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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냥깜냥 Jun 10. 2020

파란 거짓말 04.

written by 장미


파란 거짓말 04. 

 w. 장미



**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력감은 찬위가 가장 좋아하지 않는 감정 중 하나였다. 손과 발을 아무리 움직여도, 입을 열고 어떤 말을 해도 그 무엇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언제나 찬위를 공포로 몰아넣었으니까. 그래서인지 꿈 속의 바다는 더욱이 고통스럽고, 무서운 공간이었다.

찬위는 가라앉고, 또, 가라앉고, 점점 더 가라앉아 바다의 밑바닥에 도달했다. 분명히 여기까지 태양의 빛은 들어오지 못할 텐데 어째서인지 찬위의 주변은 밝기만 했다. 눈 위로 가득 찬 바다가 일렁인다. 바닥에 눕고 나서야 찬위는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손을 흔들 수 있었고, 발을 움직일 수 있었다. 몸을 일으키고, 다리를 세워 물 속에서 우뚝 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면은 닿지 않을 만큼 높은 곳에 존재해 있다. 현실감이 하나도 없는 꿈이다. 바다 아래에 서 있는 것도, 물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눈을 뜨고 있는 것도, 헤엄치는 것보단 공기 속에서 걷는 것에 가까운 움직임도 현실감과는 정 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찬위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바닷속을 어색하게 걷기 시작했다. 세상이 너무 파랗게 보였다.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의 푸른 빛이 찬위의 눈을 아프게 찌른다. 왜 이런 꿈을 꾸는 거지? 그런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이 꿈에는 어떠한 이야기도, 감정도, 이유도 없어 보였으니까. 그저 바다에 저가 존재하고, 그것만으로 끝인 것 같았다.

꿈은 아주 짧은 시간에 순식간에 지나가는 머릿속의 이야기라고 들었다. 사람은 꿈 속에서 무수한 시간을 보냈다고 느끼지만, 사실 그것은 실제로 5분 정도의 짧은 시간에 느낀 허상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닐 텐데, 바닷속의 시간이 너무나도 길다. 5분이라며, 그건 눈을 뜨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는 진실일까? 찬위는 당장 지금 이 꿈이 5분임을 깨닫고 싶었다. 길고 긴 시간을 홀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과 여름을 맞이하여 놀러갔던 해수욕장과 달리 이곳은 외롭고 쓸쓸하기만 했다. 악몽, 이게 바로 악몽이구나. 어렸을 적에 엉엉 울며 꾸었던 꿈들은 다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질 만큼 바다는 공포였다. 살려줘,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 숨이 너무 막혀. 그렇게 생각했을 즈음에 찬위는 눈을 떴다.    


      

**          



하아, 하아, 하아….

