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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NACKHEE Sep 11. 2018

이 말이 하고 싶었어,

- 영화 <레이디 버드(2018)>

각자의 사전을 펼쳐놓고 정해진 답이 없는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만큼 비생산적인 일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종종 이 작업을 즐긴다. 상대의 사전을 더 잘 알고 싶기 때문이다. 가장 자주 도마 위에 오르는 단어는 ‘좋아하다’와 ‘사랑하다’. 영화 <레이디 버드>를 보고 난 뒤 집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며 ‘좋아하다’와 ‘사랑하다’를 번갈아 생각하다 두 단어 사이에 있는 균열을 발견했다. 좋아‘하는 것’과 좋아‘한다고 믿고 싶은 것’.


좋아하다

교복을 입는 순간 타인의 시선에 대한 감각은 배로 발달한다. 가정형편, 신발 브랜드, 경험의 범위 등 지금까지는 괜찮았던 것들이 거슬리기 시작한다. 끊임없이 외부와 자신을 비교하며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감춰야 할지 가늠해 보고 그나마 나은 무언가를 극대화해 보여줄 방법을 궁리한다. 때론 자조의 방법을 택해 쿨한 태도를 유지하기도 한다. 영화 <레이디 버드>에서 성모(聖母) 고등학교 졸업반인 ‘크리스틴’은 ‘레이디 버드’라는 닉네임을 지어 자신을 재규정한다. 잘보이고 싶은 남자애가 어디 사는지 물었을 때는 자조의 톤으로 “철로변의 구린 쪽에 살아.”라고 답한다.

크리스틴은 좋아한다. 잡지에 나오는 모델 같은 얼굴과 몸매, 잘생긴 남자애, 첫 남자친구였던 대니의 할머니 집과 같이 아름다운 저택, 예쁘고 대학생들과 어울리며 공부도 꽤 잘하는 동급생, 그리고 무엇보다 ‘뉴욕’을. 그래서 몸매에 신경 쓰고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무리의 중심에 있는 ‘제니’와 친해지려 거짓말을 하고 마음에 드는 남자애에게는 먼저 다가가고 엄마 몰래 뉴욕에 있는 대학에 원서를 넣는다. 크리스틴은 온 힘을 다해, 제가 좋아하는 것들에 가까이 가려 노력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동화의 결말처럼 행복해지지 않았다. 제니와의 관계는 지속되지 않을 듯하고 두 번의 연애는 최악을 갱신했으며 막상 입학한 대학과 뉴욕에서의 생활은 별 볼 일 없었다. 이상도 하지. 그렇게 좋아했는데.


믿다, 좋아한다고

크리스틴은 학교 연극반의 가을 뮤지컬 오디션에서 교복 대신 드레스를 입고, 오디션에 응시한 모두가 뮤지컬에 참여할 수 있게 가상의 인물을 추가하자 연습에 나가지 않는다. 크리스틴의 절친인 줄리의 말을 빌리면, 그는 “주인공이 아니면 아무것도 못하는 관심종자”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틴이 제니와 자신들의 고향인 ‘새크라멘토’를 두고 “여기선 숨이 막혀”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던 건, 새크라멘토라는 소박하고 정겨운 도시는 매력적인 이야기 속 주인공을 뒷받침할 배경으로 적절하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새크라멘토와 동일시되는, 가족을 비롯해 자신을 둘러싼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 모든 것이 부적격. 그래서 크리스틴은 열심히 반짝이는 미지의 것들을 향해 다가가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거다. 열심히 제가 그것들을 ‘좋아한다고 믿으’면서. 주인공에겐 응당 그런 것들이 있어야 하니까.

대학 지원서 상담 시간에서야 크리스틴은 제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그건 뜻밖에도, 새크라멘토. “넌 분명 새크라멘토를 사랑해.”라고 단언하는 교사의 말에 크리스틴은 “제가요?”하고 반문한다. 믿기지도, 믿고 싶지도 않아서. 그저 있는 그대로 썼다는 크리스틴의 말에 교사는 그 글 속에서 새크라멘토에 대한 사랑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제야 크리스틴은 “네, 뭐, 관심은 갖고 있죠.” 하고 답하는데 교사는 “그 둘이 같은 거 아닐까? 사랑과 관심.”이라며 크리스틴의 세계에 작은 파동을 일으킨다.

