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깜냥 소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깜냥깜냥 May 07. 2020

같은 이름

written by 장미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이름은 나를 곤란하게 만든다. 대부분의 예쁜 이름은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되면 불편한 일이 무척 많이 생긴다. 다른 사람을 부르는데 나도 반응해서 민망해진다던가, 이름이 같은 사람과 쉴 새 없이 비교를 당한다던가, 자료가 섞여서 의도치 않게 몇 가지 일을 더 해야 하거나, 내 이야기가 아닌데 내 이야긴 줄 알고 마음을 졸이는 일 같은 것들 말이다. 아주 특별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면, 그 누구도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렇게 곤란할 일이 없지 않을까? 나는 어딘가에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자주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어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은 마음에 쏙 들었지만 조금 더 특별한 이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면 그건 거짓말일 게 분명했다. 나만 가지고 있는 이름이면 좋겠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내가 아니라는 생각 한 톨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특별한 내 이름.

  

“너 지우 좋아한다며?”

  

반에 앉아 있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듣게 되는 이야기였다. 저기 나오는 내 이름은 나와 같은 이름이지만 내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다른 지우만큼 그렇게 매력적이지도 못하고, 인기가 있는 사람도 아니고, 친구들이 모두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니까 말이다. 몇 반의 누가 지우를 좋아한다더라.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남들 모르게 콩닥거리는 마음을 잠재워야 했던 것은 새학기가 시작된 이후 며칠뿐이었다. 금방 모든 이야기 속에 나오는 특별한 지우가 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실망은 금방 해탈로 나를 이끌었다. 처음에는 나보다 훨씬 특별해 보이는 지우가 미웠고, 질투가 나기도 했다. 나를 기대하게 만들고, 구름 위로 이끄는 게 꼭 그 아이인 것 같아서. 그렇지만 그런 생각들은 다시금 내가 그 아이보다 못한 지우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계단이 되었다. 다른 친구들이 걔를 많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질투하고 미워하는 내가, 열등감에 잔뜩 쩔어서 말 한마디도 나눠 보지 못한 친구를 시기하는 내가 너무 초라해서 슬펐던 것 같다. 열 번째일까? 또 한 번 누군가가 지우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던 건, 그 지우가 내가 아니라는 점보다 내가 그 아이보다 못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새학기에 들려오는 지우가 내 이름이 아니라고 생각하기까지 고생한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새학기에서 바쁜 중간고사로 시간이 접어들면서 기대가 차곡차곡 접히기 시작했다. 나를 위해 억지로 꾸깃꾸깃 접어놓지 않고 가만히 놔두어도 자연스럽게 마음이 제 몸을 낮추기 시작했다. 체념은 좋지 않은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그러고 나니 마음이 더없이 편했다. 학교 생활이 조금이나마 즐거워졌다. 공부라도 못했으면 질투를 덜 했을까? 애석하게도 또 다른 지우는 공부도 참 잘했다. 선생님의 입에 지우는 공부도 잘한다는 칭찬이 입에 붙은 것은 중간고사가 지난 후였다. 또 다른 지우는 다른 반이었는데 선생님들은 꼭 우리 반에서 지우를 찾았다. 나는 지우였지만 선생님이 원하는 지우는 아니었다.

열등감이 조금씩 나를 좀먹어갔다. 나도 모르게 천천히, 아주 조금씩, 스며드는 것처럼 말이다. 체념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좋은 수단이기도 했지만, 자존감을 다시 회복하지 못하게 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차라리 그 지우가 아닌 나도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야 했을까?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억지로라도 했으면 지금보다 나았을까? 그때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후에 다시 깨달았다. 밟아놓은 자존감이 다시 부풀지 않았다. 내가 너무 못난 사람 같아서 마음이 자꾸 아팠다. 나름 재미있게 했던 공부도 어차피 지우보다 못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아서 하기 힘들었고, 친구들을 사귈 때에도 지우를 더 좋아할 거라는 생각이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었다. 그 친구들은 내 이름이 지우라서 친구를 하는 게 아닐 텐데 나는 언제나 내가 지우의 대용품인 것 같아서 불안했다. 걱정은 우정 사이의 보이지 않고 딱딱한 벽을 높게 쌓아 올려주었다. 그렇게 작은 학교 행사들이, 기말고사가, 여름 방학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나는 다시 맞은 새학기에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아졌다.

