부자 관계였다고 한다면, 아이브와 쿡은 존경하는 사촌 뻘이었다. 쿡은 자신이 게이임을 밝혔던 지난 가을, 그 이전이나 이후나 항상 “극도로 지지해줬다”고 말했다. “그런 일을 하면 돌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항상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정말 근사하죠.”
아이브는 시계를 모아들였고 동료들 및 뉴슨과 함께 시계 디자인을 논의했었다. (뉴슨은 90년대에 스스로 시계 회사인 Ikepod를 차린 적이 있었다.) 뉴슨은 5년에서 10년 후의 세상이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야말로 디자이너의 역할이라 말했다. “생각해 보시죠. 사람들이 뭘 필요로 할까요?” 2011년 소형화 기술의 진보 덕분에 그 답변은 휴대폰과 연동하여 알림 서비스가 있는 웨어러블로 보였다.
사랑 메시지를 더 간단하게 교환토록 한다는 얘기다. 그해 여름, 구글은 얼굴에 쓰는 8-파운드 짜리 컴퓨터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당시 구글의 계획을 몰랐던 아이브는 그런 걸 만들려면 “제일 분명하고도 올바른 위치”가 손목이라 정했다. 나중에 구글 글래스를 봤을 때 아이브는 얼굴이 역시 잘못된 위치임이 분명했다고 말한다.
구글 글래스
쿡은 안경이 별로 영리한 전략은 아니라고 항상 생각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정말 그 안경을 쓰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었죠. 우리가 항상 믿는 바대로 기술을 배경에 넣는 대신, 안경은 거슬려요. 구글 글래스가 실패하리라 항상 생각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까지는 그렇죠.” 그는 자기 손목의 애플워치를 쳐다봤다. “시계는 거슬리지 않아요. 당신과 저 사이에 장벽을 만들지 않습니다.
제가 여기서 알림을 받으면 손목을 조용한 떨림으로 울립니다. 무슨 일인지 무심코 볼 수 있죠.” 잡스의 옛 사무실에서 얼마 안 떨어진 One Infinite Loop 회의실에 있었고, 개인용 기술 역사가 이렇게 발달된 지금 순간을 목격하고 있었다. 젊은 여자가 어디선가 갑자기 조용하게 서류를 들고 나타나 쿡이 볼 수 있는 곳에 서류를 놓고 갔기 때문이었다.
2011년 가을, 아이브는 비록 “잠정적이고 매우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시계에 대한 대화가 공식적인 시계 프로젝트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별로 특별할 거 없이, 그리고 좀 불길하게 프로젝트를 정했었다고 한다. (“우리는 대단히 많은 걸 알아보며, 대부분은 계속하지 않기로 결론 내렸죠.” “완전히 새로운 플랫폼에서의 시작이 흔치는 않습니다.”) 이때 일을 말할 때 아이브는 주머니 바느질의 발전에 애플워치를 비유했었다.
역사적인 사례를 얘기할 때의 즐거움을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았다. 아이브가 서머셋을 계속 바랄지 안 바랄지는 모르겠지만, 신대륙에서 디자인 인생 20년을 지낸 그는 이제 구대륙의 한계도 넘어섰었다. 그는 디자인실에 역사가와 천문학자들을 불러 강의를 시켰다.
처음에는 서류에 디자이너들이 별로 집어 넣은 게 없었지만 몇 년에 걸쳐 협력하자 드디어 깨달음의 순간이 왔었다. “누군가 말하면 그게 뭔지 우리는 정확히 압니다.” 처음 논의는 시계 디자인이 아니라 시계의 전반적인 아키텍처였다. 아이브는, 휴대폰 갖고 다니기는 “OK”, 혹은 “어느 정도 OK”라 하더라도 차는 것이라면 그렇게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여전히 분명하고도 단일한 의견을 제시하면서도 대단히 다양한 제품을 어떻게 만들어낼까?”였다.
여러 가지 형태로 내놓아야 할 필요가 있다면, 오히려 기회를 삼으면 될 일이었다. 아이브는 알루미늄과 스테인리스강, 금, 특히 여러 금 합금으로 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고 말한다. (아이브는 미래 계획에 대한 힌트도 주면서 “우리는 멈추지 않습니다.”라 덧붙였다.)
애플워치는 대중시장형 럭셔리로 범위를 넓힐 수 있으며, 아이브와 뉴슨 모두에게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한계를 깨줄 수도 있다. 뉴슨은 작년부터 애플에 들어왔긴 하지만 그는 애플워치의 첫 단계부터 애플워치 작업을 해왔었다(그의 이름이 특허에 등장할 것이다).
뉴슨은 비행기 인테리어와 Safilo 돋보기(종종 아이브가 티셔츠 칼라에 걸어 놓는다)를 디자인하긴 했지만 대중시장용 제품은 디자인한 적이 거의 없었다. 사실 뉴슨은 애플에서 가능한 일에 대해 질투도 자주 했었다.
