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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냥깜냥 May 07. 2020

파란 거짓말 01.

written by 장미


파란 거짓말 01.


  

그날 아침은 평소보다 일어나기가 더 어려운 날이었다. 어머니가 몇 번을 깨우고, 또 깨운 후에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거울 속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와 있는 것이 당장이라도 크게 앓을 것 같은 모양새였다. 어머니는 찬위의 얼굴을 보시고는 학교를 쉬는 게 어떠냐고 권유하셨지만 찬위는 기어코 화장실로 들어와 샤워기를 틀었다. 차라리 학교에 가서 아픈 것을 보여주고 친구들이 걱정해주는 걸 즐기는 것이 낫지 그냥 혼자 집에서 쓸쓸하게 쉬고 싶지는 않았다. 꾸역꾸역 차가운 물로 샤워를 했다. 달아오른 몸에 쏟아지는 물이 몸의 열을 식히고 있는 것 같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열이 빠져나가서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차가운 머리가 두피 사이사이를 파고들 때마다 머리가 얼얼했다. 찬위는 어머니의 말대로 쉬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제야 하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학교에 가서 앉아 공부하는 제 모습을 그려보았다. 잘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냥 쉬는 게 좋지 않을까. 약한 마음이 머리부터 시작해 발끝까지 파고들기 시작하자 눈이 번쩍 뜨였다. 약한 생각은 하지 말자. 학교에 가자. 아집이 치고 들어왔다.

샤워를 끝낸 후 몸단장까지 재빠르게 끝냈다. 그동안 괜찮아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지 머리는 아직 말썽이었다. 어머니는 늘 아버지와 저를 위해 아침을 준비해 놓으셨지만 오늘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오히려 속이 울렁거려 잘못 먹었다간 크게 체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죽이라도 새로 끓여주겠다는 어머니를 거절하고 빈속에 대충 상비약을 털어넣었다. 차가운 물까지 벌컥벌컥 들이키고 나니 이제 괜찮은 것 같았다. 실제로 괜찮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참고서로 가득 찬 가방을 대충 둘러메고 신발을 신었다. 걱정스런 표정의 어머니가 현관 앞까지 따라 나오셨다. 찬위는 평소처럼 늘 연습했던 단정한 웃음을 내밀고 인사를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열기에 가득 찬 목소리는 조금 텁텁했다.

  

“괜찮아야지. 괜찮아야 돼.”

  

문 앞에 나서자마자 찬위는 제 양 뺨을 가볍게 두어 번 쳤다. 약을 먹었는데도 시야가 멀쩡하지 못한 탓에 학교에 쉬이 갈 몸이 아니어서 그랬다. 정신이라도 차리면 다리가 움직이겠거니 생각하고 뺨을 친 것이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시야가 또렷해지지 않자 몇 번이고 더 뺨을 쳤다. 발갛게 달아오른 볼 위로 붉은 색이 한 번 더 덧씌워졌다. 평소라면 같은 학교의 교복을 마주쳤을 엘리베이터가 한적했다. 찬위 혼자 엘리베이터를 차지하고 내려온 것은 처음이라 핸드폰으로 시간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아프다는 핑계로 평소보다 준비를 게을리해서 지각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일었다. 아침을 먹지 않아서인지 오히려 평소보다 더 이른 시간이었다.

1층임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바삐 발을 움직였다. 이르게 나온 김에 학교에 일찍 가서 앉아있어야겠다. 애들이 오기 전에 잠깐 엎드려 있으면 약효가 돌겠지. 그럼 좀 낫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

  

  

