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표절, 오마주에 대하여
요즘 스레드는 다시 표절 이야기로 시끄럽다. 익숙한 이름들, 익숙한 문장들, 익숙한 분노들. 나는 그 소란을 보다가 문득, 젊은 시절 내가 처음으로 문장을 훔쳤던 순간으로 돌아갔다.
아니, 훔쳤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나는 훔치지 않았다. 다만 어떤 문장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그 문장들이 내 몸속으로 들어와 나를 지배했다.
그게 훔친 것과 다른가? 모르겠다. 아직도.
그때 나는 아직 살아남지 못한 사람이었다. 문학을 윤리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다만 어떤 문장들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가슴이 먼저 뛰었고, 손이 먼저 떨렸다. 나는 그 문장들을 베껴 썼다. 공책에, 노트에, 컴퓨터 화면에. 그리고 그 문장들이 내 문장인 것처럼 다시 썼다.
젊은 날의 나는 피츠제럴드를 읽으며 울었다.
그의 문장은 지나치게 아름다웠고, 지나치게 절망적이었고, 무엇보다 지나치게 확신에 차 있었다.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 우리는 계속 노를 젓는다, 조류를 거슬러,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스물세 살이었다. 나는 이 문장이 거짓말이라는 걸 몰랐다. 아름다운 거짓말. 파국은 이렇게 우아하지 않다는 걸, 사람은 이렇게 문장처럼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아직 몰랐다.
피츠제럴드의 인물들은 모두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그 파국은 언제나 아름답다. 개츠비는 수영장에서 총을 맞고, 니콜은 정신병동에 갇히고, 딕 다이버는 몰락한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문장 안에서 빛난다.
나는 그 빛에 중독되었다. 내 초기 소설 속 인물들도 모두 피츠제럴드처럼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아름답게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현실의 파국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수영장에서 총을 맞지 않는다. 그냥 출근길 지하철에서 조금씩 죽어간다. 매일 조금씩. 아름답지 않게.
하루키는 더 위험했다.
그는 상실을 스타일로 만들어버렸다. 고독을 파스타와 재즈와 고양이로 감쌌다. 그의 인물들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으면서도 계속 살아간다. 사랑하던 사람이 떠났지만, 그들은 여전히 스파게티를 삶는다. 세계가 무너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재즈를 듣는다.
나는 유유정이 번역한 『상실의 시대』로 처음 하루키를 만났다. 문학사상사에서 나온 그 책. 나중에 양억관 번역가의 『노르웨이의 숲』도 읽었지만, 나는 유유정의 번역이 더 좋았다.
유유정 번역가는 '돌격대'라고 썼고, 양억관은 '특공대'라고 번역했다. 그래, 그럴 수 있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어색했다. 번역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긴 하지만, 어떤 단어들은 바뀌면 안 되는 것 같았다. 암스테르담 운하를 보면서 자위하는 '특공대'는 떠오르지 않았다. 첫사랑이 아주 많이 늙어버린 느낌이었다. 세상 풍파에 찌들어버린. 어쩐지 그 단어 하나가 바뀐 것만으로도 레이코의 얼굴이 달라져 보였다. # 하루키의 여인, 첫사랑 레이코
유유정의 번역은 건조했다. 하루키 특유의 거리감을 한국어 안에서도 유지했다. 양억관의 번역이 좀 더 유려하고 서정적이었다면, 유유정의 번역은 더 차갑고 담담했다. 그게 하루키의 진짜 문체였다.
나는 그 거리감에 중독되었다. 내 초기 작품들은 하루키의 번역체로 가득했다. "나는 커피를 마셨다. 창밖으로 비가 내렸다.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문장들. 지금 다시 읽으면 부끄러울 만큼.
하지만 그게 배움 아니었나. 훔치지 않고 어떻게 배우나. 문제는 내가 그걸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는 거였다. 나는 하루키의 옷을 입은 채 하루키처럼 걷고 있었다. 하루키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하루키의 세련된 고독은 번역된 고독이라는 것을. 일본어의 침묵을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무언가가 더해지고 무언가가 빠진다는 것을. 나는 그 번역된 고독을 또다시 내 언어로 번역하려 했다. 그건 불가능했다.
