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돌챙이와 돌빛나예술학교 (2019.12.05)
일요일 아침, 보통 때와는 다르게 부지런을 떨어본다. 오늘은 김녕 앞바다에 위치한 작업 현장을 찾아야 한다. 새로 짓는 집에 제주 돌을 입히는 작업을 점검하러 나서는 제주 ‘돌챙이’(‘석공’을 이르는 제주어) 조환진 선생의 걸음에 슬쩍 끼어보기로 한 것이다. 이른 아침 제주 바다를 배경으로 한 현장의 소리가 반갑게 맞이한다. 저만치 이미 현장을 한 바퀴 점검하고 돌아오는 선생의 모습이 보인다. 보통은 이렇게 현장에 나와 있는 시간이 많다. 제주의 익숙한 풍경인 주변의 밭담과 밭 한가운데에 자리한 산담(무덤 주위를 두르는 돌담)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따라 새롭게 보이는 풍경이다. 돌챙이 조환진 선생으로부터 듣게 될 제주 돌 이야기에 대한 기대가 커진다.
“사실 저는 제주 돌에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아버님이 돌챙이 일을 하셨지만 그 당시만 해도 석공일이 많지 않았지요. 보통 자신의 집 돌담이나 밭담 정도는 자신들이 다 해결했거든요. 산담 정도를 조성할 때나 돌챙이 힘을 빌리던 시절이라, 아버님도 평소엔 농사를 주로 하셨지요. 저도 아버님께 돌 다루는 일을 배울 생각이 전혀 없었고 아버님도 힘든 일이라 알려주려고 하지도 않으셨어요.” (이하 제주돌챙이 조환진 님)
그랬던 그가 어떻게 제주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미술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제주시 한경면의 ‘생각하는 정원’에 취업하며 조경 일을 처음 접하게 된다. 그곳에서 3년 동안 조경 일 외에도 돌담 쌓는 일을 보조하기도 했다. 그 후 대학 시절부터 취미로 해 오던 사진을 배우러 서귀포시 성산읍 ‘김영갑갤러리’에 찾아가게 되는데 인연이었던 걸까? 김영갑 선생은 그에게 갤러리 마당에 돌담을 쌓게 했다. 그렇게 돌과의 인연이 한 번, 두 번 이어지면서 제주 돌의 아름다움에 점점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결혼 후 2005년에는 제가 직접 설계를 해서 돌집을 짓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아버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그 당시만 해도 제주 사람들은 제주 돌에 큰 가치를 두지 않았어요. 여기저기서 밭의 돌이건 올레의 돌이건 다 가져가라고 무조건 공짜로 주었지요. 당시로서는 특이한 원형 돌집을 3년에 걸쳐 완성하고 아버님의 기술도 제대로 전수 받게 되었습니다.”
물이 흐르듯, 바람이 쉬어가듯, 자연스러우면서도 튼튼한 매력적인 이 돌집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그 덕분에 이후로도 그를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아버지라는 최고의 스승 덕에 찾는 이들의 기대에 꼭 맞는 최고의 실력도 갖추게 되었다.
제주를 흔히 돌, 여자, 바람의 삼다도라고 부른다. 특히 화산섬인 제주는 돌 문화가 섬 문화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돌이 갖는 의미가 크다. 지천으로 널린 제주 돌은 제주 사람들의 의식주 전반에 걸쳐 독특한 생활 민속 문화를 만들어내는 기반이 되었다.
제주 돌담만 해도 그 장소와 기능에 따라 집 주변의 돌담(울담)과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올렛담, 밭과 밭 사이의 경계는 물론 소나 말 등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는 밭담, 해안가 공동어장을 두른 원담, 목장에 두른 잣성과 캣담, 영혼의 집 무덤을 보호하는 산담 등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제주 사람들과 함께 해왔다. 돌담 외에도 제주 돌은 해녀들의 휴식처 불턱이 되기도 하고 옛 군사 방어용이었던 진성과 환해장성이 되기도 한다.
제주 돌담은 바람을 막아서는 ‘벽’이 아니다. 오히려 바람을 솎아주고 가는 길을 내어주는 바람의 ‘길’이다. 울퉁불퉁 구멍 숭숭한 제주 돌담은 바람에게 틈을 주어 얼핏 대충 쌓은 듯 보이지만 제주의 거친 바람에도 끄덕하지 않는 견고함과 멋이 담겨있다. 제주 돌은 그렇게 제주 사람을 품는다.