  

  

**

  

  

학교에 가기 싫어서 밤새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더니 늦은 시간에 눈을 떴다. 어머니는 오늘 개학인 줄 몰랐다며 사과를 하셨다. 부리나케 가방만 챙겨 들고 학교를 향해 뛰었다. 아직 다 지나지 않은 여름이 송골송골 땀이 맺히도록 열심히 불을 지폈다. 머리가 망가지고, 땀으로 얼굴이 흠뻑 젖을 때가 되어서야 교실에 도착했다. 열등감에 찌든 지우는 또 아주 멋지고 인기 있는 지우에게 졌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학교에 와서 그런지 모든 교실이 어수선하고 시끄러웠다. 모두들 제 친구들을 반기며 여름 방학 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원래라면 자연스럽게 친구들 사이에 끼어들었겠지만, 당장 못난 내가 너무 싫었다. 몇이 먼저 나를 보고 손을 들었는데 나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곧바로 화장실로 발을 옮겼다. 세수라도 해야겠다. 거울을 보고 머리 정리도 해야지. 그러고 나면 친구들 옆에 갈 수 있겠지. 사소한 생각이 차곡차곡 머리 위로 쌓여서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내 맞은편에서 오고 있던 사람과 부딪히는 일은 당연하게 일어날 사고나 다름이 없었다.

  

“괜찮아? 크게 넘어진 거 같은데 다친 데는 없어?”

“…어어? 어.”

“미안해.”

“아니야, 아니야! 내가 딴 생각하면서 걸어서 그래. 내가 미안해!”

  

눈매가 유난히 둥근 그 친구는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넘어진 나를 일으켜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다른 사람들도 당연하게 했을 그 행동이 뭐가 그렇게 친절해 보였는지 화살이 마음 중앙에 단단하게 꽂히는 것이 보였다. 정신이 빠져버렸다. 그 애가 내 손을 잡아 일으켜주고, 먼지가 묻어 더러워진 옷을 털어줄 때까지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괜찮냐고 물어보기 전까지 그 예쁜 눈매 말고 머리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생각을 하면서 걸은 건 난데 되려 사과하는 그 모습도 너무 좋아서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느끼고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내 잘못이라고 이야기하기는 했는데 제대로 사과했는지 모르겠다. 화장실에 가니 사과만큼 새빨개진 얼굴이 보인다. 찬물을 가장 세게 틀고, 머리가 젖고 있는데도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당장 달아오른 얼굴부터 식히는 게 우선이었다.

  

  

얼굴이 다 식고 하얗게 변하고 나서야 교실에 돌아올 수 있었다. 손으로 머리를 대충 빗어 정리하고 교실에 들어서니 친구들이 다시 나를 반겨주었다. 자연스레 친구들 사이에 끼여서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토로했다. 내가 학교에 늦은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까르르 뒤로 넘어가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친구들이 웃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난데없이 빠진 첫사랑도, 학교에 가기 싫어서 쌓아둔 고민도 대화 뒤로 몸을 감추었다. 수업이 시작되고, 오랜만에 보는 담임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설 때까지 나는 다시 그 생각들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자리에 앉아있는데 온몸이 심장을 따라 콩닥콩닥 뛰는 것처럼 느껴졌다. 꽤 오랜만에 기대와 설렘으로 바쁘게 뛰기 시작한 마음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잔뜩 달아오르곤 했다. 그 사람과 손을 잡는 상상, 함께 있는 상상만 해도 설레서 선생님의 말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정신을 단단히 붙잡지 않으면 금세 그 아이 생각으로 뛰쳐나가 버려서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선생님이 하시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다. 하루 종일 수업 시간을 그렇게 이상하게 보냈다.

오전 수업이 다 끝나고 점심 시간이 되었을 때 매일 같이 밥을 먹는 친구들이 내 곁으로 모여들었다. 나도 제대로 필기도 못한 교과서를 뒤로하고 친구들을 따라 급식실로 발을 옮겼다. 친구들은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 아직 다 하지 못한 방학 동안 있었던 일, 그 외에 다른 이야기를 떠드느라 앞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걷고 있었는데, 나는 혹시나 다시 그 동그란 눈매의 친구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앞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걸었다.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의 얼굴을 하나하나 보며 그 아이를 찾았다. 점심 시간의 학교는 너무 소란스럽고 어수선해서 그렇게 뚫어져라 앞만 보는데도 얼굴을 모두 확인하기 어려웠다. 혹시 이미 지나친 걸까? 다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는 새에 가버린 걸까? 찾는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마음이 덩달아 조급해졌다.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점점 빨라졌다. 느릿하게 걷고 있는 친구들과 떨어져서 혼자 걷고 있을 정도로 말이다. 뒤에서 떠들던 친구들이 혼자 앞서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내 이름을 부를 때까지 나는 그렇게 정신없이 그 아이를 찾고 있었다. 지우야! 커다란 내 이름 소리가 귀를 찌르는 순간 겨우 정신을 차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급식실에 급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다른 학생들을 지나치고 안으로 들어가 그 얼굴만 찾아다녔을지도 모르겠다.

  

“지우, 너 오늘 좀 이상하다?”

“그러니까. 무슨 일 있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딴 생각하느라 발걸음이 빨라졌나 봐. 어색하게 웃으며 가장 가까운 친구의 팔을 꼭 쥐었다. 또 그 아이를 찾다가 혼자 어디론가 가버릴 것 같아서 잡고 있어야 했다. 오랜만에 열린 급식실은 많은 학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대기하고 있는 줄 맨 뒤에 서서 급식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데 눈이 바삐 움직인다. 혹시 앞에 서 있을까? 아니면 이제 와서 뒤에 서 있는 건 아닐까? 이름도 모르고, 몇 반인지도 모르니 계속 조급해진다. 이름도 궁금하고, 몇 반인지도 너무 궁금했다. 친구라도 하고 싶었다. 이렇게 혼자 마음 졸이며 찾지 않고, 떳떳하게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야, 이서진! 여기!”

