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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냥깜냥 May 07. 2020

 파란 거짓말 02.

written by 장미


파란 거짓말




언제부터 거짓말은 새빨간 색을 가지고 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 군침이 돌 만큼 잘 익은 빨간 사과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 입 베어물면 분명히 다 먹어치우게 될 것 같은. 머리속에 거짓말은 사과의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소방관들과 시끄러운 비명 사이에 찬위가 있다. 남들과 다른 얼굴색을 하고 과학실을 바라보고 있다. 소방관들은 불을 끄기 바쁜지 찬위의 존재를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큰 불이고, 위험한 상황이었다. 순간 무언가 떨어지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찬위의 발 밑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아마 가져온 물양동이를 손에서 놓친 모양이었다. 양동이와 함께 떨어진 물들이 실내화와 양말을 넘어서 새파란 손으로 찬위의 발목을 붙잡는다. 찬위는 새파랗게 변한 제 얼굴처럼 온 몸이 발끝을 시작으로 점점 물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겉돌고 싶지 않았다. 혼자 둥둥 떠있고 싶지 않다. 순간 그 생각부터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런 찬위에게 손을 내민 것은 탐욕이었다. 발 밑으로 푸른 물들이 발목을 붙잡는 것처럼 새빨간 거짓말은 찬위의 목을 움켜쥐었다. 작은 거짓말일 뿐이야. 내지른다면 너는 저들과 같을 수 있어. 그 말은 찬위의 마음을 아주 쉽게 흔들었다. 당장이라도 열릴 것 같은 입을 꾹 막아버린 손은 마지막으로 남은 한 줄기의 이성이었다.

  

‘저는 과학실에 불이 나는 것을 봤어요!’

  

무얼 보았단 말인가. 방금까지 찬위는 교실에 있었다. 작은 불로 시작해 과학실 전체를 잡아 먹는 불이 생길 동안 찬위는 꿈속에서 머물고 있었다. 여기에 있는 불과 같은 아주 새빨간 그것에 쫓기는 꿈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은 당장이라도 그렇게 소리쳐야 한다고 주장하며 저가 대신 외칠 것처럼 굴었다. 손을 내려놓는다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껄일 게 분명했다. 찬위는 당장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학실의 복도에서 벗어나 다시 아까 물양동이를 들고 달릴 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야 한다. 거기에서 어리석은 탐욕을 버려야 했다. 거짓말을 하려는 입을 진정시키고 새파랗게 달아 오른 얼굴을 식혀야 한다. 찬위의 이성이 그의 손을 잡고 뛰며 쉴 새 없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찬위는 다시 제 교실로 돌아오기 위해 바쁘게 발을 놀려야 했다. 찐득한 물과 새빨간 탐욕이 그런 찬위의 발목을 계속 붙잡았다. 이성을 따라가지 말고 자기에게 오라는 듯이 말이다.

찬위가 잠에 들었던 그때와 같이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모두 대피를 마쳤는지 복도에서 찬위를 잡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아니, 과학실을 제외하고 이 학교에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찬위를 제외하고선 말이다. 찬위는 혼자 뚝, 떨어져버린 기분을 느꼈다. 창밖으로 우글우글거리는 사람들의 머리가 보인다. 찬위는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찬위에게 고립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우울함이 몸속에서 점점 번져나가기 시작한다. 찬위는 교실 가장 끄트머리에 웅크리고 앉아 고개를 파묻었다. 평소라면 당장 운동장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그곳에서 자연스레 섞여들어 안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홀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며 안심을 하고 그렇게 기분 좋게 있었을 것이다. 거짓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탐욕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그것이 나가지 못하는 이유였다. 찬위는 제 욕심을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그렇게 섞여들면 괜찮은데, 아무런 문제도 없을 텐데 어째서 더 큰 일을 만들려고 하는 걸까. 거짓말은 가볍겠지만 그 이후의 일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아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더군다나 친구들 앞도 아니고 소방관들 앞이었다. 덜컥 겁이 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거의 검다시피 할 정도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으니까. 자신과 다르다는 이질감이 거부감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밖으로 나가 입 속에 감춰진 말들을 친구들에게 와르르 쏟아낼 자신도 없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다들 불꽃에 의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와 있을 것을. 저와 다르게 말이다. 조금만 기다리자. 그럼 사람들도 얼굴빛이 하얗게 식어버리겠지. 그럼 탐욕도 고개를 숙일 테다. 다르지 않은 것을 깨달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섞여들 수 있을 거다. 찬위는 그러리라 믿으며 제 마음을 다독였다.

