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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냥깜냥 May 07. 2020

파란 거짓말 00.

written by 장미


파란 거짓말 00.



마치 바다에 빠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래로, 아래로, 또, 또, 또다시 아래로 내려가다 보면 끝이 나지 않는 영원에 빠질 것만 같은 기분. 검고 푸른 바다가 나를 집어삼켜버려서 영원히 암흑 속에 빠져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언젠가 꿈꾸던 바다는 너무나도 맑고 깨끗해서 꼭 내가 상상만 하던 꿈이 펼쳐진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꿈속에 있던 인어는 이미 물거품이 되어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았고, 인어공주와 함께 노래를 부르던 바다 생물들은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정말로 나 혼자만이 이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던 것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아도 생각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똑같은 생각의 굴레에서 돌고, 또 도는 반복의 연속이다. 답을 알려줄 수 있는 이는 이미 나를 떠났고, 혼자 남은 바다에 나만 그 손을 놓지 못하고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한다. 둥둥, 표류하는 생각의 배는 나를 무겁게 짓누른다. 내 몸을 짓누르고 그조차 바다에 서서히 가라앉는다. 나는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



찬위는 진득한 땀에 흠뻑 젖어버린 자신의 얼굴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끈적끈적한 땀만 만져질 뿐, 짠내 나는 파도는 그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매번 꾸는 꿈이지만 늘 그것을 모르고 마치 현실인 것처럼 마냥 헤매기만 한다. 작은 거짓말로 시작된 악몽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진실을 밝히면 꿈에서 깨어날까? 지독하기만 한 악몽이 없던 일로 변해버릴까? 나는 그렇게 솔직할 수 있는 인간이었을까? 아직 아침 해가 다 뜨지 못한 새벽, 찬위는 파란 거울 위의 자신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거짓말을 한 것이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뭐가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거짓말에 주어지는 것은 언제나 일말의 작은 죄책감뿐이었다. 남을 속여 나를 편하게 만든 것에서 오는 아주 작고, 가벼운 죄책감. 이렇게 하루 종일, 그리고 또 계속되는 며칠을 괴로워할 만큼 그리 가치 있는 죄는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위는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억울한 마음이 계속해서 불쑥 튀어 올랐다. 그래봤자 거짓말인데, 그래봤자 그냥 한 번의 눈속임인데, 왜 나는 이렇게 계속 고통스러워야만 하지.

아직 아침이 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꿋꿋하게 눈을 감고, 파란 새벽을 피해 이불을 덮는다. 엄마가 때가 잘 타지 않는다며 사주신 남색 이불은 겉가죽을 따뜻하게 만들어줄 뿐, 겁에 질린 내면까지는 포근히 감싸주지 못했다. 억지로 꾹꾹 감아버린 눈이 아려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을 뜰 수 없었다. 세상이 너무 파랗다. 분명 찬위가 베어 먹은 것은 새빨간 사과임에도 눈을 뜨고 바라보는 세상도, 눈을 감고 마주하는 꿈도 파랗기만 하다. 차라리 그 전처럼 새빨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툭, 내뱉어 버리고, 툭, 모른 체 하고, 툭, 그냥 잊어버릴 수 있는 새빨갛고 탐스러운 거짓말. 자신을 갉아먹고, 망쳐버린 바보 같은 거짓말 말고.


‘범인은 찬위가 아니야. 찬위는 그런 일을 할 친구가 아니란 거 다들 알고 있잖아.’


그렇지?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목소리는 마치 어린 아이의 것과 같아서 더욱 죄스럽게 만들었다. 별 거 아닌 시작이었는데 이제는 걷잡을 수도 없이 번져버렸다. 오늘도 찬위는 학교에 가서 거짓말을 해야 했고, 그것은 썩 좋은 방향으로 상황을 이끌어 가지 못했다. 거짓말 위에 켜켜이 쌓이는 새 거짓말들은 찬위를 좀먹고, 또, 타인을 갉아먹을 것이다. 모두를 잡아먹은 거짓말이 배부르게 가득 채운 제 욕심을 동동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것을 상상하니 배알이 꼴릴 지경이었다. 화가 났다. 가벼이 손을 잡아버린 자신에게, 이렇게 못된 저를 믿고 있던 타인에게, 위선을 떨며 손을 내민 거짓말에게. 이 상황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모든 주인공들에게 화가 났다. 사실 자신한테만 화가 났는데, 솔직하게 말을 하면 가장 나쁜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그럴 수는 없어서 냉큼 또 거짓말을 얹어버렸다.



**



“야, 그거 들었냐. 3반에 걔, 오늘 경찰서까지 간대.”


걔가 유일하게 본 목격자라며, 그러니까 진술하러 가는 거겠지. 그럼 걔는 수업도 안 듣겠네? 부럽다. 나도 그날 수업 안 들었으면 오늘 수업도 안 들었겠네.

가방을 움켜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며칠 내내 학교에는 찬위의 얘기만 들렸다. 학교에서 일어난 엄청난 일을 본 유일한 목격자. 하필이면 감기로 인해 체육시간에 홀로 교실을 지켜야만 했던 불쌍한 피해자. 운이 좋아 얼떨결에 수업도 듣지 않는 행운아, 요 근래에 찬위를 따라다니는 이름들이었다. 사소한 거짓말이 만들어낸 그것은 찬위의 새로운 이름을 잔뜩 만들어주었다. 썩 마음에 드는 이름은 하나도 없었지만, 찬위는 그 이름들을 감내하며 학교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것이 거짓말이 만들어낸 찬위의 모습이기도 했으니까.

시작은 굉장히 단순하고 사소했다.


‘아, 그거? 나 아까 쉬다가 봤어.’


