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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냥깜냥 May 07. 2020

잔화(盞話/潹華)

written by 다온



어서오세요, 여기는 찻집이랍니다.

무슨 찻집이냐고요? 그냥 평범한 찻집이지요. 길을 걷다 흔하게 지나치는 가게 중 하나일 뿐이에요.

차는 여러 가지 효능이 있어요. 몸 곳곳의 건강을 도와주는가 하면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도 줄 수 있지요. 단골손님들이 꾸준히 오가는 이곳은 조용하고 평화롭게 하루하루를 이어간답니다.

이런 우리 찻집에는 조금 다른 공간이 하나 있어요. 그건 가게 뒤편으로 가보면 알 수 있는데, 같이 가보실래요?

손님들에게 내어드릴 차를 준비하는 카운터 뒤 조리대의 옆에는 문이 하나 있어요. 이 문을 열고 나가면 가게 뒤쪽으로 갈 수 있어요. 뒤로 이렇게, 돌담이 가게를 둘러싸고 있어서 그런지 미로 속을 걷는 것 같죠? 미로라기엔 길을 헷갈릴 일이 없지만요.

아무튼, 가게와 담장 사이를 따라서 가다 보면, 짠! 이렇게 작은 창고가 하나 있어요. 주변 건물들도 있고 저희 가게가 담장에 싸여 있어서, 이 창고를 저의 안내 없이 알아챌 만한 존재는 길고양이들 정도일 거예요. 꼭꼭 닫힌 문은 제 열쇠로 열어요. 달칵 소리가 나면 문고리를 돌려서, 이렇게 들어갈 수 있답니다.

앞서 창고라고 말하긴 했지만, 내부는 깔끔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해요. 여긴 정말 소중한 공간이거든요. 컵이 정말 많죠? 손님 외의 다른 사람에게도 한 번 이곳을 보여준 적이 있어요. 그는 이곳에 진열된 것이 컵이 아니라 책이었다면, 이곳을 작은 비밀 도서관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여기에 같은 컵은 없어요. 비슷해 보이는 것들도 전부 다른 모양과 다른 색, 다른 무늬를 가지고 있어요. 컵 안에는 물이 들어 있고, 그 물의 색도 모두 다르답니다. 이곳의 컵들은 모두 특별해요. 그건 컵과, 컵 안의 물을 잘 보면 알 수 있죠. 예를 들기 위해 몇 가지 컵들을 들여다볼까 해요. 함께 보시겠어요?

우선 이 컵을 볼까요. 광이 도는 진한 갈색이네요. 든든하게 자란 나무의 색 같아요. 그리고 어디에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보통의 머그컵과 같은 모양이에요. 무늬는 도톰하게 짜인 스웨터의 꽈배기 모양과 같은 패턴이에요. 가을이나 겨울에 음료를 담아 마시면 참 잘 어울릴 것 같아요. 하지만 컵은 컵이니까, 스웨터랑 같은 질감은 아니죠. 무늬만 그런 거예요, 무늬만. 이제 컵 속을 보시겠어요? 연한 다홍빛의 물이 3분의 2가량 차 있네요. 빛이 참 예쁘죠. 이제 이 물속을 좀 더 자세히 볼 거예요. 자세히, 더 자세히 보다 보면 어떤 아이를 만날 수 있어요. 이렇게 몇몇의 아이들을 보게 될 테니, 이제부터 잘 따라와 주세요.



***



A는 약간 빠듯하게 집에서 나왔다. 버스를 놓치면 강의실까지는 좀 달려줘야 할 것 같았다. 다급한 걸음으로 정류장까지 이동했다. 3분 뒤 도착. A는 속으로 안도했다. 이 정도면 안전하다. 몇 개월 동안의 통학 생활로 익숙해진 시간 계산이었다.