마크 뉴슨
그는 2007년, 일회용 대리석 가구라는 값비싼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Gagosian 미술관과 파트너십을 맺었었다. 순수 예술의 한계를 뛰어넘은 아이디어였다. 뉴슨에 따르면 자신이 갖고 있는 창조성을 배출할 곳을 찾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 종류의 일을 맡아줄 고객이 없었어요.” 제조의 규모에 있어 극단에 서 있는 아이브와 함께 일하면 “그런 종류”의 일을 할 수 있었다. “애플이 아닌 곳에서라면 비실용적이라거나 미쳤거나 그냥 경제성 없다는 이유로 묵살당했을 일도 애플 디자이너라면 실현도 가능하죠.”
클라이브 그린여는 아이브가 언제나 럭셔리를 원했다고 한다. 그린여는 호치키스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모두를 위한 완벽한 호치키스를 만든다는, 이를테면 산업디자인의 임무 중 하나를 이미 아이브가 해냈다고 말했다. (그린여의 설명이다. “그런 철학을 가진 디자이너 대부분은 세상을 지배하지 못했죠.
호치키스는 지배했을지라도요.”) 몇 년 전, 그린여는 영국의 휴대폰 제조업체인 Vertu와의 협업을 고려했었다. Vertu는 기술적으로 평범한 제품에 보석을 박아서 수 만 달러에 파는 곳이다. 현대의 소비자 가전제품은 결국 세월에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가정을, 사치품으로 돌파한다는 도전을 내세운 회사가 Vertu이다. 그린여에 따르면 아이브가 Vertu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당시 애플워치 프로젝트에 깊숙이 관여했었던 밥 맨스필드는 아이브의 역할이 “아이브와 스티브”를 조합한 역할이었다고 한다. 맨스필드에 따르면 아이브는 여전히 애플워치를 애플에서 증명해야 했고 내부의 저항도 “대단히 많았다”고 한다.
이를테면 애플워치와 같은 제품을 스토어 내에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지, 부자 고객과 그렇지 않은 고객을 어떻게 나눌지 불분명했었다. (맨스필드의 설명이다. “애플은 모두를 위한 제품을 만들기 원합니다.”) 결국 아이브는 저항을 이겨냈고, 2013년 애플은 전직 Burberry CEO였던 앤젤라 아렌츠(Angela Ahrendts)와 전직 Yves Saint Laurent Group의 CEO였던 폴 드네브(Paul Deneve)를 영입했다.
헤더 아이브, 폴 드네브, 리처드 스트링거, 줄리안 호닉
애플은 지난해 LVMH 럭셔리 재벌 그룹의 일부인 TAG Heuer의 파트릭 프뤼니오(Patrick Pruniaux)도 영입했다. 애플은 제일 저렴한 애플워치가 349 달러이리라 발표했고, 브러너에 따르면 이미 스마트폰으로 가득 찬 세상에 저 정도 가격이면 졸업 선물로 적당하다고 한다.
Beats도 헤드폰 가격대를 저 정도로 정하여 졸업 선물로 적당하기를 추구했었다. 하지만 Apple Watch Edition이라 천진난만하게 이름 붙인 순금형 모델은 수 천 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영향력이 큰 애플 관련 블로거인 존 그루버(John Gruber)는 애플워치 에디션의 가격이 “기술 업계의 관점에서 볼 때… 충격적으로 높겠지만, 전통적인 고가 시계와 보석 업계 관점에서는 충격적으로 쌀 것”이라 쓴 바 있었다.
스위스의 시계 제조업체인 Audemars Piguet가 운영하는 시계 박물관장인 세바스티앙 비바스(Sébastian Vivas)는 자신의 업계가 애플의 계획에 흔들리지 않았다고 최근 밝혔었다. 그가 내게 한 말이다. “두렵지 않습니다. 그냥 좀 웃을 뿐이죠. 다만 시간을 알려준다는 맥락 없이도 보석류를 찰 수 있다는 개념을 남자들이 널리 받아들인다면 그때는 더 큰 위협이 될 겁니다.”
선택을 제공한다는 아이브의 결정 또한 필연적인 디자인이라는 애플의 디자인 철학에 대한 도전이다. 우리의 대화에서 아이브는 이름을 거론하지 말라 부탁하고는 경쟁사 제품을 헐뜯었다. “‘아무 거나 원하는 거 만들고, 아무 색이나 원하는 색을 고를 수 있다’는 식이에요. 디자이너로서 책임감을 방기한 겁니다.” 쿡은 자기가 만난 그 어떤 사람보다도 아이브의 취향이 더 낫다고 말한다.
아이브도 이의를 제기할 것 같지는 않다. 애플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아이브는 주변에 앉아 있는 사람들 이 “세계 최고의 실리콘-칩 디자이너”의 기술 결정에 대한 도전하리라는 “생각은 안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정도 존경을 받는 산업 디자이너는 거의 없죠. 신발과 전등 같은 제품에서나 취향에 따른 결정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이유가 있습니다.”
디자인실은 애플워치를 위한 모듈 시스템을 채택했다.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드는 몸체와 교환 가능한 시계줄 때문이다. 6 주일이 걸렸고 디자인실은 첫 모델을 만들었다. 아이브의 말이다.