평소에는 잘 부리지도 않는 호승심이었다. 피곤에 찌든 얼굴로 운동장으로 나가던 친구들과 달리 저는 편하게 쉬었던 시간에 대한 자부심, 남들은 보지 못한 것을 저만 볼 수 있었던 시간이라는 데에서 오는 승리감, 그냥 알 수 없는 약간의 자존심이 만들어낸 감정이었다. 그날의 비극은 아무런 목격자가 없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찬위는 홀로 대단한 목격자가 되어 거짓말하는 것도 가능했다. 찬위는 그것을 자신만이 쥘 수 있는 하나의 행운이라고 여겼다. 관심을 받는 자신이 우월한 존재 같았다. 친구들이 그 이야기에 대해 묻고 찬위의 거짓말에 감탄했다. 평소라면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저 스쳐지나가는 바람과도 다를 바가 없었는데, 지금은 세상을 지배한 신의 신탁만 같았다. 새빨간 거짓말에 정신을 빼앗겨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곤소곤, 찬위의 거짓말로 없던 일들이 소문이 되어갔다. 친구들 앞에 자랑스럽게 내보이던 거짓말들은 이제 찬위가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찬위의 입을 떠나 다른 친구들의 입으로 옮겨 다니고 있었고, 크기는 점점 커져 찬위가 다시 삼킬 수 있는 사이즈는 넘어서버렸다. 찬위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어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는 그저 별 거 없는 관심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할 때, 모두가 내 이야기에 집중하고, 내가 그 대화를 이끌 힘을 가지고 있고, 친구들이 만족할 만한 이야기를 하는 것, 이것이 찬위가 바라는 모든 것이었다. 이렇게 일이 손 쓸 수 없이 커져버려 감당하지 못하게 된 것을 바란 게 아니었다. 학생들 사이에 퍼지고, 퍼진 소문은 금방 선생님들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아무도 보지 않아 해결하지 못한 일은 찬위의 거짓말로 빛을 보았다. 선생님들은 찬위가 꼭 구원자인 것인 양 굴었다. 네가 그날 거기 있어서 다행이야. 네가 그것을 보았고, 그것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서 다행이야. 선생님들은 모두 찬위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사실 찬위가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말인데.


“제가 선생님께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오늘도 감당할 수 없는 말을 내뱉는다. 꼭 저가 대단한 사람인 것인 양 추켜세워 주는 선생님들이 좋았다. 친구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거짓말을 조금만 섞으면 선생님들은 계속 그렇게 봐줄 것이다.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는 전기수에게 모인 아이들처럼 사람들은 모여들 것이다. 멈춰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던 작은 순간은 이미 지나가버린 지 오래였다. 희열에 중독된 찬위의 표정은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설렘에 두근거렸다. 이미 베어 문 사과는 끝까지 다 먹어치워야 했다. 고작 사과씨만 남아 더 베어 물 수 없을 때까지 베어 물고 싶었다. 그 누구에게도 이 달콤함을 넘기고 싶지 않았다. 찬위의 선홍빛 혀는 이미 거짓말에 물들어 새파랗다. 마치 파란 색소가 잔뜩 들어간 불량식품을 먹은 후 같았다. 달콤한 사과를 베어 문 입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범인은 아직 누군지 모른다. 아무도 자신이 거짓말쟁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찬위는 범인을 모르는 목격자로 남으면 된다. 그렇다면 아무도 진실을 알지 못하리라. 찬위의 거짓말이 마치 진실인 양 그것을 믿고 살게 될 것이다.

아주 만족스러운 결말이었다. 검은 눈동자가 암울하게 빛이 났다. 



**



그날 화장실에 가던 길이었어요. 교실에서 자습하다가 가고 싶어져서요.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저만, 저만 있었어요. 1학년들이랑 2학년들이 그때 현장학습을 갔었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조용한가 보다, 하고 말았는데 과학실에 가까워지니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어요.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 때 깨달았어요.”


과학실은 불에 타고 있었어요. 저는, 저는, 너무 당황해버려서 사람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정신없이 학교를 뛰어다니고 뛰어다녔어요. 제가 다시 왔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나있었지만요.


동공이 이리저리 움직였을까? 손은 가만히 잘 두었을까? 얼굴이 붉어지거나 귀가 달아오르진 않았겠지. 거짓말을 하면 또 무엇이 변한다고 했었지? 찬위는 앞에 계신 선생님들의 얼굴을 찬찬히 훑으며 생각했다. 들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친구들에게 했던 이야기랑 많이 다를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그때 다시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선생님들이 자신이 한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는 교실에 계속 있었고, 과학실이 불탔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늦게 깨달았지만, 마지막에 들은 주제에 겁에 질려 양동이를 들고 나왔으니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어 보일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티만 내지 않았다면 선생님들은 제 말을 믿어줄 것이다. 다행히 선생님들은 찬위의 말을 믿는 것처럼 보였다. 별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찬위가 말한 것들을 각자의 방식대로 메모하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게 다 끝났겠지? 거짓말을 티 내지 않기 위해 허벅지 위에 툭 얹어놓은 손에 과육은 다 먹히고 앙상한 뼈대만 남은 사과가 보였다. 친구들은 이미 배부르게 거짓말을 나눈 뒤다. 이미 자기들의 입맛대로 새로운 얘기를 하고 있었고, 찬위의 말에 더한 기대를 가지는 친구는 몇 없었다. 선생님들도 이제 찬위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그것에 대해 깊게 파고들 뿐 찬위에게 무언가 더 묻지 않으리라. 사과는 거짓말로 시작한 모든 희열의 끝을 이렇게 알려준 것이리라. 찬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 밤, 새파란 바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꿈을 꾸기 전까지는 말이다.  



____ 장미 therosenove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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