  

  

깜빡 잠에 들었나? 어느새 교실 안이 시끌벅적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빳빳하게 굳은 찬위의 몸을 흔들어 깨운 것은 걱정스러운 얼굴의 재영이었다. 교실에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고 있었다. 불이 모두 다 꺼진 모양이다. 이제 아무 일도 없나보다. 찬위는 제 욕심을 이겨낸 것 같아서 붕 떠오르는 마음을 느꼈다. 뿌듯했다. 흐린 눈을 비비고 똑바로 재영의 얼굴을 쳐다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찬위야. 너 왜 이러고 있어? 다리 안 아파?”

“어어, 응. 괜찮아. 잠들었나봐.”

“운동장에는 왜 안 내려왔어? 다들 운동장에 너 없어서 찾아다녔어.”

“아아, 나? 나는…….”

  

다들 제 걱정을 했다니, 찬위의 기분이 더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거의 하늘에 닿을 만큼 말이다. 밝게 웃어줘야지. 해맑게 웃으면서 걱정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든 순간 찬위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재영의 얼굴이 여전이 빨갰다. 분명 얼굴빛이 변한 것은 아닌데, 어딘가 모르게 발간 빛을 내뿜고 있었다. 찬위는 제 생각과 현재의 상황이 완전히 틀려버린 것을 깨달았다. 대답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재영의 눈을 피해 다시 교실을 둘러보았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친구들은 붉은 빛을 하고 있었다. 저와 다르게 말이다. 찬위는 정신없이 제 발목을 바라보았다. 축축한 물에 젖어 새파란 빛을 내고 있다. 그럼 내 얼굴은? 내 얼굴은 무슨 색이지? 찬위는 재영을 가볍게 밀치고 반 밖으로 나섰다. 하루종일 내달리는 다리는 힘이 들지도 않은지 거침없이 발을 뻗는다. 교실에서 가장 가까운 화장실에 도착해 거울 속의 제 얼굴을 살폈다. 새파란 얼굴이 거울 속에 또렷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어딜 보아도 변함없는 자신의 얼굴이었다. 얼굴색을 확인하자마자 찬위는 다시 내달렸다. 시끄럽게 수다를 떨며 올라오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정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 사이를 거쳐 과학실로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저와 반대로 이동하던 인파를 헤치던 때와 달라서인지 금방 과학실에 도착했다. 다 타고 남아버린 싸늘한 교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을 수습하는 많은 사람들의 얼굴도 보인다. 한 소방관에게 상황을 듣고 있는 선생님들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슬픔에 가까워보였다. 슬픔은 늘 푸른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두의 얼굴은 붉은 빛이었다.

잘못됐다. 뭐가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무슨 정신으로 교실에 다시 돌아왔을까. 기억이 온전치 못했다. 찬위는 교실로 돌아와 제 자리에 몸을 아무렇게나 내팽겨쳤다. 좋지 않은 몸이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자리에 앉았다. 재영과 친구들이 찬위의 자리로 다가와 걱정하는 말을 한두 마디씩 남기기 시작했다. 찬위는 늘 그랬던 것처럼 어색하지 않게 웃으며 대답을 해주었다. 귓속에 제대로 박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의례상 남기는 대답일 뿐이었다. 아직 친구들의 얼굴이 발갰다. 찬위는 이들과 같을 필요가 있었다. 혼자 동떨어진 존재는 되고 싶지 않으니까. 다시 탐욕이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거짓말은 새빨간 색이니까 그 한마디면 충분히 동화될 것이라고 찬위의 귀에 속삭였다. 친구들의 걱정보다 그 말이 더 강렬하게 귀에 꽂힌 것은 함께 어울린 사람이라고 증명받고 싶은 찬위의 열망 때문일 게 분명하다. 이번에는 그 어떤 고민도 하지 않고 말을 내질렀다. 툭 떨어진 말은 쉬이 소리가 되어 울려퍼졌다.

  

“나 봤어.”

  

이렇게 말이다.

친구들은 제대로 된 설명이 없는 찬위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지금 찬위가 보았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찬위의 뒷말을 기다리는 귀들에게 찬위는 저가 낼 수 있는 가장 깔끔한 목소리로 거짓말을 지껄였다. 이 쉽고 간단한 일을 끝내면 찬위는 다시 저들과 같이 어울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과학실 말이야. 불나기 전에 봤어.”

  

지금까지는 진실이다. 틀린 말이 아무 것도 없다. 찬위는 오늘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과학실을 지났으니까. 그때 혼자 계신 과학 선생님을 봤으니까 말이다.

  

“불이 나서 말이야…. 내가…….”