그때 체호프가 왔다.
체호프는 나를 완전히 다른 곳으로 끌고 갔다. 체호프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다. 인물을 구원하지 않는다. 사건을 정리하지 않는다. 그냥 상태를 남긴다.
『바냐 아저씨』의 끝을 보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바냐는 여전히 불행하고, 소냐는 여전히 사랑받지 못하고, 모두가 여전히 같은 집에서 같은 일을 하며 살아간다. 끝나지 않은 대화,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돌아가지 못한 고향.
처음엔 화가 났다. 이게 뭐냐고. 결말이 어디 있냐고. 하지만 점점 알게 되었다. 이게 진짜 현실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체호프처럼 산다. 피츠제럴드처럼 우아하게 파국하지도 않고, 하루키처럼 세련되게 고독하지도 않다. 그냥 계속 산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나는 점점 그쪽으로 이동했다. 피츠제럴드의 확신을 버렸고, 하루키의 스타일을 벗기 시작했다.
체호프는 말했다.
"작가는 판사가 아니라 목격자여야 한다."
그리고 나는 체호프처럼 쓰고 싶었다. 아무도 구원하지 않는 문장을.
그럼에도 나는 미시마 유키오를 지나치지 못했다.
미시마는 내 스승이 아니다. 그는 젊은 시절 내가 감정적으로 탐닉했던, 거의 중독에 가까웠던 작가다. 그의 『우국』은 너무 뜨겁고, 너무 극단적이고, 너무 빨리 끝났다. 할복으로 완성되는 사랑. 죽음으로 봉인되는 육체.
나는 그 미학에 매혹되었다. 미시마가 선언했던 것처럼, 나도 서른을 넘기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육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문장이 가장 날카로울 때, 그때 끝내야 한다고.
나는 『우국』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할복 장면만 따로 노트에 베껴 썼다. 나는 미시마의 할복을 읽으며 내 소설 속 인물도 죽이고 싶었다. 가장 아름다울 때.
미시마는 사십오 세에 할복했다. 1970년 11월 25일, 자위대 본부에서.
하지만 나는 지금 서른을 한참 넘겼고, 비루하게 살아 있다. 나는 그를 배반했다. 아니, 그가 제시한 해답을 거부했다.
미시마의 세계에서 육체의 절정은 죽음으로 완성된다. 하지만 내가 사는 세계에서 육체의 절정은 다음 날 아침 출근길 지하철로 이어진다. 이건 배반이 아니라 생존이다.
나는 미시마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의 방식대로 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문장을 가져와 다르게 쓰기도 했다. 죽음으로 완성되지 않는 육체를, 구원받지 못하는 사랑을, 끝나지 않는 파국을 쓰기로 했다.
『우국』의 한 문장이 있다.
悦楽を知る体 (에츠라쿠오 시루 카라다).
미시마의 일본어는 서늘했다. '悦楽'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육체가 쾌락의 법칙을 학습했다는 상태에 가깝다. 탐미적이고, 폭력적이고, 군인 정신과 결합된 육체. 그리고 이 문장 뒤에는 할복이 온다. 육체가 가장 뜨거울 때, 가장 잔혹하게 파괴되기 위해서.
『우국』은 2·26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1936년 2월 26일, 일본 육군 청년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실패했다. 주인공 다케야마 중위는 그 반란에 가담한 친구들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는 선택한다. 친구를 배신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그래서 그날 밤, 그는 아내 레이코와 마지막 밤을 보낸다. 격렬한 정사.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할복. 레이코는 남편의 할복을 돕고, 자신도 자결한다.
이 이야기가 무서운 건 아름답기 때문이다. 미시마는 할복을 탐미의 정점으로 만들었다. 육체가 가장 뜨거울 때, 가장 완벽할 때, 그것을 파괴하는 것. 그게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이 문장이 한국어로 건너왔을 때, 나는 김후란 번역가의 손을 통해 만났다.
"벌써 레이코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고."
이건 원문과 같지 않다. '悦楽'의 탐미적 폭력성은 사라졌다. 대신 '기쁨을 아는 몸'이라는, 묘하게 서정적이고 애잔한 문장이 남았다.
김후란은 한 글자로 세계를 바꿨다.
