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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무는바람 Jan 16. 2022

낯선 곳으로의 여정-제주유배인이야기

국립제주박물관 특별전 2020.01.07

*웹진 인문360에 실렸던 글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집을 구해주는 프로그램이 요즘 한창 인기다. 그중에서도 육지에 비해 싼 값으로, 그러나 충분히 근사한 자연과 함께 할 수 있는 주택을 다채롭게 소개한 제주 편은 단연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요즘은 다소 주춤해졌지만 여유 있는 삶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의 제주 이주가 한때 유행처럼 이어지기도 했다. 어떤 이는 이런 열풍을 ‘자발적 유배’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만큼 복잡하고 바빠진 생활 속에서 의도한 단순함과 느림을 영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제주를 찾는다는 말일 게다. 하지만 섬은, 특히 제주는 그 옛날 낯선 이들이 겪었던 절망의 시간과 고립된 공간을 섬 곳곳에 나이테처럼 품고 있다. 그 먹색의 시간과 공간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특별한 전시가 있어서 국립제주박물관을 찾았다.


▲ 국립제주박물관 전경


▲ 특별전 포스터


1부. 먼 길 낯선 여정, 제주 유배를 들여다 보다


국립제주박물관 특별전 <제주 유배인 이야기 - 낯선 곳으로의 여정> 1부에서는 유배의 역사와 다양한 이유로 제주로 유배 온 인물들을 살펴볼 수 있다. 유배는 과거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이었다. 죄인을 특정 지역에 보내 강제로 개인의 모든 관계성을 단절시키는 형벌이다. 공동체 생활이 기반이 되던 당시로서는 ‘공동체에서 배제’, 혹은 ‘세상에서 추방’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유배형은 당연 중벌로 여겨졌다. 특히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도는 고립과 단절의 상징인 유배지로 최적의 공간이었다. 박물관 설명에 의하면 현재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는 제주 유배인은 260여 명이지만 정치가와 양반이 아닌 일반인의 유배 기록까지 산입한다면 실제 유배자 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부는 바람 뿌리는 비, 성문 옆을 지나는 길

후덥지근 장독 기운 백 척으로 솟은 누각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푸른 산의 슬픈 빛은 싸늘한 가을 기운

가고 싶어 왕손초를 신물나게 보았고

나그네 꿈 자주도 제자주에 깨이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연기 깔린 강 물결 외딴 배에 누웠구나

--- 광해군일기 <제주적중> 중에서


그리움이 절절히 드러나는 이 시의 주인공은 바로 제주 유배 인물 중 잘 알려진 광해군! 조선 제15대 임금이었지만 인조반정으로 강화도, 제주도에서 19년의 유배 생활을 보낸 광해군은 결국 마지막 유배지 제주에서 4년 4개월을 위리안치*로 보내다가 외로움과 절망의 감정을 가슴에 품고 한 많았던 생을 마감하게 된다. 위 시는 광해군이 제주로 옮겨올 때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해군이 죽고 난 후 인조가 집권한 조정에서는 광해군을 위해 우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고 하니 그 생, 참 쓸쓸하기 그지없다.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을 귀양살이하는 곳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일을 이르던 말. (출처 : 표준국어대사전)


▲ 광해군일기(국보 제151호)


광해군뿐만 아니라 사대부였던 김정의 <충암집>, 송시열의 초상화와 글씨, 한말 의병장 <최익현 초상>(보물 제1510호), 한말 정치가였던 박영효의 글씨, 제주의 마지막 유배자였던 이승훈의 재판기록 등도 함께 소개되어 있다. 당대 유배자의 처연하고 덧없던 감정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 김정, 최익현, 송시열의 초상

2부. 낯선 땅, 가혹하고도 간절했던 시간을 기다리다


옥 같던 그대 얼굴 묻힌 지 몇 해던가

누가 그대의 원한을 하늘에 호소할 수 있으리

황천길은 먼데 누굴 의지해 돌아갔는가

진한 피 깊이 간직하고 죽고 나도 인연은 이어졌네

천고에 높은 이름 열문에 빛나리니

일문에 높은 절개 모두 어진 형제였네

아름다운 두 떨기 꽃 글로 짓기 어려운데

푸른 풀만 무덤에 우거져 있구나

-- 조정철(1751-1831)



정조 시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로 유배 온 27세의 청년 조정철! 그는 가혹하고도 낯선 유배의 땅에서 한줄기 빛과 같은 제주 여인 홍윤애를 만난다. 스무 살의 홍윤애는 정성으로 조정철을 돌보았고 급기야 조정철을 제거하려는 제주 목사 김시구의 계략에 조정철을 대신해서 목숨을 잃게 된다. 30여 년의 유배 생활을 끝내고, 요직을 두루 거친 후 제주 목사가 되어 다시 제주를 찾은 조정철은 홍윤애의 묘를 찾아 이 글을 남겼다. 자신의 빛나던 청춘과 인연을 모두 옭아맨 가혹한 땅 유배지 제주! 그럼에도 그는 그것 또한 자신의 삶의 일부라고 기록한다.

