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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냥깜냥 May 07. 2020

불시착

written by 장미



당신은 시간을 여행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 광활한 우주 속 어딘가에 숨어있는 시간 하나하나를 되짚어 보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작은 순간들을 먼저 맛보는 기분에 대해 아십니까? 저는 만약 당신이 이러한 기분을 느껴보신 적이 있다고 하신다면 당신을 ‘시간 여행자’ 라고 칭할 것입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은 그러한 작은 시간들을 맛보려다 불시착하여 빈 허공에서 존재하신 적 있으십니까? 당신이 만약 시간 여행자라면 한 번 쯤은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시간 이탈자’라고 불리는 허공 속의 그 사람들을. 그리고 그 빈 허공 속에서 살고 있다는 소년의 이야기를. 또 그 소년에게 찾아온 소녀의 이야기를.   

광활하게 펼쳐진 우주, 모든 인간의 가장 큰 그 집에서 벗어난, 아무 것도 없는 새하얀 허공에서 소년은 살고 있습니다. 작은 목소리를 함께 속삭일 사람도 없고, 부풀려진 폐 속으로 집어넣고 뱉어낼 뜨뜻한 공기도 없으며, 당신이 벗어날 수 없는 시간의 굴레도 있지 않은 커다란 빈 허공에서 소년은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만큼이나 평범하게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소년은 시간의 장난에 홀딱 속아 넘어가 그 외로움 속에 몸을 던져버렸습니다. 수십 년, 아니 어쩌면 수백, 수천 년이 되는 그 많은 세월을 실감하지도 못한 채 소년은 외로움을 벗어나길 기다렸습니다. 길고 긴 시간이 소년의 곁에서 머무르지 못하고 흩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소년은 작은 시공간의 흐트러짐을 기다렸습니다. 언제 나타날지 몰라요. 그렇다고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소년은 언제나 그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잔인한 말이었지만 소년에게는 한 줄기의 빛과도 같은 말이었습니다. 그게 사실이 맞는 것인지도 잘 모르지만 소년은 그 말을 꾹 믿고 작은 흐트러짐이 생기길 기다렸습니다.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길고 긴 외로움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작은 균열은 소년을 반겨주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나서야 소년은 좌절했습니다. 오지 않는 삶의 구원이, 언제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오래된 하늘 위에 두둥실 떠 있던 구름만큼이나 둥실 떠 있는 흐트러짐이 소년을 아프게 했습니다. 몇 날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소년의 삶이 다른 사람들보다 얼마만큼이나 더 지나가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시간이 소년과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소년은 구원을 포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독한 외로움은 소년에게 당연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새로움을 찾아 떠난 여행은 끔찍한 익숙함만 남겨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그 때, 소녀가 찾아왔습니다.  

갈색의 긴 머리를 쫑쫑 땋아온 작은 소녀는 반갑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얼마 만에 본 사람의 웃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저렇게 입꼬리가 올라간 얼굴이 미소를 잔뜩 머금은 얼굴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도 한참이 걸렸습니다. 소년은 손을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왜 손을 잡지 않는 거야?”

“응?”

“나는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있는데 넌 왜 내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거냐구.“ 


소녀의 말에 소년은 얼떨결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생기를 잃고 하얗게 변해버린 손에 닿은 작은 손은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느껴본 온기에 소년은 저도 모르게 그 따스한 손을 놓지 못하고 꼭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얘, 이제 손을 놔주면 안 될까? 인사는 다 한 것 같아.”

“어어, 미안.” 


말랑하고 부드러웠습니다. 따뜻하고 약해보였어요. 그런 느낌을 받은 게 얼마만일까요. 너무 까마득히 오래 되어버려서 소년은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작은 손을 놓쳐버린 차가운 손이 어색함에 몇 번 제 손을 쥐어 봅니다. 사라졌다 나타나는 손바닥이 제 기분을 더 어색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소년은 생각했습니다. 


“근데, 있잖아. 여기는 어디야? 넌 여기 왜 혼자 있어?”

“여기? 음, 여기는….” 


소년도 이 광활한 허공이 어디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저 커다란 허공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커다란 우주와 그리워하던 지구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우주가 아니란 것만을 짐작하고 있습니다. 아마 시간여행의 불시착으로 이곳에 머무르게 된 것 같다고 생각만 할 뿐입니다.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년은 소녀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기만 했습니다. 


“너도 모르는 거야?”

“으응. 정확히는 잘 몰라.”

“으으…. 여기는 어딜까?” 


하얀 허공. 우주와 다르게 반짝이는 별 하나 갖지 못한 하얀 허공입니다. 소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소년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찬란한 별 하나조차도 갖지 못하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곳. 나를 놓아주지 않는 곳.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 저가 그리는 곳과 너무 다른 온도를 가진 곳입니다. 


“여기서 균열이 생기기를 기다리면 나갈 수 있어.” 


소년이 처음 이 허공에 도착했을 때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허영심에 가득 찬 어른은 소년에게 균열이 생기기만을 기다리라고 말하곤 이 허공을 벗어났습니다. 소년이 작은 흐트러짐을 삶의 구원으로 믿는 이유입니다. 직접 그 장면을 보았기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소녀는 소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빈 허공 속을 둘러보았습니다. 아무 것도 없이 새하얗기만 한 게 불그스름한 생기도 가지지 못한 소년의 말랑한 볼 같았습니다. 


