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감생심(焉敢生心)
불꽃이 성경책을 집어삼키던 그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궁이 앞에 선 어머니의 등은 말이 없었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처음 그 마음이 생긴 건 고등학교 1학년 봄이었다.
친구를 따라 별 생각 없이 들어선 성당 안은 조용했다. 제단 앞에 선 신부님은 말 한마디, 손짓 하나가 조심스러울 만큼 근엄했다. 그 모습이 내 가슴 어딘가를 건드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그 잔상이 떠나지 않았다. 나는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나는 밥상 앞에서 부모님께 그 마음을 털어놓았다.
아버지는 숟가락을 내려놓으셨다. 어머니는 나를 한참 바라보셨다.
"언감생심, 어찌 그런 마음을 품느냐."
놀람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였다. 아버지는 곧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건 네 길이 아니다." 그리고 덧붙이셨다. "너는 장남이다. 결혼해서 예쁜 자식 낳고 대를 이어야 한다."
그 말이 귀에는 들어왔지만, 가슴에는 닿지 않았다.
절에 다니시는 부모님과 조용한 갈등을 안은 채, 나는 계속 성당에 나갔다.
신부님께 꿈을 말씀드리자, 신부님은 서두르지 말고 먼저 교리를 배워보라 하셨다. 나는 성실하게 학습 과정을 밟았고, 가톨릭 합창단에도 들어가 열심히 노래했다. 성당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충만했다. 그리고 그만큼 교과서는 조용히 책상 한켠으로 밀려났다.
곤두박질을 친 성적표가 나오던 날, 아버지는 회초리를 드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방 서랍 안에 있던 성경책이 사라졌다. 어머니가 아궁이에 던진 것이었다.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막아서지도, 울지도 않았다. 그저 그 불빛을 바라봤다.
그때서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내가 꿈꾸던 세계와 내가 발 딛고 선 현실이 얼마나 먼 거리에 있었는지를.
결국 신부가 되겠다는 꿈은 그렇게 끝났다. 산산이 부서진 것도 아니고, 극적으로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불길이 잦아들듯, 그 꿈도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나는 다시 학생이라는 자리로 돌아왔다. 책상 앞에 앉아 교과서를 펼치면서도, 한동안은 그 성당의 고요함이 자꾸 떠올랐다.
모든 바람이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고, 어떤 도전은 실패라는 이름을 달고 남는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삶의 이치다.
그러나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언감생심이라는 말 앞에 처음부터 무릎을 꿇은 삶과, 한 번쯤 그 말을 무시하고 마음을 내어본 삶은 결이 다르다고. 나는 실패했지만, 성당 합창단에서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신부님 앞에서 내 꿈을 소리 내어 말했다. 그 시간들은 실패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살아 숨 쉰 증거이기도 하다.
이제 나는 언감생심이라는 말을 조금 다르게 듣는다.
그것은 영원한 금지의 선언이 아니다. 어쩌면 그 말은, 두려움을 마주하라는 준엄한 계시였는지도 모른다. 넘지 말라는 경고가 아니라, 네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라는 신호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그 말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다. 언감생심이라는 말이 마음속에 떠오르는 바로 그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 순간이야말로, 어쩌면 내가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과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자리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