'悦楽'를 직역하면 '쾌락'이다. '환락'이다. 하지만 그는 '기쁨'이라고 썼다.
이 선택이 모든 것을 바꿨다. '쾌락을 아는 몸'이라고 썼다면 음란했을 것이다. '환락을 아는 몸'이라고 썼다면 저속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쁨을 아는 몸'이라고 쓰는 순간, 이 문장은 잔혹함 속에서도 슬픔을 품는다.
김후란은 미시마의 칼날을 한국어의 눈물로 감쌌다.
나는 그 문장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이게 번역이구나. 복사가 아니라 망명이구나.
내 소설 『심장 아래, 피보다 따뜻한 것』에서 사토라는 인물은 번역가다. 그는 일본어를 한국어로 옮긴다. 어느 날 주인공이 그에게 묻는다. 단편:"심장 아래, 피보다 따뜻한 것 #1/6"
"번역은 일종의 망명이에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떠나는 일이니까."
그의 말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한국어는 어떠세요? 번역하기에."
"흥미로워요. 일본어와 비슷한 면도 있지만... 다른 무게가 있어요."
"무게라고 하시면?"
"음... 한이라는 감정이요. 받아들이는 슬픔이랄까. 일본어에는 없는 특별한 무게예요."
번역은 망명이다. 원문은 다른 언어의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바꾼다. 김후란은 미시마를 한국어 안에서 살게 만들었다. 미시마의 '悦楽'는 한국어의 '기쁨'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그런데 신경숙의 『전설』에 이 문장이 나타났을 때, 나는 분노보다 먼저 슬픔이 왔다.
"여자는 벌써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이건 김후란의 번역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김후란이 미시마로부터 망명시켜 온 그 무게는 어디에도 없다. 원작이 품고 있던 죽음의 그림자도, 김후란이 새로 입힌 한국어의 서정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껍데기만 남았다.
세계가 스스로를 어떻게 기억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미시마의 『우국』은 1930년대 일본 군국주의가 스스로를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김후란의 번역은 그 기억을 한국어로 망명시킨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신경숙의 『전설』은 무엇을 기억하는가?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구조를 바꾸지 않았다.
무게를 옮기지 않았다.
같은 장면을 통과했는데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요구하는 오마주의 기준은 명확하다. 알아볼 수 있어야 하고, 공유된 약속 위에 있어야 하며, 숨기면 안 된다. 신경숙 사건 이후 이 기준은 더 엄격해졌다.
그 기준이 있다는 것을, 나는 모르는 척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비평가가 아니다. 나는 소설가다. 그래서 나는 오마주를 다른 방식으로도 생각한다.
젊은 시절, 나는 『우국』의 그 문단에 매혹되었다.
그래서 나는 썼다. 피츠제럴드와 하루키의 리듬 속에서, 감정과 확신으로 가득 찬 문장들을 썼다.
"그들의 연애는 식지 않는 고열의 방치와 같았다."
"생의 가장 날카로운 환희를 스스로 감당해 낼 줄 아는 육체가 된 것이다."
지금 다시 보면 그 정서가 과했다고 생각한다.
그때 나는 너무 잘 쓰려고 했다. 너무 아름답게 만들려고 했다.
감정을 과잉으로 장식했다.
그때는 그 엔진으로 썼다. 지금은 다른 엔진으로 쓴다.
어느 쪽이 옳은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내 상태가 달라졌을 뿐이다.
피츠제럴드와 하루키를 통과한 뒤의 문장은 감정을 명명했고,
체호프를 통과한 뒤의 문장은 감정을 지웠다.
하지만 리듬까지 지운 것은 아니다.
상태를 기록한다는 것은 파편화가 아니다.
체호프의 문장은 흐른다.
다만 판단하지 않을 뿐이다.
은유를 버렸다.
감정 명명을 버렸다.
하지만 호흡은 남았다.
둘 다 오마주다.
단지 다른 엔진일 뿐이다.
소설가는 본질적으로 도둑이다.
