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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냥깜냥 May 11. 2020

파란 거짓말 03.

written by 장미

파란 거짓말 03.       


   

쿵쿵, 쿵쿵, 쿵쿵, 쿵쿵, 쿵, 쿵, 쿵….

심장소리가 점점 작게 잦아드는 것이 느껴진다. 한참을 걸었더니 이제는 학교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만큼 작았다. 해방된 가슴은 바쁜 심장을 달래기 시작했다. 주택가를 벗어나니 사람으로 가득한 상업지구에 왔다. 어딜 그리 바쁘게 가는지 사람들은 가만 서 있는 찬위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찬위는 그 가운데에서 혼자 커다랗게 우뚝 서 있는 프렌차이즈 카페에 들어갔다. 친구들이랑도 즐겨 오는 곳은 아니었다. 찬위의 친구들은 조용한 카페보다 시끄러운 피씨방을 훨씬 선호했으니까. 조용한 카페가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더욱 낮은 적막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쭈뼛쭈뼛 카페 직원 앞에 선 찬위는 자주 마시던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평소라면 따뜻한 음료를 주문했겠지만 오늘은 아주, 아주 차갑게 해달라고 말했다. 머릿속이 너무 뜨거워서 식힐 것이 필요했다. 진동벨을 받고 바깥이 잘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정신 없이 바빠 보였다. 찬위만 할 일 없이 멍하니 앉아있다. 아직도 제 처지가 실감이 나지 않아 딱딱하게 굳은 손으로 얼굴 이곳저곳을 만져보았다. 커다란 한숨을 내쉬며 머리도 쓸어넘긴다. 아까까지 시끄럽게 울리던 핸드폰은 이제 더 울리지 않는다. 핸드폰이 조용한 걸 깨닫고 나서야 찬위는 그것을 꺼내들 수 있었다.     


“재영이, 엄마, 엄마, 선생님, 재영이, 재영이….”     


익숙한 친구들의 이름과 어머니, 선생님의 번호가 핸드폰 위에 잔뜩 쌓이기 시작한다. 이 사람들이 내게 전화를 건 것은 내 거짓말을 추궁하기 위해서일까, 학교에 가지 않는 나를 걱정하는 것일까. 나쁜 마음인 것을 알면서도 찬위는 저도 모르게 꿀꺽 그런 마음을 먹었다. 평소라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 그냥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많다고 혼자 뿌듯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거짓말을 하고 나니 다들 의심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 외에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찬위는 손수 그 기록들을 하나하나 지웠다. 난 못 본 거야. 아무도 내게 전화를 건 게 아니야. 걱정이 아닐 바엔 전화를 안 걸었던 게 낫다. 그게 진실인 게 낫다. 서운한 마음을 꾹꾹, 내리누르며 찬위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메리카노는 생각 그 이상으로 금방 만드는 음료였다. 핸드폰을 잠깐 들여다보는 사이에 진동벨이 테이블 위에서 요동치기 시작한다. 찬위는 엉엉 우는 진동벨을 손에 꾹 쥐고 음료를 받으러 갔다.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는 직원은 서비스라며 자기가 만든 사과잼 쿠키도 함께 내민다. 프렌차이즈 카페에서 일어날 거라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아, 아뇨. 괜찮아요. 안 주셔도 돼요. 찬위는 거듭 거절을 했지만 직원은 자기가 점장님 몰래 구운 거라며 사양하지 말고 받으라며 트레이를 밀어주었다. 결국 아메리카노와 볼품없게 구워진 쿠키를 들고 찬위는 자리에 앉았다. 빨대도 제대로 꽂지 않고 아주 차갑고 쓴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커피와 함께 입 안으로 들어온 얼음을 와작와작 씹어 먹는다. 달아오른 머리가 점점 온도를 내리고 사고를 시작하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 어떡하지? 멀쩡한 머리는 그것부터 걱정하기 시작한다.