  

이제부터는 모두 거짓말이다. 찬위는 그대로 교실에 올라갔고, 잠에 들었다. 불이 나기 전까지 일어나지 못했고, 오히려 불을 피해 도망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일어난 것은 불이 난 이후였다. 친구들에게 하는 말은 찬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남들은 모르는 아주 은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착 깔았다. 낮고 조용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긴장감을 더했다. 친구들은 찬위의 목소리를 따라 어깨를 움츠리고 몸을 낮추었다. 심각한 표정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의 생동감을 더해줄 뿐이었다. 찬위는 점점 신이 나기 시작한 저 자신을 깨달았다. 여기에 있는 몇 안 되는 친구들이 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더없이 대단한 집중력으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커다란 쾌감을 안겨 주었다. 어차피 이건 거짓말이고 이들에게만 할 이야기다. 그리고 함께 물들면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다. 찬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거 비밀이야. 딴 데 가서 이야기하지 마. 괜히 누가 알면 큰일이 날지도 모르잖아.”

  

그렇지? 쉬잇. 어린 아이들에게 하는 것처럼 저절로 검지 손가락이 올라와 입술 위에 닿는다. 꼭 우스꽝스러운 연극 한 편을 재연하는 모양과 다를 바가 없다. 친구들은 맞춘 것처럼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찬위가 지껄인 거짓말이 생각보다 더 잘 먹힌 모양이다. 재영만이 애매한 얼굴을 하며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찬위는 그게 그렇게 큰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목 뒤로 스며드는 애써 찝찝한 기분은 억지로 넘겼다. 제 새빨간 거짓말은 얼굴 위에 예쁘게 자리 잡았을 것이다. 찬위는 이제 이들과 똑같은 인간이다. 쾌감이 넘실거리는 게 느껴졌다.

  

  

누가 말했던가. 거짓말은 한 번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 쉬울 뿐이며 비밀은 세상에 존재하지 못한다고. 반 친구들 몇몇이 알기 시작한 모양이다. 아이들이 은밀하게 묻는 질문들에 거짓말로 대답하는 것은 아무렇지 않기 시작했다. 아, 그거? 나 그거 봤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다른 친구들이 이야기하는 속을 파고드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찬위는 친구들이 보냈던 존경어린 눈빛, 영웅을 보는 것과도 같은 그 눈에서 달콤한 쾌락을 느꼈다. 새콤하고 자극적인 그 맛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에 겁을 먹지 않게 만들었다. 반의 모든 친구들이 찬위의 거짓말을 듣고 사실로 믿게 될 때까지도 그게 큰일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반 친구들은 모두 하나니까, 이곳에서 더 새어나가는 말이 없다면 저는 이곳에서 꽤나 대단한 영웅 노릇을 할 수 있으리라. 거짓말 위로 자꾸 새로운 거짓말들이 쌓여가니 진실은 바닥 저 아래에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는 게 더 어려운 것이 분명했다. 소문이 더 퍼지는 것도, 거짓말을 크게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진실처럼 바닥에 가라앉아버렸으니 찬위가 그걸 알게 될 리가 없었다. 찬위는 모든 것이 완벽하다 믿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

  

  

다음 날, 학교에 갔을 때에는 생각보다 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과학실에 어제 보았던 과학 선생님이 계셨다는 이야기였다. 과학 선생님은 구조되지 못 했고,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평소에 곧잘 친하게 지내던 옆 반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들은 찬위는 절로 올라오는 불안감을 어찌하지 못하고 손톱을 씹기 시작했다. 찬위가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 거란 믿음에서 시작했다. 거기에 사람이 있었다면 제 거짓말이 들통나니 있으면 안 되었고, 죽은 사람이 있는데 허튼 말을 할 만큼 못된 성정은 되지 못했다. 그러니까 정말로 그곳에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한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제 전제가 틀린 이야기였다니. 찬위는 눈앞이 까맣게 변해버리는 것만 같았다. 어떡하지? 어제 했던 말은 어떻게 해야 하지? 친구들이 기억을 할까? 어제 그 거짓말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을까? 수없는 생각이 머리를 빼곡하게 채운다. 답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찬위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아직 아침 시간이다. 아니, 그보다도 훨씬 이른 시간이다. 옆 반의 친구만큼 부지런한 친구는 몇 없었고, 아직 반에는 많은 사람이 차지 않은 시점이다. 반 아이들도 찬위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는지 눈빛들이 묘했다. 특히나 찬위를 바라볼 때는 더욱이 이상한 눈을 했다. 내가 어제 들은 것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해야 할까?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하며 저를 쳐다보는 것이겠지. 덜컥 겁이 났다. 찬위는 저가 벌인 일을 혼자 감당할 수 없을 거란 것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도망치고 싶었는데 도망칠 곳이 없었다. 가방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자리에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칠판만 가만 바라보며 서 있었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오늘 계속 여기에 앉아 있어도 될까?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겁이 나니 가만히 있는 것이 불가능했다. 찬위는 바쁘게 발을 옮겨 일단 교실을 벗어났다. 조용한 복도를 계속해서 걸었다. 빈 1학년, 2학년 교실들을 지나쳤고, 이제 출근을 시작한 선생님들이 가득한 교무실을 지나쳤다. 층마다 있는 화장실들과 학교 한 켠에 있는 커다란 도서관을 지나쳤고, 마지막으로 어제 새까맣게 타버린 과학실도 지나쳤다. 정신을 차리니 찬위는 운동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처음으로 못된 생각을 꿀꺽 삼켰다.

