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립스틱」

_마지막 얼굴을 향해

by leehyojoon ARCH

「립스틱」_마지막 얼굴을 향해


이 작품은 장편 「디소넌트」를 향해 나아가는 첫 씨앗 중 하나입니다.
짧고 단순하지만, 작은 물건 하나가 삶 전체를 바꿀 수 있다는 감각을 시험해 본 이야기입니다.

하루키의 「반딧불이」처럼, 어둠 속에서 깜박이는 작은 불빛 같은 단편입니다.

빛은 작지만, 꺼지지 않고 오래 남습니다.

『립스틱』은 그렇게 쓰여졌습니다.
하나의 흔적, 혹은 예감 같은 글로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현재 시점 – 아들의 발견

어머니의 화장대는 작은 박물관이었다.

정확히 스물일곱 개의 립스틱이 줄지어 있었다.


나는 세어봤다. 두 번.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브랜드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레블론 여섯 개, 맥 여덟 개, 샤넬 열 개, 에르메스 세 개.


마치 연대기처럼, 시대순으로 배열된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구입 날짜순도, 색깔순도, 가격순도 아니었다.


다른 기준이 있었다.

내가 모르는.


가장 왼쪽에는 레블론 505번이 있었다.

거의 다 닳아 케이스가 흠집투성이였다.

은도금은 벗겨져 속살 같은 플라스틱이 드러나 있었다.


가장 오른쪽에는 에르메스 ‘루즈 에르메스 24 베이주 로즈’가 놓여 있었다.

단 한 번도 쓰이지 않은.

투명한 필름 포장까지 그대로였다.


나는 각각을 들어 올려봤다.

무게가 달랐다.


레블론은 손가락 사이에서 공기처럼 가벼웠고,

에르메스는 묘하게 묵직했다.


금속의 무게라기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다른 무언가의 무게였다.


“왜 안 써요? 아까운데.”


내가 에르메스를 가리키며 물었을 때,

어머니의 손가락이 0.2초 멈췄다.


그 짧은 순간 동안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후회? 그리움? 아니면 두려움?


“아직 때가 아니야.”


그 말을 할 때,

어머니는 습관처럼 샤넬 135번을 집어 들었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케이스를 돌리는 버릇.

23년 된 동작.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이것들은 단순한 화장품이 아니었다.


각각이 다른 시간, 다른 꿈, 다른 얼굴이었다.



과거 시점 1 – 레블론Revlon 시절 (1998년)

그녀는 열아홉 살이었다.


편의점에서 립스틱을 샀다.

생애 처음으로 산 진짜 립스틱.


레블론 505번.


집에 와서 작은 거울 앞에 앉았다.

그녀가 오래 쓰던 낡은 화장대였다.


거울은 얼룩투성이었고, 조명은 희미했다.

전구는 노란빛을 내뿜었는데,

창문 틈으로 바람이 스치면 미세하게 흔들렸다.


방 안은 적막했고,

립스틱을 열 때 나는 ‘딱’ 하는 작은 마찰음이 공기를 찔렀다.


처음 발랐을 때,

그녀는 예뻐졌다.


아니, 예뻐 보였다.

그 차이를 아직 몰랐다.


다음 날, 오디션장에 갔다.

연극학과 시험.

꿈이 아직 남아 있던 시절.


오디션장은 낯선 공기로 가득했다.

나무 바닥에는 왁스 냄새가 배어 있었고,

지원자들이 묻혀 온 향수가 허공에서 뒤엉켰다.


거울 앞에 선 다른 소녀들의 입술은 확신에 차 있었다.

샤넬, 디올, 맥.


반짝거리는 케이스가 주는 힘이 있었다.

그녀의 레블론은 흐릿해 보였다.


아니, 그녀 자신이 초라했다.


“다음!”


차례가 다가왔다.

손이 떨렸다.

급히 립스틱을 덧발랐다.


거울 없이 바른 립스틱은 선이 흔들렸다.

입술 바깥으로 번진 자국은 불안과 미숙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대사를 했다.

준비했던 것보다 못했다.


목소리는 작았고,

호흡은 불안정했다.


탈락은 당연했다.


그날 밤, 그녀는 다시 거울 앞에 앉아 레블론 505번을 발랐다.

비뚤어진 선은 그대로였지만,

그 위안의 붉은색은 스스로를 지탱해 주는 무늬 같았다.


문제는 재능이 아니라 브랜드였다.


틀린 생각이었지만,

열아홉 살의 그녀가 붙들 수 있는 유일한 해석이었다.



과거 시점 2 – 맥MAC 도전기 (2001년)

그녀는 스물두 살이었다.


작은 기획사의 조연출로 들어갔다.

서류와 전화와 지시 속에 매일이 갇혀 있었다.


처음 맥 매장을 들어섰을 때,

그녀는 발을 멈췄다.


검은 벽과 차가운 조명.

반사되는 거울과 반짝이는 금속.


공간 자체가 하나의 무대였다.


“어떤 컨셉을 원하세요?”


판매원이 물었다.


컨셉이라니.