“음, 그럼 살아 돌아 갈 수는 있는 거지?”

“응? 응. 아마 그럴 거야.” 


모두 ‘아마’ 입니다. 소년이 본 것은 작은 흐트러짐 사이로 도망쳐 버린 어른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이 정확히 어느 곳인지, 정말로 흐트러짐 사이로 도망치면 살던 그 따스한 곳으로 도달할 수 있는지, 그곳에 도달했을 때 살 수 있는 건지 아무 것도 모릅니다. 소년은 슬펐습니다. 어른이 도망쳐 버린 이후에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조금 더 따스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는데 하지 못합니다. 허영심 많은 그 어른처럼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있지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그 어른보다 훨씬 적습니다. 멋있어 보였는데…. 


“으으, 그럼 잠은 어떻게 자는 거야? 먹는 건?”

“응? 그게 다 뭐야?” 


소년은 허공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시간의 길이를 가늠할 수는 없겠지만 따분함이 매우 길었으니 상상을 하지 못할 만큼 길고 오래된 시간일 것입니다. 그 긴 시간을 보내면서 소년은 참 많은 것을 잊었습니다.


허공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아요. 그래서 잠이 오지 않아요. 쉴 새 없이 뛰어가는 시간과 함께 몸이 뛰어야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피곤하지 않아요. 그래서 잠이 오지 않는 것이죠. 먹는 것을 먹을 필요도 없어요. 무언가 먹을 수 있는 게 존재하는 것도 아니지만 굳이 배고플 일도 없어요. 소년이 시간 여행을 하다 이곳에 불시착을 한 이후로는 멈춘 시간과 함께 위에 잔뜩 쌓인 음식들이 내려가지 않아 그래요. 소년은 늘 배부르고 피로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것과 관련된 말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기억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거든요. 사실 소년은 그런 말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홀로 좌절했습니다. 지구의 사람들과 자신이 너무 달라보였거든요. 작은 흐트러짐 사이로 도망쳐 당신들의 곁에 머물러도 소년은 어울리지 못할 사람일 것 같아서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잠과 음식을 잃어버린 후 소년은 꼭꼭 기억하려 합니다. 사람이라면 모두 기억하고 있을 당연한 것 하나하나를 소년은 제 호주머니에 있던 작은 쪽지와 연필로 쓱쓱 써놓고 기억합니다. 사실 그렇게 적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들과 많이 달라진 것 같아 소년은 슬펐지만요. 


“…너 그걸 왜 몰라? 왜? 먹는 거! 자는 거! 음식! 잠!”

“어어, 잘 모르겠어. 기억 안 나는데.”

“기억이 안 난다고?” 


소녀는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작은 가슴이 날카로운 것에 스쳐 새빨갛게 물드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벌써부터 많이 달라져버린 것입니다. 이 커다란 허공에서 혼자 머무르며 다른 사람들과 너무 달라져버린 것입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마음이 아파요. 이해받지 못할 사람이 되어버려 마음이 아픕니다. 


“그게. 어, 여기 오래 있어서 다 잊어버렸어.”

“그게 말이 돼? 얼마나 오래 있어야 다 잊어버리는 거야?”

“잘 모르겠어. 여기는 시간이 가지 않는 곳이거든.” 


소녀의 얼굴은 조금 더 황당하게 변했습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빈 허공을 뛰어다니며 시간을 느끼려 했습니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시간은 저 우주 안에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에요. 소녀는 힘들어 지치지 않는 제 모습을 느낄 때까지 힘껏 달리며 시간을 찾으려 애썼습니다. 앙앙, 울던 그 작은 아가였을 때부터 제 손에 휘감기던 시간이 만져지지 않았습니다. 그 어느 곳에서도 만져지지 않았습니다.



“말도 안 돼!”



소녀가 빽 소리를 질렀습니다. 소년은 그런 소녀의 모습을 가만 앉아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마 곧 모두 포기할 거예요. 소년도 똑같은 일을 반복했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화가 났어요. 소녀가 하고 있는 것처럼 소년도 화가 나고 어이가 없었어요. 늘 저와 함께 하던 시간이 눈 깜빡 했더니 사라져버려서 너무 화가 났었습니다. 소년은 소녀가 뛰어다니는 그 잠깐보다 훨씬 많이 뛰어다니고 움직였습니다. 시간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은 나타나주지 않았어요. 우주 안에서 소년을 비웃듯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지요.

그 때의 소년이 발을 멈추고 시간을 찾기를 포기한 것은 허공에 둥둥 떠 있던 돌덩어리들 때문이었어요. 소년의 뜀박질을 멈추려고 한 듯 커다란 울림을 내뱉으며 부딪쳤습니다. 쿵. 그 커다란 울림은 소년의 발끝까지 길게 울렸습니다. 눈물이 났어요. 소년은 울었습니다. 허영심 많은 어른은 벌써 사라지고 난 후였죠. 그래서 허공 위에 누워있는 소년을 그 많은 돌덩어리들이 대신 위로했습니다. 사실 왜 울었는지 잘 모릅니다. 그 때는 아직 그렇게 외롭지도 않았어요. 그럼에도 눈물이 났어요. 아마 눈물은 소년의 외로움과 슬픔을 모두 먼저 알고 울기 시작하지 않았을까요? 소년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왜! 왜 시간이 안 가는 거야? 여기는 어디야? 살려줘!”

“…여기서는 죽지 않아.”

