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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냥깜냥 May 07. 2020

초연(初演)

written by 장미


  

다시 눈을 떴다. 천장에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커다란 고래 한 마리가 숨을 쉬고 있다. 커다란 몸집만큼이나 큰 눈이 순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다. 며칠 째 저 아이만 바라보고 있는지 나도 잘 알지 못했다. 그저 눈을 뜨고, 고래를 바라보고, 현실을 자각하고, 다시 눈을 감는 것만이 요 근래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바다가 사라졌다. 나를 위해 존재하던 그 아름답고 찬란한 것이 사라졌다. 수오는 그것을 깨달을 때마다 울지 않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

사람들은 모두 수오를 보고 기적이라 말했다. 죽음을 택하고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이렇게 살아남는 사람이 생각 외로 드물다고 말했다. 네 연인은 떠났지만, 너라도 살았으니 다행이야. 친한 지인들은 눈을 뜬 수오의 손을 잡으면 늘 그렇게 똑같은 말을 했다. 내가 죽으러 갔는데, 그랬는데 연인이 대신 죽은 게 어떻게 다행이지? 깨어난 그 순간부터 수오는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고래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보면 가끔 눈앞에 인어가 보였다.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날 끌어냈던 내 연인이 말이다. 인어는 내 손을 잡고 끌어당긴다. 꼭 헬륨이 가득 찬 풍선처럼 하늘 위로 점점 떠오른다. 나는 그를 따라 겨우 몸을 일으킨다. 그의 손을 꽉 잡아보지만, 아득히 멀어진다. 침대에서 일어서면, 그래서 고래가 보이지 않으면, 다시 지독한 현실이다.

  

“왜 계속 나를 두고 떠나는 거야….”

  

오늘도 울음이 터졌다. 발은 제멋대로 걷기 시작한다. 눈물이 날 때마다 연인을 찾아 헤매던 발은 아물지 못한 생채기가 한가득이었다. 그게 꼭 수오의 마음과 같아보였다. 오늘도 아스팔트 위를 맨발로 걷는다. 그리 넓지 않은 도로를 건너면 연인의 집이 있었다. 아직 아무도 살지 않아서 텅 비어버린 집의 대문을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두드린다. 자기야, 자기야. 나 왔어. 문 열어줘. 눈물이 목 안을 가득 채워서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끅끅, 올라오는 눈물만 겨우 삼키는 게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죽고 싶었다. 바다를 향해 몸을 내던졌던 그 순간보다도 더 죽고 싶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숨을 쉬고, 살아가는 이유는 모두 나 대신 목숨을 잃어야 했던 연인 때문이었다. 널 대신 해서 그렇게 된 거잖아. 그걸 아깝게 만들지는 말자. 수오보다 연인을 더 좋아했던 지인은 수오의 손을 잡고 그렇게 말했다. 침대에 앉아 그 얘기를 들었을 때에는 꼭 세상이 무너진 것만 같았다. 갑자기 두꺼운 밧줄이 나를 옭아매는 기분이, 내 죽음조차 남에게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반항 한 점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은 나 또한 어느 정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같이 죽지 않고, 나를 살림으로써 내 연인은 나에게 크디 큰 복수를 한 게 아니었을까. 자신이 없는 삶을 이어가도록 하여 죽으려 한 내게 아주 큰 벌을 내린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자꾸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연인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절대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겠지만 내게는 이 생각을 부정해줄 그 사람이 없어서 계속해서 그렇게 생각해왔다. 매일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굴고 있음에도 죽지 못하는 이유였다.

나를 구해줘. 나를 죽여줘. 가끔 눈앞에 나타나는 인어의 손을 붙잡으면 늘 그런 말들을 했다. 죽음을 피해 살아나는 것이 남에게 구원이라 할지라도, 나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차라리 죽으면 그것이 구원이 될 것 같았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고, 고통스러웠다. 연인이 새로 쥐어준 삶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내가 어리석다는 것을 앎에도 그럴 수 없었다.

이런 사람에게도 다시 기적을 쥐어주는 것은 신이 자비롭기 때문일까, 내 연인이 또 나를 구원하려 드는 것일까.

  

  

**

  

  

“안녕하세요. 건너편에 새로 이사 온 임 주원이라고 합니다.”

