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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냥깜냥 May 17. 2020

READY

written by 장미


READY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마치 새 연극을 준비하는 것처럼 말이다. 먼저 그동안 내가 서 있던 무대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비운다. 텅 빈 무대 위에 새로운 삶을 차곡차곡 쌓아 무대장치를 세우고, 관객들에게 내보일 연기를 준비한다. 그 밑에 깔릴 음악도, 그 위에 쌓일 조명도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남들이 보기에 우스꽝스러울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삶의 시작은 연극처럼 하나씩, 하나씩 정교하고 세밀하게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오늘은 가볍게 내가 새 삶을 준비하는 그 순간들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    


      

“환생자 201045번은 오늘부터 준비 시작하시면 되겠네요.”     


사람은 죽음을 뒤로 하면 새로운 세계에 도달한다. 아무것도 없이 태어나더라도 옷 한 벌 건지고 죽었다면 괜찮은 삶이었지 않냐고 묻던 어떤 노래 가사처럼 처음 보는 옷 한 벌 입고 덜렁 떨어진다.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게 놀랍지도 않은지 익숙한 얼굴로 새로이 찾아 온 사람을 반긴다. 윤빈은 거기에서 이름을 버리고 환생자 201045번이 되었다. 생각보다 그렇게 큰 숫자가 아니다. 2020년동안,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오래 전부터 사람은 죽었을 텐데 숫자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아서 윤빈은 당황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이십만천사십오번. 스스로 제 번호를 천천히 읊조려본다. 그리 나쁘지 않은 번호이긴 하지만 이렇게 작은 숫자를 받는다는 것은 여전히 이해가 잘 안 간다.      


“사람은 계속해서 삶을 반복하니까요. 당신은 신이 만든 201045번 인간이에요.”   

  

윤빈에게 번호를 쥐어준 사람은 간단히 궁금증을 해결해주었다. 무심한 얼굴로 툭 대답을 내뱉는 것이 한두 번 질문을 받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마도 거의 매일 사람들이 죽고 나면 이러한 질문을 내뱉겠지? 지금 당장 지구에서 살아있는 사람만 해도 억이 넘어가는 숫자인데, 저가 받은 숫자들은 그것보다 작은 경우가 대부분일 테니 말이다. 이름은 이제 없는 거예요. 번호 까먹지 말고 정확하게 기억하세요. 말 끝에 설명을 덧붙인 안내원은 컴퓨터로 보이는 물건에 대충 타이핑을 몇 번 더 하더니 다음 사람을 불렀다. 윤빈은, 아니, 이제 201045번이 된 인간은 천천히 안내소를 벗어난다. 이제 무얼 해야 하는 거지? 설명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당연하게 제 자리를 찾아간다. 아직 안내소를 서성이는 것은 201045번 뿐이다. 

한참을 멍하게 있었을까. 201045번은 방금 안내소에서 안내를 받은 사람을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당장 따라 붙으면 당황할 테니까 천천히 다가가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천천히, 천천히. 앞서 가는 발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다. 앞에 있는 사람은 201045번이 따라온다고 생각하지도 않는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자기 길을 열심히 간다. 문득 201045번은 제 앞에서 열심히 걷는 사람이 부러워졌다. 저는 무얼 해야 할지 정확히 알지 못해서 이렇게 떠도는데 앞에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아보였다. 당연히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고, 그것을 위해 나아가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201045번은 전생에도 그렇게 크게 멋있는 삶을 보내지 못했다. 남들과 비슷한 삶이었고, 치열했지만 빛나지는 못했다. 남들의 발끝을 따라가기도 바쁜 삶이었다. 죽은 이후에도 똑같은 것을 반복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자꾸 발이 멈추기도 했다. 몇 걸음 따라 걷다 멈칫, 또 몇 걸음 따라 걷다 멈칫. 그냥 따라가지 않을까, 하는 기분도 들고, 이렇게 따라가는 제 모습에 자괴감도 든다. 그렇지만 안내소로 다시 돌아가 멍하니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은 상상도 하기 싫어서 억지로 발걸음을 옮겨 본다. 툭, 툭, 생각이 그레텔이 떨어트렸던 빵조각처럼 201045번의 뒤로 하나씩 떨어진다.

