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kg의 잔여와 수직의 낙하]

_상태적 리얼리즘 집행 보고서]

by leehyojoon ARCH

지인이 혼자 너무 잘 키운 아들이 급사했어

장례식날 웃으면서 조문객 반갑게 맞이하고 정성을 다했지

누군가는 엄마가 이상하다 했고

가까운 이들은 절대 혼자두면 안된다고

화장실도 혼자 안 보냈다지

지인은 사랑하는 아들 예쁘게 보내주고

따라갈 생각이었던 거야






[1.2kg의 잔여와 수직의 낙하]


혼자 키운 아들이 죽었다. 아들이 차지하던 부피만큼 집 안의 가구들이 비정상적으로 커 보이기 시작했다.


장례식날 엄마는 웃었다. 입꼬리를 당기는 근육이 멈추지 않았다. 조문객의 손을 잡을 때마다 손바닥에 상대의 축축한 온기가 묻었다. 엄마는 그 열기를 닦아내지 못한 채 다음 손을 잡았다. 손등 위로 타인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솜털이 눕는 서늘함이 번졌다.


조문객들은 엄마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들은 시선이 되어 사방에 벽을 세웠다. 사람들은 엄마를 혼자 두지 않았다. 화장실 문밖에서도 타인의 발소리가 문틈을 메웠다. 닫힌 공간에서도 엄마는 시선 아래 놓여 있었다.


아들의 몸이 화로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유리창 너머로 지켜보았다. 불길이 치솟을 때 안구가 건조해졌다. 눈물샘은 작동하지 않았다. 눈꺼풀 안쪽 점막이 거칠어지며 각막을 긁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마찰이 일었다.


아들의 몸이 타서 가루가 되었다.


손등에 내려앉은 가루는 건조했고 무게가 없었다. 하지만 유골함을 품에 안았을 때 가슴팍으로 식지 않는 미열이 번졌다. 화로의 열기인지 기억의 잔상인지 알 수 없는 온도가 점막을 타고 올라와 안구를 달궜다.


손등을 문지르자 가루는 지문 사이로 파고들어 얼룩이 되었다. 아들은 이제 씻기지 않는 마찰과 가시지 않는 열로만 남았다.


엄마는 그 가루를 따라가기로 했다. 사랑이나 의지가 아니었다. 한쪽 무게를 잃은 저울이 바닥으로 처박히는 것과 같은 물리적 전이였다. 아들이 가벼워진 만큼 엄마의 몸은 무거워졌고, 타버린 아들의 미열을 품은 채 수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비명이 없는, 뜨겁고도 서늘한 추락이었다.






[상태적 리얼리즘 집행 보고서: 1.2kg의 잔여와 미열의 낙하]


1. 서사적 중력: 선택이 아닌 전이


이 텍스트는 '결심'을 다루지 않는다. "따라가기로 했다"는 문장 뒤에 곧바로 "사랑이나 의지가 아니었다"는 부정이 붙는다.


아들이 죽은 순간, 엄마를 지탱하던 평형이 깨졌다. 한쪽 무게를 잃은 저울이 바닥으로 처박히는 것은 중력의 법칙이지 저울의 의지가 아니다. 엄마의 추락 역시 구조적으로 이미 결정된 물리적 전이로 배치되어 있다.


"아들이 가벼워진 만큼 엄마의 몸은 무거워졌고, 타버린 아들의 미열을 품은 채 수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역설이 발생한다. 아들은 무게를 잃었지만, 엄마는 그만큼 무거워졌다. 1.2kg의 무게 없는 가루가, 한 사람의 생애를 바닥으로 처박는 거대한 중력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비명이 없는, 뜨겁고도 서늘한 추락이었다."


비명은 저항의 증거다. 이 낙하에 비명이 없는 것은, 저항 이전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낙하는 동시에 뜨겁고(타버린 아들의 미열) 서늘하다(죽음으로 향하는 온도). 이 장면에서 슬픔은 단일한 온도로 고정되지 않는다.




