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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냥깜냥 May 07. 2020

하얀 달

written by 다온


   

죽었다.

뒤에서 무언가가 나를 찔렀다. 아마도 칼이었지 싶다. 누가 나를 찔렀고 왜 찔렀는지도 모르고 이어서 두 번, 세 번, 등과 허리에 여러 차례 날카로움이 찔러 들어왔다. 곧장 앞으로 쓰러졌고, 등이 찢어진 듯이 아팠다. 어쩌면 정말 찢어져 있던 걸 수도 있지만. 나를 해친 발소리가 멀어지는 게 들렸다. 옆구리를 타고 흐르는 뜨끈한 피가 느껴졌다. 그에 비해 봄의 길바닥은 생각보다 차가웠고, 퀘퀘한 흙모래 냄새를 맡으며 눈을 감았던 것 같다.

눈을 떴을 땐 병원이었다. 어렴풋한 무의식이 흐르듯이 생각했다. 길 가다 난데없이 칼 맞고 그대로 실려온 걸까. 수술했나.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분간하지 못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부터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의사? 간호사? 부모님? 어떻게 다 맞추긴 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게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나를 둘러싸고 있긴 했는데 지금의 나는 아니라는 거다. 정신이 들 때쯤 나는 애초에 병원 침대에 누워 있지도 않았고, 어느 수술실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웅성대는 소리는 시끌시끌하게 커지더니 이내 세상에 첫 울음을 내지르는 아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저 우는 아기가 나라는 것을.

여기서 눈을 뜨기 전에 캄캄한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었다. 죽은 자는 추억을 쫓아 어디든 다니며 이승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는 과정을 거친다. 애석하게도 직접 겪지 않은 곳에는 갈 수가 없어서, 오로지 기억에 의지해서만 이동할 수 있다. 추억이 담긴 장소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가 있다. 특별한 장비 없이 그냥 본인이 간직하고 싶은 그 공간의 모습을 바라본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면 그 시야 그대로 마음 속에 촬영이 된다. 그러니 이제부터 네 마음껏 여행을 다녀와라.

행복한 얼굴로 조그마한 핏덩이를 안아보는 부모님이 보였다. 나의 첫 순간은 이랬구나. 내가 태어난 병원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어머니가 이곳을 드나들며 나를 낳을 준비를 하고, 아파하기도 했을 것이 눈에 선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여행’하면 된다는 거 아닐까.

나는 유년을 따라 기억을 되짚고 자잘한 추억을 따라 여행을 이어갔다. 왠지 어른이 된 것만 같았던 초등학교 입학식 날의 운동장, 세상에서 가장 신이 나 뛰어다니던 알록달록한 놀이동산, 소중한 친구와 싸우고 찔끔 울며 화해했던 동네 공원. 음악이 하고 싶어 처음으로 찾아가 본 악기 상가. 가족 여행을 갔던 오사카, 제주도, 대구.

고등학교 친구들과 조촐한 졸업 여행을 떠났던 기억을 따라 부산에 도착한 순간, 으레 사후 세계를 다루는 영화들이 그러하듯 그 어떤 사람이나 물건과도 접촉이 되지 않던 내 몸에 누군가가 부딪혔다. 툭 부딪히고 서로가 당연스럽게 아, 하는 소릴 냈다. 그리 세게 부딪히진 않았으나 오랜만의 접촉 탓에 어깨를 매만지며 고갤 드니 내 또래의 아이가 하나 있었다.


“……저, 방금, 닿았죠?”

“아, 네. 그렇네요.”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그 아이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허둥거렸다. 얘는 뭔가 다른 건가? 뭘 더 물어봐야 하지? 당신도 죽었나요? 당신은 나와 어떻게 대화를 할 수 있는 건가요? 당신도 어딘가를 여행했나요? 물음표가 가득한 내 얼굴을 읽기라도 한 건지 아이가 웃었다. 그 웃음에서는 내가 알 수 없는 세월 같은 게 조금 느껴졌다.


“은호라고 해. 말은 편하게 하자. 이미 죽었는데 뭐가 중요하겠어.”

“아, 어……, 그래. 저, 나는, 예준이.”

“많이 놀랐지? 죽었는데 사람을 다 만나고. 놀라는 게 당연해.”

“응……. 아직도 실감 안 나. 얼마 만에 목소릴 내는 건지도 모르겠다.”


은호는 이해한다는 듯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았다. 맞닿았던 어깨에 온기는 없었다.


“나도 너처럼 죽은 사람이야. 여행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있었어. 너랑 같아.”

