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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냥깜냥 May 07. 2020

너에게

written by 다온


(※ WARNING : 본 글에는 직간접적 가정 폭력 및 성폭행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를 고려하여 정독 여부를 선택하시고, 읽으실 때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춥고 어두운, 어딘지 알 수 없는 곳. 지원은 무작정 걸었다. 분명히 추운데도 크게 춥지 않았고, 어둡긴 하지만 한 치 앞 정도는 보였다. 그래서 그저, 걸어지는 대로 걷고 있었다.

이 어딘가의 끝은 어디일까, 하고 생각할 즈음 멀리 희미한 빛이 보였다. 출구? 그렇다기엔 빛이 자꾸 움직였다. 몇 걸음 더 나아가고 나니 움직이는 것은 빛이 아닌 그림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림자의 주인은 사람인 것 같았고, 하나가 아닌 듯했다. 그대로 더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야 지원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마주하게 된 빛바랜 장면이, 몇 살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린 자신의 모습이라는 걸.




 지원아.

엄마는 한숨을 푹 쉬었다. 벽에 내몰린 나는 물 범벅이 된 얼굴로 색색 숨을 쉬며 울먹거렸다. 작은 발 주위에는 알약들이 흩어져 있었다. 처음 먹어보는 알약을 어떻게 넘겨야 할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얼른 다시 먹어. 무서운 목소리로 약 봉투에서 새 약을 꺼내준 엄마는 내 손에 약을 얹어두었다. 하나, 둘, 셋, 넷. 작은 혀 위로 얹어지는 작은 약들. 작은 입에 버겁게 채워지는 물.

바로 앞에서 내가 약을 삼킬 수 있을지 없을지 노려보는 시선.

머금은 것을 다 같이 꿀꺽 넘기기 위해 고개를 쳐들었지만, 쓴맛이 목구멍부터 올라와 울컥 구역질이 났다. 결국엔 다시 뱉어내고 말았다. 입안에 있던 약과 물이 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졌다. 고개를 숙이자마자 큰 손에 의해 고개가 곧장 들렸다. 쿵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힌 뒤통수가 얼얼했다. 짓눌린 뺨이 아파서 두어 번 더 기침했다. 아파서인지 무서워서인지 눈물이 계속 났다. 콜록대는 나를 놓은 엄마는 방으로 들어갔다.

고르지 못한 숨으로 흐끅거리며, 축축해진 바닥을 향해 혼자 숨죽여 울었다.


 


아주 예전에, 형편이 어려워져서 불편하게 살았던 작은 집. 부엌 옆의 작은 벽. 지원은 그곳으로 내몰릴 만큼 작았다. 흐릿하게 바랜 벽지처럼 희미한 기억 한 켠에 흘렸던 눈물을 떠올린다. 어느 유년의 모습이 천천히 사라질 때, 지원은 그것을 뒤로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아까처럼 저쪽에서 빛과 그림자가 움직였다. 조금 전에 본 기억이 그리 좋지 못해서, 이번에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그 빛과 그림자를 지나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나 지원의 걸음은 어김없이 장면 앞에서 멈추었다. 이전의 작은 집 다음으로 이사했던 조금 더 큰 집과 조금 더 자란 자신이 보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작은 지원은 작은 방 밖에서 들리는 큰 소리에 벌벌 떨며 눈물을 꾹 참고 있었다.


 


뭉툭하고 거친 욕설이 마구 들려왔다. 아버지란 자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집을 울린다. 쨍그랑, 쾅. 그리고 다시 욕설. 집 안의 무언가가 그의 분노에 의해 박살 난 채 바닥을 더럽힌다. 그만하라며 말리는 가족들의 목소리도 겹쳐 들렸지만 그의 귀에는 닿지 않는다. 그의 분노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지 나는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또한, 제대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설령 타당하게 발생한 분노라 하더라도 그 분노의 표출 대상이 우리가 되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으니까.

지원아.

방문을 열고 나왔더니 엄마가 나를 불렀다. 문지방 바로 앞까지 유리 파편이 가득했다. 나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아빠, 하지 마세요. 그러나 분노로 붉어진 까무잡잡한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겨우 목소리를 냈다. 되돌아오는 건 과연 자식에게 할 말인가 싶을 정도의 욕설뿐이었지만. 당장 나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은 흉흉한 눈이 가까이 다가왔다. 크고 단단한 손이 높이 들린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그친다. 나는 그게 제일 힘들었다. 차라리 그가 만든 상처가 온갖 곳에 선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한 짓이 분명해지길 바랐다.

그는 다른 물건에 더 분풀이를 하다가 방에 드러누웠다. 진한 술 냄새는 여전히 거실을 맴돌았다. 엄마는 아무런 말 없이 물걸레로 거실 바닥을 치우고 있었다.