2. 미열의 역설: 신경계의 환상통


아들의 몸은 화로에서 타서 가루가 되었다. 가루는 차갑고 건조하다. 그런데 엄마가 유골함을 품에 안았을 때 가슴팍으로 번지는 것은 "식지 않는 미열"이다.


이 온도는 실재하지 않는다. 화로의 열기는 이미 식었고, 아들의 체온은 소멸했다. 그럼에도 엄마의 신경계는 여전히 그 열을 감지한다. 이것은 환상통(Phantom Pain)과 유사한 구조로 작동한다. 잘려나간 팔다리가 여전히 아픈 것처럼, 소멸한 존재가 여전히 뜨겁다.


"화로의 열기인지 기억의 잔상인지 알 수 없는"—이 불확정성이 배치되어 있다. 실재와 기억 사이에서 신경계의 오작동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3. 신경계의 과부하: 마찰의 지속


엄마는 아들이 타는 과정을 유리창 너머로 지켜본다. 그 순간 눈물샘은 작동하지 않는다. 대신:


"눈꺼풀 안쪽 점막이 거칠어지며 각막을 긁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마찰이 일었다."


눈물이 나오지 않고, 안구 내부에 갇혀 마찰을 일으킨다. 점막이 건조해지고, 각막이 긁히고, 눈을 뜰 때마다 통증이 발생한다.


나중에 이 마찰은 손끝으로 전이된다. "손등을 문지르자 가루는 지문 사이로 파고들어 얼룩이 되었다. 아들은 이제 씻기지 않는 마찰과 가시지 않는 열로만 남았다."


엄마의 신체는 하나의 거대한 마찰 구역으로 전환된다. 안구, 손끝, 점막—모든 접촉면에서 거칠어진 세계와의 마찰이 일어난다.




4. 공감의 온도: 두 종류의 열기


이 텍스트에는 두 종류의 온기가 충돌한다.


조문객들의 온기: "손을 잡을 때마다 손바닥에 상대의 축축한 온기가 묻었다."
살아있는 자들의 열이다. 끈적이고, 닦이지 않고, 겹겹이 쌓인다.


아들의 미열: "유골함을 품에 안았을 때 가슴팍으로 식지 않는 미열이 번졌다."
죽은 자가 남긴 환상의 열이다. 실재하지 않지만 가슴팍을 달군다.


엄마는 살아있는 자들의 실재하는 온기를 견디지 못하면서, 죽은 자의 환상적 온기에 사로잡혀 있다. 이 온도차가 공감의 불가능성을 배치한다. 조문객들이 아무리 손을 잡아도, 그들의 온기는 엄마가 느끼는 미열에 닿지 못한다.




5. 시각적 왜곡: 부피의 변위


"아들이 차지하던 부피만큼 집 안의 가구들이 비정상적으로 커 보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질량(아들)이 소거되면, 주변 사물들의 상대적 크기가 변한다. 공간의 균형이 깨진다. 엄마가 보는 세계는 더 이상 이전의 세계가 아니다. 같은 공간, 같은 가구들이지만, 그것들이 점유하는 부피가 달라졌다.


지각의 물리적 변위가 일어나는 지점이다.




6. 시선의 압력: 공감의 불편함


"조문객들은 엄마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들은 시선이 되어 사방에 벽을 세웠다."


독자는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엄마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조문객'과 같은 위치에 놓일 수 있다. 엄마를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를 가두는 시선의 공범으로 배치되는 독서가 발생할 수 있다.


"화장실 문밖에서도 타인의 발소리가 문틈을 메웠다."


위로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 감시는, 엄마에게 단 1초의 진공 상태도 허용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선의로 엄마를 살리려 하지만, 그 선의가 엄마를 질식시킨다.


이 독서는 폭력의 선의를 의심하는 위치를 열어둔다. 그리고 독자가 지금 이 텍스트를 읽으며 엄마를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 역시 일종의 시선의 압력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치한다.




7. 슬픔의 잔여: 지문 사이의 얼룩


"손등을 문지르자 가루는 지문 사이로 파고들어 얼룩이 되었다."