나는 이 문장을 도발로 쓰고 싶지 않다. 다만 부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레퍼런스를 훔치는 것과 문장을 훔치는 것, 그 사이에 본질적 차이는 없다. 다만 훔친 뒤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다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썼다. 이번에는 상태적 리얼리즘의 방법으로. 김후란의 번역 구조를 의식하며, 모든 장식을 벗겨내고, 상태만 남겼다.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소유자였다. 밤은 격렬했다.
단추가 풀렸다. 브래지어가 벗겨졌다. 치마가 허리까지 걷혔다.
벽에 등이 찍혔다. 다리가 들렸다.
호흡이 가빠졌다. 손톱이 어깨를 긁었다.
허리가 뒤로 휘었다.
입술이 벌어졌다.
계절이 두 번 바뀌었다.
어느 날 아침,
여자는 샤워를 했다.
물이 식었다.
나왔다.
거울에 김이 찼다.
손으로 닦았다.
얼굴이 보였다.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뭔가.
여자는 생각을 멈췄다.
옷을 입었다.
다음 날 아침, 여자는 화장을 했다. 남자는 현관문을 열었다.
미시마의 레이코가 할복을 도운 뒤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면, 내가 쓴 여자는 다음 날 아침 화장을 하고 남자를 다시 밖으로 보낸다.
이것은 육체적 죽음보다 더 잔인한 '일상이라는 이름의 할복'이다.
나는 문장을 훔쳤다. 하지만 훔친 것과 빌린 것의 차이는 그것을 어떻게 다시 만드느냐에 있다. 나는 중력을 옮겼다.
이것을 나는 '상태적 리얼리즘'*이라 부른다.
사건을 해결하지 않는다. 인물을 구원하지 않는다. 다만 상태를 기록한다.
지하철, 구조조정, 계약직, 월세 — 이것들은 이미 2000년대 한국 소설의 클리셰다. 나는 그걸 안다. 하지만 클리셰가 된 이유는 그것이 여전히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2020년대를 사는 사람들의 시대상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그것을 사건으로 만들지 않는다.
'구조조정당하는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구조조정이 일상의 배경으로 깔린 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를 쓴다.
마술적 리얼리즘이 100년을 압축하는 밀도라면, 상태적 리얼리즘은 하루를 늘리는 밀도다.
레메디오스는 하늘로 날아갔지만, 내 인물은 지하철 2호선에 몸을 싣는다. 매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이것이 파국이다. 사건 없는 파국. 끝나지 않는 파국.
나는 묻는다.
이 문장이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가. 이 문장을 가져와 원작보다 더 불편한 상태로 인물을 밀어 넣을 수 있는가. 낭만이 아니라 지속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 수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나는 차라리 쓰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오마주는 원작의 해답을 가져와 그 해답이 작동하지 않는 지점까지 인물을 밀어 넣는 일이다.
미시마는 할복으로 해답을 제시했다. 육체가 가장 아름다울 때 파괴하라. 그게 유일한 완성이다. 하지만 나는 묻는다. 할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사나.
미시마의 세계에는 할복 이후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할복 이후를 산다. 아니, 할복조차 하지 못한 채 계속 산다.
오마주의 퀄리티는 곧 작가의 윤리다.
만약 오마주된 텍스트의 밀도가 원작보다 헐겁거나, 그 상태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다면, 그것은 세계를 책임지는 방식이 아니라 다시 한번 문학을 기만하는 행위가 된다.
나는 김후란의 번역을 넘어서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의 문장은 번역의 천재성이다. 미시마의 잔혹함과 한국어의 서정을 완벽하게 균형 잡았다. '悦楽'를 '기쁨'으로 옮긴 그 한 글자의 선택. 이걸 넘는 건 원작자도 힘들 수 있다.
나는 미시마의 군국주의적 남성성을 비판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2020년대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남성성으로 치환했을 뿐이다.
상태적 리얼리즘으로 쓰면서, 나는 여성의 시점을 주지 못했다.
거울 앞에 선 여자에게 나는 언어를 주지 못했다. 그 감각이 무엇인지, 어떤 언어로 경험되는지, 나는 끝내 쓰지 못했다.
이것은 방법론의 한계가 아니라, 방법론을 쓰는 내 한계다.
그럼에도 오마주는 원본의 힘을 인정하는 것이다.
