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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역뿌리 Dec 09. 2019

찌질함 하나, <마음의 구석>


    우울했던 시월 넷째 주는 책에 손을 대지 않았다. 누군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빠져 눈앞에 해결해야 할 현실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할까봐가 그 이유였다. 환경에 쉽게 영향받는 나에게 더이상의 우울감을 느끼지 말고 지금 주어진 과제에 집중하라는 일종의 장치였다. 기분이 울적할 때면 책부터 꺼내 좋아하는 구절을 곱씹어보던 예전의 나와는 사뭇 다른 풍광이었다. 이천십구년 시월 넷째 주 불과 두 달 전, 나는 다시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오롯하게 현실을 버티지도 못했다.


"OO님이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마음의 구석'. 뜻밖의 선물이었다. 자주 가는 동네책방 사장님이 건네지 않았으면 영원히 읽지 않았을 책이었다. 누군가의 생각이 짙은 에세이를 좋아하지만, 그땐 툭하고 치면 넘어갈 것만 같은 부스러기 멘탈을 가진 내가 지양해야할 책이었다.


그러나 평소에 좋아하는 책방 사장님의 따뜻한 호의에 금세 첫장을 펼쳤다. 그리고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단번에 무서운 속도로 읽어버렸다.

                                                                                                                       


"컷!". 제일 외쳐보고 싶었던 한 마디였다.



작가가 내 일기장을 훔쳐본 것만 같았다. 피디가 왜 되고 싶어?' 누군가 물어보면 번지르르한 이유만을 대던 내 안에 갇힌 자아의 목소리를 읽은 것 같았다. 그 한 마디에는 모든 게 압축되어 있었다. 컷이라는 장면을 구성하는 단위를 외치는 사람. 그리고 그다음 장면으로 이어붙이는 사람. 수천 개의 장면들이 모여 세상 사람들에게 재미와 위안을 건네는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 '컷을 외칠 수 있다는 것은 그런 세계를 만들 수 있는 나의 지난 꿈과도 같았다.


나는 피디지망생이었다. 지난했던 여름을 끝으로 언론고시를 접은 피디지망생이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묶어두어야 하는 시간은 점점 길어져갔다. 하던 일을 계속하다보면 목적지에 다다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토록 하고 싶은 일은 콘텐츠 만드는 일인데, 정작 유튜브 콘텐츠 하나 만들지 았다. 유튜브에 도전하는 것보다는 내가 부족한 지식과 요령을 배워서 시험을 치루는  피디라는 꿈에 가까워지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기간이 길어질 수록 회의감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이 꿈을 위한 '준비'였기 때문이다. 준비를 위한 준비를 지속하다보니 내 정체성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것들을 참고 무언가를 꾸준히 해나가는 일이 미덕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나의 성향을 무시한 채 'to-do-list'를 지속하다보니 내 색깔을 잃는 것 같았다.


언젠가 좋은 평가 따위 받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진다면, 나는 모범생이라는 이 불편한 옷을 던져버리고 진짜 내 삶을 찾고 싶었다


                                                                                                                               

'언론 고시'라는 입사 시험의 구조보다는 밖을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내 타고난 성향에 반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학창시절부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나는 나를 절벽까지 밀어붙였다. 식사 시간은 30분으로 잡고, 그 이외의 시간에는 최대한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공부를 잘하면 주어지는 보상들이 많았다. 주변의 관심, 성취감.. 등등. 자연스럽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참고 도장 깨듯이 무언가 일을 지속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에 와서는 모범생 타이틀을 벗어던지고 진짜 내가 원하는 일을 해왔지만, 결국 공부하는 수험 기간 동안에는 또다시 나를 내모는 완벽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무엇을 버릴지가 아니라 무엇을 남기고 싶은지 선택하다 보면 나에게 진짜 중요한 것들이 더 선명해진다


                                                                                                                                 

작가는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에서도 곤도 마리에의 미니멀리즘 팁을 적용한다. 설레지 않으면 과감하게 버려라. 나에게 진짜 중요한 것들을 찾기 위해.

나도 나를 부정하면서까지 목표를 이루고자 했던 습관을 버리고자 한다. 더불어, 2년 동안 울고 웃게 했던 피디 입사시험을 준비했던 과정들도. 그렇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콘텐츠를 끊임없이 만들 것이다.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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