  

떡 해왔는데 드실래요? 내 연인의 집에 새로운 이가 들어왔다. 누군가가 이사 온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울었던가. 갈 곳조차 잃은 기분이었다. 새로 이사 오는 사람이 나타나면 미친 사람처럼 매달리는 것은 아닐지 걱정했는데 그럴 힘조차 없어서 이삿짐 센터의 커다란 트럭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이제 저 집에 다시 갈 일은 없겠구나. 그렇게 포기했는데 맞은 편에서 먼저 우리 집의 문을 두드렸다. 곧 죽을 것 같은 내 시체 같은 모습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그 사람은 해맑게 웃으며 일회용 접시 위에 따끈하게 올라와 있는 떡을 쥐어 주었다. 오랜만에 생명력이 넘치는 무언가를 마주했다. 그래서인지 더욱이 어색하고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떡도 거절하면서 문을 닫으려 했는데, 그 해맑은 사람은 그런 내가 싫지도 않은지 몇 마디를 덧붙이면서 떡을 내 손에 넘겼다. 맞은 편에 비슷한 또래가 살고 있어서 너무 좋다고 이야기하던 그 사람은 자주 보자면서 악수를 하고 사라졌다. 굉장히 이상한 사람 같다고 생각하며 떡을 대충 식탁 위에 올려두고 자리에 누웠다. 오늘도 역시 고래가 보인다. 당장이라도 살아움직일 것 같은, 깊은 울림으로 바닷속에서 나를 반겨주던 그 고래는 오늘따라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사람을 봐서 그런가.

  

  

“수오씨, 어제 옆집 사람이 그러던데 수오씨 말을 이제 못한다고 하시더라고요. 분명히 인사할 때에는 목소리 들은 것 같아서 ‘저, 그 분 말씀 잘 하시던데요?’라고 했더니 잘못 들은 게 분명하대요.”

“…….”

“진짜에요?”

“아뇨. 근데, 저기…. 왜 오셨어요?”

  

주원은 마치 제 집처럼 우리 집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입을 닫은 이후로 말을 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어디에서 내가 말을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갑자기 찾아와서는 그 이야기 뿐이었다. 거기 그 사람들한테 가서 말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되겠냐고 묻는데 예의 없는 행동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미워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남을 거부하지 않는 내가 이상해서 목소리가 자꾸 퉁명스럽게 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입은 무척이나 가볍다. 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내게 어떤 일이 있는지 대부분 알고 있었다. 자살을 하러 간 연인들, 홀로 살아 남은 한 사람. 이웃들에게는 재밌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었다. 그리고 새로 온 이 사람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이 사람은 그런 내 이야기를 듣고도 이러는 걸까? 어떤 사람은 나에게 연인을 죽여 살아남았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안쓰러워하는 얼굴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밑에 잔잔하게 깔린 혐오를 나는 분명하게 본 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말을 줄이고, 상상에만 매달렸다. 지인도, 주변의 이웃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어져버린 것 같았다. 당장 내게 현실은 상상과 같은 그 바닷속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런 내 하루를 무참히도 바꿔버린다. 상상만 같던 현실로 나를 끌어당겼다.

  

“수오 씨는 햇빛을 더 봐야겠어요. 안색이 너무 창백해요.”

“저희 집 천장에 있는 고래 그림 알아요? 그거 진짜 잘 그렸는데 누가 그린 건지는 잘 모르더라고요. 집 수리해주시던 분이 지울 수 있다고 했는데 제가 괜찮다고 했어요. 마음에 들어서 남겨뒀는데 잠 잘 때마다 보면 기분 좋더라고요.”

“수오 씨. 밥은 먹었어요? 저 안 먹은 거 같아서 이것 좀 싸왔는데 얼른 드셔보세요.”

“저 무슨 일 하는 줄 알아요? 수오 씨는 아쿠아리움에서 일하셨다고 하던데 요새는 일 안 하시죠?”

  

주원은 매일 같이 찾아와 적어도 10분씩은 말을 걸고 갔다. 어디에서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듣고 온 것인지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대화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수오 쪽에서 가는 대답이 거의 없는데도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나중에는 수오가 하루종일 그 사람이 오는 시간을 기다릴 만큼 열심히, 또 꾸준히 찾아왔다. 주원은 연극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배우를 하는 것인지, 그 외에 스태프를 하는지, 그런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지만 연극에 대한 지식이 생각했던 것보다 어마무시해서 듣는 재미가 있었다. 주원 덕분에 조금이나마 사람이 사는 것처럼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꾸준히 수오를 찾아오는지 모르지만 수오는 그 짧은 순간에 겨우 연인을 잊을 수 없다. 육지로 건져진 채로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연인이 죽지 않았다면, 내가 죽으려 하지 않았다면 조금 더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었을 텐데. 그 사람 때문에 기분이 잠깐이나마 떠오르다가도 이런 생각이 들면 푸욱 가라앉아버리곤 했다. 주원은 연인을 많이 닮은 사람이었다. 눈 앞의 이목구비나 평소의 행동은 하나도 닮지 않았지만 분위기 하나만은 연인이 다시 살아돌아온 것처럼 닮아있는 사람이었다. 연인이 함께 있었다면 분명 좋은 친구가 되었으리라. 어느 날 이야기하고 있는 그 얼굴을 가만 바라보다가 그런 생각도 해보았다.