“모형을 다룰 때는 좀 어색합니다. 말하자면 새로움이나 차이에 대해 반응할 때가 많으니까요.” 새로운 모형은 거슬리거나 실망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몇 년 전, 아이브와 동료들은 미래의 아이폰 6를 며칠간 갖고 다니면서 각 프로토타입 크기를 평가 내렸다.
아이브는 제일 처음 좋다고 느꼈던 크기가 5.7인치였다고 기억했다. “그리고 하룻밤 사이에 돌아와서는 ‘아, 이거 너무 커’라 느꼈다 이거죠. 그러고 나니까 5.6인치도 너무 크게 느껴졌습니다.” (쿡도 그 과정을 설명한 바 있다. “조니는 4.7인치와 5.5인치를 고수했죠.”)
Cartier Santos
아이브가 슬롯에 클릭하면 되는 애플워치용 시계줄로 결정 내린 것도 1년 전이었다. 후에 아이브는 다른 시계와 함께 디자인실 외부에서 차고 다니며 실험을 해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둥그런 모서리를 가진 사각형 몸체의 모양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기능의 큰 부분이 (이름이나 약속 등의) 목록이라면 원형 몸체는 합리적이지가 않습니다.” 최종 형태는 뉴슨의 시계, 그리고 1904년에 나온 Cartier Santos와 유사했다.
맥과 마우스, 아이포드와 클릭휠, 아이폰과 멀티터치처럼 참신한 입력 기기를 갖춘 획기적인 애플 제품들이 있다. 아이브는 애플워치도 애플 역사에 획기적인 제품이 되리라 간주한다. 애플워치 오른쪽에 솟아 있는 손잡이인 디지털 크라운(용두)은 전통적인 시계 제조에서 그 이름과 형태를 가져왔다. 애플워치에는 애플에서 오랫동안 개발 중이던 신기술인 손가락 압력을 감지하는 터치스크린을 탑재할 예정이다. (강하게 누를 때와 그냥 손댈 때가 클릭과 더블클릭처럼 다른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손가락으로 확대나 축소를 하기 어렵기 때문에 생긴 장치인 디지털 크라운은 디자인실에서 주문한 장치였다. 제품 외양 디자인이 아니라 아예 아이브가 애플 엔지니어들에게 만들어달라 요청했다는 의미다. 시간이 흐르면서 디지털 크라운의 역할에 목록 스크롤링도 포함됐고, 아이브는 디지털 크라운의 다양한 용도를 좋아했지만, 그의 한 동료가 뻣뻣한 손가락으로 스크롤하는 광경을 보자 과연 더 자연스러운 시계-감기 제스처 때문에 혹시 우연히라도 더 큰 엄지손가락을 터치스크린에 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날 오후, 아이브는 측면에서 본 애플워치를 스케치했다. 디지털 크라운을 가로 세로 축으로 보면 균형 있게 장착돼 있지 않다. 아래보다 약간 더 위쪽에 가까우며, 밑면보다는 윗면에 더 가깝다. (보다 평평한 보조 버튼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한 후 아이포드의 앞면을 빠르게 스케치했다. 사각형 안의 사각형, 원 안의 원이었다.
그는 애플워치 스케치를 가리키며 “상징적(iconic)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는 없겠지만요”라 묘사했지만 바로 그 뒤에 애플워치 스케치가 “매우, 매우 상징적인 시선입니다.” 만약 디지털 크라운을 시계 중앙에 위치시켰다면 애플워치는 상당히 다른 제품이 됐으리라는 설명이다.
“글자 그대로예요. 그게 뭔 문제냐 물으실 수 있겠지만, 글쎄요. 예전에 있던 일을 말 그대로 되풀이한다면, 애플워치가 하는 일에 대한 정보는 틀렸다는 의미입니다. 디지털 크라운을 돌릴 수 있다는 점이 안심이기는 하지만, 시침을 돌린다거나 손을 조정한다는 기능이 아니죠. 목표는 ‘묘한 친숙함’을 만들어내기였습니다.”
애플은 애플워치를 건강 모니터링, 카드 없이 하는 결제, 추파 메시지, 출퇴근 시간 동안 손목 두들기기 등을 목표로 하는 듯하다. (애플은 애플워치를 선보일 때 “친숙하다”는 단어를 너무 자주 사용했다.) 2012년 아이브는 샌프란시스코의 St. Regis 호텔로 소수의 회사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제프 윌리엄스는 아이브가 그 기회를 살려 아이디어를 조절하고 기나긴 침묵을 통해 상당한 인내심을 보였다고 한다.
윌리엄스는 한 번에 받을 수 있는 정보량에 대한 대화를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가 기억하는 아이디어는 또 있었다. 요새 나오는 자동차들 중에 기술적인 문제를 서비스 센터에 자동으로 보고하는 기능도 갖춘 차가 있지만, 아이들의 경우 그런 경고를 보내는 제품이 없다는 아이디어였다.