찬위가 예상했던 것처럼 반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 자리를 찾은 찬위는 가방걸이에 가방을 걸어놓고 책상 위에 엎드렸다. 집에서보다 더 뜨거워진 머리가 팔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팔에 따끈한 온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편하게 쉴 수 있을 텐데. 반 친구들이 하나 둘 오기 시작하면 반듯하게 앉아 공부를 해야 했다. 이 상태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찬위는 해야 했다.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기억은 잘 안 날만큼 꽤 오래 전부터 찬위는 가식쟁이가 되어 갔다. 매일 대부분의 친구들보다 먼저 학교에 와서 공부를 했다. 수업 시간에는 누구보다 더 열심히 집중하는 모범생인 척 했고, 쉬는 시간이나 식사 시간에는 다른 친구들과 모두 잘 지내는 것처럼 연기했다. 인사를 안 하고 넘어가는 친구가 없었고, 찬위의 주위에 아무도 없는 시간이 잘 없었다. 선생님들의 관심이 좋았고, 혼자 있지 않는 게 즐거웠다. 처음에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버거워서 실수도 많이 했지만, 몇 년을 그렇게 살아가니 이제 너무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가끔 이렇게 아프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지 않는가. 그래서 찬위는 지금 아무도 없이 혼자 앓고 있는 이 시간이 마음에 들었다. 정말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찬위, 오늘도 일찍 왔네? 너는 그 시간에 일어나지냐?”

  

나는 그거 못하겠던데. 오늘도 엄마가 겨우 깨웠어. 반에서 그나마 친한 재영이 찬위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인사했다. 아무도 없을 때에는 당장 죽을 것 같아서 공부도 포기하려고 했는데, 반에 친구들이 들어차기 시작하니 찬위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할 때만 끼던 안경을 끼고, 어제 다 못 했던 참고서를 펼쳤다. 재영이 와서 찬위에게 인사를 하기 전까지 찬위는 어떻게 저가 공부를 하고 다른 친구들과 인사를 했는지 기억을 하지 못할 만큼 정신이 없었다. 어깨를 치고 찬위의 자리와 가까운 제 자리를 찾은 재영이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은 찬위가 공부를 하면 잘 다가오지 않았지만 재영은 언제나 개의치 않고 제 할 말을 했다. 처음엔 그게 귀찮고 싫었는데 나중에는 공부를 하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재영이라도 와서 이야기를 해주는 게 고맙다는 것을 느꼈다. 재영이 말하는 것을 적당히 받아치면서 대화를 이어나가던 찬위는 제 참고서가 아예 보이지 않을 만큼 정신이 없을 때 샤프를 내려 놓았다. 재영도 찬위가 샤프를 내려놓는 순간에 맞춰 대화를 끝냈다. 평소라면 공부를 더 하면 더 했지, 이렇게 그만두는 찬위가 어색한지 의자도 끌고 가까이 다가왔다. 붉게 달아오른 찬위의 얼굴을 발견한 것은 그 후였다.

  

“야, 너 아파?”

“어?”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열 나는 거 아니야?”

  

……아닐걸? 찬위의 대답이 늦자 재영이 얼른 찬위의 이마 위로 제 손을 올렸다. 제 손이 그리 차갑지도 않은데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이마가 느껴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열이 높은 모양이었다. 찬위는 아까 약을 먹어서 저가 그렇게 아프다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재영의 손이 차갑다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재영이 호들갑을 떨며 양호실에 데려가려고 하지 않았다면 오늘 하루종일 평소처럼 수업을 들었을 게 분명했다. 담임 선생님께 양해를 구한 재영은 찬위의 의사는 제대로 묻지 않고 양호실로 질질 끌었다. 양호 선생님께 찬위의 상태를 보여주고, 체온을 재서, 그에 맞는 해열제를 받는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양호 선생님도, 재영도 그냥 조퇴를 하거나 양호실에 누워 있는 것을 추천했으나 부득부득 고집을 부리며 자리로 돌아온 것은 찬위의 선택이었다. 수업을 빼먹으면 수업 자료를 알려줄 친구들은 많았지만 저가 직접 수업을 듣는 것을 선호하기도 했고, 자리에 앉아 걱정스러운 얼굴로 찾아오는 친구를 보는 게 좋았다. 해열제도 먹어서 열은 금방 내릴 거라며 더욱 몸이 좋지 않을 때 조퇴를 하겠다는 약속을 한 뒤 자리에 돌아왔다. 찬위가 생각했던 것처럼 몇몇의 친구들이 찾아와 찬위의 안색을 살피며 걱정을 했다. 찬위는 이 순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첫 수업 시간부터 시작해 재빠르게 오전이 지나가버렸다. 평소보다 집중하기가 어려운 몸상태인지라 찬위는 집중을 하기 위해 훨씬 많은 체력을 소모해야 했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말이다. 함께 어울리는 다른 친구들과 재영이 같이 점심을 먹자며 다가왔지만 찬위는 아침처럼 먹지 못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책상 위로 엎드렸다. 친구들이 매점에서 빵을 사준다고 했으니 5교시가 시작하기 전에 먹어두면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금방 잠이 쏟아져서 다른 친구들이 점심을 먹으려고 가면서 제게 남긴 걱정도 제대로 대답해주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몸이 따끈따끈하다. 열에 잠식되다 못해 녹아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

