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꺼내놓는 법

내 안의 작은 상자들을 열자

하노이에서도 케이블 방송을 달면 한국 TV를 볼 수 있다. 물론 실시간으로 하는 TV도 볼 수 있다. 한국과 하노이는 2시간의 시차가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11시에 하는 프로그램을 하노이에서 9시에 볼 수 있다. TV를 즐겨 보는 편은 아니지만 주말이면 아이들 재우고 남편과 함께 실시간으로 방영되는 프로그램이나 그전에 못 보았던 프로그램들을 챙겨본다. 우리 부부는 한국에 대한 그림움을 이렇게 달래고 있다.


어느 날 <전지적 참견 시점>에 ‘스테파니 리’라는 배우 겸 모델이 나왔다. 처음 보는 배우지만 다양한 CF나 드라마, 영화에 출연했다고 한다. 이날 방송에서는 그녀가 CF 찍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감독의 ‘Ready Action’ 사인이 떨어지면 그녀는 모델답게 프로로 돌변했다. 멋진 정장을 입을 때나 블링블링한 원피스를 입을 때나 차도녀(차가운 도시 여자)처럼 세련되고 지적인 이미지를 풍겼다. 그녀에게 말이라도 걸면 쌀쌀맞은 대답을 들을 것만 같았지만 멋져 보였다.


하지만 카메라가 꺼지는 순간 그녀는 180도 돌변했다. CF 찍을 때 보여주었던 도시적인 여성은 온데 간데없고 옆집 언니가 와있었다. 실실 웃기도 하고 스태프들이랑 농담도 하고 연신 '배고파'라는 말을 했다. 그녀의 최애 음식은 바로 개불이었다. 여배우와 개불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조합 아니던가. 개불을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 평소 개불을 먹지 않는 나도 ‘한 번 먹어보고 싶다’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또한 붕어빵을 사달라고 조르는 스테파니 리와 체중관리 때문에 안 된다는 매니저의 모습은 마치 맛있는 거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와 말리는 엄마의 모습이 연상돼 귀여웠다. 드라마에서나 CF에서만 스테파니 리를 봤다면 나는 그녀를 차갑고 세련된 이미지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그녀의 실제 모습을 보니 그녀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학창 시절이었던 1990년대 후반에는 아이돌이라면 ‘청소년들의 우상’으로 여겨졌다. '우상'은 그야말로 나와는 거리감이 있는 맨 꼭대기에 위치해 고개를 한껏 들고 우러러봐야 볼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들은 항상 멋지고 잘 해내는 모습을 보여줘야 인정받았다. 내가 고등학생 때 ‘SES’라는 그룹이 데뷔를 해서 굉장한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그중 한 멤버가 ‘올리비아 핫세’를 닮은 예쁜 외모로 주목을 받았는데 그녀는 현재 ‘펜트하우스’라는 드라마에 출연 중인 ‘유진’이다. 그녀는 아이돌로 음악 방송 무대를 대기할 때 신비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화장실조차 가지 못하고 차 안에서 대기했다고 한다. 이때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게 진정한 스타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친근함’과 ‘솔직함’이 팬을 끌어당기는 무기가 되고 있다. 요즘 유튜브에는 TV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실험적인 콘텐츠를 볼 수 있는데 특히 해외 팬을 몰고 다니는 K-POP 스타들이 나오는 콘텐츠는 인기가 많다. 나는 가끔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자체 제작 콘텐츠나 잡지 인터뷰, V앱, VLOG 등 일상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영상을 즐겨본다. 그 속에서 아이돌은 게임을 하고, 요리, 여행, ASMR, 콩트 등을 통해 무대 위에서 보여주지 않는 친근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의 실제 모습은 누구의 ‘우상’이 아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청년들이다. 평소에는 차갑게 보이는 이미지인데 실제로는 따뜻한 인간미가 있는 모습, 연약해 보이는 이미지인데 실제로는 강하고 뚝심 있는 모습 등의 반전 매력은 특히 나를 끌어당긴다. 아이돌이 무대를 멋지게 잘하면 눈길 한 번 가고 관심이 생긴다. 하지만 요즘 10~20대들의 입덕(어떤 분야에 마니아가 되는 것) 포인트는 평소 스타의 성격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멤버들 간의 케미가 얼마나 좋은지 등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솔직하고 친근한 모습이 사람들을 무장 해제시키는 열쇠가 되고 있는 것이다.


TV 속 세상뿐 아니라 평소 인간관계에서도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 나에게는 인상이 세 보이지만 알고 보니 마음은 누구보다 여린 사람이 그랬고, 자신의 치부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이 그랬고, 알량한 자존심을 세우지 않은 사람이 그랬고, 자신이 있는 것을 뽐내지 않는 사람이 그랬다.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나도 같이 애써 포장했던 갑옷을 벗어버리고 여린 모습을 보였고, 솔직해지고, 자존심을 세우지 않는다. 또한 겸손해진다. 솔직함과 진솔함은 상대방도 충분히 매력적이게 만든다.


문득 나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모습 속에 감춰진 진짜 나의 모습을 얼마나 드러내고 사는가? 솔직히 나는 나 자신을 내놓는 법에 서툴다. 특히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 썼던 10-30대에는 더 그랬다. 내게 자신 없어하는 부분은 다른 사람이 흉볼 것 같아 더욱 보여주기 싫었다. 나는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피부가 좋지 않았다. 항상 피부에는 여드름이 났고 여드름 자국으로 얼룩덜룩한 내 피부를 화장으로 커버하기 바빴다. 심지어 친구 집에서 밤새 노는 날에도 화장을 지우지 않고 더 꽁꽁 감췄다. 누군가를 좋아해도 좋다는 표현을 제대로 못하고 오히려 관심 없는 척했다. 힘든 일이 있어도 힘들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점점 나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게 어색하기 시작했다.


40대가 되어서야 나를 꺼내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바로 매일 아침 글쓰기를 하면서부터다. 글을 쓰면 40년 동안 내 마음속에 잠가 두었던 비밀의 상자를 하나씩 여는 기분이 든다. 그 문을 열 때마다 보물 상자를 발견한 것처럼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물론 마음속 비밀의 문을 여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양할 수 있다. 친구와 마음껏 수다를 통해 열 수 있고 운동을 하면서 내 안의 스트레스를 날려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글쓰기는 단순히 내 속의 것을 꺼내놓는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를 돌아보게 하고 이를 통해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하며 미래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또한 몇 개월, 몇 년이 지난 후에도 내가 쓴 글을 읽어보며 그때 느꼈던 생각과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다. 이제부터 글쓰기를 통해 상자를 열고 내 안의 솔직한 모습을 꺼내 보려 한다.


신은영 작가가 쓴 <이젠 블로그로 책 쓰기다> 란 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글쓰기는 내 안에 있는 견고한 벽을 허무는 일이다.

그 시도들이 나를 부수는 대신

나를 더욱 견고히 한다.

...

가장 훌륭한 작가는 모든 것을 내주는 작가다.

작가는 어떤 형태로든 자신을 노출하는데

그 위험을 감당해야만 한다.

<이젠 블로그로 책 쓰기다> BY 신은영


이제 나에게 ‘나를 꺼내는 일’은 더 이상 손가락질받거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나를 이해하고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내 안의 상자를 열어 나를 꺼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