지원아.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그 부름을 어긴다는 선택지는 나에게 없었다. 유리를 밟지 않게 조심하면서 그의 방으로 향했다. 그는 아까의 횡포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자상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나를 앞에 앉혀놓고 예쁜 딸이라며 뺨을 쓰다듬었다. 언성을 높이며 욕하던 목소리와 지금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고, 높게 들린 손과 지금의 손이 겹쳐서 보였다.

얼른 가서 자라는 말에 조용히 방을 나왔다. 엄마는 아직 분노의 잔해를 치우고 있었다. 왜 그의 짓을 처리하는 것은 엄마가 되어야 하는지, 그가 저지른 흔적들도 잔상처럼 남아 나를 괴롭힌다. 엄마는 가만히 선 나를 보았다. 세수하고 자.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남긴 말이 저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따라 조용히 욕실로 향했다.

큰 거울을 통해 마주한 내 뺨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혈육이란 뭘까. 찬물로 아버지라는 혈육의 피를 씻어내리며 생각했다. 차분하고 무감각해진 나의 눈이 나를 본다. 붉은 것 없이 깨끗해진 채 방으로 돌아갔다. 차가워진 이불 속으로 몸을 숨긴다. 그제야 눈물이 났다. 손이 계속 떨리고 숨이 잘 안 쉬어졌다. 잠들지 못하는 새벽 속으로 나는 더 몸을 웅크렸다.


 


하루 이틀이 아니었던 이런 날들 탓에 지원은 유리가 깨지는 소리를 듣거나, 그의 것은 물론 다른 성인 남성의 큰 목소리를 들으면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빠르게 뛰고 숨이 가빠진다.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이 날 것 같은 두려움을 참으려 노력해야 한다.

현관과 가까운 방에서 지냈던 터라, 그가 집에 오는 소리를 가장 먼저 듣는 것은 지원이었다. 묵직한 발소리가 가까워지면 긴장에 굳는 몸을 이불 속으로 숨겼다. 그런 다음 두 손을 꽉 맞잡고 달님에게 빌었다.

제발 오늘은 아무 일도 없게 해주세요. 오늘이 조용하게 지나가게 해주세요.

그 기도는 매일 밤 계속되었다. 어느 날은 달님이 그것을 들어주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들어주지 않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원은 매일 빌었다. 오늘은 달님에게 이 기도가 닿기를 바라면서, 간절하게.

어느새 유년의 장면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어둠 속의 지원 하나였다. 지원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여전히, 멈출 수 있다면 멈추고 싶은 걸음이었지만, 지원은 또 걸었다.


 


얼마나 더 걸으면 끝날까. 여기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더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걸어지는 대로 걷고, 보이는 대로 보게 되는 곳. 걸음이 이끄는 만큼 걸어서 우뚝 멈춘 곳에는 또다시 시작되는 유년의 기억이 있다.

장면 속 지원은 어느 여름날 아래, 익숙한 고등학교 때의 하복을 입고 마찬가지로 익숙한 동네를 걷고 있었다. 분명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 거기, 가면 안 되는데.

저 기억이 어떤 날이었는지 떠올린 지원은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그 아이를 만나러 가선 안 돼. 가지 마. 안 돼. 하지만 교복을 입은 지원은 걷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었다.




동아리에서 멘토와 멘티로 이어진 후배에게 연락이 왔다. 나와 상담하고 싶은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 아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후배가 생겨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나는 기뻤다. 그 아이가 산다던 빌라 입구에서 잠시 이야길 나누고 귀가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지원아.

앳된 목소리 너머의 욕망이 들려왔다. 두 손목을 압박하는 힘이 셌다. 나름대로 키운 근력이 있으니 어디 가서 힘으로 밀리지 않을 자신은 있었는데,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확실하게 대항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이런 일을 겪게 되면 그런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당장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안 돼. 그만해. 제발.

얕게 떨리며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풀기 위해 노력하고, 나를 짓누르는 무게를 밀어내려고 발버둥 쳤다. 내 손을 속박하던 그 아이의 손이 웃옷 속으로 파고드는 게 느껴진다. 두 손이 자유로워지자마자 그 아이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겁을 먹은 채 패닉 상태에 빠지려는 마음과 침착해야 한다고 소리치는 이성 사이를 오가는 머릿속 덕분에, 아무리 노력해 봐도 바들거리는 팔 힘은 역부족이었다.

제발. 안 돼. 하지 마. 그만해. 그만.

교복 안에 받쳐 입었던 티셔츠가 목 아래까지 올려졌다. 나는 이제까지 그 아이의 이름과 그만하라는 말을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성이라곤 보이지 않는 그 아이는 자신의 욕망만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행동을 멈출 줄 몰랐다.