  

  

정신을 차린 것은 재영이 제 몸을 가볍게 흔들 때였다. 친구들이 사다놓은 빵이 책상 한 켠에 놓여 있었다. 아직 점심 시간은 끝나지 않은 것인지 반이 시끌벅적했다. 재영은 찬위의 이마 위에 손을 올리고 열을 재본 뒤 빵을 내밀었다. 늘 점심을 거르지 않던 친구가 거르고 엎드려만 있으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고마워. 어지러운 정신을 겨우 붙잡고 찬위는 웃으며 감사 인사를 남겼다. 포장지를 벗겨내니 속이 빌 때 자주 먹던 크림빵이었다. 매번 장난만 치는 짓궂은 친구들이라 저가 좋아하는 것은 기억도 못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오늘 처음으로 기분이 좋은 것 같다. 아파서 정신이 하나도 없고, 짜증만 났는데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너 다음 교시 체육인데 괜찮아?”

“아, 체육이야? 망했네.”

“안 할 거면 지금 교무실 갔다 와. 내가 대신 가줄까?”

  

아니, 괜찮아. 이거 다 먹고 가면 되겠다. 고마워. 수업 종이 치기 전에 허락을 받아 놓아야 할 것 같아서 마음이 급해졌다. 먹는 속도가 빨라지자 옆에 있던 친구들이 천천히 먹으라며 찬위를 저지했지만 마음이 그렇지 못하니 속도가 크게 줄지는 않았다. 빵의 양이 그렇게 많은 편도 아니었고, 기분이 좀 나아지자 속이 빈 것이 더욱 또렷하게 느껴져서 찬위는 정신 없이 빵을 다 먹어 치웠다. 재영과 친구들에게 갔다오겠다고 이야기하며 교복을 단정히 정리한 찬위는 2층에 위치한 교무실로 가기 위해 계단으로 향했다. 복도에서 마주친 아는 얼굴들이 끊임없이 인사를 한다. 그게 찬위의 기분을 조금 더 좋게 만들었다. 그동안 열심히 한 결과물들이 이럴 때 늘 빛을 발하는 것 같다고 찬위는 생각했다. 계단을 몇 번 내려가고 나니 복도가 조용해졌다. 아마 1학년들도, 2학년들도 학교를 비운다고 했었던가…. 고등학교의 마지막인 3학년이 되자마자 학교 밖을 나가는 일이 드물어졌다고 툴툴거리던 친구들의 말이 떠올랐다. 1학년은 현장학습, 2학년은 수학여행 때문에 없다고 했나. 자신들도 그때 다 즐겁게 놀아놓고 부러워하는 것이 우스워 한참을 웃은 기억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학교가 조용하니 한적하고 좋았다. 이제 교무실까지 누굴 마주칠 확률도 적어져서 딱딱하게 굳어있던 어깨의 힘도 자연스레 풀어졌다. 멋있는 선배이고 싶은 마음은 당분간 곱게 접고 있어도 될 터였다.

  

“실례합니다.”