201045번이 제 앞 사람을 따라 도착한 곳은 먼지가 가득 쌓인 극장이었다. 간판도 제대로 달려있지 않았고, 꾀죄죄한 모습이 이 극장의 나이를 대강 알려주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더러워서 그렇게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제 앞 사람은 201045번과 같지 않은 모양이다. 입으로 바람을 후후 불어 문고리에 붙어 있는 먼지를 대충 털어내고 딸깍, 문고리를 돌린다. 극장이 열리자마자 보물을 숨겨 놓은 사람처럼 후다닥 극장 안으로 들어간다. 201045번만 멍한 얼굴로 혼자 남아 있다. 따라들어가자니, 몰래 따라온 게 티가 나고, 그냥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하자니 안내소에서 서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속이 뒤틀리는데 201045번이 할 수 없는 것이 없다. 문고리가 다시 돌아가고 극장 문이 열릴 때까지 조금 기다리던 201045번은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신은 잘 모르지만 각자 할 일이 정해져있나보다. 나도 모르게 깨닫는 순간이 오겠지. 그럼 저도 안내소에서 바로 열심히 걸어가기 시작하던 사람들처럼 제 길을 찾아 걷기 시작할 것이다. 201045번은 멋있게 제 길을 찾아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길을 걷기 시작했다. 주위에 많은 건물들이 무얼 하는 곳인지 구경이라도 해볼 참이었다.   


       

타박타박, 타박타박, 타박타박. 길을 걷는데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마치 연극으로 유명한 어느 대학처럼 길에 모든 곳이 극장이었다. 아까 보았던 극장과 마찬가지로 먼지가 가득 쌓인 곳도 있었고, 깨끗히 정돈되어 당장이라도 연극을 시작할 것 같은 극장도 있었다. 문이 닫힌 극장도 있었으며, 문이 활짝 열린 곳도 있었다. 201045번은 그 중에서 문이 열린 몇몇의 극장을 들어가보기로 결정했다. 여기는 모두 극장인 것 같으니 안에서 사람들이 무얼 하는지 구경이라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201045번은 개중에서도 가장 깔끔해보이고, 문도 활짝 열린 극장에 들어갔다. 극장 안에는 다른 대기실이나 카운터 없이 곧바로 관객석이 나왔다. 극장 자체가 그렇게 큰 사이즈가 아니라서 관객석도 많지 않았는데 201045번은 대충 무대가 잘 보일 것 같은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대 위에는 멋드러지는 연극 대신 치열하게 청소 중인 사람이 하나 서 있었다.     


“저기, 혼자서 뭐하고 계세요?”

“오, 당신은 누구세요?”

“어, 어어, 저는 201045번이요.”

“아! 좋은 번호네요. 저는 1368번이에요.”     


그래서 뭐하고 계시는 거예요? 201045번의 질문에 1368번은 끝까지 아무런 대답을 해주지 않고 웃기만 했다. 손에 들고 있는 빗자루를 내려 놓고, 201045번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때까지 말이다.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에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여유가 흘러 넘쳐서 201045번은 괜히 분한 마음이 들었다. 저만 모르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1368번이면 정말 크지 않은 숫자다. 제 번호도 꽤나 작은 숫자라고 생각했는데 1368이라니…. 그 사이에 사람이 몇 명인지 세어보다가 쉬이 세어지는 숫자가 아니란 것을 깨닫고 바쁘게 움직이던 손가락을 모두 접어 주먹을 쥐고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1368번은 201045번의 질문에는 대답을 해주지 않고, 여기에 어쩌다 도착했는지를 물었다. 201045번의 궁금증은 절대 해결해주지 않겠다는 걸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201045번은 인내심을 가지고 1368번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을 해주기로 결정했다. 원하는 대답을 다 듣고 나면 저가 원하는 말을 해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냥, 다들 뭘 하는데 저는 하는 게 없어서요. 열려 있길래 들어 왔어요.”