  

나도 모르게 고개가 휙 돌아갔다. 본능에 가까운 행위였다. 이름을 듣는데 귀에 확 꽂혔다. 아무 이유 없이 그 친구의 이름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인영이 보인다. 사뿐사뿐 내려오는 발걸음도 마음에 쏙 들었다.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을 때에는 나도 모르게 입이 크게 열려 버렸다. 정말로, 정말로 그 친구였다. 동그란 눈매를 가진, 첫눈에 흠뻑 빠진 그 친구 말이다. 서진, 이서진. 나는 속으로 서진의 이름을 계속 되뇌었다. 까먹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말이다.

  

  

이름을 알게 된 후부터 마음이 부푸는 건 아주 금방이었다. 그날 밥을 어떻게 먹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오후 수업도 그렇게 대충 날려버렸다. 집에 가서도 모자란 공부를 하지 않고 바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읊조리는 그 애의 이름이 너무 예뻤다. 다음에 본다면 인사라도 해볼 수 있을까? 친구가 되면 좋겠어. 몇 반일까? 서진에 대한 많은 생각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내 마음 속을 빼곡히 채워나갔다. 가기 싫던 학교가 가고 싶었다. 학교에 가면 서진을 볼 수 있을 테니까. 자꾸 마주치다 보면 친구가 될 수 있으니까. 좋아하는 마음을 전한다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그 얘기를 듣기 전까지 내 마음은 설렘을 타고 하늘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

  

  

“너 지우 좋아한다며?”

  

무럭무럭 자라나는 마음은 걔를 떠올릴 때마다 돋아나는 애정을 먹어가며 성장했다. 알고 보니 자주 놀던 친구가 서진과 같은 중학교를 나와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너무 좋아서 달아오르는 얼굴을 친구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애를 써야 할 만큼 말이다. 그렇게 조금씩 키워나가던 마음을 단숨에 꺼트린 것은 새학기면 늘 듣는 그 얘기였다.

잘 안 풀리던 문제가 있었다.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제대로 아는 친구가 없어서 선생님께 여쭈어보려고 교과서를 끌어안고 복도를 걷고 있었다. 몇 번 보지 못한 익숙한 얼굴이 보여서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었다. 하지만 서진의 옆에 있던 친구가 툭 던진 말이 내 발을 묶을 거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지우를 좋아한다고 한다. 서진이 지우를 좋아한다고 한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저기 나오는 지우가 나를 지칭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보다 멋진 지우, 나보다 인기 있는 지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요즘엔 지우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그랬을까. 나는 자연스럽게 또 다른 지우를 잊고 있었다. 그에 따른 열등감도 머리를 숙인 채 내 속의 가장 아래에 있는 심연 속으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것이 막지도 못하게 불쑥 머리를 쳐들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란 생각은 마음을 거세게 때린다.

혼자 멀뚱히 복도에 서 있는 모습은 이상할 거란 것을 잘 안다. 그런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마음을 수습할 수 없다. 나를 좋아할 거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친구가 되고, 시간을 보내면 언젠가 마음이 닿을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나를 좋아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만큼 남을 좋아할 거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건 나쁜 생각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날지도 모르니까. 거기다가 다른 누구도 아닌 지우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곤두박질친다.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어, 지우야?”

  

요 근래에 겨우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친구를 통해 알게 되어서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서진이 나를 발견해서 아는 척을 해오는데 마주 웃어주기 어려웠다. 나는 서진을 못 본 척 발을 움직였다. 가까워진 마음의 거리가 다시 멀어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는 척을 할 수 없었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꽤 오래 울려 퍼졌다. 나는 귀를 막고 꿋꿋이 걸었다. 교무실로 가는 길이 너무 멀었다.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께 모르는 문제의 설명을 듣는데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풀지 못해 빈칸으로 남겨진 문제 위로 선생님의 글씨가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게 꼭 잊어버렸던 제 열등감이 마음 위로 기어다니기 시작한 모양과도 같아 보였다. 이제 지우가 싫었다. 그냥 밉기만 했던 아는 애가 너무 싫은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나는 한참을 고민해도 제대로 풀지 못했던 문제를 선생님은 그 어떤 것보다도 쉽게 풀어나가셨다. 풀이의 마지막으로 온점까지 찍고 펜을 내려놓으신 선생님이 나를 올려다보신다. 사실 제대로 들은 게 아무것도 없어서 이해도 안 되었지만 감사하다는 인사만 남기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도 지우를 더 좋아하겠지? 좋아하던 선생님도 미워 보였다.