가쁜 숨을 잠재우기 위해 폐에 가득 공기를 채우고 내뱉는다. 꿈에서와 달리 목이 쩍쩍 갈라질 만큼 건조한 공기는 찬위를 기쁘게 했다. 코와 입 안으로 짠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는다. 건조하기 짝이 없는 공기는 폐에 있는 물을 날리고 건조하게 말려주는 것 같았다. 실제로 바다에 다녀온 것처럼 찬위의 온 몸은 짠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남색의 이불도 축축했고, 새벽이 칠한 하늘도 축축한 색깔의 옷을 입고 있었다. 방도 물에 잠식되어 버린 것 같다. 찬위는 덜컥 겁이 나서 몸을 일으키고 문을 열었다. 저와 함께 바닷물이 문밖으로 쏟아진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고요한 집안에 혼자 덜컹거리는 큰 소리를 내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물을 틀고, 짠물들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보일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서 차디 찬 물이 머리 위로 마구 쏟아진다. 서늘한 몸이 더욱 차갑게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몇 시지? 제 정신을 차리고 정상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물이 따뜻하게 데워지고도 한참 지난 후였다. 몸을 씻어내기에 알맞은 온도가 되고, 조금 더 뜨거워질 때까지 물만 맞고 있던 찬위는 달라진 온도를 느끼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리를 감고, 몸을 씻어내고, 얼굴을 닦았다. 평소 씻던 대로 다 씻고 나와 시간을 확인하니 6시도 되지 않았다. 어머니도 일어나지 않았을 게 분명한 시간이다. 축축한 머리에 수건을 대충 얹어 놓고 저가 열어놓은 제 방의 문을 꽉 닫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물이 다 빠진 방은 잔뜩 어지럽혀져 있었다. 찬위는 제대로 밀어넣지 않은 의자에 앉아 어제 저가 적어 놓은 글을 차근차근 읽어보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시작할 거짓말들이 그에 따른 예상 답변과 함께 빼곡하게 적혀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저 자신을 다독이면서 이르게 학교 갈 준비를 한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자신이 없었다. 일찍 일어난 김에 빨리 준비해서 학교에 가 있을 참이었다. 아무도 만나기 싫어. 학교에 갈 때까지 그 누구도 보기 싫어. 그 마음이 찬위를 다독여 빠르게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거짓말을 잔뜩 적어놓은 노트도 빼놓지 않고 가방에 넣어 챙겼다. 이제 막 동이 틀 무렵, 찬위는 집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교복은 제대로 갖춰 입지도 않은 모양새였고, 운동화도 제대로 신을 생각을 못 했는지 엉망진창이었다. 그 모양으로 찬위는 달리기 시작했다. 혹시 아파트를 벗어나다가 재영이를 만날까봐, 학교 가는 거리에서 그 외에 다른 친구들을 만날까봐, 학교에 들어섰는데 모르는 친구들이 불이 났던 과학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봐, 재빠르게, 아주 재빠르게 달렸다.          


당연하게도 교실에 도착할 때까지 마주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방을 대충 책상 위에 던져 놓고 자리에 앉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불도 제대로 켜지 않은 교실에 저 혼자 앉아 있다. 이제 반에 애들 한 둘이 오기 전까지는 안심하고 있어도 좋을 것이다. 그 전까지 거짓말을 연습하고, 오늘 있을 일을 생각해봐도 좋을 것이다. 마음을 내려놓으며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도 못한 꿈을 꾸어서인지 건조한 공기가 폐부를 스쳐 지나가는 것을 의식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뜀녀서 더 엉망이 된 제 교복을 단정하게 정리하고, 교실 불도 제대로 켜 놓고 나니 오늘도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가방 걸이에 가방을 걸고, 늘 하던 대로 교과서를 꺼내 공부를 시작하고 있으면 반에 들어온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저에게 인사를 하고 제 친구들과 떠들 것이다. 평소처럼 오늘 있을 이야기를 할 것이다. 과학실 이야기는…, 안 했으면 좋겠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일찍 나온 모양이다. 평소라면 친구들이 들어차 있을 만큼 기다렸는데 아무도 오지 않고 교실에는 찬위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가만히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 날과 같아 보였다. 반 친구들은 모두 운동장에 나가서 혼자 교실을 지키고 엎드려 있던 그 날. 꿈속에서 오늘과 다르게 커다란 불꽃이 저를 삼키려 했던 그 날 말이다. 제 손을 따라 움직이던 샤프가 뚝, 멈췄다. 반동 때문인지 샤프심도 똑, 부러졌다. 덜덜덜, 찬위도 모르게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다가 찬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그 이후로 과학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과학실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는다면 거짓말을 제대로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혹시나 다른 말을 했다가 거짓말을 들키면 곤란하다. 실내화가 빨간 구두처럼 착착 춤을 추는 것처럼 움직인다. 과학실로 가는 발걸음이 자연스럽다. 복도는 제대로 불이 들어와 있지 않았고, 학생들의 온기가 다 빠져 나가서 서늘하기도 했다. 이대로 가면 과학실도 뜨거웠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서늘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 같다. 찬위는 걷고, 또 걸으며 과학실의 모습을 상상했다. 들어갈 수 없으면 어떡하지? 지나가다가 누굴 만나면 또 어떡하지? 생각이 뭉게뭉게 차오른다. 여러 생각을 하며 걷는 찬위의 뒤로 진득하게 검은 그림자가 달라 붙는다.     