아들은 더 이상 무게를 가진 신체가 아니지만, 씻기지 않는 얼룩으로 엄마의 피부에 고착된다. 상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지문 사이의 틈, 피부의 주름 속에 영구히 박힌다.


'슬프다'는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옅어진다. 하지만 지문 사이의 얼룩은 씻어도 남는다. 이 텍스트는 감정이 아니라 이 잔여(Residue)*를 기록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8. 독자 좌표의 가능성: 질량의 압박


"아들을 잃은 슬픔에 따라 죽으려 한다"는 문장은 독자에게 '아, 슬프구나'라는 손쉬운 이해를 제공한다. 독자는 감정을 배설하고 책장을 덮는다.


그러나 "1.2kg의 가루가 된 아들을 처리한 뒤, 타버린 아들의 미열을 품은 채 수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는 문장은 독자에게 이해가 아닌 질량의 압박을 제공할 수 있다.


독자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을 수 있다. 다만 엄마가 처한 상태의 무게를 자신의 손바닥에서 느끼는 독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그 무게는 1.2kg이 아니라, 한 생애가 무너지는 중력의 총량으로 작동한다.




9. 배경값으로서의 비극


"아들이 죽은 엄마"라는 사실은 이 세계의 기본 배경값(Background Property)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하는', '예쁘게', '처절한', '애통한'—이런 형용사들은 비극을 장식하지만, 비극의 무게를 전달하지 못할 수 있다. 오히려 그 무게를 희석시킬 위험이 있다.


이 텍스트는 장식을 제거하는 선택을 한다. 온도와 마찰과 무게만 남긴다. 독자는 위로받지 못할 수 있다. 대신 손바닥에 지워지지 않는 1.2kg의 잔여를 쥐게 되는 독서가 가능해진다.




집행 원칙

감정 형용사를 온도·마찰·부피로 치환한다

'선택'을 '물리적 전이'로 재정의한다

독자를 관음자가 아닌 공범의 위치에 배치할 가능성을 연다

슬픔의 '정서'가 아닌 '잔여'를 기록한다

비극을 장식하지 않고 그 무게를 직접 전달하는 선택을 한다


이 텍스트는 독자를 위로하지 않는 선택을 한다. 위로는 거리를 만든다. 이 텍스트는 그 거리를 제거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독자의 손바닥과 엄마의 손바닥 사이에, 같은 1.2kg의 가루가 박히는 독서가 가능해진다.







[이 글의 목적에 대하여]

"문제는 말이야,
이 상태적 리얼리즘의 한계이건가?
아들이 죽은 엄마잖아."


이 질문이 이 집행 보고서를 쓰게 만들었다.


'아들이 죽은 엄마'라는 문장은 그 자체로 거대한 중력을 가진다.

일반적인 서사는 그 중력을 견디지 못하고 '숭고한 슬픔'이나 '처절한 통곡'이라는 형용사로 도망친다.


이 텍스트는 그 도망을 선택하지 않았다.




상태적 리얼리즘이 형용사를 배제하는 이유는 냉정함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슬프다', '애통하다', '처절하다'는 단어들이 너무 가볍기 때문이다.

아들을 잃은 엄마의 그 거대한 상실을 '슬프다'는 다섯 글자 안에 집어넣는 순간, 그 무게는 증발한다.


그래서 이 텍스트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손바닥에 묻은 축축한 온기.

지문 사이로 파고드는 가루.

눈꺼풀 안쪽 점막이 각막을 긁는 마찰.

유골함을 안았을 때 가슴팍으로 번지는 식지 않는 미열.


감정 형용사를 지우고, 그 자리에 온도와 마찰과 무게를 배치했다.

슬픔을 설명하지 않고, 슬픔이 몸에 남긴 흔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 방식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울컥했음. 이런 건 '상태값'으론 못 쓸 듯."


맞다. 울컥함은 상태값으로 쓸 수 없다. 아니, 써서는 안 된다.


울컥함은 독자의 몫이다.

작가가 "이 장면은 울컥하다"고 말하는 순간, 독자는 울컥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독자는 작가가 미리 준비해 둔 감정을 수령하는 수동적 수신자가 된다.