  

  

교실로 돌아가는 복도는 아까와 다르게 한적하고 조용했다. 선생님께 문제를 물어보는 사이에 수업종이 친 모양이었다. 늦으면 선생님께 혼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도 발걸음이 느렸다. 반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뒤로 돌아 학교를 벗어나고 싶었다. 어디서 오는지 모를 수치심에 몸을 숨기고 싶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혼자 기대하고 있던 자신이 어리석어 보였다. 스스로를 열등감 아래로 파묻으며 걷고 있는데 아는 얼굴이 보였다. 지우였다.

  

“안녕?”

  

별로 말을 나누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대화를 해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나는 그냥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지나치려고 했다. 걔가 나를 먼저 부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환한 미소를 얼굴 위에 걸고 나풀나풀 손을 흔드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나는 지우를 똑바로 마주하자마자 모두들 이 아이를 좋아하는 이유를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싫어하는 내가 보기에도 절로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분명 표정이 좋지 않았을 텐데 먼저 말을 걸어주는 것을 보니 상냥하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나도 모르게 내 앞에 서 있는 지우와 내 모습 하나하나를 뜯어보며 비교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멀뚱히 쳐다보기만 하니 지우는 다시 한 번 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호의를 이유 없이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라 나도 그에 응하여 손을 들었다. 이 인기 있는 친구가 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너 3반에 지우 맞지? 나도 지우야. 서 지우. 너는 김 씨지?”

“어, 어, 응.”

“네 얘기 많이 들었어. 공부도 잘한다며? 친구들이 네 이야기 종종 해줬거든.”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신세는 비단 나에게만 있는 일은 아닌 모양이다. 맞은편의 지우도 나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며 조잘조잘 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수업 시간은 이미 시작해서 당장 들어가야 하는데 급하지도 않은 모양이다. 공부를 잘한다, 인기가 많다, 착하다, 이런 말들을 들었다며 늘어놓는데 모두 거짓말 같았다. 분명히 나보다 공부를 더 잘하고, 인기가 많은 건 자신이면서 나를 추켜세워주려는 것처럼 말을 하는 게 얄미웠다. 우리 둘을 비교해보자면 당연히 내 앞의 지우가 몇 배는 더 나은 사람일 것이다. 사람들이 더 좋아하기도 할 거고. 다른 사람이 해주는 칭찬이면 모르겠는데 나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나를 추켜세워주는 것은 그리 기분이 좋은 행위는 아니었다. 오히려 비꼬는 기분도 들고, 열등감도 자꾸 솟아올라서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처음 보는 친구의 호의를 이렇게 받아들이는 건 나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나는 대충 바쁘다는 변명을 둘러대며 더 참지 못하고 말을 끊어냈다. 아까까지 들어가기 싫던 교실이 너무 그리웠다. 이제 다시 교실 밖으로 나오지 말아야지. 서진도, 지우도 모두 마주치기 껄끄러웠다. 학교가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 둘 중 하나라도 마주칠까 두려워하는 마음은 꼭 당장 터지기 일보 직전인 폭탄을 끌어안고 있을 때 느끼는 감정과도 같았다. 몹시도 불쾌하고 불안했다.

  

  

**   

    


서진과 지우를 마주치지 않기 위해 힘겨운 며칠을 보냈다. 주말이 오기 전까지 잔뜩 솟아있는 신경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내 첫사랑도, 내 첫사랑이 좋아하는 사람도 그렇게 보고 싶지 않았다. 매일 우연을 가장하여 서진과 마주치고 인사를 하려고 하던 과거의 나와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렇게 평소답지 못한 게 문제였을까? 나는 교실 풍경을 보고 머리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서진도, 지우도 우리 교실에는 잘 오지 않는 편이었는데 무슨 일인지 둘 다 내 주위를 자꾸 맴돌았다. 내게 직접 말을 거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 주변의 친구들과 대화를 하며 자꾸 나를 보는 것인지 눈이 마주쳤다. 요즘 서진의 생각으로 제대로 하지 못한 공부를 하기 위해 책상에 코를 박고 있다가 한 번씩 고개를 들면 꼭 둘 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것은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둘 다 부러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몰라서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업 시간이 끝나고 쉬는 시간을 보낼 때마다 마주치는 것을 깨달은 순간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둘 다 내게 무슨 일이 있어서 이렇게 신호를 보내는 걸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있잖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이리로 와서 해.”