제주 밭담은 세계식량농업기구(FAO)의 세계농업유산자원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또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최근 제주 돌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제주 밭담은 전체 길이가 2만 km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특히 검은 현무암을 구불구불 쌓은 모습 때문에 ‘흑룡만리’로 불리기도 한다. 이를 활용한 제주밭담축제가 매년 9월 열린다.
노란 유채꽃과 하얀 메밀꽃은 검은 밭담에 안겨 선명한 꽃색을 자랑하고 초록 보리 새싹은 밭담을 배경으로 더욱 신선하다. 밭담에 내려앉은 하얀 눈은 또 얼마나 훌륭한 풍경을 선물하는지, 제주의 사계절이 밭담 위에서 반짝인다.
“조경 일을 하던 시절, 협재의 한 별장 공사 현장이었는데, 돌담 쌓는 업체가 와 있었어요. 배우면서 일하고 싶다고 하니까 내가 기술을 배우고 난 뒤에 따로 사업을 할 사람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거예요. 그때 내가 직접 돌담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제주 사람이라면 간단히 돌담 쌓는 방법은 알아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음이었어요.”
그 일을 계기로 2015년 제주시 한림에 돌빛나예술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있다. 학생들의 신청을 받아 돌담 쌓기 체험을 하고, 성인 대상의 양성 교육 과정을 진행하여 300여명의 동문이 탄생하기도 했다. 그렇게 돌담학교 동문들과 함께 무너진 돌담을 찾아 보수하는 봉사 활동에도 부지런하다. 특히 돌담 보수 작업은 금성리 잣담(돌담 위로 걸어서 밭으로 갈 수 있는 밭담)처럼 맹지(공로에 접한 부분이 없는 토지. 도로가 아닌 타 지번의 토지로 둘러싸인 토지)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한 제주 사람의 배려의식이 돋보이는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역할도 한다. 돌담 학교 동문들에게는 실습장이 되고 돌담은 보수되어 좋으니 일석이조가 따로 없다.
사실 이전에 보수된 것들 중 상당 부분이 제주 정통의 방식이 아니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거친 표면의 마찰력을 이용하여 돌끼리 잘 맞물리도록 쌓아 놓으면 한 줄로 쌓아올리는 ‘외담’이라도 태풍이나 강한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쓰러지지 않고 잘 견딘다. 이런 제주 돌의 특성과 역사를 알리고 보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에 이 일을 놓을 수가 없는 것. 가끔씩은 돌빛나예술학교 내의 작은 동굴 무대에서 국제관악제 행사를 치르기도 하고 미술 작품 전시회가 열리기도 한다.
“제주의 돌은 정말 보물이에요. 단순히 돌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보물로 쌓은 돌담들이 예술적인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사실 돌담과 돌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그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나 보존을 위한 단체나 협회도 하나 없는 실정이거든요. 돌챙이 분들 중 명인이나 장인으로 대접 받는 분도 없고요. 이런 부분도 많이 힘쓰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취미 생활로 해 오던 사진을 돌담 학교 동문들과 함께 하기 시작한 이유도 제주 돌담의 아름다움을 사진으로라도 많이 기록하고 알리고 싶기 때문이었다. 내년 5월에는 사진 전시 등을 곁들인 또 다른 행사를 기획 중이다. 매 주말을 이용하여 제주의 돌담과 돌집 등을 견학하는 프로그램도 꾸준히 진행하며 제주 돌 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에 부응하고 있다. 사실 대부분의 돌챙이 분들은 이런 교육 활동 보다 일을 해서 버는 수입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교육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돌담 교육을 계속 이어가고, 발품을 팔아가며 다양한 기획을 하는 모습에서 제주다움에 대한 진솔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영국이나 아일랜드 같은 경우는 벌써 50여 년이 된 돌담협회들이 있어요. 공부를 하다 보니 사실 제주에만 독특한 돌과 돌문화가 있는 게 아니라 화산 지형에 돌담 문화를 가진 나라들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영국과 아일랜드도 다녀왔지요. 다른 문화권이지만 고유의 돌담 문화를 어떻게 지켜오고 있는지 배울 수 있었어요.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젠가는 제주와 영국, 아일랜드 사람들이 오고가는 교류를 하고 싶은 생각이 있지요. 이 두 나라에 비해 제주의 돌들은 굉장히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어요. 아마 우리는 수석을 가져다 돌담을 쌓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특별히 아름답죠.”
제주 돌이 있는 모든 곳이 작업실이고 그 자체가 갤러리라고 이야기하는 제주 돌챙이. 몇 번의 제주 돌과의 우연한 만남이 운명이 된,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제주 돌챙이가 아름다운 하루다. 제주 돌과 제주 돌챙이의 열정이 예술로 어우러지는 멋진 풍경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