은호의 마음 속엔 얼마나 많은 사진이 있을까. 공유는 안 되는 건가. 사후 세계는 생각보다 괜찮으면서도 번거롭네. 별 시덥지 않은 생각을 채울 즈음에 은호가 나를 불렀다.

“예준아, 어디 가던 길이야?”

“응?”

“괜찮으면 같이 다닐래?”

“어…… 내 추억 그닥, 재미는 없는데.”

“나도 그리 재미있지는 않지만, 같이 다녀보고 싶어서.”


나는 여유있게 웃는 은호를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여행하기 시작했다.

나는 은호의 추억의 장소에 가본 적이 없지만, 은호가 함께 있으면 괜찮았다. 처음 보는 공간에 대해 은호는 조근조근 자신의 추억을 이야기해 주었다. 하나같이 소중한 추억들이었다. 은호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즐거웠고, 내 이야기를 해주는 것도 꽤 즐거웠다. 은호는 부산에서 살던 사람이어서, 이 주변에 대해 많은 것을 들려주었다. 은호의 이야기에 비해 세상은 너무도 빠르게 변해버렸지만, 은호의 기억 속에는 옛모습 그대로가 선명하다고 했다. 하루종일 은호의 기억 속 부산을 함께 여행하고 느긋하게 해가 저물어갔다. 우리는 아무 집의 옥상에 드러누워, 붉게 물들었다가 파랗게 번지는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사진은 많이 찍었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아. 은호 네가 더 많이 찍지 않았을까? 나는 이제 한 3일? 4일? 얼마 못 돌아다니기도 했고.”


은호는 이제껏 나처럼 누군가와 부딪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 그건 아마 은호 자신이 너무 오래 이승을 떠돌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동행을 제안하게 된 건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뚜렷한 이유는 모르지만, 그저 함께 다녀보고 싶었다고 했다. 은호는 모르고 나는 아는 것들과 내가 모르고 은호가 아는 것들이 교차할 때마다 우리는 웃었다. 비슷한 또래지만 은호의 시간이 멈추지 않고 이승과 같이 흘렀다면 아마 은호는 적어도 내 나이의 두 배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예준아,”

“응?”

“죽을 때 어땠는지 기억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상냥하고 배려가 깊은 목소리였다.


“음……, 사실 잘 모르겠어.”

“아팠어?”

“약간……? 아니, 좀 많이 아팠던 것 같아. 뒤에서 누가 날 찔렀어. 칼로 등을, 여기랑, 여기랑. 정확히 세지는 못했고 아무튼 여러 번 등이랑 허리가 푹푹.”

“말만 들어도 아팠겠는데.”

“범인은 잡혔으려나 모르겠어. 내 장례식은 잘 끝났는지도. 내 시체 발견했을 지나가던 사람이 좀 불쌍하기도 하고.”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난도질 당한 넌?”

“뭐……, 괜찮아. 지금은 멀쩡하잖아.”


이미 죽어놓고 멀쩡하다는 말이 웃겼다. 은호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은호가 웃을 땐 어딘가 포근한 느낌이 있다. 청량하기도 하고. 고작 하루 정도 함께 있었는데도 오랜 친구 같다.


“너는?”

“응?”

“은호 너는 어땠어?”


떨어졌어. 집 옥상에서 떨어지고 싶었는데, 집은 너무 낮아서 이름 모를 높은 건물 위로 올라가서, 그대로 몸에 힘을 빼고 아래로 떨어졌어. 그래도 한 번에 바로 죽기에는 모자란 높이였나 봐. 지금은 까마득히 높은 건물이 훨씬 많이 보이는데, 그땐 그렇지 않았거든. 아팠는지는 잘 모르겠어. 너도 대화하면서 느꼈겠지만 나는 죽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까. 그래도 몸 곳곳이 으스러진 듯이 아팠던 걸로 기억해. 머리카락이 피로 축축이 젖어드는 게 느껴지고, 바닥에 닿은 뺨은 시리도록 차가웠어. 엎드려 있었는지 누워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하늘이 보였어.


“근데 그 밤하늘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더라.”


달이 원래 그렇게 환했는지, 내가 모르고 산 건지, 아님 그 날만 그랬는지. 다 잘 모르겠어. 하지만 확실한 건 살면서 본 달 중에 가장 하얗고 눈부셨다는 거야. 죽은 뒤에도 매일 달을 보고 있지만 그 날의 달만큼 그렇게 하얗진 않더라.


“예뻤어. 이렇게 잊을 수 없을 만큼.”