  

그 말을 하자마자 두 사람 모두 내게 다가와 가까운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서진은 요새 복도에서 잘 보이지 않는 날 걱정했고, 지우는 저와 대화를 나눈 그 날 이후로 제대로 이야기를 해보지 못해서 왔다고 이야기했다. 그런 거라면 당장 와서 물어봐도 괜찮았을 텐데 왜 멀리서 눈치를 봤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밀린 공부를 하느라 쉬는 시간에 잘 나가지 않았다는 설명을 둘에게 차근차근 해주었다. 그게 내가 입을 연 마지막 순간이었다. 내 말을 듣고 뭘 안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크게 안심한 얼굴로 서로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과도 자주 하는 단순한 대화들이 내 책상 위로 잔뜩 쌓였다. 내가 아무런 말 없이 입을 딱 다물고 있는 것도 크게 상관이 없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둘만의 대화였다. 그게 내 마음을 콕콕 찔렀다. 서진은 좋아하는 사람과 대화하는데도 큰 반응이 없는 편인지 지우와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덤덤했다. 지우는 언제나 반짝반짝한 사람이라서 다른 친구들한테 이미 들은 얘기를 하는데도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내 앞에서 떠드는 두 사람이 퍽 잘 어울리는 모양새를 하고 있어서 나는 질투심만 삐쭉삐쭉 솟을 뿐이었다. 이렇게 떠들 거면 둘이 밖에서 떠들지. 두 사람과 같이 있는 게 좋으면서도 나는 그런 생각만 자꾸 들었다. 그냥 두 사람 다 내 친구라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둘 다 그런 친구는 아니니까 말이다. 수업종이 치고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둘은 내 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선생님이 오시고 나서야 두 사람이 사라졌는데, 나는 둘이 없어지자마자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진이 다 빠져버린 것 같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으면 좋겠다. 둘과 함께 있는 게 너무 힘들었다. 

두 사람은 이때부터 짠 것처럼 쉬는 시간마다 번갈아 찾아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내 앞에 앉아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고 가는 것뿐이었지만 계속해서 반복되니 같은 반에 있던 친구들도 의아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둘이 오지 않는 시간에 내게 무슨 일로 둘이 자꾸 다녀가냐며 묻는데 나도 정확히 둘의 생각을 알지 못해서 해줄 말이 없었다. 그냥 내가 재밌나 봐. 계속 오네. 무덤덤한 얼굴로 그렇게 말을 했더니 친구들은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는 내 모습이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친구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학교에서 인기가 좋은 지우가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나와 계속 어울리기 시작해서 그런 시선으로 나를 보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실 이 좁은 학교 안에서 인기가 많아봤자 얼마나 많겠냐마는, 그래도 그나마 제일 유명한 친구라 함께 있는 다른 친구들을 질투하는 사람이 꽤 되었다. 매번 지우의 그림자에 따라붙어서 질투하고, 미워하고, 부러워하던 열등감투성이가 다른 열등감투성이들에게 그런 시선을 받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나는 나를 부러운 듯이 쳐다보는 친구들을 보며 자조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는 꼴이 참으로도 이상하다.

친구들이 인기 있고, 잘났다는 이유로 나도 누군가에게 열등감을 주는 상대가 된다는 것은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일이다. 아직 지우를 보면 불쑥, 불쑥 솟아나는 열등감을 어찌하지 못하는데, 사실 그렇기 때문에 친구라고 이야기하기도 애매한 사이라고 생각하는데 남들은 나를 지우와 친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질투를 한다. 이상한 굴레가 막힘없이 굴러가는 모양새가 우습기 그지없었다. 차라리 다른 친구들이 지우에게 달라붙은 못생긴 벌레 취급을 해주면 좋겠다. 나도 지우만큼이나 대단한 존재처럼 우러러보거나 질투를 느끼지 말고 잔뜩 비웃어줬으면 좋겠다. 이미 바닥을 치고 꺼져버린 자존감은 불편한 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인다.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진즉에 들기 시작했다. 서진을 만나기 위해서 혼자 바등바등하던 때가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완연한 가을을 맞이한 하늘은 손에 닿지 않을 만큼 까마득히 높다. 변해버린 주위의 시선도, 자꾸 의중을 알 수 없게 들이미는 서진과 지우도, 내게 해명을 바라는 다른 친구들도 견디기 버거워서 옥상으로 도망쳐 왔다. 다른 학교들은 큰일이라도 날까 싶어 옥상 문을 걸어 잠근다고 하던데 우리 학교는 언제나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두었다. 그게 오히려 학생들의 흥미를 떨어뜨려서인지 옥상은 늘 한적하기만 했다. 그래서 가끔 이곳에 오는 것을 좋아했다. 옥상 문을 닫고 그 옆에 주저앉아 하늘을 마냥 올려다보는 시간을 좋아했다. 마음을 차분히 정리하고 모래가 되어버린 자존감을 조금이나마 수습할 때 이곳을 자주 찾는 편이었다. 오늘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자리를 잡고 앉았더니 기대만큼 예쁜 하늘이 나를 반긴다.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머릿속을 정리해본다. 서진을 좋아하는 마음과 지우 때문에 산산조각이 나버린 내 자존감과 그 위를 잠식하고 있는 열등감, 지금의 상황 같은 것들이 공책에 요점 정리를 하는 것처럼 빼곡히 정리되어 채워진다.