“아하, 그럴 수 있죠. 여기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사니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나요?”

“살아있는 사람들보다는 작지만 엄청 많이요. 아마도 그럴 거예요.”     


환생고리는 늘 바쁘게 움직이거든요. 환생고리? 201045번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1368번은 그것에 대해서는 꽤 할 말이 많은지 입을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궁금한 것들이 많았지만 201045번은 1368번이 입을 닫을까봐 가만히 들어주기 시작했다. 1368번은 정말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전생에도, 지금도, 아마도 나중에도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일 게 분명하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201045번이 가만히 앉아 1368번의 말을 듣고 이해한 것은 이것들이었다.  

   

1. 사람은 정해진 숫자만큼 만들어졌다. 그 이후에 더 만드는 것은 신의 결정이다. 

2. 인간들은 죽고 사는 것을 반복하며 지구에 인간의 숫자를 유지한다.

3. 죽고 나서 온 여기는 정리하는 곳이다.

4. 환생고리는 새로 환생할 사람을 탄생으로 데려가는 고리이다.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환생고리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사실 정해진 이름은 아니다.     


몇몇은 201045번도 대충 눈치로 아는 것들이었고, 아닌 것도 꽤 있었다. 차곡차곡 지식을 쌓아 정리하고 나니 극장에 대한 것이 더욱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삶을 정리하는 곳에 있는 게 온통 극장 뿐이라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매번 다양한 삶을 살고, 새로운 직업을 택했을 텐데 그것과 상관 없이 삶을 정리하는 곳이 극장이라니,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201045번은 극장이랑 거리가 멀어서 이곳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근데 왜 다 극장 밖에 없어요?”     


한참을 떠들던 1368번이 모아둔 숨을 내쉴 때, 201045번이 잽싸게 제일 궁금해 한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을 듣자마자 1368번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런 질문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뭐, 이런 바보가 있지? 이런 표정에 제일 가까워보였다. 순간 기분이 나빠진 201045번은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게 맞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기 말고도 문이 열린 극장은 꽤 있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다른 극장은 조금 더 친절한 사람이 상주해 있을지도 모른다. 혼자 제 할 말만 하는 1368번과 다르게 201045번이 궁금한 점을 쏙쏙, 가르쳐 주는 친절한 사람을 만난다면 그게 더 낫지 않을까? 201045번은 그런 생각을 했다.      


“너 몇 번째 환생이야?”

“저도 잘 모르는데요.”

“그래서 그런가? 왜 이렇게 바보야?”

“…….”

“뭐, 지금 지구가 몇 년도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런 얘기 해보지 않았어?”     


주인공, 조연, 주연, 대사, 그런 말들. 사람들 삶에도 자주 빗대는 것들이잖아. 공연에 쓰이는 말들인데도. 1368번의 말에 201045번은 제 전생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처럼 연극에서 쓰이는 말들을 삶에 빗대는 일은 흔한 것이었다. 201045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1368번은 그런 201045번의 행동을 예상한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인간들이 그렇게 연극에 인생을 빗대는 것은 정말 삶은 연극과 같아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저마다의 극장을 가지고 있고, 그곳에서 삶을 연기한다. 내려온 배우는 한 사람의 스태프가 되어서 무대를 정리하고, 새로운 삶을 위한 무대를 준비한다. 모든 것이 끝나면 환생고리를 따라 탄생으로 간다는 것이 1368번의 긴 말을 짧게 요약한 것이었다. 1368번의 모든 말을 듣고 나니 201045번은 이곳의 분위기와 수많은 극장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지금 당장 201045번도 당연히 제 극장을 찾아가는 게 맞지 않을까? 제 극장도 삶을 정리하고 죽은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무대 위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무대장치를 내려주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고, 이곳처럼 깨끗하게 청소되기를 바랄 것이다. 201045번은 그런 결과로 생각이 도달하자마자 관객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덜커덩,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1368번의 지겨운 수다를 뒤로 하고 201045번은 극장을 벗어났다. 제 극장을 찾으러 가기 위해서 말이다.          