2012년 아이브가 휴먼 인터페이스를 담당했을 때, 제일 급한 임무는 iOS의 개편이었다. 잡스는 자기 비행기 인테리어처럼 애플 데스크톱 달력에 꿰맨 가죽을 입히는 등, 아날로그 디자인의 디지털화를 좋아했었다. 아이폰을 선보일 때는 아이브도 그런 접근이 적절하다 생각했었다. “정말 긴장했었습니다. 사람들이 소리도 나는 물리적인 단추를 직접 손대 왔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안 움직이는 유리에서 조작해야 한단 말이죠.
그 점이 걱정스러웠어요. 다만 결정 내린 사항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정말 중요한 일이죠.” (보다 쉬운 사용을 바랬지만 타이밍이 다했던 둥그스런 디자인의 아이맥은 3년 반만에 교체됐다.) 또한 아이브는 아이폰 앱 아이콘의 모서리를 동그랗게 만들고 싶었다. “미칠 지경이었죠. 해결하지 못한 채 날카로운 모서리만 보일 정도였습니다.”
혹시 이전에도 개입하기를 그가 직접 요청했을까? “사전 단계라고 말할 수 있을 과정이 있었습니다. 이게 올바르지 않다고 보지만, 지금 내 할 일로 바쁘다였죠. 물론 잡스와 대화했고, 그도 제 의견을 분명히 알고 있었어요. 그가 건강이 계속 괜찮았다면 어떻게 했을지 추측하진 않겠습니다.”
그래서 쿡에게, 혹시 CEO가 된 이후 아이브가 소프트웨어도 맡겠노라 강하게 요청했는지 물었다. 쿡은 그 사항을 분명 많은 시간을 들여서 대화했다고 한다. “그가 많은 일을 추가할 수 있음이 확실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브의 커리어를 보면, 마치 왕좌를 뒤에 둔 채 깊고 공손한 대화 속에 빠져든 사내의 움직임을 보는 듯하다.
앨런 다이
iOS 7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있었던 쿡과 아이브의 대화는 애플의 홍보 관리자인 앨런 다이(Alan Dye)가 봐도 당연히 할 법한 대화였다. 애플의 산업 디자이너들이 제품에 대한 통제권을 좀 잃을 위기라는 의미이며, 다이의 표현에 따르면 아이패드는 점차 “유리 조각”이 되어가고 있었다.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만큼, 아니 하드웨어보다 더 중요해지기 때문이었다.
애플워치는 새로운 압축 방식으로 금을 연마하고 40개의 자석으로 버클을 채우는 등, 대담한 산업 디자인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그런 기회를 보여 줄 애플 제품은 점차 드물어졌다.
뉴욕에 있는 Kate Spade에서 일한 후, 애플의 홍보 마케팅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그래픽 디자이너인 다이는 너무나 커지기 전, 새로 생긴 휴먼 인터페이스 팀장을 맡아 디자인실로 들어갔다. 사실 애플에는 휴먼 인터페이스 팀이 이전에도 있었으며 회사 반대편에 위치해 있었고, 아이브와 페르베이가 들어갈 수 없었다.
잡스 사망 이후 애플에서 일어난 일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을 텐데, 원래의 팀과 새로운 팀 간에는 갈등이 있었고 결국 아이브 휘하에서 팀이 합쳐졌다.
Infinite Loop 잔디밭 탁자에서 다이와 대화를 나눴다. 그는 스케치북을 가져와 배드민턴 공과 전구, 번개, 나무의 단순한 외곽선을 그린 페이지를 펼쳤다. 애플워치에서 전송할 메시지 요소를 상상하며 그렸던 그림들이었다. 미래 언어의 씨를 뿌리는 작업이라면서 다이는 “웃기는 그림이죠.”이라 얘기했다.
지난 봄, Beats의 CEO인 지미 아이오빈은 로버트 브러너를 만나고 싶다 했었다.브러너의 기억에 따르면, 아이오빈은 “들어와서는 회사 팔았어요라 말하더군요.”라 말했으며, 당시 아이오빈은 매입한 회사가 어디인지 말을 안 했었다. 그래서 브러너는 삼성이 인수했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그 회사가 애플이었고, 애플이 30억 달러 이상을 지불했다는 소식을 알자, 브러너는 아이브에게 저녁 좀 먹자고 메일을 보냈다. 아이브는 타이밍이 묘하다고 브러너에게 답메일을 보냈다.
로버트 브러너
쿡에게 얘기했을 때, 쿡은 Beats의 스트리밍 서비스와 직원들을 먼저 칭찬하고 그다음에 하드웨어를 칭찬했다. “조니라면 그런 제품을 디자인했을까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분명 아니죠. 하지만 제품이 무엇인지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아시기 때문에 사는 겁니다.” 브러너는 Beats 브랜드를 자랑스러워했지만 Beats 디자인 리듬의 적응에는 운동화처럼 시간이 좀 걸렸다고 한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원래는 싫어했죠. ‘L.A.Lakers 색으로 하자! 좋아, 보라색과 노란색. 환상적이야!’ 하는 식이잖아요.” 쿡에게 그런 참신함을 원했냐고 묻자 쿡도 웃으며 답했다. “Beats가 진정한 자신이기를 바랍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제는 애플에 속한다면서 마술봉을 휘두르고 싶지는 않군요. 앞으로 어떨지 두고 봅시다.”