이제 서진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콩닥콩닥 뛰는 마음은 여전했고 그래서 서진이 이렇게 찾아오는 것이 버거웠다. 나도 모르게 기대를 하게 되니 말이다. 혹시 그때 말하던 지우가 내가 아닐까? 새학기에 그 생각으로 나를 망쳐놓고는 또 바보 같은 기대를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내가 서진을 찾아다니던 그때가 계속 그리웠다. 지우도 그렇다. 왜 나랑 함께하려 하는지 이해가 잘 안 갔다. 같은 이름인 것 외에 지우가 내게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지우만큼 인기가 좋은 것도 아니고, 공부도 그냥저냥이었다. 자존감이 높아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도 아니었고, 열등감에 찌들어서 다른 사람들의 눈치나 보는 못난 인간이었다. 누군가가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쉬이 하기에는 내가 너무 자신감이 없었다.

  

“지우?”

“어? 여기는 무슨 일이야?”

“그냥. 오랜만에 생각나서 와봤어. 너는?”

“나는 여기 자주 오는 편이야. 좋아하거든.”

  

빈 옥상에 말소리가 던져진다. 오래된 문이 커다란 소음을 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튀어나와 반갑게 미소를 짓는다.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둥근 눈매가 예쁘게 휘어진다. 나는 오랜만에 바쁘게 뛰는 심장을 느꼈다. 발끝과 머리끝까지 닿을 만큼 크고 힘차게 심장이 두근거린다. 옥상에 올라오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서진이 무슨 일인지 얼굴을 내밀었다. 나를 보자마자 예쁘게 웃는 것이 얄밉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애가 웃기는 또 왜 그렇게 예쁘게 웃는단 말인가. 괜한 기대를 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원망스러운 마음도 한 조각 생겼다. 자연스럽게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교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조곤조곤 말을 건넨다.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서진에게도 들릴까 봐 마음을 졸이며 열심히 대답을 해주었다. 서진과 함께 있으면서 부정적인 감상이 거의 들지 않는 것은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

  

“여기 좋다. 애들 다 옥상은 별로 안 좋아해서 나도 한 번 오고 안 왔는데 괜찮네.”

“그렇지? 오늘 날씨도 좋아서 올라왔어. 햇볕도 따뜻해서 교실 가면 잘 거 같아.”

“수업은 안 듣고?”

“못 듣는 거지, 뭐.”

  

대화가 즐거워서 자꾸 큰맘을 먹게 된다. 날씨도 좋고, 장소도 좋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단둘이 있기도 하니까 마음을 고백해보고 싶은 충동이 불쑥 머리를 내민다. 이 애는 나 말고 지우를 좋아할 텐데, 얘가 좋아하는 지우가 나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굶주린 짐승을 꼬드기듯 달콤한 향기로 나를 유혹한다. 눈을 꼭 감고 질러버리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서진이 좋아하는 지우가 누구인지.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요즘 들어 계속해서 내 옆에 찾아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가. 사실 그것은 서진과 친구가 되고,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더욱 가까워지고 싶다는 내 욕망을 실현한 일이기도 하지 않은가. 어디에서 치솟는지 모를 욕심은 내 입을 간질인다. 고백을 해. 네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토해내. 당장이라도 재채기처럼 고백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왜 그래, 지우야?”

“……있잖아.”

“응?”

“있잖아.”

“응. 뭔데?”

“나, 나 너 좋아하는 거 같아.”

  

너도 나 좋아하지? 나 들은 적 있어. 네 친구가 너한테 지우 좋아하지 않냐고 묻는 거. 이런 말은 더 덧붙이지 못했다. 좋아한다는 고백도 재채기인 양 터져 나온 것이라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뒤에 뻔뻔하게 다른 말을 붙이려고 하는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손을 올렸다. 거울이 없어서 보지 못하지만 새빨개진 얼굴 위에 살구색의 손이 얹어진 모습은 분명히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다시 없을 흑역사를 만든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서진을 바라봤다. 미묘하게 변한 얼굴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싸한 기운이 목 뒤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부정하고 싶은 게 사실이었다.

  

“음, 그렇구나.”

“…….”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하.”

“…….”

“미안해, 지우야.”

  

사과를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때 내가 들은 지우는 내가 아니라는 것을. 눈물이 터졌을까?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어떻게 변했는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위로 차가운 물이 들이부어졌는지, 기대감이 훅 꺼지면서 열기를 다 뺏어갔는지 모르겠다. 그냥 멍한 정신을 겨우 붙잡고 서진이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서진은 지금 당장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렇다고 해서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과 연애를 할 마음은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그게 거짓말인 것을 알았다. 지우를 좋아한다며. 지우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나는 똑똑히 들은 게 있는데 서진은 그 이야기를 똑바로 해주지 않는다. 나는 내 마음을 똑바로 이야기했는데, 그것의 대답은 거짓말이 덕지덕지 붙은 변명이었다. 화가 번지기 시작했다. 바람을 타고 거세지는 불처럼 말이다.

  

“…거짓말쟁이.”

“뭐?”

“거짓말쟁이!”