원본이 품고 있던 긴장감을, 에로티시즘을, 잔혹함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건 오마주가 아니라 약탈이다.
신경숙에게는 그 존중이 없었다.
나는 제약을 걸었다.
미시마의 구조를 유지한다.
원본의 힘을 살린다.
쾌락 언어는 배제한다.
시대를 전환한다.
제약 없으면 실험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쓰면 더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건 오마주가 아니다.
조르주 페렉은 알파벳 'e' 없이 300페이지 소설을 썼다.
레이먼드 크노는 같은 이야기를 99가지 문체로 다시 썼다.
제약이 창작의 동력이기 때문이다.
나는 미시마의 구조 위에서,
쾌락 언어 없이,
원본의 힘을 유지하면서,
'상태적 리얼리즘'*으로 썼다.
이것이 완벽한가? 아니다.
이것이 성공인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이 오마주다.
하지만 나는 시도했다.
작가는 문장을 선택하는 순간, 그 문장이 발을 딛고 있는 세계의 무게까지 짊어져야 한다. 훔친 문장에는 동력이 없다. 오직 자신이 처한 상태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현재의 언어로 번안해 낼 때만 서사는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선택 이후에도 세계는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이제 작가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나는 이 문장을 더 잘 쓰기 위해 다시 쓴 것이 아니다. 이 문장이 더 이상 나를 구원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했기 때문에 다시 썼다.
젊은 시절의 나는 미시마의 죽음의 미학에 구원받고 싶었다. 육체가 가장 아름다울 때 파괴되는 그 순간에 모든 것이 완성된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죽음으로 완성되지 않는 삶을 쓰고 있다.
끝나지 않는 일상을, 반복되는 패배를, 그럼에도 계속되는 아침을 쓰고 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공유된 인식'과 내가 감당하려는 '서사적 필연성'은 같은 좌표에 있지 않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 서 있느냐의 문제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본다.
나는 "여성의 언어를 주지 못했다"고 썼다.
그것이 방법론의 필연인지,
내 한계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다만 이것은 안다.
상태적 리얼리즘은 판단하지 않는다.
"남자가 넥타이를 맸다. 여자가 고쳐 맸다."
이것이 억압인지, 친밀함인지는 독자가 느껴야 한다.
만약 내가 "여자는 남자를 수습했다"고 쓴다면,
그 순간 해석을 강제하는 것이다.
이 방법론은 모든 이데올로기를 거부한다.
젠더 비평도 거부한다.
오직 상태만 기록한다.
상태는 독자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이것이 나의 윤리다.
이 글은 선언이 아니다. 해명도 아니다.
다만 번역을 어떻게 보는지, 표절을 어디서 멈춘다고 생각하는지, 오마주를 어떤 태도로 다루는지에 대한 한 소설가의 기록이다.
결국 문학이란 세계가 스스로를 기억하는 방식이며, 그 기억의 무게에 대해 작가가 윤리적으로 응답하는 과정이다. 훔친 문장으로는 결코 세계를 책임질 수 없다.
오직 자신이 발 딛고 선 상태를 윤리적 동력으로 삼아, 처절하게 다시 써 내려간 문장만이 우리를 이 구원 없는 세계에서 겨우 숨 쉬게 할 뿐이다.
이것이 완벽한가? 아니다.
이것이 윤리적인가?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는 시도했고, 그 시도의 한계를 안다. 그리고 계속 쓸 것이다.
칼은 사라졌지만, 멸망은 여전히 전야에 있다.