  

“저는 말이에요.”

“네.”

“삶은 하나의 연극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말을 하면 좀 오글거리다고 생각하나요? 수오 씨는 늘 가만히 들어주니까 별 얘기를 다 하게 되네요. 어쨌든 연극을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삶은 연극 같아요. 모두 자신이 주인공인 무대 위를 거닐고, 연기하고, 대사를 말하는 거죠. 그럼 엄청 별 거 아닌 것 같아지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좀 살만 해지는 것 같아요.

  

“죽고 싶을 때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삶은 연극이라고요?”

“네. ‘오늘까지의 나는 이제 막을 내리고 끝을 냈으니 새로운 연극을 만들어 내자.’ 이렇게 생각을 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처럼 사는 거죠.”

“…이상해요.”

“이상한데, 나쁘지는 않아요.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생각보다 숨 쉴만 해지거든요.”

  

수오 씨도 매일 죽고 싶어하는 것 같으니까 수오 씨한테만 알려주는 이야기에요. 분위기를 풀기 위해 슬쩍 짓는 웃음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머릿속에 내 짧은 인생이 휘몰아치고, 스쳐 지나간다. 장난으로 넘겨준 주원의 말은 나를 이상하게 만들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제대로 들리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평소처럼 의미 없는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그를 보냈다. 문이 닫히자마자 슬금슬금 침대 위로 기어 들어가니 더욱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지금까지의 내 삶은 그저 하나의 비극일 뿐이었을까. 그럼 지금은 어떻게 된 걸까. 죽다 살아난 나는 무대 위 어디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무대 위에 서있기는 한 걸까. 눈을 꼭 감았다. 시야에 암흑이 가득 찰 수 있게. 얼른 잠에 들고 싶다. 꿈속의 저 편으로 넘어가 이런 생각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 꿈에는 연인이 나와주면 좋겠다. 푸른 바다와, 커다란 고래와, 나를 사랑한 바다 생물과, 인어가 보고 싶었다. 여러 색을 품을 수 없어서 한없이 파랗던 인어가 그리웠다. 푸름의 생명력이 그리웠다. 눈을 감아도 시야 너머의 조명 빛이 계속 넘어오는 기분이 든다. 따뜻한 색은 오히려 푸름을 잡아먹어 꿈에서 멀어질 수도 없다. 현실에만 가까운 수오는 인어를 떠올려도 가까이 하지 못한다. 언젠가는 나를 데려갈 것처럼 손을 내밀더니 나타났으면 하는 오늘은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원망하면 안 되는 존재란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원망이 자꾸 튀어오른다. 눈 앞에 나타나주면 좋을 텐데.

머릿속에 자꾸 연인과의 일이 떠오른다. 삶은 연극이라고 이야기했던 주원의 말처럼 꼭 무대 위의 주인공들 같다. 달콤하게 속삭였던 사랑은 푸석한 대사처럼 들리고, 햇살은 마치 조명 같다. 뒷배경은 누가 그린 것인 양 어색하고 초라하다. 수오가 기억한 추억은 절대 이렇지 않았는데. 울컥 화가 차올랐다. 그런 이야기를 한 주원이 미웠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해서 우리의 추억을 퇴색시키지? 그 아름답던 것이 왜 이렇게 초라해졌지? 수오는 번쩍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대충 옷을 걸치고 또 맨발로 아스팔트 위를 나선다. 아직 저녁이었지만 차는 그리 많지 않다. 수오는 주위를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곧바로 주원의 집을 두드렸다. 다시 돌아오라고 연인에게 빌었던 것처럼 쿵쿵, 쿵쿵, 쿵쿵. 심장소리가 수오의 손과 함께 두근거린다. 수오 자신도 지금 저가 하고 있는 일을 퍽 이해하지는 못했다.