애플의 9월 발표가 있기 며칠 전, 브러너와 아이브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저녁을 같이 했는데 Beats 인수는 거의 얘기를 하지 않았다. 브러너는 당시 아내에게 10시까지는 집에 가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마시다 보니 12시 반이 지난 겁니다. 스트레스를 푸는 듯했어요.” (스티븐 프라이는 아이브가 훌륭한 호텔과 훌륭한 포도주를 사랑한다 말했었다.)
아이브는 매우 지쳤고 9월 발표로 분주했었다. 브러너에 따르면 “스티브 없이 이런 일을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디자이너들에 대한 가십도 좀 나눴다. 아이브가 Pacific Heights의 미래 화장실에 들어갈 “완벽한 반경의 대리석 모퉁이”그림을 보여주자,브러너는 과거의 이 직원이 얼마나 꼼꼼한지 되새겼다고 한다.
애플 이벤트는 쿡과 보노의 시답잖은 무대 농담으로 이상하게 끝났다.
그들은 애플과 U2간 무료 음악을 포함하여 불투명한 거래를 부끄러운 듯 말했었다. 그날 애플워치의 페이스로 나왔던 마키마우스처럼, U2는 아마 엔터테인먼트의 원천이라기보다는 상징에 더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난 아이브가 죄다 자기가 해야 하냐며 투덜대는 장면을 상상했다.
사람들이 떠나려 하자, 하퍼 앨릭젠더는 아이브에게 애플워치를 건네줬다. 두 가지 크기 중 더 큰 로즈골드였으며, 하얀색 고무 플라스틱 시계줄이 달려 있었다. 아이브는 이 애플워치를 자기 손목에 느슨히 찼으며, 애플워치가 썩 아이브에게 어울렸다. 몇 분 후, 임시 쇼룸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하얀색 창고로 들어갔다. 마치 책임감을 무언극으로 보여주듯, 그의 걸음걸이에는 과장된 무거움이 엿보였다.
아이브는 애플워치 제조에 3년이 걸렸다고 얘기했다. “긴 시간이었습니다. 정말 힘들었고요.” 그러나 열렬한 박수가 힘이 됐다. 방은 기자는 물론 패션계 인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개중 골드 Rolex Oyster를 차고 있던 모델, 릴리 콜(Lily Cole)의 사진을 그녀의 친구인 올리비에 잠(Olivier Zahm)이 세심하지만 분별없이 인스타그램에 올렸었다. (이 사진에는 “Sorry, Apple”이라는 코멘트가 달렸다.) 올리비에 잠은 Purple 매거진의 편집자이다.
잡지 표지 인물은 릴리 콜, 오른쪽은 올리비에 잠
쇼룸에서 차본 애플워치에는 스테인리스 스틸 체인 브레이슬릿이 달려 있었는데 자석 덕분에 시계줄이 동전 쌓기처럼 착 소리와 함께 맞물렸다. 앞서 나왔던 10분짜리 영상 앞에 나온 영화 예고편 길이의 “reveal” 영상에서 보면 음악을 제외할 때 나온 소리가 이 소리와 한두 가지의 깔끔한 커플링 소리뿐이었다. 애플워치가 실제로 시장에 나오려면 아직 좀 기다려야 한다(4월에 나올 예정이다). 애플워치 화면에는 그저 전시용 텍스트와 이미지만이 반복 재생됐었다.
같이 다닌 일행은 리처드 호워스와 줄리안 호닉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오랜 기간 만들었던 물건을 다른 사람들이 다루는 광경을 보며 약간 황홀해하는 듯 보였다. 시연자가 내게 설명을 하려 하자, 그들이 끼어들어서 디자인 얘기로 그를 방해했다. 호워스는 “이 물건 재료가 거의 미친 재료입니다. 사람들이 애플워치 표면을 사파이어 글래스로 만들었다고 말하느데, 유리가 아니에요.
사파이어 크리스탈입니다. 완벽하게 구조가 다르죠. 게다가 스테인리스 스틸도 초-강화돼 있고요. 뒷면의 지르코늄(Zirconia) 세라믹도 사파이어가 다듬어냈습니다. 롤렉스나 무슨 다른 회사가 만들기라도 했다면 엄청난 비용이 들었겠죠. 십만 달러 정도 했을 겁니다.” 호닉이 농담으로 그를 거들었다.
“우리는 단 돈 5만만 받습니다.”
줄리안 호닉
다음 날 디자인실로 아이브를 보러 갔었다. 평평한 천으로 덮여 있던 탁자가 열려 있었는데, 이 탁자는 사실 유리로 만든 애플워치 전시 서랍이었고, 화물기 뒤편에서 나오는 경사로처럼 자동으로 움직이는 덮개가 밑에서 내려와서 직원이 관리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아이브는 소매부 수석 부사장을 맡은 아렌츠와 함께 애플스토어의 새로운 디자인 작업을 하기 시작했으며(아직 발표 안 됐다), 새로운 애플스토어는 금으로 채워진 진열대에 더 어울리게 될 전망이다. (아마 적어도 특정 구역은 여행자나 무단 침입자를 덜 환영하는 곳이 될지 모르겠다.)