다른 학년들이 없어서인지,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아서인지는 모르지만 교문에서 복장이 불량인 학생을 잡는 선생님들이 아무도 계시지 않았다. 교문은 평소보다 싸늘하고 조용한 기운을 내뿜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찬위는 운동화를 신은 제 발을 슬쩍 교문 밖으로 빼보았다. 교문 밖으로 나서면 큰일이라도 생길 것 같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해서 어색할 뿐이었다. 다른 발도 냉큼 교문 밖으로 내밀었다. 뒤를 돌아 학교를 보니 학교는 조용하게 찬위를 바라보고 있다. 찬위를 막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시간에 학교를 벗어나도 별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성큼성큼 발을 내딛었다. 교문이 점점 멀어진다. 교복 재킷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는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나쁜 자세였다. 불량 학생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런 학생들이라면 이런 불안함은 느끼지도 않겠지만. 아니, 이런 자세가 나쁘다고도 생각을 안 할 게 분명하다.

  

  

무척 먼 곳으로 나아갈 줄 알았는데, 찬위가 간 곳은 학교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주택가였다.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좁은 길 구석으로 들어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가방이 벽과 몸 사이에 낀 채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었다. 안에 있는 철제 필통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일 것이다. 찬위는 거기에서 숨을 죽이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시작하는 종소리가 울리는 순간을 말이다. 그 전까지는 저가 학교에 가지 않고 나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핸드폰으로 쉴 새 없이 시간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00. 정각이 되자마자 학교는 시끄럽게 운다. 종소리가 바람을 타고 저 멀리까지 퍼져나간다. 찬위의 귀도 마음껏 흔든다.

학교에 가지 않았다. 아무 이유도 없이. 아파도 꼭 갔던 학교를, 무섭다는 이유로 가지 않았다. 찬위는 이상한 해방감과 엄청난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이제 어떻게 해야지? 그런 생각만 머릿속에 빼곡했다. 휴일이 아닌 날에 이 시간을 학교가 아닌 곳에서 보내본 적이 없었다. 특히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로는 방학 때에도 자습을 위해 학교에 나왔던 찬위였기에 더욱이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햇빛이 잘 들지 않아 까만 골목길 사이에 앉아있던 찬위는 무작정 몸을 일으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종이 치는 소리가 들리는 곳이라 이곳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는 여기에 더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수업에 들어가지 않는 선생님들이 저를 찾으러 나올 것 같았다. 부모님께 전화해보시겠지? 저가 어디간지 모르고 찾으러 다니겠지? 나를 봤던 친구들이 학교에 왔다 나갔다는 이야기를 하겠지?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빼곡하게 채운다. 그 위를 다시 덮는 것은 역시 과학 선생님의 죽음이다. 정말로 찬위는 선생님이 죽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거짓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이 죽지 않을 것을 믿고 있어서, 그렇게 알고 있어서 쉽게 거짓말을 했다. 친구들이 오늘 찬위의 이야기를 할까? 찬위가 한 거짓말에 대해서 대화를 나눌까? 찬위가 한 말을 담임 선생님께 전할까? 그렇다면 찬위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솔직히 거짓말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그럴 수는 없었다. 찬위는 제 손으로 저가 쌓아온 것들 위에 거짓말이라는 낙인을 찍을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게 진실일 순 없는데, 언젠가 거짓말이란 것을 들키고 말 텐데 찬위는 어떻게 해야 할까. 찬위의 걸음 뒤로 숱한 고민들이 질질 따라다닌다. 핸드폰에는 친구들과 부모님, 담임 선생님의 연락이 빼곡하게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찬위의 눈은 아무것도 차지 않고 텅 비어있다. 그래서 계속해서 걸을 수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걸음을 쉬지 않고 그렇게 둘 수 있었다. 찬위는 한참을 그렇게 걸었다.  



____ 장미 therosenove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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