“그럼 죽여줘! 이곳은 너무, 너무 끔찍해!” 


소녀도 소년이 그랬듯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몸을 더 자그맣고 동그랗게 말고 커다란 울음소리를 내뱉었습니다. 소년은 어찌할 줄 모르고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우는 사람을 본 것은 너무 오랜만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소년이 알 리가 없습니다. 공처럼 둥글게 말고 있던 소녀가 엉엉 우는 것을 멈추었습니다. 조금 화가 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소년을 바라보았습니다. 


“너! 왜 우는데 달래주지 않는 거야!”

“응?” 


화가 난 얼굴은 눈물과 열로 붉게 색칠되어 있었습니다. 빨간 수채화 물감이 하얀 볼 위에 폭 퍼지듯 퍼져있는 게 더 없이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런 소녀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던 소년은 저도 모르게 풋 웃어버렸습니다. 사랑스러움에 웃음이 잔뜩 배어나왔습니다. 소녀는 그런 소년의 웃음에 더 화가 난 듯 얼굴을 붉히고 소년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작은 품에 폭 안겼습니다. 


“웃지 마! 나도 내 얼굴 못난 거 알고 있단 말이야!”

“응?”

“달래주면 좋겠다고 말했잖아! 달래주는 건 이렇게 안아주는 거야.” 


품에 안긴 소녀는 따스했습니다. 꼭 잡고 있던 소녀의 손보다 훨씬. 소년이 안고 있기에 뜨거울 만큼 따스했습니다. 소녀는 소년의 품에서 아까보다 훨씬 큰 울음을 내뱉었습니다. 그에 소년은 어쩔 줄 모르고 머리만 긁적이다가 소녀의 어깨에 하얀 손을 올렸습니다. 토닥토닥, 하얀 손이 저도 모르게 소녀의 작은 어깨를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계속 울었습니다. 뜀박질은 소년이 더 많이 했던 것 같은데, 우는 건 소녀가 더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소년은 그런 소녀를 계속 기다리며 토닥였습니다. 울지 않는 얼굴이 훨씬 예쁜 것 같은데 소녀는 눈물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소년은 그런 소녀를 이제 위로할 줄 아니까요. 계속, 계속 달래주고 위로해줄 수 있습니다. 



“…고마워.”

“응?”

“달래줘서 고마워.”

“아니야. 울지 않아서 다행이야.” 


소년은 방긋 웃음을 지었습니다. 소녀는 그런 소년의 웃음을 가만 바라보다 함께 웃었습니다. 마주한 웃음이 예쁘게 빛났습니다. 역시 소녀는 울지 않을 때 훨씬 어여쁜 것 같습니다. 고마워. 소년은 소녀가 속삭인 그 말을 읊조려봤습니다. 무슨 뜻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무척 사랑스러운 울림입니다. 소녀만큼이나 사랑스러운 울림이에요.

사실 소년이 기억하는 것은 많지 못합니다. 잊지 않겠다며 작은 쪽지에 끄적이기도 했지만 그 작은 종이에 쓰기에는 기억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고마워.’ 이것 역시 소년은 잊어버린 말입니다. 따라 속삭일 줄은 알아도 무슨 뜻인지는 기억하지 못하는 사랑스러운 말입니다. 


“이제 뭘 하면 좋을까? 넌 평소에 혼자 무엇을 했니?”

“나는 하늘 위에 돌덩어리들을 세고 맘껏 뛰어다니고 예쁜 우주를 구경했어.” 


아주 재미있는 일들은 아니었지만, 나름 즐거운 일들이었습니다. 돌덩어리들은 아주 많았고, 뛰어다닐 허공은 무척이나 넓었고, 우주는 아주 예뻤기 때문입니다. 이 커다란 허공은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소년은 시간들도 모두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지구에 사는 행복한 누군가의 시간, 또 어떤 작은 나라의 시간, 지구가 변하는 커다란 시간 모두 볼 수 있었습니다. 소년은 그 어느 놀이보다 우주를 구경하는 것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푹신한 허공 위에 누워 쉴 새 없이 흘러가는 우주를 구경했습니다. 저가 없어도 우주는 너무 힘차게 흘러가 조금은 슬픈 마음도 들었지만 그 흘러가는 순간조차 너무 아름다워 소년은 멍하게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거 말고 할 수 있는 건 없어?”

“음. 응. 여기는 저 돌덩어리들 외에 아무 것도 없으니까.”

“그래? 그럼 일단 네가 하던 것들을 같이 해보자.” 


소녀의 말에 소년은 먼저 허공 위에 누워 두둥실 떠있는 돌덩어리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처음 찾아올 때에는 반짝반짝 예쁘게 빛이 나더니 저렇게 금방 빛이 다 사라지고 커다란 돌덩어리들만 남아버렸습니다. 작고 큰 돌덩어리들이 제 눈 위로 두둥실 떠있는 것을 가만 바라보던 소년이 눕지 않는 소녀를 의아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소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헤매고 있었지만 소년은 알지 못했습니다. 


“어…그러니까 누워야 하는 거야?”

“아. 응. 맞아. 누워야 저 돌덩어리들을 제대로 볼 수 있어.” 