**          



주위를 몇 바퀴를 돌고 나서야 201045번은 제 극장을 찾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극장과 비슷한 크기를 하고 있는 제 극장은 먼지를 가득 쌓아올린 채 201045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 제 앞에서 열심히 극장을 찾아 걷던 그 사람을 떠올리며 201045번은 후, 후, 문고리에 입김을 불었다. 가벼운 먼지가 푸욱 일어나 살랑살랑 어딘가로 떠나간다. 조금이나마 깨끗해진 문고리를 잡아당긴다. 달칵, 소리와 함께 201045번의 극장의 문이 열렸다.

1368번의 극장과 마찬가지로 극장 문을 열자마자 바로 관객석이 나왔다. 201045번은 관객석 중앙에 앉아 지난 치열했던 삶의 무대를 바라보았다. 뿌연 색의 구름, 이상하게 삐죽삐죽 솟은 높은 빌딩들, 제 냄새가 잔뜩 배인 방, 그 외의 추억이 담긴 장소들의 단편까지. 커다란 무대 위에 아기자기하게 담긴 작은 소품 하나하나가 지난 삶을 담뿍 담아 예전을 돌아보게 하는 것들이었다. 201045번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제 할 일을 드디어 떠올릴 수 있었다.

일단 저 추억을 차곡차곡 모아 정리해야 한다. 극장 한구석에 몰아 넣어도 좋고, 다 쓰레기처럼 내다 버려도 나쁘지 않았다. 그 이후에 빗자루와 물걸레로 무대를 싹싹 쓸어놓고 환생고리를 기다리면 된다. 새 삶을 살 때에 넣고 싶은 무대장치를 설치해도 좋지만, 새로운 삶이 자유롭게 펼쳐지기 바란다면 그냥 텅 빈 무대인 채로 놔두어도 좋다. 무대 위에 펼쳐진 자유는 201045번의 의지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것이다. 빠른 환생을 하고 싶다면 당장 바쁘게 일을 시작해야 할 테지만 201045번은 굳이 그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아직 제 예전의 삶을 돌아보고자 하는 마음도 컸고, 빨리 새로운 삶을 시작할 의지도 없었다. 그래서 관객석에서 무대 위로 올라와 제 무대 장치를 손으로 살살 쓸어보기 시작했다. 추억이 사정없이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지난 삶의 이름은 윤빈이었다. 그래서 무대 장치 여기저기에 윤빈이라는 이름이 마구잡이로 쓰여져 있다. 제 영역표시를 아주 단단히 한 것 같아서 절로 웃음이 났다. 무대 위의 세트를 하나씩 만져본 뒤에 한 일은 그 위에 쌓아올렸을 조명과 아래에 깔려있던 배경음악을 틀어보는 것이었다. 너무 밝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예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어쩡쩡한 조명색과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밝은 장조로 진행되는 음악이 우스꽝스러운 모양으로 무대를 꾸민다. 무채색과 난색과 한색이 이상한 모양으로 무대 위에서 섞인다. 201045번은 그 위를 누비며 윤빈이 했던 대사를 읊조려 보고 지난 삶을 회상한다. 분장실 안에는 윤빈이 즐겨 입었던 옷과 자주 입었던 것들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모양으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이전의 삶이 얼마나 바빴는지 보여주는 증거와도 같아 보였다. 이렇게 바빴던 삶이니 깨끗하게 정리해도 괜찮지 않을까? 극장 구석에 쌓인 이전의 것들도 확인해보았다. 환생을 이미 한 번 건너온 후라 정확히 기억나는 것들은 없지만 한 눈에 보기에도 반짝반짝한 것들이었다. 그에 비해 무대 위에 있는 지난 삶의 산물들은 초라해서 201045번은 남기고 싶지 않았다. 윤빈이라는 이름도 내려놓는 것이 맞을 것 같아 보였고.     


