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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편집장 Oct 30. 2020

누리야 누리야 뭐하니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 Project 16  #초저녁

매거진 발행작가 : 초저녁(https://brunch.co.kr/@earlynite/11)
매거진 발행일 : 2020. 10. 16.


맞벌이 부모님을 둔 외동딸은 취미 생활에 일찍 눈을 뜰 확률이 높다. 함께 놀이터에서 흙 파먹고 놀던 친구들이 온 동네에 퍼지는 밥 짓는 냄새에 각자의 집으로 흩어지면 홀로 남아 유선방송, 책, 가요 테이프를 벗 삼아 시간을 보내야 한다. 맞다, 내 이야기다. 그 시기 본 영화 '금옥만당', 테이프가 늘어져라 들었던 솔리드 2집은 아직도 내 코어 메모리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 오늘은 책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양귀자의 '누리야 누리야 뭐하니'가 그 주인공이다.


카오스의 옷장에서 기적처럼 발견한 보물


   이 책을 다시 발견한 건 친정집 옷장에서다. 지난해 한 CF가 화제였는데, 친정엄마가 결혼한 딸의 방을 한동안 치우지 못하고 그대로 뒀다는 내용이었다. CF를 볼 때마다 뭉클했다. 나도 결혼하면 우리 엄마가 내 방을 있는 그대로 두겠지. 내가 결혼한다고 이야길 꺼내자마자 대성통곡한 엄마니까. 하지만 웬 걸. 엄마는 내가 결혼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내 방을 불도저로 밀어내듯 치워버렸다. 그래 놓고는 종종 전화해서 "얘, 네가 없으니까 집이 빈 집 같아"라는 엄마.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 여하튼 이 책도 그렇게 엄마의 불도저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줄만 알았다. 엄마로 말할 것 같으면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내 아이팟 나노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아무 맥락도 없이 아빠의 군 시절 사진을 깡그리 치워 버린 장본인이니까. (엄마 나름의 이유는 '지저분해서'였다.) 1994년도에 출판된 낡디 낡은 책 '누리야 누리야 뭐하니'가 우리 집에 남아있을 리 없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친정집을 찾았다. 하지만 '누리야 누리야 뭐하니'는 엄마의 금은보화가 숨어있는(앗, 기밀인데..) 옷장 밑 칸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정확히는 버려져 있었다. 바로 이런 난장판으로 말이다.


'아이고, 쟤 시집가면 저 지저분한 방 이제 안 봐도 되겠네'라던 엄마는 내 지저분한 책장의 일부를 옷장에 옮겨놨다. 나머지 책은 어디로 행방불명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1995년 어느 동네서점에서


   마치 오랜만에 꺼낸 옷 주머니에서 꾸깃한 만 원짜리 몇 장을 발견한 듯 환호를 지르며 책을 집어 들었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1995년 봉천동의 공기가 온몸을 휘감듯 떠올랐다. 


   이 책을 처음 만난 건 봉천역 대천서점이었다. 그곳은 내 아지트였다. 어린이, 청소년 코너에 쭈그리고 앉아 뭐든 닥치는 대로 꺼내 읽었다. (대천서점은 동네서점의 전 세계적인(?) 위기에도 여전히 건재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때 읽은 많은 책 가운데 아직도 내용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책이 바로 '누리야 누리야 뭐하니'다. (이후 '누리야 누리야'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다.) 


   양귀자는 훗날 '모순', '원미동 사람들'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마냥 동화 작가인 줄만 알았다. '누리야 누리야 뭐하니'는 컬러풀한 삽화와 귀엽고 발랄한 제목 때문에 가볍게 읽을만한 책으로 골랐다. 하지만 그 내용은 말 그대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내용이었다. 9살인 나와 동갑인 주인공 나누리의 이야기가 마치 내 이야기인양 매일 밤 베개를 적셔가며 읽어 내려갔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그 진한 여운에 꼬박 일주일을 앓아 울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표지부터 대성통곡하는 그림인데, 왜 밝은 이야기라고 생각했을까(좌), 책에서 유일하게 밑줄 그은 부분. 나는 예나 지금이나 어지간히도 자존심이 셌나 보다(우)


놀랍도록 아름다운 실화


   '누리야 누리야 뭐하니'는 작가의 말로 문을 연다. 양귀자는 이 책이 독자에게 받은 두 통의 편지를 바탕으로 한 실화라고 밝힌다. 이 놀랍고도 아름다운 실화의 결말은 소설이 모두 끝난 뒤 공개하겠다며 말이다.