은호의 나직한 목소리가 이야기를 끝마치듯 가라앉았다. 그 사이 밤은 더 깊어가고, 새벽이 밝아올 듯했다.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도록 한 건 아닌데, 아마 내가 체감하는 시간과 이승의 시간은 다른 것 같다. 은호가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햇살이 가득히 내려올 때까지 우리는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은호가 보았을 달을 가만가만 떠올리다, 내가 먼저 새 이야기를 꺼냈다.


“은호야, 우리 바다 보러 갈래?”

“응? 어디 바다?”

“나 친구들이랑 여행 갔었거든, 광안리로. 너도 거기 알지?”

“그럼, 알지. 가까이 살았었어.”

“같이 가자, 광안리.”


이제 더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목적지로 도달할 수 있었지만 언젠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평범한 사람처럼 버스를 타고 지하철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산 사람들 사이에서 바다로 향했다.

마침내 도착한 봄의 바다는 한적했다. 모래사장에 가만히 앉은 사람들, 반려견과 산책을 나온 사람들,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시리도록 투명했다. 사실상 우리가 느낄 온도 같은 건 없지만, 차디찬 바람이 우리를 꿰뚫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나 죽을 때, 무의식 중에 떠올리던 게 생각났어.”

“뭔데?”

“컴퓨터에 저장해뒀던 부끄러운 작곡 초안, 지워둘 걸. 친한 친구한테 말해서 혹시 이런 일 생기면 대신 지워달라고도 할 걸. 이대로 죽을 줄 알았으면 대학교 가지 말고 음악이나 더 할 걸. 그 등록금이면 살 수 있는 장비가, 하아.”


내 가벼운 후회를 듣고 은호는 웃었다. 우리 그 초안 들으러 가볼까? 장난스런 제안에 나는 펄쩍 뛰며 절대 안 된다고 소리쳤다. 상상만 해도 숨고 싶은 상황을 떠올리며 목 뒤가 홧홧해졌다가 나도 금방 은호와 같이 웃어버렸다.


“누군가는 네 흔적을 쫓아 살고 있을 거야. 네가 지금 네 추억을 쫓아 여행하고 있듯이. 남은 사람들에게는 그런 흔적들이 꽤 필요해. 그래야 너를 추억하고, 너 없는 세상을 버티고, 살아낼 수 있을 거야.”


우리도 다른 사람들처럼 모래사장에 적당히 앉아 흘러가고 흘러오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았다. 탁한 듯한 푸른빛이 몰려와 하얀 거품을 만들고 스으윽 뒷걸음질을 치다가 다시 훌쩍 다가왔다. 저 멀리로 시선을 옮기면 어디까지가 바다고 어디부터가 하늘인지 모를 경계가 아득히 펼쳐졌다. 하늘과 바다가 만나 세상이 뒤집혀도 모를 듯한 쪽빛을 시야에 담으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마음 속 한 켠에 선명한 사진이 찍혀 있었다.


“예준아, 사진 찍어줄까?”

“……내 사진?”

“응. 내가 가져갈 네 사진,”

“그럼 나도 찍어서 가질래, 네 사진.”


은호는 환한 얼굴로 일어나 바다 쪽으로 좀 더 걸어갔다. 넘실대는 파도에 발이 닿을 듯 말 듯 할 즈음 뒤를 돌았다.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은호의 머리칼도, 내 눈을 마주보며 자연스럽게 웃는 얼굴도, 나와 부딪혔던 둥근 어깨 그 너머에 눈부시게 빛나는 푸름도, 간직하지 않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꼭 기억하리라는 마음을 담아 정성스럽게 사진을 찍었다. 조금 전에 찍어두었던 사진 옆으로 은호의 사진이 자리했다. 은호만큼 예쁘게 웃진 못했지만 나름 행복한 얼굴의 내 사진은 은호의 마음에 쏙 들어갔다. 잘 찍혔네. 기분 좋은 목소리가 언제나 나를 편안하게 한다.

각자의 사진을 찍어주고 나서는 사박거리는 소리가 나는 모래알 위를 거닐며 수다를 떨었다. 동네가 어땠고 학교가 어땠고 하는 평범한 이야기들. 그리고 은호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들었다.


“예준이 너는 데자뷰 자주 느꼈어?”

“음, 자주는 아니고 가끔? 왜?”

“우리가 이렇게 사진을 찍잖아. 내가 살아온 기억 중에서 간직하고 싶은 추억의 공간들을 여행하면서 사진을 하나둘 찍으면, 그게 다음 생에서의 데자뷰가 되는 거야. 처음 보는 곳인데 익숙한 것 같고, 와본 것 같고. 그런 느낌은 네가 이전 생에서 ‘사진’을 남겼기 때문인 거야. 다음 생의 너는 지금 네 마음에 남은 공간들을 지날 때 그런 데자뷰를 느끼겠지.”