물론 애플이 하룻밤 사이에 엘리트 지향의 기업이 되진 않았으며, 애플은 2014년 첫 분기만 해도 7,500만 대의 아이폰을 판매했었다(다수는 중국에서 팔았다). 그렇지만 VIP 구역 디자인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순수한 목적에 맞는지 궁금해졌다. 아이브도 “카페트 안 깔아주면 시계 안 살 거야”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고 한다.
앤젤라 아렌츠
그날 오후, 아이브는 연어회를 먹으며 계절 알레르기를 불평했다. “주말에 상태가 나빠져서 월요일은 쉬어야 할 겁니다.” 아이브는 전날이 “중대한” 날이었다고 묘사했었다. 그의 아이폰 6는 거의 1-2분 간격으로 부드럽게 문자 알림을 울려댔다. 아이브 세대에게 있어서 새로운 휴대폰은 크고 잘 미끄러져 떨어지기에 작고 둔탁한 10년 전 휴대폰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을 것이다.
난 아이브에게 약간 튀어 나온 아이폰 6 렌즈에 대해 물었다. 튀어나왔기 때문에 아이폰 6는 바닥에 평평하게 놓을 수 없다. 아이브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두께가 약간 더 커진다고 설명했다. “정말 상당히 실용적인 최적화입니다.” 그 말의 뒤에 숨어 있는 드라마는 추측만 해야 할까? “뭐, 그렇죠…”
이야기를 나누면서 난 애플워치 줄을 풀고 다시 찼다. 애플워치가 주의를 흩뜨릴 가능성도 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브도 알고 있다고 답했다. 아이폰처럼 애플워치는 (아이브의 영상에 따르면) “단순하고 순수”할 뿐이며, 당연히 수면(睡眠)과 고독(孤獨), 혹은 영화 감상에 있어서 위협과 방해가 될 수 있다. 아들이 만들었던 햄스터 장애물 코스를 기억하는 아버지, 마이클 아이브는 요새 젊은이들이 “과도하게 화면만 바라본다”고 걱정했다. 디자인실 바깥의 인도를 걸으며, 한 직원이 팔뚝의 아이폰 6는 물론 애플워치도 쳐다보고 있는 광경을 봤다.
애플워치는 팔을 들지 않으면 꺼진 상태가 되는 디자인이다. 2014년 말 본사 캠퍼스에서 본 프로토타입을 보면, 이 기능은 아직 불완전했다. 가령 마크 뉴슨도 자연주의에서 멜로드라마를 연기하듯 과도하게 팔을 들거나 하여 세 번만에 성공시켰었다. 보통의 경우 화면은 9개의 페이스 중 하나를 비쳐주는데 모두 사용자가 변경 가능하다. 하나는 밝은 꽃, 나비, 해파리 사진과 함께 시간을 보여주며, 검은 배경 안에서 움직인다. 모두 애플워치를 발표할 때 나왔던 이미지이고, 아이브는 이 이미지가 얼마나 좋은지 설명까지 해줬다.
자기 아이폰 6를 들고 홈 버튼을 누르면서 아이브는 “전체 화면이 나타나죠. 제가 볼 때는 너무 오래된 느낌입니다.”라 말했다. (아이폰 6가 출시되기 2주 전이었다.) 그는 애플워치가 아이폰의 LED 디스플레이에 비해 더 어두운 검정색을 가진 새로운 디스플레이 기술을 채용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유리 바로 밑에서 프레임과 유리의 접점을 가리기 더 쉬워진다. 애플워치의 해파리는 깊은 우주에서 유영하며, 아이브에 따르면 이미지 자체로 애플워치가 어떤지 보여준다고 한다. 현재의 아이폰 화면에서 해파리는 검정 테두리 안의 어두운 회색에 박혀 있을 뿐이며, 아이브는 “전혀 마술이라 할 수 없을 것”이라 말했다.
앨런 다이는 자기와 아이브가 “최대한 화면 경계를 피하자”는 결정을 내렸을 때가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설명했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간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대단히 중요한 야심이라 할 수 있을 텐데 다이의 말에 따르면 우연이 아니었다. 애플워치의 변경 가능한 페이스의 형태인 “둥그런 사각형”은 애플워치 몸체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단 디자인실이 화면 모서리를 완전히 없애지는 않았다. 다이가 웃으며 말했다.
“애플워치에서 사진 보기 좋다는 점을 알았을 때 사진 가장자리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해는 마시죠, 우리도 다 해 봤다고요! 끔찍한 아이디어가 뭐였는지 알려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가장자리를 흐리게 하고, 사진을 원형으로 만들기도 했었다. “사진 구석을 너무 어둡게 하는 바람에, 우리를 먼저 생각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습니다.”