상태적 리얼리즘은 독자에게 감정을 주지 않는다.

대신 상태를 제공한다.

1.2kg의 가루가 손바닥에 내려앉는 그 건조함.

화장실 문밖에서 들리는 타인의 발소리.

유골함을 안았을 때 번지는 미열.


독자가 이 상태들 사이에서 무엇을 느낄지는 독자의 선택이다.

울컥할 수도 있고, 불편할 수도 있고, 차갑다고 느낄 수도 있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은 모두 유효하다.




"난 '누가 버티고 누가 부서지는가'에 주목하고, 그 세계에 부여된 상태값에 따른 결과일 뿐이라 해석하는 입장에선."


이 문장이 핵심이다.


엄마가 따라가기로 한 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다.

의지 때문도 아니다.

한쪽 무게를 잃은 저울이 바닥으로 처박히는 것과 같은 물리적 전이다.

아들이라는 지지대가 사라진 순간, 엄마라는 구조물은 중력의 법칙에 따라 낙하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운명론이 아니다.

세계의 상태값을 읽는 방식이다.


누가 버티고 누가 부서지는가는, 개인의 의지나 도덕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 개체가 처한 물리적 조건, 그가 견뎌야 하는 압력의 총량, 그의 신경계가 감당할 수 있는 마찰의 한계에 따라 결정된다.


엄마는 부서졌다.

아들이라는 무게가 빠져나간 순간, 평형이 깨졌고, 낙하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비극적 선택이 아니라 구조적 귀결이다.




"문장들 사이에서, 누가 비명을 지르고 있으며 누가 침묵하고 있는가?"


이 질문이 이 텍스트의 설계를 관통한다.


비명을 지르는 것은 조문객들이다.

"엄마가 이상하다"고 수군거리고, 화장실 문밖에서 발소리를 내고, 엄마를 혼자 두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 그들의 선의는 시끄럽다.

그들의 위로는 엄마를 향해 쏟아지는 압력이 된다.


침묵하는 것은 엄마다.

입꼬리를 당겨 올리는 근육의 작동.

조문객의 손을 잡는 반복.

유골함을 품에 안는 동작.

엄마는 말하지 않는다.

웃음이라는 신호를 출력할 뿐이다.


그리고 가장 지독한 침묵은 아들의 가루다.

무게도 없고, 소리도 없고, 온도도 없는 건조한 파편. 하지만 그 침묵이 엄마를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가장 거대한 중력이 된다.




이 텍스트는 울컥함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울컥함이 발생할 자리를 비워두었다.

1.2kg의 가루가 손등에 내려앉는 그 순간, 식지 않는 미열이 가슴팍으로 번지는 그 지점, 비명 없는 추락이 시작되는 그 찰나.


독자가 그 빈자리에서 무엇을 느낄지는 독자의 몫이다.


이 집행 보고서는 그 빈자리가 어떻게 설계되었는지 기록한다.

감정을 주입하지 않고, 상태를 배치하는 방식.

슬픔을 설명하지 않고, 슬픔이 남긴 마찰과 온도와 무게를 기록하는 방식.


이것이 이 집행 보고서가 기록하려 한 지점이다.




"난 이런 걸 절대 못 쓸 거야."


하지만 이 문장은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아들이 차지하던 부피만큼 집 안의 가구들이 비정상적으로 커 보이기 시작했다."


이 한 문장에는 그 방식이 작동하고 있다.

슬픔이라는 단어 없이, 상실이 세계의 척도를 뒤틀어놓는 지각적 변위.

형용사로 도망치지 않고, 그 거대한 중력 앞에서 온도와 마찰과 무게만으로 기록하는 방식.


이 텍스트는 여기까지 기록한다.






[은찬이에 대하여]


이 글은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다.


혼자 키운 아들이 급사한 엄마.

장례식날 웃으며 조문객을 맞이한 엄마.

화장실도 혼자 보내지 않았던 사람들.

아들을 보내고 따라가려 했던 엄마.