아아…. 소녀가 소년의 말을 듣고 그제야 몸을 뉘였습니다. 딱딱할 줄 알고 천천히 머리를 허공 위로 올려뒀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푹신했어요. 와, 침대 같아. 맞아요. 허공은 침대 같아요. 꼭 이렇게 누워 있으면 당장이라도 아빠가 동화책을 읽어주러 올 것처럼 푹신푹신한 침대 같아요. 그래서 소년은 저도 모르게 가만 누워 아빠를 기다린 적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오시지는 않았지만요. 몇 날 며칠을 가만히 누워 기다려보곤 했습니다.

아빠는 살아 계실까요? 물론 소년이 바라보고 있는 우주는 흘러가는 시간과는 상관없이 모든 시간을 가지고 있어 어느 시간이든 자유롭게 볼 수 있어요. 그렇지만 흐트러진 균열 사이로 들어가면 우주 속에 들어가 흘러가고 있는 시간과 함께 저도 움직이기 시작할 테니까 아빠가 언제까지 살아계실지는 참 중요합니다. 소년이 균열 사이로 들어갔을 때 살아계시지 않는다면 소년은 또다시 혼자가 될 테니까요. 하지만 찾아볼 용기는 나지 않아요. 겨우 허공을 벗어났을 때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아버리면 돌아가려하지 않을 것만 같아서. 보고 싶지만, 소년은 늘 꾹꾹 참고 있습니다. 


“저게 다 어디서 온 돌덩어리들이야?”

“모르겠어. 아마 너랑 내가 온 것과 같은 방법으로 오지 않았을까?”

“처음에도 저렇게 못생기게 온 거야?”

“으응. 아니. 엄청 반짝반짝 빛이 났어.”

“그럼 별이야?” 


별? 소년이 허공은 찬란한 별조차 갖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소녀는 그렇지 않은 걸까요? 아니면 소년이 생각한 별과 소녀가 말하는 별이 다른 걸까요? 허공 위에 떠있는 예쁘지 않은 별. 소년은 소녀의 말을 듣고 한참을 가만 바라보다 그제야 저것들이 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처음 반짝반짝 빛이 났던 것도 다 별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습니다. 별이란 말을 듣고 나니 이상하기만 하던 돌덩어리들이 우주의 그 별 들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별인 것 같아.”

“진짜?”

“응. 반짝반짝 꼭 별처럼 빛났으니까 별일 거야.” 


크기가 다른 별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부딪칩니다. 그 모든 순간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은 소녀와 함께 '돌덩어리 개수 세기' 놀이를 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소녀도 소년을 보챌 생각을 하지 못하고 멍하게 별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처음입니다. 저렇게 못생기고 투박한 별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또, 이렇게 가장 원초적인 별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기분이 이상합니다. 꼭 벌거벗은 사람을 보는 것 같아요. 그게 아니라면 갓난 아가들을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정말 너무너무 이상한 기분입니다.

소녀와 소년은 그렇게 한참을 별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주의 처음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요. 두 사람 모두에게 쉬이 잊힐 장면이 아닙니다. 어쩌면 평생 가장 기억에 남는 일들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남들이 사랑하는 잔뜩 빛나는 별이 아닌, 못생기기만 한 별을 바라보고 사랑하게 되는 경험을 그 누가 쉽게 할 수 있을까요.




그 후, 잔뜩 달리기를 한 두 사람은 힘들거나 피곤하지도 않은 변함없는 몸으로 자리에 앉았습니다. 허공에 있다는 걸 더 자각시켜버려서 기분이 훨씬 나빠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얼굴에 잔뜩 화가 그려졌습니다. 뚱한 표정으로 끝없이 이어진 허공을 바라보던 소년은 결국 다시 뒤로 누워버렸습니다. 푹신한 침대가 부드럽게 소년을 감쌉니다. 마음이 편해져요. 수많은 별들을 보면서도 꼭 제 집인 것 같아 행복합니다. 


“이제 우주를 보자!”

“그럴까?”

“응! 우주를 보면 무슨 느낌이야? 예뻐?” 


…예뻐? 쉽게 표현할 수 있는 느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예쁘다고 하기에는 그런 말보다는 훨씬 아름답고 경이롭습니다. 우주는 그래요. 지구 밖에서 본 우주도 많이 다르겠지만 우주 밖에서 본 우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요. 가만 바라보면 곁에 있지도 않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감이 안 올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소녀가 오기 전까지 거의 대부분 우주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별들을 세거나 뛰는 것을 합친 시간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을 우주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워. 말로 표현 못 할 정도로 말이야.”

“우와. 얼른 보자! 네가 그런 말을 할 정도라니. 너무 기대 돼!” 


소녀의 볼이 잔뜩 상기되어 씰룩였습니다. 소녀가 많이 기대하고 있으니 소년은 저도 모르게 떨기 시작합니다. 제 눈에는 말로 표현 못할 만큼 아름다운 우주지만 다른 사람에게 보여준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년은 잘게 떨리는 손으로 우주를 끌어왔습니다. 작은 공 모양의 우주가 손 안에서 따뜻하게 요동칩니다. 우주는 이 허공 안에서 가장 따뜻한 존재입니다. 시간이 함께 하기 때문이죠. 시간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무언가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소년은 가끔 견딜 수 없을 만큼 외로울 때 우주를 끌어안아요. 갓 태어난 아가만큼이나 따스해서 꼭 시간을 벗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동생 같아요. 그래서 우주가 더 좋은 걸지도 모릅니다, 소년은. 


“우와….”

“만져볼래?”

“만져도 괜찮은 거야?”