   

   9살 누리는 찔레꽃 마을에서 산다. 아빠의 요양 때문에 내려온 찔레꽃 마을. 누리 아빠는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고, 엄마는 그 충격으로 집을 나간다. 누리는 엄마가 언젠가 자기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 믿으며 홀로 집을 지킨다. 동네 사람들이 자신을 고아원으로 보내버릴까 싶어 애써 당당한 척 꿋꿋하게 소식도 없는 엄마를 기다린다.

   

   결국 누리는 엄마를 직접 찾아 나서게 된다. 사람 많은 서울로 올라가면 엄마를 찾을 수 있겠지. 혹시나 돌아올 엄마에게 편지 한 장을 남겨두고 서울로 향한다. 누리는 서울에서 10년 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나고, 무수히 많은 시련을 겪는다. 서울역 화장실에서 만난 강자 언니, 납치당한 자신을 살려준 영발 오빠, 애써 모은 돈을 홀랑 빌려 사라진 공장 언니, 구두쇠 같은 누고 할아버지까지. 


   누리는 꿋꿋하고 단단하게 역경을 견뎌낸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밝은 햇살을 나누며 사는 사람이 되라고 지어준 '나누리'라는 이름처럼, 고난 한가운데에서도 희망의 빛 한줄기를 반짝인다.


   과연 누리는 엄마를 찾을 수 있을까. 책으로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저자의 말처럼(이것이 단순히 소설의 흥미를 돋우기 위한 구성인지, 실제인지는 모르겠으나) '누리야 누리야 뭐하니'의 결말은 실로 놀랍다. 책이 발간되고 몇 년 후 MBC에서 추석 특집 단막극으로도 제작되었을 정도니, 드라마틱한 이야기임엔 분명하다.


엄마의 냄새에서 느낀 삶의 피로


   9살 그 시절엔 누리가 불쌍해서, 누리 앞에 닥친 시련이 너무나 무서워서, 이 험한 역경을 나도 언젠가 겪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몸살 앓듯 일주일을 내리 울었던 것 같다. 


   유년 시절, 어른의 삶은 꽤 골치 아픈 일이란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TV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행복하게 살 수만은 없다는 걸, 그런 삶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꽤 일찍 눈치챘던 것 같다. 이렇듯 삶이 내 맘 같지 않더라도, 일단은 부딪히고 깨져봐야 한다는 걸 나는 왜 그리도 일찍 알아챘던 걸까.


   아마도, 엄마 때문이었으리라. 엄마의 품에 안기면 늘 마늘 냄새와 화장품 냄새, 그리고 피곤에 전 시큼한 냄새가 동시에 풍겼다. 그 시절 엄마는 가사도우미 일을 했다. 고시촌 하숙집에서 서울대생들의 밥을 해줬고, 하숙집 주인집 할머니네 살림을 도왔다. 학교가 파하고 혼자 집을 지키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은 날이면 도림천을 건너 엄마가 일하는 신림동 할머니네로 향했다. 


   그곳에서 엄마는 우리 집 좁은 부엌이 아닌 넓고 근사한 부엌에서 밥을 짓고 있었다. 엄마가 지은 밥을 내가 모르는 낯선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맛있게 먹었다. 요리 솜씨 좋고 호탕한 성격의 엄마를 신림동 할머니는 친딸처럼 좋아했다. 덩달아 나도 친손녀처럼 챙겨주셨다. 나 역시 세련되고 정 많은 신림동 할머니가 좋았다. 


25년 전 책값 치고는 꽤 비싼 편. 책상태는 민트급이다. 비싼 값을 한다.


우박 내린 신림동 하숙집


"옛날에 우박이 내려도 가난한 농부 밭만 골라 가며 떨어진다고 안 카더나. 그렇지만 불행도 끝내는 지 힘에 지가 지칠 날이 있는 법인 기라. 봐라. 지 아무리 거센 비바람도 때가 되면 다 잠잠해지지 않느냐. 그 사람이 누리 너한테 그리 잘해 줬다니 반드시 복 받을 끼다. 암, 그렇고말고." (양귀자, 누리야 누리야 뭐하니, 한양출판, 186p)


   신림동 할머니 집에 어느 순간 불행의 기운이 닥쳤다. 불행의 그림자는 서서히, 은근하게 집안을 맴돌기 시작했다. 신림동 할머니의 작은 아들이 골방을 차지한 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할머니의 작은 아들은 몇 년간 감옥에서 살다 나왔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삼촌 방문 앞을 조심히 걸어 다녔다. 괜히 무서웠다. 물정 모르는 9살짜리가 봐도 범상치 않은 한량의 기운이 느껴지는 삼촌이었다.  