“어…….”     


과학실은 예상했던 것처럼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막아놓은 상태였다. 누가 보아도 큰일이 났던 것처럼 새까맣게 물들어 있는 과학실이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과 사뭇 달라 어색했다. 들어갈까, 말까 고민을 한참 하던 찬위는 몸을 숙이고 몰래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지금 학교에 있을 사람도 없으니 그냥 보고 오는 게 거짓말에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 아래에서 한 행동이었다. 그 날 이후 찬위의 모든 행동은 완벽한 거짓말을 완성시키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하여 움직였다. 거짓말을 완성시키고 의심 받지 않으며 사람들이 무난하게 이 일을 잊을 때까지 그렇게 버티고 있는 것, 거짓말을 하고 물들어 버린 파란 얼굴을 감추고 남들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생기 찬 얼굴로 살아가는 것, 그런 것들이 찬위가 완성해야 할 수행 과제들이었다. 사박사박, 이상한 소리를 내며 실내화는 까맣게 탄 재들을 밟아 나갔다. 교실은 그것의 모습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잔뜩 어그러진 상태로 홀로 버티고 있었다. 더 완벽한 것을 연기하기 위해 들어왔지만 찬위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모두 제 모습을 잃어버리고 까맣게 타버렸으니 말이다. 괜히 들어왔나. 그런 생각을 하며 차근차근 과학실의 모습을 눈에 챙겨 넣었다. 

과학실 안쪽에는 누가 억지로 문을 연 것처럼 입을 아무렇게나 벌린 작은 방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과학 선생님들이 비품을 보관하고 쉴 때 이용하시는 보조 교실인 모양이다. 왜 여기가 억지로 열려 있지? 찬위는 차근차근 문의 상태를 살피며 그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영화에서 본 것처럼 하얀 테이프로 사람의 흔적이 표시되어 있었다. 아마도, 과학 선생님이 여기에 계시다가 돌아가신 모양이다. 발끝에서 시작한 소름이 머리 끝까지 온몸을 따라 쭉 타고 올라왔다. 현실감이 머리 위로 무겁게 올라선다. 남의 이야기, 거짓말 해도 상관 없는 것, 그렇게 치부해왔던 것은 이렇게 차디 찬 현실이다. 사람이 죽었고, 과학실은 모두 불에 타 없어져 버렸다. 찬위는 이제야 그만 두는 게 맞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을 뒤로 빼고 물러서는 게 맞는 일일 것이다. 찬위가 가볍게 하던 수많은 거짓말과 결이 다르다.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발은 들어섰는데. 이 과학실에도, 거짓말의 시작에도 들어섰는데 찬위는 다치지 않고 발을 뺄 수 있을까? 사람들은 이미 시작에 들어선 찬위의 발을 물었는데? 마치 악어가 문 것처럼 발을 삼키고 빼려 해도 놓아주지 않을 텐데? 그럴 수 있을까? 하얀 사람의 그림자에서 점점 멀어지는 몸뚱아리가 딱딱하게 굳어간다. 몇 번이고 읽어서 다 외워버린 노트의 글도, 친구들이 나누던 그 이야기들도, 그만 두는 게 맞다고 외치기 시작한 머릿속의 경보기도 찬위의 머리 위에서 시끄럽게 나뒹군다. 무서워. 무서워. 그만 하고 싶어. 그 생각이 들자마자 찬위는 달리기 시작했다. 교실을 막아 놓은 폴리스 라인을 어떻게 벗어났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끊어버렸을까? 들어갔을 때처럼 살금살금 훼손하지 않고 잘 나왔을까? 그런 생각들은 사치에 가까웠다. 찬위는 당장 제 노트를 꺼내 거짓말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였다. 발을 빼고 싶어. 그만 하고 싶어. 이제 그냥 이런 거 안 하고 싶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얼굴을 따라 줄줄 흐른다. 엉엉,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고 줄줄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으며 찬위는 노트 위에 줄을 북북 그었다. 이것도 안 할래, 이것도 안 할래. 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과학실이 불타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과학 선생님을 되살리고 싶다는 정의감에서 비롯한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그때로 돌아가면 거짓말만 안 하고 싶다. 일어난 일을 막고 물 흘러가듯이 돌아가는 운명을 바꿀 생각을 할 만큼 찬위는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죽은 과학 선생님을 그리워할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냥 저가 했던 그 실수를 하기 싫어서, 단지 그 이유만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힘을 꽉 준 손이 북북 그어서인지 노트는 제 모양을 잃고 찢어지기 시작했다. 찬위의 정갈한 글씨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눈물은 얼굴을 채우고 책상 위로 떨어져 교실을 가득 채울 것 같았다. 꿈에서 벗어나려고 일찍 일어나 교실까지 왔는데, 여기도 그냥 바다였다. 찬위가 벗어나지 못한 꿈속의 그 바다와 똑같은 곳이었다.