▲ 정헌 조정철의 <정헌영해처감록>


▲ 의녀 홍윤애 묘비 탁본


제주 유배 시절이 조정철에게는 사랑의 계절이었다면, 김정희에게는 학문적 열정이 완성된 시기라고 볼 수 있겠다. 제주 유배 시절 추사체를 완성한 김정희의 <수선화 시 초고>와 충남 예산 김정희 종가에서 전래되던 벼루와 붓(보물 제 547호), 김정희가 친구 권돈인에게 써준 <묵소거사자찬>(보물 제1685-1호), 김정희의 제자 허련이 그린 <완당선생해천일립상> 등에서 유배지에서 느끼는 애달픔만큼이나 한층 깊어진 학문적 열정을 엿볼 수 있다. 그중 <묵소거사자찬>은 비록 제주에서 쓴 것은 아니지만 김정희의 해서체를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김정희는 추사체뿐만 아니라, 해서와 예서 등 다양한 서체에 능했다.  

또 김정희의 벗이었던 조선 후기의 고승 초의선사의 초상화, 임금을 그리며 쓴 사모곡, 가족과 제주 목사와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통해 그의 인간적인 면모도 살펴볼 수 있다. 버려진 자들의 깊은 절망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었다. 기다리는 시간은 기어코 오고야 만다는 믿음을 벼리고 또 벼렸을 것이다.



▲ <묵소거사자찬> - 침묵할 때 침묵하고 웃어야 할 땐 웃어라


3부 제주 유배, 그 후


유배인들은 섬에 무엇을 남겼을까? 조선 중기 200여 년간 출륙 금지령이 내려진 제주는 외부와의 교류도 엄격히 제한되었다. 그런 가운데 고위급 관리나 학자들의 유배는 불모지 제주에 유학이라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제주 사람들이 오현으로 꼽으며 기리는 김정, 정온, 송상인, 김상헌, 송시열의 시문집은 물론 오현의 사적을 기록한 <오선생사적>, 일제강점기 때 탁본된 <우암송선생유허비 탁본>등을 통해 제주에 뿌리내린 유학의 흔적을 살필 수 있다. 또한 제주향교에 보관 중인 유배인 제자들의 과거시험 합격 명단 <용방록><연방록>(도유형문화재 제10‧11호), 김정희가 쓴 대정향교 <의문당> 현판, 김만덕의 덕을 기리며 쓴 <은광연세> 현판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더불어 유배 와서 가문을 형성한 김해김씨, 청주한씨 족보 등 제주에 뿌리 내린 입도조(제주의 새로운 성씨가 됨) 자료도 함께 전시되어 관심을 끈다.

▲ 김정희가 쓴 <의문당>, <은광연세> 현판


절망 속에 삶을 피워낸 사람들


김정희는 유배 시절 스스로를 '빈화(부평초)'라 칭하며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또한 유배 생활이 길었던 김춘택은 땅속에 갇혀 세상에 고개를 내밀 수 없는 지렁이의 처지가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느낀 절망과 허망함을 절묘하게 비유한 표현이다. 하지만 이들이 남긴 유무형의 유산 덕에 이후 제주는 새로움을 얻었고 섬의 역사는 한층 빛나고 다채로워졌다. 그 옛날 출륙이 금지된 섬사람은 유배인을 통해 비로소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배인의 탄식은 역설적으로 삶의 열정이 되고 섬의 자산이 되었다. 먹색의 시공은 오늘, 푸르게 빛난다.

▲ 김정희의 <세한도>


▲ 김정희의 붓과 벼루



○ 제주국립박물관 기획전시실

주소 - 제주시 일주동로 17

특별전 - 운영 기간: 2019.11.26.-2020.-3.01

관람시간 - 평일 09:00-18:00토,일,공휴일 09:00-19:00

관람시간 - 야간개장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21:00까지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1, 1/25(설날),1/28(대체휴무일)

관람료 - 무료


문의 - 064-720-8108/8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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