“응. 따뜻하기도 해.” 


우와. 소년은 소녀에게 작은 우주를 넘겼습니다. 소녀의 품에 시간의 온기가 가득 안겼습니다. 이건 너무 벅찬 일입니다. 그 어떠한 생명을 끌어안아도 못 느낄 감정이에요. 감히 어떤 사람이 이렇게 우주를 끌어안아볼까요? 이곳은 너무 춥고 외로운 곳이지만 그만큼 경이로운 곳이에요. 말로 표현하기에 너무 감탄스러운 그런 곳입니다. 아아, 소녀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감동이 아니었어요. 작게 나오는 신음이 벅참을 대신 표현했습니다. 소녀는 계속 품에 있는 우주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습니다. 소년은 그런 소녀를 가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소녀의 기분이 어떨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조용히 기다려주는 것이지요. 아마 소녀는 또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년은 찔끔 눈물이 났었거든요. 아마, 감동이라 말하는 감정 때문이 아닐까요? 소년은 이곳에 온 이후로 잊은 게 너무 많아서 정확하게 잘 모르겠습니다. 


“이거 너무, 우와….”

“어때?”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이런 기분, 와, 진짜 처음인 것 같아.” 


소년은 정신없이 우주를 바라보는 소녀를 보며 더 아름다운 우주를 준비했습니다. 이곳에서 어떻게 이렇게 우주를 볼 수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여기 어디서든 우주를 볼 수 있습니다. 소녀가 끌어안고 있는 작은 공 모양의 우주도, 너무 커다랗게 펼쳐져 다 볼 수 없는 우주도, 지도처럼 착, 펼쳐서 볼 수 있는 우주도 모두 허공에서는 자유롭게 볼 수 있습니다. 소년은 그래서 드넓은 우주로 시간이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소년은 자신이 보았던 그것을 꼭 소녀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광활한 우주는 소녀가 아주 좋아할 것 같았거든요. 


“이것도 봐줘.”

“이건 또 뭐야?” 


소년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커다랗게 우주를 펼쳤습니다. 커다란 탄성이 귀를 울렸습니다. 소년이 상상했던 것처럼 소녀가 무척 좋아하는 것입니다. 소년의 기분이 별들에게 닿을 만큼 쑥쑥 커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저와 함께한 친구들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너무 좋아요. 


“이게 다 뭐야? 너무 신기해! 우리가 여기 살았던 거야?”

“응. 우리는 이곳에서 왔어.”

“그럼 우리 가족들도 볼 수 있는 거야?”

“아마 가능할 거야.” 


나도 본 적 있거든. 뒷말은 꿀꺽 삼켰습니다. 그냥 하지 말아야 될 말 같았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소년은 우주를 바라보다 지루해지면 지구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 사람들을 보곤 했어요. 사람들은 너무 행복하게 웃고 있어서 소년도 따라 웃곤 했어요. 지구의 사람들은 너무 행복해요. 소년처럼 외롭지도 않고, 기억을 잃어가지도 않고, 흐트러짐만 기다릴 필요도 없어요. 그건 너무 행복한 일이에요.

소년은 소녀의 가족들을 찾아보았어요. 소녀의 가족이 어떨지 상상이 잘 가지 않아요. 소년은 제 가족의 얼굴도 겨우 기억하고 있어서 가족이 어떤 모습인지 잘 모릅니다. 가족까지 잊어버리는 건 너무 슬픈 일이에요. 가족이 무엇일까? 너무 많이 잊어버린 그 날에 소년은 가만 앉아 가족들을 기억하려 애썼었습니다. 무엇이든 생각날 때까지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요.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린 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어요. 너무너무 생각이 안 났거든요. 아빠가 자기 전에 동화를 읽어준 것도 그 때 겨우 기억했습니다. 


“어어. 여기! 여기야. 우리 가족!”

“…….” 


소녀의 가족을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간질간질하고, 말랑하고, 애틋한 기분입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구겼습니다. 소녀는 그런 소년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가족들 보고만 있었습니다. 얼마나 걱정할까요? 얼마나 불안할까요? 벌써부터 소녀를 찾다 지쳐버리신 거라면 어떡하죠? 그렇게 되어버리면 소녀는 가족들에게 갈 자신이 없어질 것 같아요. 지구에 돌아가도 계속 시간 여행만 하고 싶을 거예요. 누군가가 저를 포기한다는 건 너무 아픈 일이잖아요. 


“봐. 이게 우리 엄마고, 여기가 아빠. 이분은 할머니, 여기 둘은 내 동생들이고, 저기 서 있는 남자는 우리 오빠야.”

“아아, 그렇구나.”

“다들 너무 보고 싶어.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소년의 기억 속에 허영심 많은 그 어른이 두둥실 떠올랐습니다. 얼굴이나 목소리 같은 것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날 어른과 함께 있었던 일들은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저도 데려가주세요. 저도 나가고 싶어요!’

‘얘야. 미안하지만, 여긴 한 사람 밖에 지나갈 수 없어.’

‘그래도 저는, 저는 작은 아이니까 아저씨와 꼭 붙어 있으면 한 사람처럼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글쎄. 그럴지도 모르겠다만 난 그렇게 위험한 행동은 하고 싶지 않구나.’ 