찬위는 거짓말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니, 아닌가? 그랬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릴 때에 찬위는 어떤 아이였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을까? 거짓말을 할 줄도 모르는 착한 아이였을까? 저의 어릴 때가 분명치 않다. 갑자기 땅에 뚝 떨어진 기분이다. 옛날에 어떤 사람인 줄 기억한다면, 아니, 적어도 거짓말을 한 적이 있는지만 기억이 나도 그때 했던 것처럼 어떻게든 넘겨볼 텐데, 생각나는 게 없어서 꼭 백지에 처음 글을 써내려 가는 기분이다. 멍해진 찬위는 아까 계속해서 거부했던 그 쿠키를 입에 물었다. 바삭바삭하다기보다는 조금 촉촉한 쿠키는 새콤한 잼과 함께 입 안을 점령한다. 달콤한 사과의 맛이 미묘하게 신경을 지배하고 곧이어 신경을 따라 머리에 올라와 닿았을 때, 찬위는 새빨갛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마치 사과처럼 예쁜 색깔을 하고 있던 사람들 말이다. 소방관들은 불에 탄 과학실을 보고 어디까지 알 수 있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추리할 수 있지? 우리반 친구들은 기억하고 있겠지? 어제 내가 했던 이야기를 빼곡히 기억하고 있겠지? 나 말고 과학실을 본 사람이 있을까? 1, 2학년들이 다 없는 지금 거기를 지나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나 말고 없지 않을까? 찬위 혼자였지 않을까? 나만 목격자이지 않을까? 

입에서 잼과 조금 녹고 눅눅해진 쿠키들이 정신없이 섞이기 시작한다. 입을 움직이며 사과잼을 음미할 때마다 좋은 생각이 하나씩, 또 하나씩 자리 잡는다. 결론은 못된 누군가를 만든다.

아무도 모를 거다. 그렇게 믿자. 아무도 모른다면, 나만 그걸 아는 거라면 내가 말하는 게 곧 진실일 것이다. 거짓말은 썩지 않고 예쁜 조형사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쿠키를 넘기고 아메리카노를 한 번 더 들이켰다. 입 안이 깔끔하게 비워졌다.         


 

**          



찬위는 그 카페에서 한참동안 시간을 보냈다. 밝았던 하늘이 어두컴컴한 옷을 껴입을 때까지 찬위는 우두커니 앉아 자리를 지켰다. 이상하게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찬위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화재 사건은 꼭 대단한 추리 소설 같았다. 그것을 만들어내는 뇌는 배고프지도 않은지 저녁이 될 때까지 앉아서 생각만 하게 만들었다. 거짓말이 만든 각본이 예쁘게 완성되자 찬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그 직원은 이미 퇴근했는지 다른 직원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찬위가 건네는 트레이를 받았다. 카페를 나오니 사람들이 아침보다 훨씬 많았다. 퇴근하는 직장인들, 하교하는 학생들, 그 외의 다른 볼 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까지. 여러 색으로 얼굴을 칠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찬위가 슬쩍 끼어들었다. 이 사람은 노랑, 저 사람은 분홍, 방금 지나간 사람은 보라, 그 누구도 파랗지 않다. 찬위도 이제 그렇지 않을 테니까. 이 많은 사람들은 모두 파랗지 않다. 불그스름한 혈색과 어울리지 않는 색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찬위는 그게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집은 금방 도착했다. 멀리서 봐도 찬위의 집에 불이 환하게 들어와있는 것이 보였다. 불켜진 집을 보고 나니 현실감이 물처럼 밀려들었다.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가 깨어 계시겠지. 분명히 혼날 거다. 이렇게 이유없이 학교에 가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언제나 찬위는 자랑스러운 아들이었고, 오늘 선생님께 전화만 오지 않았더라면 그건 아마 계속 유지되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나를 어떻게 보실까. 책임감 없는 아들이라고 혼을 내실까, 갑작스런 반항을 당황스럽게 여기실까. 발걸음을 따라 심장이 쿵쾅거린다. 불안하다. 너무 불안해.     


“찬위야, 왔어?”

“…어, 엄마.”

“아이고, 우리 아들. 많이 무서웠지?”     


어머니의 반응은 상상했던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걱정이 담뿍 담긴 표정을 하시고선 어색한 발걸음으로 들어온 찬위를 포근하게 안아주셨다. 이게 무슨 일인지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찬위가 뭐가 무서웠단 말인가. 혼날 일이 걱정되어서 무섭긴 했지만 그것은 어머니가 위로해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머니가 혼낼 것을 예상하고 무서웠던 것이니까. 찬위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어머니는 제대로 보지 못하신 건지 찬위를 놓지 않고 ‘아이고, 우리 아들.’이라고 웅얼거리기만 하셨다. 평소라면 찬위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는 아버지도 무슨 일인지 현관 근처까지 나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찬위를 보고 계셨다. 상황이 파악되지 않으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찬위가 할 수 있는 것은 어색하게 웃으며 가만히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것뿐이었다. 입을 열지도 못하자 혼날 때 했어야 할 변명들이 공기 중으로 아무렇게나 흩어진다.     