  

아직 점심 시간이라 그런지 교무실도 한적했다. 선생님들도 식사를 하러 가서 다 돌아오지 않은 것인지 군데군데 빈 자리가 보였고, 몇 있는 선생님들도 저들끼리 모여서 가볍게 대화를 나누시는 중인 것 같았다. 체육 선생님이 안 계시면 교무실 밖에서 기다릴 생각으로 안을 쭉 둘러보았다. 다행히 별 일이 없으셨는지 체육 선생님은 자리에 앉아서 핸드폰을 보고 계셨다. 친한 선생님들께 가볍게 목례를 하며 찬위는 선생님 자리까지 곧바로 나아갔다.

  

“선생님.”

“어, 찬위구나. 무슨 일이니?”

“저 다음 시간에 저희 반 수업인데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요.”

“그래? 조퇴하려고?”

“아뇨. 다음 수업까지는 듣고 싶어서 있으려고 하는데 체육까지는 무리일 것 같아서요.”

“그럼 교실에서 자습하고 있으렴. 가서 애들한테 체육복으로 갈아 입고 운동장으로 나오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찬위는 생각도 못한 체육 선생님의 말을 한 번 더 되새기며 교무실을 벗어났다. 당장 대학교 입시에 매달려야 할 고등학교 3학년들에게 체육 시간은 자습 시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남학생들은 나가서 축구라도 하겠다고 아우성이었지만 체육 선생님은 늘 교실에서 수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도 자습 대신 엎드려 있겠다는 허락을 받겠다는 생각이었으니까. 당장 체육 시간에 어떻게 선생님을 설득해서 나가 놀지 생각하고 있을 반 친구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찬위는 발을 바삐 움직였다.

학생이 3분의 2 정도 빠지니 학교가 조용하다 못해 고요했다. 운동장에도 뛰어놀고 있을 학생들이 없었고, 복도에는 저 외에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찬위는 저도 모르게 빈 교실들을 눈에 꼭꼭 집어 넣으며 걸었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 빈 책상과 의자 하나, 하나를 곱씹듯이 바라보며 걸음을 걸었다. 그러다가 인기척이 느껴지는 교실을 보게 된다면 자연스레 들여다 보게 되는 것은 비단 찬위만 그러는 건 아닐 거다. 과학 1실은 얼마 전에 오신 과학 선생님이 담당하는 교실이었다. 화학과 관련된 과목을 주로 맡으셔서 문과인 찬위는 제대로 본 적이 없지만 이과 친구들이 가끔 해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평소라면 교무실에서 잘 떠나지 않는다는 분이 어째서인지 오늘은 과학실에 계셨다. 그게 이상해서 찬위는 창문에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친구들이 체육복을 입고 나가려면 지금 당장 가서 알려줘야 했겠지만 당장의 호기심을 참기가 어려웠다. 창문 안의 과학 선생님은 찬위가 잘 알지 못하는 과학 실험 기구들을 잔뜩 꺼내놓고 무언가를 하고 계셨다. 수업이 없으셔서 실험이라도 하시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친한 선생님이라면 들어가서 무얼 하고 계시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러지 않았다. 조금 더 늦게 가면 반 친구들이 준비할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서 몇 분 정도를 과학 선생님만 가만 바라보고 있던 찬위는 몸을 떼고 다시 바삐 걷기 시작했다. 열은 많이 내렸는지 이제 걷는 것도, 생각을 하는 것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얘들아, 오늘 운동장 수업이래.”

  