그 어른은 무책임하게 소년을 두고 떠나버렸습니다. 소년은 혼자 허공에서 지내게 되었지요. 그 때 그 어른은 말했습니다. 흐트러짐 사이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고. 그럼 소녀와 소년은 함께 나올 수 없는 것일까요? 소년은 이 외로운 허공에 소녀를 홀로 두고 우주로 들어가야 할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건 너무 어려운 문제에요. 소년이 자신 있게 대답을 하기에는 너무 어렵고 복잡한 질문 같아요. 


“언젠가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꼭 만날 수 있을 거야.” 


소년은 소녀를 위해 거짓말을 해버렸어요.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거짓말이었죠. 딸꾹, 딸꾹질이 나오려고 해요. 거짓말을 해서 그런가 봐요. 소년은 소녀에게 거짓말한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입을 꼭 다뭅니다. 딸꾹질을 해버리면 소녀는 소년이 거짓말 한 것을 알아버릴 게 분명해요. 언젠가 만날 수 있을까요? 소년이 먼저 나가버리면 소녀는 언제 생길지 모르는 흐트러짐을 무작정 기다려야 합니다. 소년이 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인데 소녀가 잘 기다릴 수 있을까요? 기다리지 못하고 소년을 원망하면 어떡하죠?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허공에 와서 이렇게 많은 고민을 한 것은 처음이에요. 생각이 많은 것은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왜 그렇게까지 가족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거야?”

“응? 당연히 좋아하니까 보고 싶은 거지?”

“좋아해? 그게 뭐야?” 


이제 달래주는 것은 아는데 좋아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정말로 소년은 잊어버린 게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좋아한다는 말조차도 기억을 못하니까요. 소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소년을 보고 좋아한다는 말을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 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많은 것을 보여준 소년에게 좋아한다는 아주 예쁜 말을 알려주고 싶었거든요. 소녀의 머리가 데굴데굴 구르며 생각을 합니다. 좋아한다는 말을 어떻게 알려주면 좋을까요? 


“좋아한다는 말이야!”

“응.”

“엄청 보고 싶고, 따뜻하고, 또. 음, 어렵다. 아, 엄청 사랑스러운 감정이야!” 


보고 싶다. 따뜻하다. 사랑스럽다. 모두 소년이 아는 단어인데 왜 좋아한다는 단어는 이해가 가지 않는 걸까요? 그 말은 너무 어렵습니다. 소년은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꽁꽁 싸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소녀가 알려주는 것은 뭐든 다 알고 싶었거든요. 


“알겠어? 이해 가?”

“으응. 아니. 너무 어려운 것 같아.”

“음, 조금 더 쉬운 말이 없을까?”

“쉬운 말?”

“어어. ‘사랑한다.’랑 같은 말이야! 사랑한다는 말은 알아?” 


사랑이라는 단어는 잘 알고 있어요. 아빠가 늘 소년에게 동화책을 다 읽어주고 나면 속삭이던 말이니까요. 사랑해. 잘 자. 잠에 푹 빠져들어 여행을 떠날 때, 살포시 얹어주시는 목소리는 아직 잊지 않았어요. 소년은 소녀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소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 졌습니다. 


“좋아한다는 사랑한다보다 훨씬 더 간질간질한 말이야!”

“그래?”

“응!” 


이제 좋아한다는 말을 알 것 같습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간지럽다니, 그 말을 듣고 나니 소년의 목 뒤도 무척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목 뒤를 긁었어요. 소년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알려준 소녀는 굉장히 뿌듯한 얼굴로 다시 가족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얼른 보고 싶어요. 가족들이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이제 다른 거 하자.”

“응?”

“우주는 됐어. 다른 거 하고 싶어.” 


계속 가족들을 바라보다가는 엉엉 울 것 같아 소녀가 고개를 돌립니다. 가족들은 많이 보고 싶지만 그렇다고 소년을 붙잡고 울 수는 없어요. 소년은 동생들이나 오빠처럼 놀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무언가 부끄러워요. 소녀는 꾹꾹 눈물을 참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저 위에 잔뜩 떠있는 별들을 만져보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아니면 다시 몇 개나 있는지 세어본다던가. 뜀박질은 허공에 있는 걸 깨닫게 해서 싫어요. 우주는 눈물이 나서 더더욱 싫어요. 


“있잖아. 좋아한다 말이야.”

“응? 그게 왜? 이해 안 가?”

“아니, 그게 아니라. 네가 말한 대로라면.” 


난 널 좋아하는 것 같아. 소녀의 볼이 훅 달아올랐습니다. 아까는 수채화 물감 같았는데 지금은 북북 그어놓은 크레파스만큼이나 붉어요. 소년은 그런 소녀의 예쁜 볼을 보며 웃었습니다. 사랑스러워요. 소년은 소녀가 가족 생각을 하는 동안 소녀의 생각만 잔뜩 한 모양입니다. 아니면 좋아한다는 말만 생각을 했을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소녀가 울 것 같은 순간에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소녀는 어찌 해야 할지 모르고 볼만 잔뜩 붉히고 있었습니다. 이런 말을 가족 아닌 다른 사람에게 들은 건 처음 있는 일입니다. 


“고마워. 알게 해줘서.” 


소년은 웃고 있었습니다. 좋아한다는 소년의 말로 머리가 어지럽던 소녀는 그런 소년의 웃음을 보고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고작 좋아한다는 말만 알려줬을 뿐인데 이렇게 고마워해준다니. 소녀는 소년에게 잔뜩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어요. 소년이 궁금하다면 뭐든 알려주고 싶으니까요.