“학교 얘기 들었다. 찬위야, 그런 일이 있었으면 엄마한테 이야기했어야지.”

“네? 아니, 뭘요. 그걸 왜 얘기해요.”

“과학 선생님이 큰일을 당하셨다며? 친구들이 장례식에 간다고 연락 왔더라.”     


너도 갈 거지? 찬위에게 어머니가 그 일을 알게 되는 것은 공포와도 같았다. 거짓말을 했다는 것부터 문제였기도 했고, 그거 때문에 학교를 빠졌다는 것을 알면 실망하실 게 분명해보였기 때문에. 그랬는데 어머니는 오히려 걱정을 하신다. 그 참혹한 광경을 보고 견디지 못해서 학교를 가지 않은 아들을 보듬어주신다. 찬위는 마음이 따뜻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제 한마디로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긍정적인 것을 가져다 주었다. 괜히 거짓말을 했다는 마음은 이미 깊숙한 곳으로 몸을 감춘지 오래였다. 잘했다. 진짜 잘했다. 상황을 다 알고 나니 거짓말을 시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찬위는 곧장 슬픈 얼굴을 꾸며내었다. 공포에 질린 표정은 조금만 더해도 생동감이 넘쳐났다. 어머니의 품에서 나온 찬위의 얼굴은 당장 눈물을 흘려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그 얼굴을 본 부모님의 표정은 더 나쁘게 어두워졌다. …장례식, 저도 가야겠어요. 그 말은 좀 더 애처로워 보이기 위한 수단이다. 공포에 질린 아들이 학교도 가지 못했는데 선생님을 애도하러 간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 더 안타까워 보일 테니까. 부모님은 혹여나 저가 큰일이라도 날까봐 가지 못하게 막으실 거다. 찬위는 당연히 저가 가지 않을 미래를 그리며 그렇게 말을 했다.     


“그래, 그렇게 이야기할 줄 알았다. 그런데는 교복 단정히 입고 가는 거니까 가방만 내려놓고 다녀와.”     


이렇게 이야기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숨이 턱 막혔다. 어머니는 당장 가방을 받아들 것처럼 손을 내밀고 계셨다. 찬위는 그것을 반박할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었다. 슬픈 얼굴은 어색하게 깨지며 당황을 내비쳤다. 어머니의 손에 가방을 쥐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하, 이상하게 웃으며 찬위는 가방을 내려놓고 집을 나섰다. 대충 시간을 때우고 나서 들어가야겠다. 장례식장을 다녀왔다는 생각이 들 만큼 오래. 그렇게 생각하며 발을 옮기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재영이었다.     


“여보세요.”

[너 장례식장 간다며? 어머니가 방금 전화하셨어. 나도 나갈 테니까 1층에서 기다려.]

“어? 어?”     


재영은 제 할 말만 마치고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재영아! 찬위의 부름은 빈 복도에 울리기만 할 뿐 찬위가 원하는 사람에게 닿지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딱, 딱 맞추어지는 상황이 다시 찬위를 공포에 스며들게끔 했다. 다들 알고 이러나? 일부러 나를 궁지에 몰아 넣기 위해 이러는 걸까? 따뜻해진 마음이 차갑게 식어간다.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반응에서 피할 수 없다. 반응이 흘러가는 대로 파도에 몸을 맡기듯 찬위는 그 위에 올라서야 했다. 꼭 단두대에 오르는 사형수처럼 발을 질질 끌어 1층으로 내려갔다. 재영은 이미 준비가 끝난 상태였는지 찬위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는 왜 안 왔어? 물음에 악의는 단 한 톨도 보이지 않는다. 그게 더 양심을 쿡쿡 찔렀다. 어어, 그냥. 어쩌다보니. 말도 안 되는 답을 하고 먼저 발을 옮겼다. 재영은 더 이상의 말을 덧붙이지 않고 찬위를 장례식장으로 이끌었다. 장례식장은 찬위와 재영이 사는 동네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서 꼭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 곳이었다. 버스가 흔들려서인지, 찬위가 불안해서인지 멀미가 오늘따라 심했다. 눈을 꼭 감고 소설을 고쳐 나간다. 어색하지 않은 변명을 거짓말에 섞어 예쁜 쿠키를 만들어 낸다. 도착은 금방이었다.     


     

“야아, 왔냐.”

“응. 찬위도 왔어.”

“얼른 들어가보자. 다른 애들은 벌써 왔다갔어.”     