“다 버리자!”     


극장 안을 다 울리게 외친 201045번은 손에 장갑을 끼며 극장 정리를 시작했다. 일단 바깥에 잔뜩 쌓인 먼지부터 닦는 게 먼저였다. 마른 걸레로 대충 많이 쌓인 먼지들부터 정리하고, 물걸레를 가지고 나와 깨끗하게 닦기 시작했다. 극장 자체는 낡지 않는 모양인지 먼지만 예쁘게 닦아도 광이 살아나고, 옛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해서 청소를 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201045번은 처음 시작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극장 외부를 모두 닦아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할 일은 무대 정리였다. 맨 먼저 배경이 되어준 낡은 커튼을 제거했다. 언제 무슨 마음으로 고른지 모를 회색의 커튼은 아주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다 떼어내고 나니 부피가 어마무시했다. 두 손으로 들고 옮기려 하니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바닥에 내팽개친 후 질질 끌어 극장 밖으로 커튼을 끌어냈다. 이게 제 지난 삶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담당했을 것을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이렇게 우중충한 색의 삶은 누가 봐도 재미 없을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201045번은 서서히 잊혀져 가는 전생과 같은 색의 커튼은 두 번 다시 무대에 달지 않을 거라고 몇 번이고 다짐하며 커튼을 치웠다. 다행히 여러 극장들 중간중간에 폐기물을 처리할 수 있는 커다란 쓰레기통이 있어서 커튼을 버리는 것은 그렇게 큰 일이 아니었다.

극장 외부, 무대 위의 커튼까지. 큰 것들을 다 정리하고 나니 이제 작은 것들이 201045번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무대 장치로 쓰여진 건물이나 제 방, 추억이 담긴 장소들도 모두 정리하겠다고 다짐했건만 다짐과 실행은 쉽게 하나로 모이지 않아서 201045번은 제 예전의 이름을 계속해서 쓸기만 하며 그것들을 끌어내리지 못한 채로 한참동안 시간을 흘러가도록 놔두었다. 슬쩍 바깥에 나가 다른 극장들을 살펴보니 모두들 제 기억들을 잘 정리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상하게도 201045번은 미련이 자꾸 남는다. 대단하지 않은 삶이라 아쉬움이 많이 남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이런 우중충한 것들임에도 버리기엔 애정이 남아서 아쉬운 걸까. 분명 지난 삶이 성공은 아니었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으면서도 자꾸 그런 이상한 미련들이 불쑥 튀어나온다. 어떻게 해야 이 미련들을 정리하고 새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다시 잘 앉는 자리에 앉은 201045번이 멍하게 무대를 보며 생각했다. 사실 그랬다. 당장 마지막으로 숨을 쉬고 세상을 뜨고 나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방금 죽은 것처럼 기억들이 미묘하게 생생한 기운을 내뿜어서, 지난 삶을 모두 정확하고 깨끗하게 기억하는 게 아님에도 아직 내 것 같았다. 구질구질하게 쌓아 두어야 하나 싶은 것들이었다.