그녀는 그런 단어를 입에 담아본 적이 없었다.


“직장인이요. 깔끔한… 그런 거요.”


판매원은 몇 개를 내밀었다.

델타, 러시안 레드, 체리.


짧은 단어들인데,

각각이 하나의 세계처럼 들렸다.


거울 앞에 서서 델타를 발랐다.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얼굴의 윤곽이 조금 달라지고,

시선이 흔들렸다.


립스틱이 그녀를 바꾼 게 아니었다.

안에 숨어 있던 무언가가 끌려 나온 것 같았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그날부터 그녀는 맥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레블론을 쓰던 사람과는 다른.


사무실에서도 목소리를 냈다.

회의석상에서 의견을 말했다.


주저하던 손이 조금은 안정되었다.


물론 립스틱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


브랜드가 나를 바꾸는 게 아니다. 내가 브랜드를 선택한다.


절반만 맞는 깨달음이었다.



과거 시점 3 – 샤넬Chanel 전환기 (2005년)

그녀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첫 대형 연극의 주연을 맡았다.

연출가는 말했다.


“새로운 에너지가 필요해. 너 같은.”


캐스팅 소식을 들은 날,

그녀는 백화점에 갔다.


샤넬 카운터 앞에 서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진열장 속 립스틱들은 조명 아래서 유물처럼 빛났다.


결국 발걸음을 옮겼다.


“이 색깔 어떠세요?”


판매원이 내민 것은 135번이었다.


루즈 코코 135 델리버리.


그녀의 입술과 거의 같았지만,

동시에 완전히 달랐다.


거울 속 얼굴은 낯설었다.

같은 얼굴인데,

다른 생명이 깃든 듯했다.


더 세련되고,

더 완성된.


“포장해 주세요.


그 순간, 그녀는 샤넬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첫 공연은 성공이었다.

언론은 “신예 배우”라 불렀다.


사진 속 그녀의 입술은 흠잡을 데 없었다.

샤넬 135번의 색이 그대로였다.


그때 떠올랐다.

여덟 살이던 어느 날.


마트 화장품 코너.


엄마에게 “저것도 사자”고 졸랐던 순간.

돌아온 대답.


“우리는 그런 거 못 써.”


반짝이던 진열장의 샤넬.


이제는 쓸 수 있었다.

아니, 써야만 했다.


브랜드가 그녀를 바꾸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브랜드를 선택했다.


드디어.



과거 시점 4 – 에르메스Hermès 완성기 (2012년)

그녀는 서른셋이었다.


드라마 주연.

영화 조연.

광고 모델.


이름이 알려졌다.

길에서는 사람들이 속삭이며 고개를 돌렸다.


에르메스 매장에서 판매원은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새 립스틱을 먼저 보여주었다.


“루즈 에르메스 24번, 베이주 로즈. 한정판이에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원통 하나가 건네졌다.


집에 돌아와 화장대 위에 올려놓았다.


지나치게 완벽했다.

표면에는 흠집 하나 없었고, 케이스는 묵직했다.


끝을 손에 쥔 듯한 감각.


그래서 쓰지 않았다.


화장대 맨 오른쪽에 놓아두었다.

가끔 바라보기만 했다.


언젠가 쓸 날이 올 거라 생각하면서.

어떤 특별한 날에.


정점에서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았다.



현재 시점 2 – 어머니의 고백

“그걸 언제 쓸 거예요?”


내가 다시 물었을 때,

어머니는 잠시 침묵했다.


“모르겠다. 아직 그럴 만한 일이 없어서.”


“무슨 일이어야 하는데요?”


어머니는 에르메스를 손에 들었다.

무겁다는 듯이.


“나 자신을 위한 일.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제야 나는 이해했다.


레블론은 선택받기 위해서였다.
맥은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샤넬은 성공하기 위해서였다.


에르메스는?

아직 그 이유를 찾지 못한 거였다.


“그런 일이 있을까요?”


“있을 거야. 언젠가는.”


49세의 확신.


나는 화장대를 다시 봤다.


스물일곱 개의 립스틱.
스물일곱 개의 시간.
스물일곱 개의 그녀.


그리고 하나의 미래.



에필로그 – 아들의 깨달음

여섯 달 후,

어머니는 에르메스를 사용했다.


특별한 날도 아니었다.

그냥 화요일 오후였다.


나와 커피를 마시러 나가는 날.


“오늘은 왜 그걸?”


“그냥. 쓰고 싶어서.”


그게 전부였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다른 사람도 없었다.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날 어머니는 예뻤다.


레블론을 바르던 열아홉 살의 그녀와는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더 자연스럽고,

더 당당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나는 물었다.


“이제 어떤 립스틱을 사실 거예요?”


어머니는 웃었다.


“아무것도. 이제 충분해.”


스물일곱 개로 충분했다.

스물여덟 번째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깨달았다.


립스틱은 가면이 아니었다.
또 다른 얼굴이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얼굴은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얼굴일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 얼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스물일곱 개의 다른 얼굴이 필요했다.


레블론부터 에르메스까지.


“진짜 나는 마지막에 나타난다.”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