찬위가 한 말의 여파는 아주 큰 반응을 가져왔다. 저마다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친구들은 찬위의 말을 듣자마자 환호성을 내질렀다. 평소라면 절대 나오지 않을 이야기를 찬위가 했기 때문이었다. 체육복을 입고 있던 친구 몇은 이미 운동장으로 뛰어나간지 오래였고, 아직 갈아입지 않은 친구들도 체육복을 입기 위해 난리였다. 그렇게 좋아하는 친구들을 보며 찬위는 조용히 제 자리에 앉았다. 재영은 이미 옷을 갈아입은 후라 제 자리에서 다른 친구들과 찬위를 기다리고 있었다. 된대? 짧은 질문에 찬위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혼자 교실에 있을 거야? 친구들은 혼자 남는 찬위가 걱정되는지 몇 가지의 질문을 계속 했고, 찬위는 그런 친구들을 교실 밖으로 밀어내며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랬다. 친구들의 걱정은 따스하고 좋았지만 사실 걱정할 것은 별로 없었다. 학생도 대부분 없는 날, 수업 시간에 혼자 교실을 지키는데 큰일이 생길 일은 벼락 맞는 것만큼이나 적을 것이다. 친구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하는 걱정이란 것을 잘 알고 있어서 찬위의 기분은 조금 더 좋아졌다. 아프더라도 학교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잘 있을 테니 재밌게 수업하고 와. 친구들이 끝까지 저를 걱정하는 것을 보고 가볍게 손을 흔들어준 뒤 찬위는 혼자 제 자리에 엎드렸다. 반 친구들이 모두 빠진 교실에 불을 꺼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평소보다 조금 어두운 교실이 싸늘하고 한적하다. 엎드리면 잘 보이지 않는 창밖에서 친구들이 신나게 뛰어노는 소리가 들린다. 머리를 흔드는 열과 좋지 않은 몸뚱아리가 저를 괴롭힘에도 어쩐지 평화로워서 찬위는 저도 모르게 잠에 빠져 들었다.

  

  

**

  

  

짧은 잠이라서 그런 것일까? 찬위는 잘 꾸지 않는 꿈을 꾸었다. 붉게 일렁이는 불꽃이 찬위의 눈앞에 있었다. 불꽃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찬위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거기에 닿으면 다 녹아버릴 것 같아서 찬위는 정신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물이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차가운 물이 있으면 저 불꽃을 다 꺼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작은 샘물, 아니 커다란 강이 눈앞에 보였으면 했다. 거기에 뛰어들어 열기를 다 식혀버리고 싶었다. 몸에 열이 나서 그런 걸까. 찬위 저 자신이 너무 뜨거워서 이런 꿈을 꾸는 걸까. 물이 보이지 않는다면 당장 꿈에서 깨어나 눈을 뜨고 세수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몸이 딱딱하게 굳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꿈에서의 찬위만 달리고, 또 달리고 있었다. 눈을 뜨면 바로 양호실에 가야지. 양호실에 가서 다시 해열제를 먹자. 이런 꿈을 꿀 바엔 약을 배부르게 먹고 공부를 하는 게 훨씬 더 좋을 것이다. 불꽃이 찬위를 삼켜버렸다.

수업이 끝나기 15분 전쯤에 눈을 뜨기 위해 타이머를 맞춰둔 찬위는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헉, 이상한 소리를 내며 허리를 곧게 세웠다. 열기로 가득한 꿈 때문인지 당장 눈앞에 붉은 게 아른거리는 것 같다. 꿈과 다르게 제 몸에는 열이 계속해서 떨어지는 탓에 손이 너무 차가워서 시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발의 온기가 악몽으로 바삐 뛰고 있는 심장으로 모두 몰려든 것 같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찬위는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제 몸을 진정시키고 나니 친구들은 수업을 잘 하고 있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당장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바라보니 운동장에 있는 친구들은 한창 바쁘게 뛰어 놀고 있지 않고 어수선한 모양으로 여러 개의 무리를 짓고 서있었다. 체육 선생님은 어디로 가셨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소방차나 구급차가 오는 것처럼 사이렌 소리로 학교 바깥이 시끄러웠다. 어디 큰 불이라도 난 걸까? 사이렌 소리가 너무 바빠 보였다. 찬위는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복도로 슬쩍 나와보니 수업을 하기 바쁜 선생님의 커다란 목소리는 없고, 다른 반 친구들의 어수선함만 교실 밖으로 새어나왔다. 갑자기 덜컥 겁이 나서 찬위는 복도를 내달렸다. 뭐지, 무슨 일이지? 모두 아는데 저만 모르니 무서운 것일까? 아니면 정말 학교에 큰일이 나서 본능적으로 긴장이 되는 걸까? 답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찬위는 계속 달렸다. 어디에서라도 답을 주었으면 했다. 찬위에게 모름은 커다란 고통이었다. 특히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을 저가 모를 때에는 더욱.