숨이 꽉 막힌다. 물이 차올라서 폐부를 가득 채운다. 물이 폐를 스치고 지나간다. 건조한 공기는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다. 견디지 못한 찬위는 몸을 엎드려 엉엉 울기 시작헀다. 커다란 울음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운다. 웅웅 울리는 목소리가 꼭 물속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과 같아 보였다.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닌데. 내가 받고 싶었던 관심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돌아가고 싶다. 당장 어제로, 아니, 그것보다 더 이른 날로. 숨이 턱턱 막히니 가슴께가 절로 저려왔다. 심장이 아픈 건지, 물이 가득 찬 폐가 아픈 건지, 어디가 아픈 건지 찬위는 제대로 찾지 못하고 한참을 그 자리에서 울었다. 찬위가 그렇게 울 때까지 반에 들어온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          



눈물은 생각보다 그리 오랜 시간을 차지 하고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다. 현실은 잔혹해서 짧은 시간을 울게 한 후 몰려오는 감정을 인간이 모두 감내하도록 만든다.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멋있지 못하다. 훨씬 초라하고, 처량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비웃음이 나오게 만들기도 한다. 혼자 엉엉 울던 찬위는 혼자 자리에 멍하니 앉아 제 앞을 바라봤다. 친구들이 들어오기 전에 눈물을 닦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 할 텐데 그럴 기운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그냥 다 하기 싫다. 가만히 앉아서 친구들과 이야기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다가 집에 들어가고 싶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정신이 들면 어지럽혀진 제 책상을 차곡차곡 정리하게 되고, 그러다가 또 나쁜 생각이 들면 가만히 앞을 바라보고 있기만 한다. 찬위는 오늘따라 일찍 학교에 들어선 재영이 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러고 있었다.     


“찬위, 너 오늘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어? 재영아. 안녕….”

“너네 어머니가 너 일찍 나갔다고 집에 전화 왔어.”     


밥도 못 먹고 왔네. 무슨 일 있어? 학교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사온 것 같은 샌드위치를 뜯으며 재영은 제 자리에 앉아 찬위에게 말을 걸었다. 붉게 달아올랐을 눈가를 꾹꾹 누르며 찬위는 인조적으로 웃음을 만들어 냈다. 괜히 솔직하게 이야기해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잘 알아서인지 저도 모르게 새로운 변명을 만들어 냈다. 눈알이 절로 굴러가고, 입은 꾹 다물고 제 말을 찾아간다. 입을 열면 또 새로운 거짓말을 하겠지. 방금까지 하기 싫다고 생각했으면서.     


“엄마가? 왜, 왜?”

“너 요새 큰일 있는데 안 보이니까 걱정 되셨나보지. 내가 와본다고 했어.”

“아아…. 걱정 안 하셔도 되는데….”

“걱정 안 하겠어? 이렇게 상태가 구린데.”     