좋아하는 것과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좋아한다고 믿고 싶은 것의 간극. 이는 노력하지 않아도 관심을 두게 되는 전자를 다양한 방법으로 부정하며 ‘애증’의 감정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미 좋아한다고 믿고 싶은 것에 모든 ‘애(愛)’를 쏟아버려 진짜 좋아하는 것에는 ‘증(憎)’만 남기며 자신을 속이게 된다.


사랑한다

졸업 파티를 앞둔 크리스틴은 의류 판매장에서 엄마와 드레스 몇 벌을 입어본다. 첫 번째의 푸른색 드레스는 너무 짧고 타이트했다. 두 번째로 입어본 핑크색 드레스는 사이즈도 알맞고 크리스틴의 붉은 머리색과도 잘 어울렸다. 거울 앞에 선 크리스틴은 제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는데 엄마는 ‘너무 핑크’이지 않냐고 한다. 그러고 나서 피팅룸 문을 사이에 두고 오가는 대화. “그냥 예쁘다고 해주면 안돼?” “내 말에 신경도 안 쓰잖아.” “예쁘게 봐주면 좋잖아.” “미안해. 사실대로 말한 건데. 거짓말할 걸 그랬나?” “아니, 난 그냥 엄마가 날 좋아해 주면 좋겠어.” “널 사랑하는 거 알잖아.” “근데 좋아하냐고.” 크리스틴은 엄마가 자신을 좋아해 주길 바랐고 엄마는 크리스틴을 사랑했다.

엄마의 반대에도 뉴욕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크리스틴은 환영 파티에서 만난 동기에게 기어이 자신의 고향이 ‘샌프란시스코’라고 말한다. 밤새 술을 진탕 마신 크리스틴은 응급실 침대에서 눈을 뜨고, 행인을 붙잡아 일요일임을 확인한 후엔 예배 중인 근처 성당에 들어간다. 이 장면에는 어떤 대사도, 내레이션도 없다. 성가대의 찬양과 이를 응시하는 크리스틴의 얼굴만 비춰줄 뿐이다. 한참을 낯선 도시에서 익숙한 것 속에 있다가 성당 밖으로 나온 크리스틴은 집에 전화를 건다. 핸드폰 너머로 부재중임을 알리는 아빠의 녹음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길 위에 서서, 크리스틴은 음성 메시지를 남긴다. 크리스틴이 남기는 음성 메시지를 따라 배경은 그가 서 있는 뉴욕의 거리에서 새크라멘토의 거리로 이동한다.

“안녕, 엄마, 아빠. 나예요, 크리스틴. 두 분이 참 좋은 이름을 지어준 것 같아요. 아빠, 엄마한테 얘기 좀 할게요. 안녕, 엄마. 엄마도 새크라멘토 거리를 처음 운전할 때 감상에 젖었었어? 난 그랬어. 그 얘길 하고 싶었는데 그땐 우리 사이가 안 좋았지. 평생 지나다니던 그 길들. 쿠키의 옛날 버거. 가게랑 건물들이 너무 정겨웠어. 엄마한테 이 말을 하고 싶었어. 사랑해. 고마워요.”

뉴욕에 온 크리스틴은 떠올렸다. 새크라멘토와 가족, 철로변 구린 지역에 있는 집과 등 떠밀려 간 성모 고등학교, 그리고 베스트프렌드 줄리를. 그렇게 가까이 가고 싶었던 큰 집과 잘 나가는 친구와 잘생긴 남자친구, 뉴욕에서의 새로운 생활이 아니라. 그들을 떠올리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관심이 먼저 닿아 있었다. 그러고는 집에 전화를 걸어 엄마에게 고백했다. 사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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