  

“누구세요.”

“나예요.”

“오, 수오 씨? 무슨 일이에요?”

  

수오가 생각할 틈도 없이 손을 뻗었다.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주원의 고개가 돌아갔다. 손의 얼얼한 감각을 느끼고 나서야 수오는 자신이 한 일을 깨달았다. 이렇게까지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원망은 조금 들었지만 때릴 정도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 그랬는데, 뺨을 때려버렸다. 수오는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흐르는 눈물이 오늘도 늘 그랬던 것처럼 입을 틀어막았다. 주원의 눈은 건조하게 내려앉았지만, 친절한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주원은 수오를 집 안으로 이끌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니 다른 것보다도 천장을 차지하는 커다란 고래부터 눈에 들어왔다. 수오가 제 연인이 살 적에 그려놨던 것이었다. 아직도 낡아진 부분 없이 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그것을 보니 침대 위의 고래가 떠올라 순식간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주원이 건네준 물컵을 받아들고 큰 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사과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깔끔한 목소리로 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 주원은 형식적인 인사를 되돌려주었다. 그 이후로 둘의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수오는 가만히 천장의 고래를 바라보았고, 주원은 그런 수오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언제나 늘 주원이 대화를 이끌어서 둘의 사이에 대화가 빈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무 말도 없으면 얼마나 어색할지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그렇지도 않았다. 수오는 오랜만에 찾아온 연인의 집에서 안정감을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었고, 주원은 그런 수오를 배려하기에 충분히 커다란 이해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한참 가만히 있다가 입을 먼저 연 것은 수오였다.

  

“삶은 연극이라면서요.”

“네, 그랬죠.”

“그렇게 제 삶이 연극이라고 생각해봤어요. …저도 일단, 살아야 하니까요.”

“그것 때문에 오신 거예요?”

“네. 제 삶이 연극이라 생각하니 저는 오히려 너무 초라해져서요.”

  

그렇게 생각하니 이성을 잃어서 찾아왔어요. 죄송해요. 뺨을 때리려던 것은 아니에요. 수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른답지 못한 제 행동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이 사람에게도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 너무, 너무 죽고 싶었다. 이제 더 이상 삶을 이어가기 힘들었다. 잠시나마 괜찮았던 게 다 거짓말 같았다. 저가 한계까지 끌어내려진 인간이라 생각하니 참을 수 없었다. 주원은 수오가 말을 마친 이후에도 더 이상 그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아서 더 그랬다.

  

“…제가 연극쟁이라서, 그런 생각은 못 해봤네요.”

“네?”

“저는 제일 빛나는 순간이 연극이라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수오 씨한테는 의미가 다르니 신기해요.”

“…….”

“저도 사과할게요. 수오 씨가 그런 기분이 들길 바라서 한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말을 좀 정정해볼까요? 멀뚱히 물컵을 들고 있는 수오를 식탁 의자에 앉힌 주원이 맞은 편에 앉아 입을 열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수오는 그런 주원의 말을 가만히 듣기 시작했다. 집이 주원의 것이라는 점 이외에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수오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나서야 잠깐동안 제 삶에 머물렀던 평온을 보았다.

초연(初演)이란 말을 들어본 적 있어요? 새로운 공연이 생겨나면 가장 처음으로 하는 공연을 초연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배우들도, 스태프들도, 연출도 모두 가장 긴장한 공연이에요. 관객들에게 처음 선보이는 공연이니까 반응이 어떨지도 모르고, 연습이 아닌 실전에서 무대에 오르는 것은 처음이니까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지만 조명은 빛나고, 무대 위의 배우들은 주인공이 돼요. 관객들의 반응이 좋으면 더 좋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초연은 언제나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인간도 삶을 딱 한 번, 처음으로 사니까 언제나 초연하면서 사는 거예요.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의젓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걱정으로 가득한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거죠. 그러다 삶을 포기하면 연극이 끝나는 거고, 다시 살아가면 새로운 연극이 시작되는 거예요. 다음 연극에는 더 잘하면 되는 거고, 더 멋진 공연을 선보이면 돼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며 삶을 연명해왔어요.

  

“이번 연극도 수고했으니까, 다음 연극은 더 잘해야지.”

“…….”

“제가 수오 씨한테 바란 것은 그거예요.”

“…….”

“애인이 당신을 살리고 죽었다면서요. 비극으로 끝났지만 희극은 다시 만들 수 있는 거잖아요.”

“…….”

