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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무는바람 Jul 06. 2021

귤꽃향에 묻힌 돌미륵의 집 찾기

광령리 서천암지와 돌미륵(2020.4월에 찾은 서천암지)

우뚝! 멈춰 섰다. 

 몇 번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거라곤 낮은 키의 귤나무들이 맑은 바람에 옹성 대며 모여 선 작은 규모의 과수원, 그 옆에 바위 절경이 눈 호강을 주는 하천, 철근의 맨몸을 드러낸 4차선 교각의 밑동, 드문드문 자리 잡은 유채꽃, 저 멀리 푸른 하늘을 혼자 부산스럽게 노니는 올레 리본만이 보일 뿐 어디에도 절터라고 여겨지는 것들은 찾아볼 수 없다. 과연 나는 제대로 찾아온 것일까? 맑은 봄날, 서천암 터 찾기가 시작된다.      


서천암의 흔적을 찾아서 

 오랜만에 나선 봄길의 설렘도 잠깐, 해안동 2278-2 서천암지 가는 길이 수상하다. 내비게이션 안내에 따라 겨우 차 한 대 지날만한 소로에 접어드니 당황스럽다. 게다가 내가 찾던 자리에 떡하니 버티고 선 과수원, 길을 잃은 것일까? 부지런히 준비해 간 자료를 들춰본다. 다행이다. 이 과수원 일대가 바로 고려 시대 사찰이었던 서천암지이다. 미리 정보를 알지 못했다면 어디에서나 흔히 보고 지나치는 과수원에 불과할 그런 모습이다.


 숨은 흔적들을 찾아보기로 한다. 과수원 한쪽에 옛 절터의 우물로 추정되는 샘터가 있다고 하는데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다. 옆으로 물 마른 작은 하천만이 건조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이 샘터 바로 위쪽 언덕에 돌미륵이 있었는데 지금은 근처 한 식당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한참을 과수원을 거닐어본다. 설마 기와나 토기 등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바닥에 뒹구는 돌들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역시 찾지 못하고 실망감에 과수원을 나서는 초입에 의심스러운 조각이 있다. 하나 보이기 시작하니 제법 연이어 눈에 잡히는 흔적, 반갑다. 평범한 돌일까, 내가 찾던 와편일까 자세히 보니 물결 모양 무늬가 희미하게 남아있다. 빗살무늬도 보인다. 아마도 나처럼 이곳을 찾아 같은 흔적을 찾던 앞선 이의 공력이 들어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몇 점의 조각이 아니었다면 흔적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기 힘들 터였다.       


기록 속의 서천암

 서천암의 기록에 항상 등장하는 인물이 고려 시대 혜일 스님이다. 혜일 스님은 고려 충렬왕 무렵인 1275년에서 1308년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시승(詩僧)이다. 산방굴사를 창건했다고 전하며 제주 전역을 두루 다니며 수행을 하였다. 서천암 역시 혜일 스님이 수도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하여 <탐라지(耽羅志)>, <남사록(南槎錄)> 등에 서천암의 존재와 함께 혜일 스님의 시가 기록되어 있다. 

 고산자 김정호가 1861년에 제작한 대동여지도를 보면, 지금의 광령천 상류는 무수천, 하류는 조공천으로 표기되어 있다. 무수천(無愁川)은 빼어난 경관이 속세의 근심을 잊게 한다는 뜻이며, 조공천(朝貢川)은 공물을 실은 배가 이 포구에서 출항했기 때문에 붙여졌다. 현재 무수천 8경은 그 비경을 자랑하는데 혜일 스님의 시에서 ‘아름다운 조공천 위’라는 것이 절경의 무수천이고 그곳에 도인 종해가 세운 암자가 바로 서천암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서천암지 옆으로 무수천과 올레길 17코스가 ‘무수천 트멍길’로 함께 하고 있어 호젓한 산책으로 그 절경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일이다.         

 절 떠난 돌미륵을 찾아서 

 이제 서천암지를 떠난 돌미륵을 찾아가 본다. 

 제주 사람들에게 돌은 다양한 방식으로 삶 속에 자리해 왔는데 하나의 신앙으로 여겨져 생명력과 영험함을 부여받기도 하였다. 제주 사람들은 이를 ‘돌미륵’ 혹은 ‘돌미럭’이라 불렀다. 제주 불교는 ‘절에 가듯 당에 가고, 당에 가듯 절에 가는 식’의 민간적 토속 신앙과 융합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수많은 불교신앙 가운데 미륵만이 유일무이하게 당 문화와 결부되어 전승되고 있다.

 제주에서 미륵이라 불리는 돌은 여럿 있다. 오늘 우리가 찾아갈 서천암지에 있었던 ‘덕절 미륵불’을 비롯해서 제주읍성 동서에 자리한 ‘동서자복미륵’과 제주시 회천동 화천사의 ‘오석불’, 제주시 도평동 흥룡사 ‘미륵불’, 제주시 도남동 제석사의 ‘제석천왕 3기’, 애월읍 광령리 ‘마씨 미륵’ 등이 그것이다. 

 서천암의 돌미륵은 근처의 한 식당(돌나무 식당)에서 만날 수 있었다. 어쩌다 절터도 아닌 식당에 자리하게 된 걸까? 아마 서천암이 폐사되면서 한동안은 지역주민들이 미륵불을 봉안, 덕절로 부르며 부처님처럼 의지하고 기도를 올렸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서천암터에 있다가 4.3 사건 이전에는 해안동의 서관음사로 옮겨졌다고 하는데 4.3의 와중에 서관음사가 소실되자 다시 이곳 서천암터에 모셔졌다. 이후 돌미륵에 기도를 하기 위해 찾는 이들이 많아지자 과수원 주인이 경작에 어려움을 들어 근처의 식당(돌나무 식당)에 보관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 이곳 향나무 밑에 자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돌이 그득한 제주 땅을 일구며 살아야 했던 제주 사람들. 땅 속의 수많은 돌들을 골라내며 척박한 삶을 경작해야 했던 제주사람들은 희귀한 모양의 돌에 자신들의 믿음을 불어넣으며 의지했다. 그 대표적인 ‘서천암지(덕절) 돌미륵’은 눈, 코, 입의 모양새며 옷주름처럼 나타난 흔적이 있어 다른 미륵에 비해 소박한 가운데 일면 화려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 표정이 웃는 듯, 우는 듯 종잡을 수 없다. 

 이제 곧 짧지만 강한 향을 터뜨리는 귤꽃이 피는 시기가 다가온다. 그 향기 따라 절 떠난 돌미륵의 그리움도 달랠 수 있지 않을까? 올레길을 찾는다면, 향나무에 기댄 돌미륵의 식당을 만난다면 귤향이 기억하는 서천암과 돌미륵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길.  


*이 매거진의 글은 제주시정 홍보지 <열린제주시>의 '일과 열정'란과 제주시블로그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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