——— 참조 텍스트 ———
二人とも実に健康な若い肉体の所有者であつたため、彼等の夜は激烈を極めた。夜のみならず、訓練を終へて土埃まみれの軍服を脱ぎ捨てる間さへもどかしがつて、帰宅するなり妻をその場へ組み伏せることも一度や二度ではなかつた。麗子もよく応じた。初夜を過して一箇月を隔てるか隔てぬかに、麗子は早くも悦楽を知る体となり、中尉も亦そんな麗子の変化を喜んだ。
두 사람 다 실로 건강한 젊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탓으로 그들의 밤은 격렬했다. 밤뿐만 아니라 훈련을 마치고 흙먼지투성이의 군복을 벗는 동안마저 안타까워하면서 집에 오자마자 아내를 그 자리에 쓰러뜨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코도 잘 응했다. 첫날밤을 지낸 지 한 달이 넘었을까 말까 할 때 벌써 레이코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고, 중위도 그런 레이코의 변화를 기뻐하였다.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의 밤은 격렬하였다. 남자는 바깥에서 돌아와 흙먼지 묻은 얼굴을 씻다가도 뭔가를 안타까워하며 서둘러 여자를 쓰러뜨리는 일이 매번 이었다. 첫날밤을 가진 뒤 두 달 남짓, 여자는 벌써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여자의 청일 한 아름다움 속으로 관능은 향기롭고 풍요롭게 배어들었다. 그 무르익음은 노래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 속으로도 기름지게 스며들어 이젠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노래가 여자에게 빨려오는 듯했다. 여자의 변화를 가장 기쁜 건 물론 남자였다.
이 문단은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던 시절, 피츠제럴드와 하루키의 리듬 속에서 '기쁨을 아는 몸'이라는 문장에 처음 매혹되었을 때의 작업이다.
그들의 연애는 고열처럼 타올랐다.
퇴근길 지하철의 소음과 먼지를 묻힌 채 현관문에 들어서는 순간, 남자는 외투를 벗기도 전에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여자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여자는 당황하면서도 기꺼이 무너졌다.
단추가 풀렸다. 브래지어가 벗겨졌다. 치마가 허리까지 걷혔다. 남자의 입술이 목덜미를, 쇄골을, 유방을 따라 내려갔다. 여자의 손이 남자의 셔츠를 잡아당겼다. 허리띠가 풀렸다. 서 있는 채로. 벽에 기댄 채로. 호흡이 거칠어졌다.
계절이 두 번 바뀌기도 전에, 여자의 몸은 이미 그 격렬함의 리듬을 익혔다. 손이 어디를 더듬을지, 입술이 어디에 머물지, 언제 숨이 터질 듯 가빠질지.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해졌다.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낯선 것이 있었다. 자신의 얼굴인데 자신이 아닌, 욕망을 통과한 얼굴. 목에는 어젯밤의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남자는 그 변화를 보며 소유자의 기쁨을 느꼈다.
남자의 외투에 묻은 먼지는 구조조정이 진행 중인 사무실에서 묻어온 것이었고, 여자가 느낀 그 격렬함 역시 계약 갱신 통보를 기다리는 불안 사이에서 찾아낸 유일한 출구였다.
이 밤이 지나면 남자는 다시 이름표를 단 부속품이 되고, 여자는 다시 갱신 미정 상태로 돌아가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여자는 거울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목에 남은 붉은 자국을 파운데이션으로 덮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립스틱을 그렸다. 남자의 파열된 자존감을 수습하고, 그를 다시 세상이라는 전장으로 밀어 넣는 일. 그것이 여자가 익힌 또 하나의 리듬이었다.
같은 문장을, 같은 사건을 지금 다시 쓰면 이렇게 된다.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소유자였다. 밤은 격렬했다.
밤뿐만 아니라 퇴근길 지하철의 먼지를 묻힌 채 현관문을 열자마자, 남자는 외투를 벗기도 전에 여자를 벽으로 밀어붙이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단추가 풀렸다. 브래지어가 벗겨졌다. 치마가 허리까지 걷혔다.
벽에 등이 찍혔다. 다리가 들렸다.
호흡이 가빠졌다. 손톱이 어깨를 긁었다.
허리가 뒤로 휘었다.
입술이 벌어졌다.
계절이 두 번 바뀌었다.
어느 날 아침, 여자는 샤워를 했다.
물이 식었다.
나왔다.
거울에 김이 찼다.
손으로 닦았다.
얼굴이 보였다.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뭔가.
여자는 생각을 멈췄다.
옷을 입었다.
남자는 외투를 입었다. 구조조정이 진행 중인 사무실로 가야 했다. 여자는 계약직 갱신 통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밤이 지나면 남자는 다시 이름 없는 부속품으로 돌아가야 했고, 여자는 다시 무채색의 일상으로 침잠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여자는 화장을 했다. 남자는 현관문을 열었다.
※ 이 텍스트들은 해설 없이 병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