“비극과 희극은 주인공의 결말로 정해져요. 당신이 행복하면 다음 연극은 희극일 수도 있어요.”

  

수오 씨 연인도 그걸 바라지 않을까요? 아롱아롱 떨어지는 것은 눈물일까. 그 바다의 흔적일까. 잠을 자지도 않는데, 꿈을 꾸고 있지도 않은데 저 멀리서 바다가 보인다. 주원의 너머에 내가 사랑했던 그 바다가 보인다. 수오는 거기에 있는 인어를 보았다. 파란 눈에, 푸른 머리를 하고, 영롱한 파랑을 자랑하는 비늘을 가진 내가 사랑하는 인어. 나를 위해 너무 많은 색깔을 뒤집어 쓰고 물거품이 되어버린 나의 인어. 당신이 바라는 게 이 사람이 말하는 게 맞을까? 물어보고 싶은데 답을 해줄 이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짠 바닷물이 얼굴을 씻어주는데 손으로 닦아내도 자꾸 넘쳐 흐른다. 눈물이 실없이 참 많이도 난다고 수오는 생각했다. 주원은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말을 하지 않을 때를 너무 잘 알아서 미워할 수도 없었다. 어쩐지 아무 연극이라도 좋으니 극장에 가서 연극을 보고 싶었다. 주인공이 행복에 겨워 활짝 웃는 것을 끝으로 막을 내리는 희극이 보고 싶었다. 당신이 원하는 삶이 그것이라면, 나는 당신의 삶을 대신하여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

  

  

주원의 지인을 통해 이번 년도부터 공연을 시작하는 연극 표를 얻었다. 주원은 같이 가는 게 좋지 않겠냐며 이야기했지만 수오는 정중히 거절했다. 혼자 가서 어떤 표정으로 나올지 저도 잘 몰랐기 때문에 굳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연극을 보기 전 날, 처음으로 바다의 꿈을 꾸었다. 나는 그 바다에 서있었다.

  

“아, 사람.”

  

파란 인어는 수오를 처음 보는 것처럼 반겼다. 수오는 저도 모르게 그 인어의 품에 와락 안기었다. 오랜만이야. 작게 속삭인 말은 수오가 그동안 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인어는 품에 안긴 수오를 조심스레 토닥여주었다. 바다는 언젠가 경험했던 것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어 반갑기도 하면서도 두려웠다. 수오에게 바다는 그리운 존재였지만, 몹시도 두려운 존재였으니까. 이제야 삶을 이어갈 의지를 조금이나마 얻었는데 이곳에 오니 당장이라도 물거품이 될 것 같다.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 같다. 당신이 이어준 삶을 나는 오늘 포기하고 당신의 곁으로 돌아가는 걸까. 그 옆에 설 수 있을까.

인어는 자연스레 수오를 이끌었다. 마치 처음 바다에서 만난 그날처럼. 그때와 같이 바다에 대한 설명은 커녕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수오는 인어를 따라 걷고, 또 걸으면서 심히 빠르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잠재울 수도 있었다. 숨은 짓눌린 것처럼 쉬기 어려웠지만 물거품으로 변했던 인어가 옆에 있으니 자연스럽게 심장은 고요해졌다. 오랜만에 보는 바다생물들과 인사하고, 저 멀리서 다가오는 커다란 고래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인어는 그런 수오를 보면서도 단 한마디도 먼저 하지 않았다. 주원과 있을 때와 다르게 수오가 이것저것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인어의 집에 주원이 이사온 것, 주원이 해준 연극에 관한 이야기들을 계속 주절거렸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기에는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몇 가지 없었다. 매일을 시체처럼 살아와서 연인이 굳이 듣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 판단했다.

살아 생전부터 다정한 청자가 되어주었던 인어는 오늘도 역시 그 누구보다 능숙한 청자가 되어주었다. 말미잘이 흔들거리는 바위에 나란히 앉아 주고 받는 이야기는 즐거웠다. 수오는 바다에 되돌아오고 나서야 진정한 웃음을 되찾은 사람인 것 같았다.

  

“행복해지면 좋겠어.”

“응?”