  

나는 빼액 소리를 쳤다. 어디에서 그렇게 큰 힘이 온 건지 모를 만큼 아주 큰 목소리였다.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서진의 표정은 아주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나는 이제 다시 서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거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렇지만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처럼 떠들기 시작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차라리 다른 지우를 좋아한다고 솔직히 말했다면 이렇게 화가 나지 않을 것이다. 솔직한 고백만큼 솔직한 대답이 왔다면 이런 결말로 마무리 짓지 않았을 것이다. 장난인 양 넘어가더라도 친구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서진이 직접 찾아와주면서 쌓아뒀던 우정을 내 발로 흩어지게 하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내 입을 막을 수 없었다.

  

“너 지우 좋아하잖아. 왜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

“어?”

“나 다 들었어. 너 친구랑 지우 좋아한다는 이야기 들었다고.”

“지우야….”

“차라리 그냥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얘기하지 그랬어. 그래서 나는 친구밖에 될 수 없다고 하지 그랬어.”

“…….”

“다른 모든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지우를 좋아하더라도 너는 나를 좋아한다는 이야기였으면 했어. 거기서 말하는 지우가 김 지우였으면 좋겠다고.”

“…….”

“그게 아니라면 거짓말로 대답은 하지 말았어야지.”

  

대답과 함께 짧은 첫사랑도, 눈물도 흩어진다. 발갛게 달아올랐던 얼굴은 이미 새하얗게 탈색이 된 지 오래다. 서진의 얼굴은 도깨비처럼 일그러져있다. 내가 봤던 얼굴 중에 가장 못생긴 얼굴이었다. 그때 잘못 들은 이야기일 수도 있다. 내가 오해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좋게 생각하려면 그렇게 좋게 생각할 수 있는 게 잔뜩이었는데 그런 생각은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그냥 화만 나서 나도 모르게 화를 냈다. 옥상이 오늘따라 더욱 삭막해 보인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곳에 더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지우를 데려오자. 둘이서 잘해보라지. 남이 봤으면 비웃을 어리석은 생각이 내 뇌를 관통하고, 나는 그것을 이행하기 위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뒤에서 서진이 부르는 목소리는 또렷했지만 못 들은 척했다.

매번 지우가 찾아와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지우의 반에 도착했다. 다른 아이들은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 있든 반짝반짝 빛나는 인기 많은 지우만 내 눈에 또렷하게 들어왔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지우와 대화하고 있는 무리에 끼어들었다. 지우의 손목을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지우는 갑작스런 내 행동에 당황한 듯했지만 내게 별말을 하지 않고 나를 따라와 주었다. 아마 눈물로 더럽혀진 내 얼굴 때문이었으리라. 머리끝까지 난 화가 차분하게 식어나가는 것은 지우를 이끌고 옥상으로 올라간 뒤부터였다. 옥상에는 서진이 있지 않았다. 텅 비어있는 옥상을 보니 화가 푸시시 가라앉았다. 지우를 데려온 이유가 사라져버렸다. 그제야 내가 한 어리석은 행동들이 떠오른다. 아무 설명 없이 데려온 지우에게도 설명을 해주어야 할 텐데 부끄러워서 할 수가 없었다. 지우는 내 말을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다.

  

“지우야.”

  

내 이름을 부르는 게 어색하다. 아니, 내 앞의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친구를 부르는 게 어색하다. 그러고 보니 지우의 이름을 제대로 부른 기억이 없다. 나와 같은 이름이라서 입 밖으로 내는 게 이상하다고 은연중에 생각했었나? 왜 제대로 부른 기억이 없을까. 지우에게 해주어야 할 설명이 잔뜩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지우야. 다시 한 번 지우의 이름을 불러보고 어색한 입을 다셨다. 이상한 행동을 하는 내가 싫어질 만도 한데, 그냥 내버려두고 교실로 내려갈 만도 한데 지우는 그런 것 없이 나를 차분히 기다려준다.

  

“나도 너처럼 인기 많았으면 좋겠어.”

“응? 무슨 말이야, 그게?”

“너 인기 많잖아.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아니, 아니야. 나 안 그래.”

“아냐. 너 인기 많아. 나는 맨날 들었는걸.”

  

누가 지우 좋아한다며? 그런 이야기, 매번 들었는걸. 그게 나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는걸. 너는 모두가 좋아하는 지우지만 나는 그냥 평범한 지우인걸. 두서없이 말을 내뱉는다. 지우가 내 원망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그동안 잃었던 자존감을 보상해주길 바라는 것처럼, 오늘 깨져버린 첫사랑을 돌려받길 원하는 것처럼, 내 열등감을 표출하며 원망을 토해냈다. 너는 인기가 많은데, 나는 그렇지 않아. 너는 공부를 잘하는데, 나는 너보다도 공부를 못해. 너는 매력적이어서 예쁘기도 하고 멋지기도 한데, 나는 그냥 평범하고 못생긴 거 같아. 나는 너보다 잘난 게 아무것도 없어, 지우야. 너는 왜 그렇게 잘난 거야, 지우야?