그 후, 소녀는 끊임없이 소년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먹는 것, 자는 것과 같은 단순한 것들부터 아주 복잡한 무언가까지 하나하나 자세히 알려주었지요. 소년은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허공에 오고 처음 있는 일이지요. 허공에 온 이후로 이렇게 행복했던 적은 처음입니다. 외롭지 않은 것도 처음이에요. 소녀와 함께한 모든 게 처음입니다. 처음이란 건 너무 신기한 것이에요. 소년은 처음이란 걸 알게 되어 너무 기뻤답니다.

허공은 평화로웠습니다. 늘 그렇듯 쿵, 울림을 내며 부딪치는 별들도, 가끔 둥실둥실 떠다니는 다양한 모양의 우주도, 그 사이에서 처음을 배우는 소년과 가르치는 소녀 모두 평화로웠지요. 그래서 그랬나 봐요. 작은 흐트러짐이 너무 평화로워서 생겨버렸나 봐요. 소년은 허공 위에 생긴 작은 찢어진 상처를 발견했습니다. 그 안에는 우주가 가득했지요. 낯이 익은 모습이었습니다. 그 어른이 기다린 ‘균열’이었습니다. 상처가 벌어지고 또, 벌어지면 아마 한 사람이 들어갈 만큼 커다랗게 변할 것이에요. 그러면 또 누군가는 허공에 남겨지겠죠.


그래요. 누군가는 허공에 남겨져야 해요. 소녀는 모르지만 소년은 알고 있습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그 작은 균열을 무시해버렸습니다. 누가 가든 허공에 홀로 누군가 남는 건 싫어요. 그건 누가 남든 너무 끔찍한 일이란 걸 소년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어떡하죠? 두 사람 모두 그 흐트러짐 사이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아마, 안 되지 않을까.”

“응?”

“으응. 아무 것도 아니야.” 


소년은 가만 생각하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습니다. 어른이 그런 모험은 하고 싶지 않다 말했어요. 소년은 그것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아마, 한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들어가면 큰 일이 난다는 말일 것입니다. 소년과 소녀 모두 손을 꼭 잡고 들어갔을 때, 둘 모두 이상한 곳으로 빠져버리면 어떡하죠? 아니면 살지 못할 지도 몰라요. 어떤 결과든 함께 살던 곳으로 가지 않으면 끔찍한 결과일 것입니다. 싫어요. 허공에 남는 것만큼 싫은 결과들이에요. 모험은 너무 무서운 것입니다.

그럼 어떡하죠? 명쾌한 답을 낼 수 없는 소년은 흐트러짐을 발견했음에도 아무런 행동을 취할 수 없습니다. 그저 무시해버릴 뿐이죠. 그렇게나 기다렸던 흐트러짐임에도 말이에요.    

흐트러짐은 더욱 더 커다랗게 상처를 만들어 내고 소년은 계속해서 그 상처를 무시했습니다. 답을 내지 못한다면 그 흐트러짐은 소년에게 필요치 않습니다. 지금의 평화를 깨버리는 나쁜 존재가 될 뿐이에요. 삶의 구원이 평화의 파괴가 되어버렸습니다.

소녀를 만난 건 행복일까요? 아니면 불행일까요? 허공의 끝없는 외로움을 걷어준 것은 소녀지만 또, 삶의 구원을 망쳐버린 것도 소녀입니다. 처음을 알려준 것도 소녀지만 끝없는 고민을 안겨준 것도 소녀지요. 모두 소녀에요. 그래서 소녀가 어떤 존재인지 정할 수 없습니다. 좋아하는데 미워져서 너무 싫습니다. 왜 소년은 허공에서 소녀를 만났어야 했을까요? 차라리 시간 여행 중 마주치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면, 시간 여행 도착지에 살고 있던 사람이었다면, 태어나 자란 그 시간의 사람이었다면 이렇지 않았을 거예요. 소녀에게 배운 운명이 이리도 잔인합니다. 다음 정해진 운명은 절대 오지 않기를 소년은 저도 바랐습니다.




“있잖아! 나 신기한 걸 발견했어!” 


너도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일 거야! 분명해! 소녀의 밝은 목소리가 소년의 하얀 손을 이끌었습니다. 무언가 찝찝한 기분이에요. 소녀가 찾은 것 같습니다. 흐트러짐을. 콩닥콩닥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심장이 너무 바삐 뛰어 숨을 못 쉴 거 같아요. 소녀가 함께 벗어나자고 말하면 어떻게 해야 하죠? 이 흐트러짐 사이로 가면 벗어날 수 있다고는 말했지만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는 한 적이 없단 말이에요. 어떻게 대답해야할까요? 어떻게 반응해야할까요? 콩닥콩닥 뛰던 가슴을 따라잡지 못해 손이 덜덜 떨립니다. 숨이 가빠와요. 소녀는 그런 소년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결국 흐트러짐 앞으로 소년을 데려와 버렸습니다. 가빠오던 숨이 턱 막혀버렸어요. 


“이거 봐! 신기하지?”

“어? 어어…….”

“뭐야. 반응이 왜 그래?” 