마지막 남은 힘으로 그 아이의 이름을 크게 외치듯 부르며 어깨를 세게 밀쳤다. 문득 정신이 든 듯한 그 아이는 나를 아래로, 더 아래로 누르던 힘을 서서히 풀었다.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된 나는 곧장 그 아이의 집에서 나와 옷을 추스르고 빌라 건물 밖으로 도망쳤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집이 있어서 금방 돌아올 수 있었다. 진정되지 않는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여전히 그 아이가 내 위에서 나를 압박하고 있는 것 같았고, 내 몸을 향하는 손길도 아직 선명하게 느껴졌다. 작은 몸이 벌벌 떨렸다. 더운 여름날이었지만 손끝부터 머리끝, 발끝까지 얼어붙어 버릴 것처럼 춥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얼른 갈아입을 옷을 챙기고 욕실로 들어갔다. 온몸을 데울 수 있을 정도로 따뜻한 물에 많은 것을 씻어내리고 싶었다. 어지러운 머릿속도, 잊고 싶은 손의 느낌도, 무섭게 내려앉던 공기도, 나에게 닿았던 지저분한 욕망도. 전부.


 


지원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했다. 그 아이의 이름조차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시간이 지나 희미해진 기억이었다. 그랬었지, 무서웠지.

이후 한동안은 학교에서 그 아이와 마주치기만 해도 숨이 막혀서 더 힘겨웠다. 가장 친했던 친구에게만 이야길 털어놓고 참았던 눈물을 쏟은 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학교에 있는 동안 생각 이상으로 힘들어하는 자신을 느끼고서, 그 당시 담임 선생님께 이 일을 말씀드렸다. 지원은 그 상황에 제대로 맞서지 못하고 더 밀어내지 못한 게 자신의 탓인 것 같아서 더욱 괴로워했었다. 그래도 다행히 선생님의 도움으로 조금씩 괜찮아질 수 있었다. 나에겐 잘못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결론 내리고, 그 괴로운 감각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질 수 있었다.

멀어졌던 감각을 따라 눈앞의 장면도 사라져갔다. 다시 어둠 속에 혼자 남은 지원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심호흡했다. 또 걸어가야지. 지원은 움직였다.


 


이번엔 빛도 그림자도 아닌 무언가가 저만치 떨어진 곳에 있었다. 조금 더, 조금 더 걸어서 닿은 그곳은 놀이터였다. 요즘처럼 탄탄한 고무블럭이 아닌, 연한 베이지 빛의 거친 모래가 얕게 깔린, 작은 학교에 있을 법한 놀이터. 곳곳에 칠이 벗겨진 놀이기구들이 있었다. 지원은 정글짐과 철봉과 뺑뺑이와 미끄럼틀을 지나, 작은 그네에 앉았다.

그네에는 유년의 내가 앉아 있었다.

나도 함께 그네에 앉아 유년의 나를 바라보았다. 얼핏 멀쩡한 모습이었지만 마음 깊은 곳까지 썩어 문드러지고 잔뜩 지친 게 보였다. 어린 나는 어린 데에 비해 넘치도록 많은 생각을 하느라 욱신거리는 머리를 숙인 채 시선을 내려 신발코를 보고 있었다.




차마 닿을 수는 없는, 지금의 나는 지킬 수 없었던 나의 유년.

그런 너에게 무슨 말을 해주면 좋을지는 지금의 나도 잘 모르겠지만,

“지원아,”

잊지 않을게.

살기 위해 잊어야 했던 아픈 기억들 일부를 잠시 되짚어 본 것 같아. 나는 어쩌면 그 많은 순간 속에서 너를 수천, 수만 번쯤 죽이고 있던 건 아닐까. 사실은 언제든 떠올리면 선명하게 재생되는 기억들인데, 자꾸 저 먼 곳으로 너를 밀고 또 밀어낸 건 아닐까.

좀 더 안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지켜내지 못해서 미안해.

이제 더는 밀어내지 않을게. 그리고 나는 조금씩이라도 계속 나아가 볼까 해. 그렇다고 널 잊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너를 기억한 채 한 걸음씩 천천히 내디뎌 보려는 거니까.

혼자 외롭지 않아도 돼. 이제 괜찮을 거야.

절대로, 잊지 않을게.

푹 숙였던 작은 고개가 나를 향하고, 드디어 유년의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 시선이 맞물리는 순간 세계가 일렁였다. 시리도록 추운 어둠이 아득하게 사라져간다. 가장 어두운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지원은 눈을 떴다. 익숙한 방, 익숙한 침대. 혼자 사는 지원의 침실이었다. 꿈이었구나.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앉자마자 뺨을 타고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이미 축축하게 젖어있던 얼굴이 그제야 느껴졌다. 지원은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묻고 가만히 있었다. 손안에서 조금 더 울었을 수도 있고, 마음을 꾹 가다듬었을지도 모른다.



잊지 않을게. 언젠간 닿을 수 있도록. 



____ 다온 writerda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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