그래, 사실 버리지 않고 모아 두는 방법도 있었다. 한 구석에 모아둔 것들이 지금보다 더 오래 전의 201045번의 선택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거기에 있는 것들은 너무 휘황찬란해 보였다. 전생에서는 꽤 값이 나간다고 이야기했을 유물 같은 것들이 예쁘게 장식되어 있다. 아마 그 때의 나도 저것들은 성공이라 말할 수 있으니 저렇게 놔두었을 것이다. 추억이 아까우니 남겨두자 생각하다가도 저기 있는 화려한 물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위축이 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것을 가지고 살았을 사람도, 또, 모아둔 사람도, 무대 위의 구질구질한 물건들도, 모두 저의 것이고, 저가 살아온 발자취임을 머릿속으로는 안다. 그렇지만 당장의 것이 가장 제 것 같아서 나머지는 꼭 남의 삶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를 보고 자존감이 뚝뚝 떨어지는 기분이다. 죽으면 꼭 해탈을 하고, 초월을 해서 나를 잘 다룰 수 있고, 모든 것을 똑똑하게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201045번의 고민은 꽤나 오랜 시간을 빼곡히 채울 만큼 길어졌다. 미련을 버리는 것이, 아니면 쌓아두는 것이 그 다음 삶을 사는 뭐가 더 좋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괜히 할 일이 없으니 관객석만 쓱쓱 쓸어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머릿속을 스친 아주 웃긴 발상은 다시 연기를 해보는 것이었다. 저 구질구질한 무대 세트장 위에 혼자 우뚝 서서. 객석 뒤에 숨겨진 스태프실로 들어간 201045번은 제 무대를 장식했던 조명과 배경음악을 다시 꺼내어 들었다. 무대 위에 살포시 내려 앉는 조명도, 극장을 장악하기 시작하는 배경음악도 아련함을 불쑥 불러 일으킨다. 역시 그냥 두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분장실로 들어갔다. 어지럽혀져 있는 곳에서 자주 입었던 좋아하는 옷을 꺼내들어 입는다. 그리고 무대 위로 올라선다. 뜨거운 조명이 눈이 부실 만큼 환하다. 어두운 관객석은 잘 보이지 않는다. 배경음악은 귀를 찌르지만, 정확히 들리지 않고, 관객석에서만큼은 작아 보이던 무대가 혼자 채우기엔 너무 커다랗게 느껴진다. 타박타박, 아무도 없으니 제 걷는 소리 하나하나가 귀에 쑤셔 박힌다. 지난 삶을 연기하려 목을 가다듬어도 긴장은 쉬이 내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 아아, 아, 아.”     


목을 몇 번이고 더 가다듬은 후에야 기억나는 첫 대사를 읊는다. 삶은 잘 쓰여진 희곡처럼 탄생을 시작으로 막이 오르고 장이 시작된다. 그렇지만 201045번이 내뱉는 대사는 뒤죽박죽이고, 정확하지 않다. 마치 긴장으로 대사를 다 까먹어 버린 신입 배우처럼 말이다. 무대에 처음 서면 이런 기분인 걸까. 201045번은 실수를 반복하는 제 자신을 가볍게 때리면서 자꾸 생각나는 대사를 읊었다. 연기톤의 목소리는 지난 삶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수치스러울 만큼 저 자신이 우스웠다. 분명 저 삶은 나의 것인데, 무대 위에 선 나는 그것을 모방하는 배우일 뿐이다. 201045번은 그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극장의 의미도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삶은 치열했고, 행복했으며 나의 것이지만 동시에 죽은 이후는 내 것이며 내 것이 아니다. 아무리 똑같은 무대에서, 똑같은 무대장치를 연출한 후에 움직인다 해도 201045번은 윤빈이 될 수 없다. 이미 죽었으니까. 그래서 극장을 새로이 정리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그 이가 될 수 없으니 새로운 나를 맞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야 했다. 201045번은 그것을 모르고 무대를 정리하려 했다. 자신이 아직 윤빈인 줄 알았다. 그래서 미련이 뚝뚝 남았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짓까지 벌인 것이다. 201045번은 다시 관객석에 앉았다. 모든 게 준비되어 있지만 배우는 없는 무대가 시야를 빼곡히 채운다. 확실하게 무대에서 서 있을 때와 관객석에 있을 때의 기분은 천차만별이라 말할 만큼 달랐다. 그렇지만 이제 201045번은 알았다. 저것은 모두 나의 것이 아니니 버리는 게 맞다는 사실을.         