떠나는 날, 아이브는 나를 애플워치 축하 저녁 부페로 데려갔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와인바였다. 그날 저녁은 분위기가 매우 조용하고 생각에 잠긴 듯했는데, 아이브는 모두들 지쳐서였으리라 언급했다. 애플워치 소프트웨어는 운동 목표를 달성했을 때, 양각으로 새기고 도료로 칠한 가상의 메달을 보여준다. 아이브는 이 가상의 메달 모양이 50년대 올림픽을 방불케 하는, 그러니까 “좀 향수 어린” 모양이라 설명해줬다. “무엇이 문자 그대로 일지 신중하게 택한다면 큰 힘을 낼 수 있습니다.” 그날 파티에서도 문자 그대로, 모든 손님들에게 가상의 메달을 실제 그대로 만든 메달을 수여했다. 검정색 천 파우치에 담아서 말이다.
샌프란시스코의 아이브 집, L-모양의 거실에는 커다란 난로가 짙은 나무에 둘러싸여 있었다. 헤더 아이브는 야경을 더 잘 보기 위해 조명을 좀 껐다. “여기서 Alcatraz 등대 빛을 보실 수 있어요.”라 헤더가 말하자 아이브도 덧붙였다. “새로운 집이 바로 저기에 있는데요. 거의 수면 위에 계시는 겁니다.” 40 피트 깊이로 지하를 파는 Pacific Heights 리노베이션 작업 일정은 올해 끝난다.
노먼 포스터
그가 고용한 건축가는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가 이르는 Foster + Partners이다. 2009년 이래 이 회사(아이브는 가끔 “노먼 애들”이라 부른다)는 애플의 새 캠퍼스 작업도 하는 중이다. 예상하시겠지만 아이브는 자기 집의 공동 디자이너이기도 하는데, 쿡에 따르면 아이브는 애플의 새 캠퍼스에서도 공동 디자이너를 맡고 있다고 한다. 쿡은 애플이 자신의 건축가들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다만 두뇌까지 외주 맡길 수는 없겠죠. 새 빌딩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표현해야 합니다.”
하루 전에 극심한 연안 폭풍이 있어서 새들마저 실리콘밸리를 넘어가게 만들었던 12월의 어느날, 현재 애플 본사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새 캠퍼스 부지에서 아이브를 만났다. 아직 비가 내리고 있었으며, Santa Cruz 산맥도 안 보였고 종종 시끄럽게 떠 있는 드론(온라인에서 다들 보는 영상을 촬영한다)도 없었다. 이 부지는 기존 사무용 빌딩 하나 빼고는 모두 치워져 있으며, 여기서 바로 Foster의 건축가 30명이 일하고 있다.
런던에 있는 팀도 종종 여기에 들어가고, 아이브 팀도 여기에 합류한다. 로비에는 벽 크기의 거대한 새 캠퍼스 렌더링이 있었고, 렌더링 속 새 캠퍼스의 원형 중심부에는 원형 극장과 분수, 살구 나무 등이 있었다. 새 건물에서 디자인실은 3만 평방미터 넓이의 최상층 공간을 차지할 것이다(산업디자인과 휴먼 인터페이스가 같이 들어간다). 디자인실에서는 본사와 운동실 사이의 “사바나”라 부르는 전경도 볼 수 있다. 아이브의 말이다.
“노먼이 이 프로젝트를 맡기 정말 바랬습니다.” 우리는 프로토타입과 렌더링으로 가득 찬 방을 걸어 다녔다. 아이브는 건축 프로젝트에 대한 자신의 기여에 의심이 없었다. 그는 디자인 원칙으로 볼 때 “물리적인 규모에 따라 구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궁금하더군요.”라 말했다. (나중에 그는 Foster의 건축가들에게 모서리의 기하학에 대해 강의했다고 한다. 캠퍼스가 원형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벽과의 접점에서 약간 바닥을 들어 올리는 식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우리는 축적모형 앞에 섰다. 아이브는 캠퍼스가 처음에는 원형 3개가 모여있는 “트라이로발(trilobal)” 형태였다고 한다. 꽃잎 3개가 붙은 꽃, 혹은 방사능 상징이 생각났다. 단일한 원형은 최고의 세심함이라는 디자인실 최고의 모토를 반영하는 듯 보였다.
쿡의 휘하에서 애플은 보다 부드럽고 덜 예민하면서 뭣보다도 제조를 해외에 맡긴 고용주로서 실적을 개선시키려는 체제를 실험해왔다. 애플은 자신을 증명하기로 결심했으며, 쿡의 말마따나 애플의 리더들은 “더 많은 돈을 바라는 탐욕스러운 악당”으로 여겨져선 안 될 일이었다. 50억 달러의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되는 폐쇄형 정원과 같은 애플의 새 사옥은 이 분위기를 반영하지 못한 듯하다.
하키퍽 마우스
그후 난 아이브에게 새 캠퍼스의 단순함을 공유하는 애플 디자인에 대해 물었다. 사실 최초의 아이맥에는 원형의 “하키퍽”마우스가 포함돼 있었는데, 이 마우스는 다루기 힘들다는 평이 많아서 실패한 디자인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다.