한참을 그렇게 달렸을까. 계단도 몇 번 오르내렸더니 어느새 2층이었다. 같은 계단을 이유없이 내려갔다 오르기를 반복했다. 저가 원하는 답을 찾기까지 바쁘게 다닌 다리가 가볍게 저린 것이 느껴졌다.

  

오늘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한참을 바라보았던 과학실이 불에 타고 있었다.

커다란 불꽃과 함께 울리기 시작했을 경보가 윙윙 머리를 울릴 만큼 큰 소리로 시끄럽게 상황을 알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모르겠지만 몇몇의 선생님들이 불을 끄기 위해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 겪는 일에 손이 아주 빠른 속도로 차갑게 식어갔다. 겁을 먹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아니, 오히려 너무 겁을 먹어서 큰일일 정도였다. 덜덜 떨리는 손을 붙잡고 찬위는 인파 속에 혼자 서있었다. 선생님들도 생각도 못한 일이 일어나서인지 저들 사이에 끼여 있는 찬위를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찬위가 그렇게 서 있는 것을 제지한 이가 아무도 없었다. 학교는 순식간에 혼비백산이 되었다. 불꽃으로 정신 없는 과학실에 있지 않은 선생님들은 다른 학생들을 밖으로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학교 안은 비명과 소란으로 가득했다. 찬위는 저와 같은 교복을 입은 친구들이 과학실과 떨어진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모양을 보고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너무 무서워서 저도 모르게 발을 내딛었다. 꿈에서 본 불꽃이다. 꿈에서 본 불꽃이야. 그런 생각만 머리에 자꾸 쌓여나갔다.

  

  

대피하는 학생들 중에는 아는 얼굴도 많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정신이 빠진 것처럼 보이는 찬위를 붙잡고 함께 대피를 하려 했지만 찬위는 어디서 난 힘인지 그것을 다 뿌리치고 내달렸다. 꿈에서 잡아먹혔듯이 현실에서도 그렇게 당할 것 같아서 물이 필요하다는 생각 밖에 나지 않았다. 물통, 물, 차가운 것, 그것 외에 찬위의 머리를 차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자 화장실인지, 남자 화장실인지, 아니면 선생님들만 사용하는 교사용인지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했다. 화장실이 보인다는 것만 깨닫고 당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조용한 화장실 한 켠에 놓인 양동이를 걸레 빨 때에만 사용하는 수돗가에 가져가서 물을 틀었다. 새파란 물이 검붉은 양동이를 금방 가득 채웠다. 그 뒤로 또 정신 없이 달렸다. 불꽃에게 잡아 먹히려면 물을 부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찬위를 누가 잡았는지, 누가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찬위는 어느새 다시 과학실 앞이었다. 소방차가 언제 도착한 것인지 소방대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불은 아까보다 작았다. 찬위는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물 양동이를 들고 가만히 서있었다. 제정신도 아닌데 얼마나 달린 것인지 심장이 아플 정도로 뛰고, 숨은 벅차서 가슴팍이 바삐 움직였다.

불꽃이 일렁이고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선생님들의 비명이 들렸다.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었다. 찬위는 이상하게 거기에 있던 과학 선생님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나와 계실까? 그런 생각을 했다. 선생님이 나오시지 않았다면 안에서 괜찮으신 것일까?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뒤늦게 소방대원들이 찬위를 발견했는지 제 팔을 이끄는 힘이 느껴졌다. 고개를 올려다보니 무거운 장비로 무장을 한 소방대원이 제 입을 막고 끌고 있었다. 양동이는 언제 놓쳤는지 모르겠다. 찬위는 그냥 그 손에 이끌려 다른 학생들처럼 대피를 하고 있었다.

  

불꽃 앞에서 사람들이 너무 빨갰다. 찬위만 그렇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저도 새빨갛게 물들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____ 장미 therosenove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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