“진짜 신기하다. 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

“너를 만나기 이전에 마주쳤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가르쳐줬어. 그 사람은 이걸 어떻게 알았는진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 사람도 누군가를 마주치고, 그 누군가도 다른 누군가를 마주쳤던 건 아닐까.”


바람이 불면 사르르 날리는 모래처럼 은호의 목소리는 바람결에 섞여 저 너머로 날아갔다. 내 목소리도 그런 느낌으로 사라지고 있을까. 애초의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서로뿐이라 잘 모르겠다. 내 몸으로 돌아다니고 내 목소리로 이야길 하고 있지만 나는 결코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이렇게나 모르는 것이 가득한데 은호는 모든 걸 다 깨달은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도 긴긴 여행을 하고 있다. 넌 어디에 마음이 묶인 거야?

차마 묻지 못한 물음을 꿀꺽 삼키고 나니 어느덧 밤이 되었다. 오늘은 내가 이 바다에 여행을 왔을 때 묵었던 숙소의 건물 위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 3층 방에 머물렀었는데, 새벽 4시가 되도록 실컷 웃고 떠들었던 기억을 은호에게 짧게 들려주었다. 왁자지껄했던 그 날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 여행을 함께 했던 친구들은 많이 울었을까. 가족들은, 다른 지인들은, 나를 잘 떠나보냈을까.

우리의 여행은 생전의 기억에만 의지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죽은 이후에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보러 갈 수 없다. 그 사실이 조금 아쉽다가도, 만약 나를 보낸 뒤의 그들을 바라보면 이승에 마음을 놓기는커녕 더 머물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게 될 것만 같으니까, 이 세계의 규칙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나는 떠난 사람의 몫을 하고 있으니, 그들은 남겨진 이들의 몫을 잘 해주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 믿음 속에는 그들이 잘 지내길 바란다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고, 그들보다는 하늘에 가까울 수 있는 내가 바라고 바라면 좀 더 잘 닿을 소원이지 않을까.


“예준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언제나처럼 나긋한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천천히 눈을 뜨고 옆쪽에 누운 은호를 돌아볼 생각이었으나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고갤 돌려야지 하는 의지도 한참을 떠올리던 생각들도 단숨에 날아갔다. 줄줄 떠다니는 상념들로만 가득했던 시야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새하얀 달이 환하게 들어찼다.

달이 원래 이렇게 하얬던가. 이렇게 환할 수가 있나. 이렇게 예쁠 수가 있나.

먼 어느 날의 은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멀지 않은 곳에서 작은 축축함을 느낄 수 있었다. 더욱 투명하게 반짝이는 물빛을 나는 모른 척한 채, 하이얀 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고요하고 사랑스러운 밤이 지나가고 있었으니까.

어느샌가 눈을 감았다 뜨니 다음 날 저녁이 되어 있었다. 저무는 노을빛이 바다와 하늘을 하나같이 물들이고, 몸을 일으켜 앉으면 옆에는 잔뜩 웅크린 채 눈을 감고 있는 은호가 보였다. 마치 자고 일어난 것만 같은 느낌에 기지개도 켰다. 하늘을 향해 쭉 뻗었다가 내린 손으로 조심스럽게 은호의 어깨를 흔들었다. 살살 움직이는 느낌에 천천히 눈을 뜬 은호는 개운한 낯빛이었다. 은호도 내가 그랬듯 일어나서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잘 잤어?”


다정한 물음과 따뜻한 목소리. 나는 미소를 지었다.

처음 부딪힌 이후로 닿은 적 없던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 다홍빛으로 가득한 세상을 향해 바로 섰다. 한 발자국 앞으로 걸었더니 저만치 문이 하나 생겼다. 그 문은 마치 어제의 달빛처럼 눈부셨다. 살아 있는 다홍빛 세상은 천천히 짙고 푸른 밤에 물들어갔다. 오늘도 달이 뜨고 있을 것이다.

은호가 내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나도 딱 그만큼 더 은호의 손을 잡았다.

우린 다음 생에 꼭 만나게 될 거야. 분명 좋은 친구가 될 거야. 우리 그때는 숨 쉬는 몸으로, 세차게 뛰는 심장을 가지고 만나자.

몇 발자국 더 내디딘 곳 바로 앞에서 함께 문고리를 잡고 동시에 문을 밀어 열었다. 새하얀 빛이 우리를 감싸 안았다.

우리는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려 한다.

  


____ 다온 writerda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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