너 지금 얼굴만 보면 한 10년 더 늙은 애 같아. 과학쌤 일이 그렇게 충격적이야? 재영의 질문에는 질책이 한 점도 담겨있지 않다. 알고 있는데 회초리 마냥 제 뺨을 치는 것 같다. 재영은 과학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머릿속으로 말이 굴러가긴 하는데 적당한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적당히 재영이 판단하고 물러갔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며칠 만에 찬위는 너무 지쳐버렸다. 저가 벌려놓은 일을 해결하려고 이리 저리 뛰어봤지만 해결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힘들었다. 다 내려놓고 싶은 시점에 찾아온 재영은 그리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친구였다. 찬위가 정의롭지 못한다면 재영은 그 반대에 서 있는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애니까. 찬위가 솔직히 이야기한다거나, 거짓말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면 금방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맞다고 고백하라며 닦달할 친구였다. 재영은, 그런 친구였다.

차라리 다른 친구였다면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 다른 친구들은 저만큼이나 착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 애들이었다. 찬위가 거짓말을 했다고 솔직히 말하면 너 어떡하냐면서 걱정도 해줄 친구도 몇 있을 것이다. 그럼 찬위가 마음을 좀 놓을 수 있었을까? 새로운 길로 걸을 수 있었을까? 그렇게 잠깐 생각을 해봤지만 이미 찬위 옆에 있는 것은 재영이다. 새로운 거짓말을 해야 하고, 가던 길에서 빼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    

 

“너 화장실 좀 갔다 와. 진짜 꼴이 말이 아니다.”     


어, 어, 그래. 어색하게 대답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재영의 안쓰러운 눈빛을 못 본 척 하면서 찬위는 화장실로 발을 옮겼다. 진짜 세수를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해야 할 시간이다. 재영이 이상하게 봐도, 재영이 들어온 순간부터 찬위가 벗어날 길은 사라졌다.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 처음 바랐던 것처럼 이 일이 모두에게 잊혀질 때까지 저가 진실에 가까운 사람이면 된다. 세수를 하고, 볼을 착착 때리며 찬위는 제 마음을 가라앉혔다. 새빨간 거짓말을 하자. 남들이 못 알아볼 만큼 감쪽같이 새빨간 거짓말. 그 누구도 저를 의심하지 않고 과학 선생님을 잊을 때까지 말이다.          

교복 주머니에 들어있던 손수건으로 얼굴을 툭툭 닦으며 찬위는 복도를 걸었다. 시간을 끌기 위해 부러 한 층 위에 있는 화장실을 찾았다. 교실로 돌아갔을 때에는 재영 외에 다른 친구들이 더 와서 떠들고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아무렇지 않게 끼어들어 오늘 내도록 과학 선생님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할 텐데. 다른 반 친구들이 무슨 소리를 하든 끼어들지 않고 제 친구들과 다른 이야기를 하며 떠들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바닥을 보고 걷다 마주친 것은 새하얀 실내화였다. 누구지? 찬위는 앞에 있는 사람을 피하기 위해 발을 슬쩍 움직이면서 생각했다. 찬위는 같은 학년에 모르는 애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복도를 다니며 저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가는 친구도 잘 없었다. 아직 1, 2학년이 돌아오지 않았을 테니 같은 학년일 게 분명한데 인사를 하지 않는 친구…. 누가 있는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슬쩍 들어올리니 실내화의 주인은 저를 보고 가만 멈춰 서 있었다.     


“안녕?”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복도를 채운다. 몇 반이더라, 이름은 진주였던 거 같은데. 확실히 인사를 할 만큼 잘 아는 애는 아니다. 오히려 저렇게 인사를 하는 게 이상하다 느낄 수 있을 만큼 모르는 사이였다. 조용한 성격의 차분한 생김새를 가진 진주는 친해지기 어려운 느낌이 강했던 애니까. 먼저 인사를 하니 무시할 수 없어서 대충 인사를 한 찬위는 당황에 잔뜩 물든 얼굴로 진주를 바라봤다. 진주는 찬위를 보고 예쁘게 웃음을 지었다.     


“나 과학 선생님 봤는데.”     


웃음 뒤의 말이 찬위의 심장을 퉁, 떨어뜨렸다.



____ 장미 therosenove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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