장례식장은 조용하고, 아주 시끄러웠다.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덜컥 겁먹기 쉬운 장소였다. 매일 같이 다니는 친구들은 평소와 다르게 아주 단정하게 교복을 차려 입고 있었다. 바깥에서 나눠주는 흰 국화를 한 송이씩 손에 꼭 쥐고 분향소에 들어갔다. 준비된 게 없었는지 어색한 영정사진이 친구들과 찬위를 반겨주었다. 상주는 아마도 선생님의 아버지인 것 같았다. 주름진 얼굴 사이사이에 눈물이 가득 낀 상태였다. 그나마 지을 수 있는 미소도 곧바로 숨어들었다. 엉거주춤한 모양으로 친구들과 함께 꽃을 놓고 절을 했다. 옆에서 기도를 하는 친구도 있었다. 절을 하자마자 선생님의 아버지께서는 다시 눈물이 터지셨는지 엉엉 큰 소리를 내며 우셨다. 찬위도 울컥 눈물이 터져나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몸을 일으키고 영정사진을 자세히 보니 마지막 그 모습이 떠오른다. 그날따라 이상한 분위기의 과학실과 그곳에 서 있던 과학 선생님의 모습 말이다. 괜히 온 걸까? 그런 마음이 절로 들었다. 그냥 너무 피곤하고 무섭다고, 쉬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말할걸. 그랬다면 가족들의 걱정을 듬뿍 받고 잠을 잤을 텐데. 내일 학교에서 풀어낼 소설을 다듬으며 졸음에 빠져들 수도 있었을 텐데. 조금 더 착한 아들이 되고자 했던 마음이 죄책감에 가득 눌렸다. 나는 선생님이 죽은 줄 몰랐어요. 그랬다면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영정사진을 가만 보며 찬위는 속으로 선생님께 말을 건넸다. 대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혼자 이 말을 꼭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거짓말을 더 해도 선생님은 용서해주세요. 나는 선생님이 그렇게 된지 몰랐으니까. 말도 안 되는 비약인 걸 안다. 억지에 가까운 변명이 맞다. 그렇지만 찬위는 저가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을 더 하게 될 자신을 알기 때문에 미리 선생님께 용서를 구했다. 선생님은 대답해주지 않아도 상관 없었다. 어차피 대답을 원해서 한 말은 아니었으니까.

선생님의 가족들은 다른 친구들한테 그랬던 것처럼 따로 마련된 자리로 이끌어 한 상 가득 차려주었다. 장례식에 오기 힘들었을 텐데 고등학교 3학년 애들이 잔뜩 왔으니 식사라도 양껏 챙겨줘야겠다는 설명도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래서 친구들은 사양 않고 자리에 앉아 밥을 한 술씩 뜨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국에 밥부터 담그는 친구도 있었고, 잘 익은 고기에 손을 뻗는 친구도 있었다. 찬위만 꺼끌한 입 안을 다시며 젓가락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오늘 하루동안 제대로 먹은 것도 없는데 입맛이 돋지 않았다. 오히려 게워내고 싶은 마음만 잔뜩이었다.     


“너 학교 안 와서 난리도 아니었어.”

“…어어? 그래?”

“너 말고 그날 불 난 거 본 사람 아무도 없었대. 그러는데 너는 말도 없이 학교 안 오지. 무슨 큰 일이 있었던 거 아니냐고 선생님들도 묻고 가셨어.”

“아아, 그랬구나.”

“재영이가 너 어제 생각나서 학교에 못 가겠다고 하더라고 얘기해서 넘어갔지. 아니면 경찰에 전화라도 할 폼이던데?”

“…….”

“무서우면 무섭다고 말하지 그랬어. 멍청이지, 너?”

“하하, 그러게. 재영이가 말 잘 해줘서 다행이다.”     


찬위를 보는 재영의 표정이 미묘했다. 재영은 언제나 찬위를 꿰뚫어보는 얼굴을 하곤 했다. 그래서 찬위는 은근슬쩍 그 시선을 피하고 밥을 한 움큼 퍼서 입에 쑤셔넣었다. 밍밍한 밥알이 입 안에서 머무는 동안 반찬을 쑤셔넣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이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거짓말을 멋드러지게 꾸며놓으면 무얼 하는가. 사람들은 찬위가 원하는 대로 말을 하지 않는데. 자기 마음대로 생각을 하고, 그 말을 찬위에게 아무렇게나 내뱉는데. 찬위는 절대 거기에 맞춰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미리 알지 못하니까. 그냥 생각따라, 말을 받은 것따라 대충 거짓말을 지어내고 내뱉는다. 예쁘게 마무리지었던 소설은 뒤죽박죽 엉키어 모두 불에 타 버리고 없어진 지 오래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하고, 대답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시 버스 안이었다. 찬위는 자리에 앉아있었고, 그 주위에 친구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둘이 떠드는 놈들도 있었고, 조용히 핸드폰만 보는 놈도 있었다. 찬위는 멍하게 자신의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통화기록이 모두 지워져 있어서 깨끗한 제 핸드폰을 말이다. 잠들 수 있을까. 내일 학교는 제대로 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 들었다. 상황이 자꾸 제 뜻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화가 난다.               