나는 이 원망이 나를 더 못나게 만들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추하게 털어놓는 진심은 나를 더 갉아먹고 못난 나를 만들 것이다. 열등감은 늘 그랬던 것처럼 나를 좀먹고 내 자존감을 갉아먹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원망을 털어놓지 않고 못 배길 것 같았다. 서진이 지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버린 순간 이렇게 되어버릴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못난 사람은 의연하게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애꿎은 사람을 괴롭힐 것이다. 조금이나마 나은 사람이 되려면 그러지 말아야겠지만 나는 이렇게 행동을 해버렸다. 이제 학교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을까? 내 책상 위에 즐거운 대화가 쌓일 일이 있을까? 다 토해낸 원망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지우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당장 죽고 싶을 정도로 내가 우스웠다.

  

“있잖아, 지우야. 우리 친구할래?”

“어?”

“나는 너랑 친구하고 싶었거든.”

“…거짓말.”

  

왜 거짓말이야? 나 진심이야. 나는 김 지우랑 친구하고 싶었어. 너 보고 먼저 인사하기 시작한 것도 나고, 매일 네 자리 앞에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도 난데 왜 아니야? 지우 너는 내가 인기 있다고 말하지만 네 친구들이랑 더 잘 지내는 건 너고, 공부도 나랑 비슷하게 하잖아. 내가 잘났다고 이야기하지만 정말 내가 너보다 잘난 건 없어, 지우야. 사실 나는 계속해서 내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래서 지금 말하는 거야. 나랑 친구하자고.”

“…….”

  

쿵쾅쿵쾅, 머리가 심장을 따라 뛴다. 열등감으로 요동치던 바다가 점점 잔잔하게 가라앉는다. 나는 지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계속해서 다시 되새겨봐야 했다. 나는 내 모습이 너무 못났는데 지우는 하나도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지우는 나 같은 거에 관심도 없을 줄 알았는데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내가 미워하던 사람이 나를 좋게 평가하며 친구가 되자고 손을 내미는 것을 보는 기분은. 좋은데 이상하게 울렁거린다. 지우의 손목을 잡고 옥상으로 올라올 때에는 서진과 지우의 뺨이라도 쳐보겠다는 헛된 꿈을 꾸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냥 이유가 궁금했다. 보잘것없는 나와 친구가 하고 싶다고 말하는 말간 얼굴이 진심인지 궁금했다.

  

“왜?”

“응?”

“왜 친구가 하고 싶어?”

“음. 이유가 많은데.”

“응.”

“굳이 꼽자면 이름이 같잖아.”

  

너도 지우고, 나도 지우잖아. 처음에는 그래서 친구하고 싶었어. 지우라는 이름이 흔한데 잘 보이지는 않잖아. 그래서 나랑 같은 이름을 보니까 너무 반갑더라고. 그래서 그때부터 친구하고 싶었어. 그 다음에는 같은 반 친구들이랑 너무 잘 지내는 네 모습을 보니까 착해 보여서 친구가 하고 싶었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습도 멋있어 보였어. 너랑 한 번도 이야기한 적 없는데 내가 인사를 하니까 네가 받아주더라고. 그때 너무 기뻤어. 그래서 계속 반에 찾아가서 이야기하고 그랬어. 너랑 친구하고 싶은 이유도 많고, 너랑 친구해서 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아. 친구하자, 지우야.

  

지우의 말에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나는 늘 나보다 지우가 반짝반짝하다고 생각했는데, 지우는 오히려 내가 반짝반짝해서 친구가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거기에다가 가장 큰 이유가 자기와 이름이 같다는 점이라는 것이 웃겼다. 눈물에 잔뜩 젖은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지더니 하하하하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저런 이유로 지우와 나를 비교하고 나를 깎아내리고 있었는데 지우는 많은 이유로 나와 친구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게 어쩐지 마음을 녹아내리게 해서 나는 지우의 어깨를 잡아 끌어안았다. 친구하자. 친구하자.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그런 내 모습이 이상했는지 한참 적응을 하지 못하던 지우는 친구를 하자는 내 말에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오늘 이름 덕분에 아주 특별한 친구를 얻을 수 있었다. 그제야 내 이름이 조금은 예쁜 것 같았다.

  

  

**

  

  

옥상의 그 일 이후로 나와 지우는 진짜 친구가 되었다. 학교에서도 자주 만나고, 주말에 시간이 되면 얼굴을 보는 날도 잦아졌다. 서진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도,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당분간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첫사랑은 천천히 정리해볼 작정이었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과 별개로 서진은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했으니 될 수 있다면 먼 훗날에 다시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조금은 있었다. 나는 아직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고, 자존감이 아주 낮은 바보천치이지만 이제 지우와 나를 비교하지는 않았다. 이름으로 얻은 친구는 내 자존감을 깎아 먹는 존재로 있기엔 너무 소중한 친구였다.   




____ 장미 therosenovel@gmail.com

매거진의 이전글 초연(初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