아이브는 그런 이미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팔과 손목, 그리고 마우스에 대해 여러 다른 의견이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만드는 모든 것에 일부 오류는 있을 수 있습니다. 완벽하지 않으니까요.” 그는 뭘 내놓든 언제나 대중의 불만이 있다고도 말했다. “그래서 다시 하는 것이죠. 스티브와 제가 늘 얘기하던 겁니다. ‘환상적이지 않아? 우리가 만족스럽지 않은 모든 걸 고치고 다시 시도해볼 수 있으니까.'”
아이브도 웃으며 인정했는데, 새 건물의 원형 형태는 고칠 수 없었다. 다만 아이브는 새 사옥을 최대한 산업디자인 제품화시키려 노력했다. 그의 원칙에 따르면 사무용 건축물은 생산에 들어가지 못한 수제(手製) 프로토타입이었다. 그리고 아이브는 손으로 만드는 프로토타입에는 본질적인 가치가 없다고 본다. “무관심하고 자격 미달 장인이 있을 수 있잖아요.”
따라서 만약 거대한 원형 형태가 잡스의 고집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이를 대량생산을 위한 기회로 보면 그만이었다. 바로 이런 논리에 따라 새 사옥에서 아이브가 열광하는 부분이 따로 있다. “여러 요소를 모은 키트가 있습니다. 그걸 정말 많이 만들면 되죠.” 빌딩의 중공슬래브(void slab)의 디자인을 거의 아이브의 디자인실이 했었다.
중공슬래브는 한 면에는 바닥이 있고 다른 면에는 천장이 있으며, 그 사이에 냉방 시스템을 갖춘 4,400개의 콘크리트 블럭이며, 캘리포니아 Woodland에 소재한 애플이 만든 공장에서 이 중공슬래브를 만들고 있다. 아이브는 중공슬래브가 건축보다는 조립이라 설명했다.
아이브는 그제서야 원형 사옥이 “맞는 그룹들 간을 이어 줄 대단히 실용적인 방식”이라 말했다. “높은 빌딩은 그런 연결을 더 복잡하게 할 뿐입니다. 하지만 반박 논리도 꽤 강력하다. 두 개의 둘레를 도는 복도의 길이가 각각 거의 1 마일이기 때문이다.
애플의 신사옥 조감도
외부로 나가기 전에 아이브는 계단 작업과 함께, 직원 보안카드 리더기의 신호체계도 보여줬다. 빌딩 지하 어디에 주차를 할지 도와주는 밝은 색상의 폴리카보네이트 패널이었다. 벽에는 본사와 분리돼 있는 방문객 리셉션 센터의 두 가지 버전이 붙어 있었고 위에서 보면 모두 변형된 사각형이었다. 하나는 “Pill”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한쪽 면이 반원 형태였고, 다른 하나는 보다 애플스럽게 생겼으며 이름이 “아이폰”이었다.
아이브의 말이다. “마무리를 지어야 할 텐데요. 계속 반복해서 작업 중입니다.” 그는 최근 “아이폰”을 소개했었다. 방문객이 Pill을 방문했을 때 반원 형태의 면을 보고는 메인 빌딩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Mitsubishi 엘리베이터 조종 패널도 단순화시켜야 한다고 “큰 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우리는 비가 오는 와중에 Jeep 차를 타고 부지를 돌았다. 아이브는 비가 정말 많이 온다 말했다. 새 빌딩의 원형 부분은 콘크리트로 선을 그려내고 지하 2층 깊이의 주차장을 만들 만큼 깊게 파낸 참호였다. 밖으로 나갈 때 아이브는 제공된 안전모 착용을 거절했다. 우리는 진흙 속을 걸어가 끝을 살펴봤다. 감탄사가 들려왔는데, 거의 후회하는 소리로 들렸다.
그는 3주일 휴가를 막 앞두고 있었다(회사 다닌 이래 제일 긴 휴가다). 애플에 들어온 이래 지난해가 “제일 어려웠다”면서, 아이브는 나도 종종 목격했던 그런 종류의 피곤함이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우리의 이전 만남 이래 그는 폐렴에 걸린 것 같았다. “저 스스로를 태워서 건강이 안 좋아진 셈입니다.” 뉴슨을 영입했으니 결국 자기가 떠나리라는 관측을 그는 부정했다.
사실 파월 잡스에게 이 문제를 말했을 때, 그녀는 “좀 더 지속 가능하고 그럴 수 있는, 좀 다른 구조를 만들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라 말했었다. 그녀는 남편과 아이브의 커리어를 비교하면서, “그런 일을 해내는 사람은 정말 드뭅니다만, 희생이 있으리라고 봅니다”라 말했었다.
우리는 새 빌딩의 외곽을 돌았다. “스티브가 정말 열성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던 곳이 여기에요. 달콤 씁쓸함이 있습니다. 바로 여기가 미래였으니까요. 그렇지만 여기 올 때마다 과거도 생각납니다. 그냥, 슬퍼요. 그가 봤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는 뉴슨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다. 미래의 본사 구내식당을 위해 실험용으로 만든 2만 제곱피트 넓이의 미니어처 구내식당이었다.
원문 : Ian Parker contributed his first piece to The New Yorker in 1994 and became a staff writer in 2000.
http://m.kmug.co.kr/board/zboard.php?id=column&no=2938
번역 : 위민복
구성 : 케이머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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