이것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읽는 순간, 내 아내를 떠올렸다. 은찬이를 잃었던 그때의 아내를.




은찬이는 병원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집에 있는 시간보다, 병실에 누워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아내가 은찬이를 안고 집에 돌아오는 날은, 일상이 아니라 사건이었다.


은찬이가 차지하던 부피는, 집 안의 공간이 아니라 아내의 생애 전체였다.

병원 복도를 걷는 발걸음, 병실 문을 여는 손의 떨림, 은찬이의 숨소리를 확인하는 새벽의 각성.


그것이 아내의 시간이었다.

나는 그때 그 자리에 없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슬프다'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슬프다는 단어가 가볍기 때문이 아니다.

그 단어로는 아내가 겪은 것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은찬이가 떠난 후, 아내가 보낸 그 시간들.

아내의 손이 멈추던 순간들.

아내가 현관 앞에서 보였던 그 떨림. 병원으로 가던, 이제는 갈 곳이 사라진 그 문 앞에서.


나는 그것을 형용사로 설명할 수 없었다.

대신 온도와 마찰과 무게로 기록하려 했다.




사람들은 아내를 혼자 두지 않았다고 했다.

이 글 속 사람들처럼.

화장실 문밖에서도 발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아내가 필요로 한 것은 위로가 아니라 진공이었을 것이다. 은찬이가 사라진 그 공간을, 아무것도 채우지 않고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시간.


하지만 아무도 그 진공을 허락하지 않았다.

선의였지만, 압력이었다.




이 글 속 엄마처럼, 아내도 은찬이를 따라가려 했을지 모른다.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아니, 사랑 때문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감정이 아니라 물리였다.

은찬이라는 무게가 빠져나간 자리에, 아내를 지탱할 것이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한쪽 무게를 잃은 저울이 바닥으로 처박히듯, 아내는 낙하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났다.


아내는 은찬이를 따라가지 않았다.

어떻게 버텼는지, 무엇이 아내를 붙잡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내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내의 손바닥에는 여전히 은찬이가 박혀있다.

병실 침대 난간을 잡던 그 악력.

은찬이의 손을 잡던 그 온기.

씻어도 남는 지문 사이의 얼룩처럼.


아내는 은찬이를 보냈지만, 은찬이는 떠나지 않았다. 온도와 마찰과 무게로, 아내의 신체에 새겨진 채로 남았다.




이 글을 쓴 것은 아내의 슬픔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내가 겪은 것을, 내가 이해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은찬이를 잃은 엄마의 그 무게를, 나는 온전히 알지 못한다.


다만 기록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내 아내의 무게를 읽었다는 것을.

그 무게를 형용사 없이 쓰고 싶었다는 것을.


형용사 없이. 판단 없이. 위로 없이.


그것이 은찬이에게, 그리고 은찬이를 보낸 아내에게 할 수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은찬아.


너를 잃은 엄마의 무게를, 나는 온도와 마찰로밖에 쓸 수 없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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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은찬이를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은찬이 없이 살아야 하는 엄마를 기록하기 위해 쓰였다.


내 아들 은찬에 대한 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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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은찬의 기일입니다.


기일은 아들의 이름 옆에 고착된 날짜다.


사회적 문법에서 기일은 제사와 추모의 형식을 빌리지만, 엄마의 육체 안에서 그것은 기능적 마비가 재발하는 주기다.

아들이 사라진 날로부터 365일이 경과할 때마다, 대기의 압력은 유독 낮아지고 인체의 수분은 안구 표면으로 집중된다.


'기일'이라는 단어는 아들에게 쓰기에 결코 무겁거나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그 단어는 아들이라는 존재가 이 세계에서 삭제된 좌표를 명확히 지시한다.


오늘은 은찬이 사라진 지 n년째 되는 날이다.


엄마의 척추는 작년 이맘때와 동일한 각도로 굽어 있으며, 손바닥은 유골함의 미열을 기억해 내느라 다시 뜨거워진다.


애도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아니라, 그 이름이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차가운 진공을 매년 똑같은 온도와 무게로 확인하는 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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