   내가 10살 되던 해, 엄마는 더는 신림동 할머니네로 부엌일을 하러 가지 않았다. 엄마는 나랑 단짝인 A의 아버지가 차린 작은 전자회사에 취업했다. S전자의 협력업체의 협력업체의 협력업체쯤 되는 회사였다. 덕분에 우리 집 살림살이는 좋아졌고, 단칸방에서 방 두 칸짜리 집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신림동 할머니는 내게 디즈니 캐릭터가 그려진 이불 세트와 침대를 선물해주셨다. 엄마 보고 고생했다고, 고마웠다고 다독이셨다.


   얼마 후, 신림동 할머니네 식구들이 빚쟁이들을 피해 집을 팔고 전국 방방 곳곳을 돌아다닌다는 이야길 엄마의 전화통화로 얼핏 들을  있었다할머니는 돈이 필요하다고돈을 빌려줄  있겠냐고 했다아마도 엄마는  큰돈을 할머니에게 빌려줬고그중 대부분을  받았던  같다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도  때문에 신림동 할머니와  차례 통화하는  들었으니까 일로 아빠와도 종종 싸웠다신림동 할머니네 불행의 기운이 우리 집까지 번졌지만우리  식구는 애써 모른  지냈다.


행복을 양보하다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들의 숫자만큼 불행한 사람이 있었다. 처음에는 온통 나만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서울에 올라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나보다 불행한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행복하면 그 행복을 위해서 또 다른 누군가가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다 같이 행복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내가 불행한 것이 차라리 나았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행복하다면 얼마나 다행인가. (양귀자, 누리야 누리야 뭐하니, 한양출판, 155p)


   엄마가 취업한 전자회사는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해 나갔다. 엄마는 사장의 압박에 영업까지 뛰어들었고, 제품의 불량으로 소비자 한 명 한 명을 찾아가 사장을 대신해 일일이 사과까지 했다. 그 당차던 엄마가 집에 돌아와 우는 일이 잦아졌다. 회사는 결국 부도가 났다. 엄마는 몇 달치 월급이 밀려 김밥집 주말 아르바이트까지 시작했다. A의 아버지는 사업 실패의 충격으로 쓰러졌다. A네 가족의 불행이 우리 집까지 번졌지만, 우리 세 식구는 여전히 애써 모른 척 지냈다.


   25년 만에 다시 읽은 '누리야 누리야 뭐하니'. 다시 읽어 보니 소설 속 누리가 꼭 우리 엄마 같았다. 스무 살 상경해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도 기죽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던 우리 엄마. 이까짓 불행 따위 내가 이겨주겠어!라는 기세로 늘 생의 감각을 건강하게 갈고닦았던 우리 엄마. 비록 불도저로 '누리야 누리야 뭐하니'를 옷장 구석에 밀어버린 엄마지만. 


   엄마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회사에 다닌다. 엄마가 다니는 회사는 부도났던 A 아버지의 친형, 그러니까 내 친구 A의 큰 아버지가 운영하는 곳이다. 규모도 작고 환경도 열악해 쉬는 날도 없이 일하지만, 엄마는 나이 들고도 일할 수 있음에 즐겁고 행복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엄마의 거칠고 굽은 손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은 미어지지만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엄마는 우리 집에 내리는 우박이 곧 지나갈 것임을 알았을 테다. 우리 집이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집에 쏟아질 우박이니까. 차라리 내가 맞고 말지, 더 단단해지려 겪는 일이려니 참고 버텼으리라. 우박이 지 풀이 지쳐 사라질 때까지. 


  엄마보다 더 계산적이고 못된 나는 나 때문에 다른 이가 행복한 것보다, 내가 더 행복한 편이 좋다. 이 왕이면 우박이 우리 집 말고 다른 집에 쏟아졌으면 좋겠다. 언젠가 엄마처럼 엄마가 된다면, 삶을 살아내고, 또 살아내 마음의 품이 더 깊어진다면 행복을 양보하는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까. 9살 꼬마에게도, 34살 내게도 여전히 어려운 숙제다.



왕자님과 공주님이 나오는 동화를 좋아한다면 : ★

나누긴 뭘 나눠, 인생은 독고다이라면 : ★

삶의 희망을 믿는다면. 아니, 믿고 싶다면 : ★★★★★

몰입도 높은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 ★★★★★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 Project>는 계속됩니다. 다른 작가분과 함께 매거진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매일 각기 다른 작가의 1~2편 글이 업로드될 예정입니다. 함께 써 내려갈 것이고, 함께 책으로 묶을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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