소녀의 맑은 목소리가 소년의 귓가에 둥둥 울렸습니다. 꼭 언젠가 우주를 구경하다 보았던 작은 북 같은 울림입니다. 소녀가 자꾸 무언가 물었지만 소년의 귀에 정확하게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모두 둥둥 울리기만 했어요. 둥둥, 둥둥, 둥둥둥, 둥둥. 점점 빨라지는 북소리를 견디지 못한 소년은 결국 커다란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갔습니다. 허공의 끝이 없는데도 끝이 보일 때까지 계속 뛰었습니다. 생각은 어려워요. 결정할 수 없는 고민이구요. 소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요? 무엇이 잘못이었던가요? 소년이 소녀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결정을 내리기 쉬웠을까요?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소녀를 버리고 이미 흐트러짐 사이로 도망쳤을까요? 둥둥 울리던 북소리만큼이나 빠르게 온갖 생각이 소년의 뇌 사이로 파고들었습니다. 소년은 그 고통을 참지 못하고 계속 소리를 내질렀어요. 목이 쉬지 않습니다. 숨이 가쁘지 않아요. 허공의 끝을 맛 볼 만큼 달렸는데 힘들지 않습니다. 너무, 너무 끔찍했어요! 소년이 보낸 모든 시간 중 가장 끔찍한 순간이라구요! 소년은 결국 뜀박질을 멈추었습니다. 고민의 고통에 도망쳤는데 더한 고통이 찾아와 더 달릴 수 없었습니다. 결정을, 결정을 해야 합니다.



“너, 요즘 좀 이상한 거 같아.”

“…어디가?”

“그냥 뭔가 이상해. 배우려고 하지도 않고, 별을 세려 하지도 않아. 우주를 바라보지도 않고, 나랑 이야기도 하지 않아.” 


혼자 허공에 붕 뜬 널 보고 있는 것 같아. 소녀는 서운한 듯 이야기했고, 소년은 뭐라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직 고민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언제쯤 정할 수 있을까요? 소년은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뜀박질을 했습니다. 달리고 달리면 다시 고통이 찾아왔지만 또 달리고 달리면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년은 쉴 새 없이 뜀박질을 했고 소녀는 그런 소년을 기다리며 우주를 바라보았습니다. 가족들을 바라보기도 했고, 친구들을 바라보기도 했고, 무한한 우주를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시간과 함께 있는 우주를 끌어안고 드넓은 우주를 바라보았습니다. 언젠가 다시 무언가 배우려고 하는 소년을 소녀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언제쯤 소년이 소녀에게로 올까요? 소녀는 오늘도 달리고 있는 소년을 기다리며 우주를 바라봅니다.

고민의 끝은 포기였습니다. 소년은 소녀를 위해 희생하는 것으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빠가 살아있는지 알지 못하는 저보다, 당장 저 우주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많은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소녀가 허공을 빠져나갔을 때, 훨씬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소년은 다시 외로워지겠지만, 소녀가 오기 전까지 언제나 그랬으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녀가 없다는 생각을 하기만 해도 손이 덜덜 떨리는데, 어리석게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소년은 곧바로 소녀를 균열에 데려갔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는 동안 균열은 소년이 과거에 봤던 만큼 커져 있었습니다. …이제 돌아가. 며칠 만에 들은 소년의 목소리는 너무 딱딱하고 축축해서 소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돌아가라고 했어요. 분명 소년은 돌아가라고 말했어요. 소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처음 만났던 날, 소년은 돌아가는 방법을 아무 것도 모르는 것만 같았거든요. 설령 돌아가는 법을 알고 있더라도, 이렇게 단호하게 밀어 넣을 친구는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가만히 끌어안았던 그 때 그 하얀 손으로 소년은 소녀를 균열로 이끕니다.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않고, 아주 불친절하게 말이죠.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소녀는 그런 소년의 손을 뿌리칩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데, 눈물은 나지 않습니다. 눈물샘도 시간과 함께 멈춰버린 모양입니다. 버릇처럼 손을 들어 눈가를 벅벅 닦던 소녀는 그제야 소년만큼이나 하얗게 변해버린 제 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온기도 없고, 시간 한 끗조차 남아있지 않은 새하얀 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도 모르는 새에 허공에 있던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나봅니다. 


“돌아갈 때야. 지금이 아니면 못 가. 이것 봐. 네 손도 나처럼 변했잖아.”

“그럼 너는? 너는 같이 안 가?” 


응, 같이 못 가. 꼭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만 같습니다. 단 한 번도 이렇게 소녀에게 단호하게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제 외로움을 끝내준 친구니까,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선생님이니까 소년은 언제나 소녀에게 나쁜 말을, 다정치 못한 말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오늘은 그렇게 해야 합니다. 소녀가 이제 우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이제 더 이상의 고민으로 결정이 뒤바뀌기 전에, 균열이 아무도 삼키지 않고 입을 닫아버리기 전에 소녀라도 돌려보내야 한다고 소년은 생각했습니다.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어. 네가 먼저야. 네가 먼저 가족에게 가는 게 맞는 거야.” 


잘 가, 조심해서 가, 안녕. 소년은 소녀를 힘껏 밀었습니다. 힘을 버티지 못한 몸이 균열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이제 다 끝이에요.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던 사람의 온기도, 작은 목소리를 함께 했던 대화도, 죽을 만큼이나 괴로웠던 고통, 혹은 고민도 이제 다 끝이에요. 소년은 부디 소녀가 안전한 여행을 하길 바랐어요. 이제 다시 이곳을 찾지 않았으면 해요. 부디 그랬으면 해요.




____ 장미 therosenove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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