집에 돌아오니 부모님은 방에 들어가시지도 않고 찬위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 다녀왔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안심이 되셨는지 두 분이 함께 거실을 정리하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텅 빈 거실에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서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주저앉아 제 방을 둘러보는데 예쁘게 놓인 제 가방이 보인다. 찬위는 곧바로 가방에 있던 모든 것을 다 밖으로 꺼내었다. 교과서 몇 권과 커다란 참고서 한 권, 얇은 공책 세 권이 어찌하지 못하고 가방이 토해내는 대로 밖으로 빠져나왔다. 철제 필통은 이미 요란한 소리를 내며 침대 앞까지 굴러간 뒤였다. 책상에 자주 쓰지 않는 공책을 꺼내 놓고 자리에 앉았다. 차근차근 있었던 일을 기록해본다. 어제 저가 본 것, 저가 한 것, 저가 말한 것 모두 적어본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도 한 자, 한 자 기록한다. 얼렁뚱땅 거짓말을 저질러버려서 정리가 하나도 안 될 줄 알았는데 누가 예쁘게 끼워맞춘 것마냥 정갈하게 정리가 된다. 카페에서 짠 소설은 이미 불에 타서 없어진 지 오래인데, 찬위가 겪은 일들은 소설처럼 단정하게 정리가 되어간다. 찬위는 그 위에 내일 해야 할 일을 채워적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할 것 같은 대사도 공책 한 바닥을 가득 채울 만큼 빼곡히 적어 내려갔다. 대사에 맞춰 새롭게 할 거짓말을 짜낸다. 이 일이 마무리 될 때까지 찬위가 해야 할 일이 정해지기 시작한다. 이제 벗어나지 못한다. 찬위는 그 불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그 불에 없는 것처럼 구는 것뿐이다.          



**          



찰박, 찰박. 방에서 나지 않을 소리가 들린다. 언제 깜박 잠이 든 걸까. 억지로 감긴 눈을 뜨게 한 찬위는 제 눈에 들어온 새파란 하늘을 보았다. 여기가 어디지? 팔을 휘적이자 물이 찰랑찰랑 손을 따라 춤을 추는 게 느껴진다. 짠내가 코를 타고 들어와 바다라는 정보를 꺼내온다. 그래, 여기는 바다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려 했다. 고개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눈이 겨우 움직이며 할 수 있는 최대한 넓은 범위의 시야를 채워준다. 그 어디에도 땅으로 보이는 것은 없다. 찬위는 바다 한 가운데에 떠 있는 게 분명했다. 눈 앞도, 제 몸 아래에 깔린 것도 너무 새파랗고 차갑다. 찬위는 금방 겁에 질려 바둥거리기 시작했다. 가라앉을 법도 하건만 가라앉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움직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찬위의 머리와 몸통을 그 자리에 고정한 것처럼 팔과 다리가 이상하게 움직이기만 할 뿐이다. 이거 왜 이래? 이거 왜 이래?! 이런 악몽은 한 번도 꾼 적이 없다. 난생 처음 꾸는 악몽은 어릴 때 꾸었던 것보다 더욱 공포스럽게 다가온다. 움직이지 못하고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데 정신이 멀쩡하게 유지되는 것이 무척 공포스러웠다. 차라리 가라앉았으면, 그런 마음도 들 만큼 말이다. 이런 꿈을 꾸는 이유가 뭐야? 소리를 내 물어도 귀에 닿는 것은 없다. 목소리도 나지 않는 모양이다. 그냥 이렇게 머릿속으로만 생각을 하고 가만히 있어야 하나 보다. 찬위는 그 어느 때보다 좌절하는 자신을 느꼈다. 

꿈은 언제까지 지속될지 아무도 몰랐다. 언젠가 깨겠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무력함이 찬위를 잡아먹자 몸이 조금씩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바다의 밑바닥이 찬위를 끌어당긴다.



____ 장미 therosenove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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