“너는 특별한 사람이잖아. 행복해지면 좋겠어.”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현실에서는 인어가 언제나 늘 풍선처럼 천천히 떠올랐는데 오늘은 그 반대로 수오의 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인어는 그런 수오의 손을 자연스럽게 놓았다. 잡아주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수오의 몸은 바다에서 점점 멀어진다. 위로, 위로, 또, 그 위로 떠오른다. 파도와 가까워진다. 점점 햇빛이 닿기 시작한다. 인어와 다시 헤어지면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냥 몸이 풍선처럼 떠오르는 것밖에 없었다. 어느새 바다 위에 누워있다. 햇살이 따스하게 안부를 묻는다. 수오는 이제 여기가 정말로 마지막인 것을 깨달았다. 오늘은 누군가의 마지막 기적이자 자비였다.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려주는 마지막의.

  

  

  

  

눈을 다시 뜨니 고래가 보였다. 그때처럼 참 짧은 꿈이다. 오늘은 바닷물로 얼굴이 젖지도 않았다. 수오는 몸을 일으키고 어색하게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그날 이후로 처음 있는 외출이었다.

  

살이 언제 다 빠졌는지 딱 맞는 옷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체구에 맞는 옷을 입고, 깨끗하게 단정한 수오는 주원이 준 연극표를 손에 쥐고 극장에 들어섰다. 괜히 사람들이 많은 인기가 많고, 커다란 극장에 가면 수오가 더 긴장하고 놀랄 것 같아서 그런 공연은 피했다던 주원의 말을 증명해주듯이 극장은 작고 소박했다. 오늘 처음으로 새 공연을 올려서인지 안내해주는 관계자들도 긴장으로 몸이 잔뜩 굳은 것처럼 보였다. 남들이 더 긴장을 해서 오히려 풀어진 수오가 의자에 몸을 깊게 파묻었다. 공연 직전에 온 것인지 금방 조명이 정리되고 연극이 시작되었다. 최대한 즐겁게 볼 수 있는 가벼운 것으로 골랐다더니, 공연 내내 웃기 바빴다. 노랗고 환하게 빛나는 조명도,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사도, 뒤를 장식하고 있는 배경도 수오가 생각했던 것만치 초라하고 못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멋져서 그렇게 폄하한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성이 뛰어나지도,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나지도, 조명이나 무대가 뛰어나지도 않았지만 수오의 마음에는 빠듯하게 기쁨이 들어찼다. 공연을 해나가는 사람들의 희열이 빈틈없이 수오를 채웠다. 수오는 연극이 끝나고 나서야 주원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로 삶은 연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힘으로 한 땀, 한 땀 채워 올린 건물은 배경이 되고, 찬란하게 빛나는 햇살은 조명이 되어 무대를 만들어준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대 위의 배우처럼 때로는 활기차게, 때로는 우울하게 보이지만 제 연극에 최선을 다 하고 있을 것이다. 연극의 표를 구해준 주원이 너무 고마웠다. 좋은 선물로 보답해야겠다고 수오는 다짐했다.

  

  

두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오랜만에 외출을 나온 수오는 몸을 이끌어 작은 꽃집에서 하얀 꽃다발을 샀다. 그리고 곧바로 기차에 올라섰다.

기차는 쉬지 않고 달려 연인이 있는 곳으로 데려와 주었다. 살아난 뒤 처음 찾아온 장소였다. 바다에서 살아 돌아왔기에 수오는 이제 바다에 갈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바다의 짠내만 맡아도 속이 울컥거리고, 숨을 잘 쉬지 못해서 그동안은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연인이 있는 바다는 보지 못하고 그 근처의 산을 올랐다. 정상까지 오르면 바다가 조금 보인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들었던 것 같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 다 닳아버린 체력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산을 올랐다. 다른 사람들은 금방 오르는 산이었지만 체력이 그다지 좋지 못하니 남들보다 한참이나 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다의 짠내도 나지 않았고, 바다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조금 보이는 곳이었다. 아니,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될 만큼 형편 없는 장관이었다. 그럼에도 수오는 연인이 있는 곳으로 온 것 같았다. 저가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 해서 했으니 연인도 자신을 원망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바다가 보이는 쪽으로 꽃다발을 내려둔 수오는 허리를 푹 숙여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오늘은 제 첫 공연을 끝내고 새로운 연극을 시작하는 날이다. 이곳에 오기 전에 봤던 연극의 커튼콜 음악이 들린다. 신나고 즐거웠던 음악이 수오의 초연을 마무리해준다. 관객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수오는 제 연인에게 작별을 고했다.

  

나는 당신의 삶을 대신해서 살아가지만 내 삶을 살아갈 것이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나의 탄생을 알리기 위해 그 누구보다 힘차고 우렁차게 울었다. 내 최초의 대사였다.  



____ 장미 therosenove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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