 

다 버릴 거라고 생각하니 무대 정리는 쉬웠다. 다시 쓰려면 하나하나 모양을 그대로 유지한 채 분해하고 정리를 했어야 했겠지만 다시 쓸 일이 없으니 그냥 다 부수면 될 일이었다. 망치를 들고 속이 시원해질 만큼 무대 장치를 때려 부수었다. 내려앉는 제 추억들이 마음을 좀 아프게 했지만 이제 201045번은 그런 감정 정도는 이겨낼 수 있었다. 쓸모 없어진 무대 장치들을 자루에 담아 바깥에 내다 버리고 무대 바닥에 주저앉아 깔려 있는 바닥재를 떼어낸다. 혹여나 배우가 미끄러질까봐 단단하게 무대 바닥에 박혀 있는 바닥재는 저의 발 아래에서 혹독하게 밟혔는지 발 모양이 한가득이었다. 201045번은 바닥재 위에 빼곡하게 새겨진 발자국을 보며 바빴던 지난 삶을 되새겨보았다. 많이 바빴지. 다음에는 조금 더 여유롭게 살자. 스테이플러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바닥재를 제거하기 위해 심들을 뽑으며 201045번은 생각했다. 다음 바닥재는 조금 더 푹신한 것으로 깔아야겠다. 아무것도 없는 매끈하고 밋밋한 바닥재는 저의 발걸음을 바삐 움직이게 만든 것 같아 보였다. 

순조롭게 진행한 무대 정리는 순식간에 끝을 내었다. 무대가 텅 비니 마음도 텅 비는 기분이다. 201045번은 아직도 더러운 분장실로 들어가 제 옷가지 하나하나를 꺼내들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다시 입을지도 모르니까 미련 한 방울 정도는 뚝 떨어지게 놔둬도 괜찮지 않을까. 이것들은 모아서 극장에 계속 두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깔끔하게 옷을 개어 상자 안에 차곡차곡 쌓았다. 예쁘게 정리해서 놔두면 괜찮은 모양으로 다음 삶의 내가 올 때까지 남아있겠지. 옷이 많지 않아서 정리가 금방이었다. 분장실도 깨끗하게 정리한 후에 옷이 든 상자를 든 201045번은 자신의 것들이 가득 모아져 있는 극장 한 구석으로 갔다.

이상하게 멀리서 보았을 때 반짝반짝하고 멋져 보이던 것들이 가까이 가니 빛이 다 바래서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과거의 자신이 무슨 마음으로 남겨두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것도 자신의 미련인 것을 깨닫고 나니 버린 것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옆에 상자를 내려 두고 바로 다음 작업을 위해 몸을 움직였다. 가만 보고 있어봤자 자괴감이 들거나, 자존감이 깎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게 분명하다. 


         

무대 정리의 마지막은 새 바닥재를 까는 일이었다. 새로이 무대에 들이는 것들도 안내소에서 제공을 해주었기 때문에 201045번은 어렵지 않게 폭신하고 두툼한 바닥재를 구할 수 있었다. 무대 사이즈가 일정해서 따로 재단할 필요도 없이 제작되어 있기에 그냥 무대 위에 깔아두기만 하면 되었다. 저번처럼 스테이플러도 다 박아두어서 아예 바닥재가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할까 생각도 잠깐 했지만 괜히 나중에 치우는 게 더 힘들 것 같아 깔아두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안내소에서는 다음 삶에 장식하고 싶은 것들도 보고 가져가도 된다고 말했지만, 201045번은 이번에는 그러지 않기로 결정했다. 여유롭게 살기 위한 바닥재만 깔아두고 배경음악도, 조명도, 무대장치도 태어날 나에게 양보하겠다고 이미 마음을 먹은 뒤였다. 

바닥재까지 금방 깔고 나서 관객석에 다시 앉았다. 계속 보았던 것과 다르게 무대는 텅 비어있지만 그게 어떻게 꾸며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서 괜시리 마음이 설레었다.     


“201045번, 201045번. 환생고리로 이동 부탁드립니다.”     


이제 새 삶을 시작할 시간이다.



____ 장미 therosenove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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