곧 도착한 버스 안, 평일 오전답게 사람이 많았다. 사람과 사람 틈에서 겨우 손잡이를 쥐고 버텼다. 흔들흔들, 익숙한 흔들거림에 몸을 싣고 달리다 보면 학교 앞 정류장에 도착한다. 같이 흔들리던 사람들 중 대다수가 이곳에서 A와 함께 내렸다. 그리고 각자의 강의실을 향해 걷는다. 나무가 가득 늘어선 캠퍼스, 익숙한 건물들 사이사이로 수많은 학생들을 지나친다.

익숙한 강의실에 도착하면 익숙한 얼굴들. 친구들과 아침 인사를 나누고 그 옆에 앉으며 강의실 속 풍경에 자연스럽게 섞인다. 어이없고 말도 안 되는 웃긴 농담, 한참 남았지만 벌써 고민하게 되는 점심 메뉴 같은 것을 이야기했다. 정각이 되면 교수님이 도착해 출석을 부르고, 언제 들어도 졸린 강의를 꾸벅꾸벅 졸아가면서 듣는다. 째깍째깍. 시간아, 빨리 가라.

같이 강의를 듣던 친구들 중 몇몇과 함께 학식당 테이블에 둘러앉아 각각 같거나 다른 메뉴들을 먹었다. 먹으면서 개인적인 이야기도 나누고, 유행 중인 드라마 이야기도 하고, 조별 과제에서 만난 다른 과의 답답한 사람 이야기 등 같이 웃거나 같이 화낼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나누었다. 밥을 다 먹고 교내 카페에서 산 음료를 하나씩 들고 또 캠퍼스 안 벤치에서 수다를 계속했다. 매일 보는 얼굴이어도 즐겁게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서 A는 학교생활이 꽤 좋았다.

오늘은 동아리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강의가 일찍 끝난 편이라 모임이 있기 전까지 혼자 동아리방에서 다이어리를 펼쳐 보았다. 일정을 정리하기 위해 산 것이기도 했으나 다이어리 뒤편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많아서 그곳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장에는 많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처음 대학에 와서 낯선 선배들과 동기들 사이에서 오리엔테이션을 가졌던 날의 들뜬 기억,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날 좋은 봄에 MT를 다녀와서 즐거웠던 기억, 말도 안 되는 일정으로 이상하게 진도를 이끄는 교수님 때문에 애를 먹었던 기억, 마음대로 되지 않는 공부에 시달리며 대학 공부에 회의를 느껴본 기억, 잘 맞던 친구와 부딪혀 언쟁하는 과정에서 서로 상처를 주었던 기억, 유달리 우울감을 느끼던 날에는 대학에 온 결정이 잘못된 건 아니었을까 고민하면서 괴로워한 기억까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꽤 많은 시간을 지나왔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래도 잘 디딘 첫 발자국일까. 열아홉에서 스물이 되면서 사회적인 책임을 무겁게 떠안으리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스물에 만난 사회는 이제껏 살아온 날들과 어느 정도는 닮아 있었다. 게다가 책임의 무게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버티고 견디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가장 커다란 이유는, 나를 믿어주고 격려해주는 친한 사람들 덕분이 아닐까. 행복한 추억을 가득 채워준 소중한 사람들.

혼자였던 동아리방에 선배와 친구들이 하나둘씩 들어왔다. A는 일기장을 덮고 다시 일상 속으로 빠져든다. 오늘 모임이 끝나면 다 함께 맛있는 걸 먹으러 갈 것 같다. 회의가 끝나면 시끌벅적하게 식사를 하고서, 어느덧 어둑해진 하늘 아래 반짝반짝 수많은 간판이 빛나는 대학가를 걸어 정류장을 향해 갈 것이다. 그렇게 스물의 하루가 또 저문다.



***



조금은 혼란할 때도 있었지만 주변에서 주는 사랑 덕분에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A를 볼 수 있었네요. 잘 자란 나무 같은 진갈색, 따스해 보이던 무늬, 누가 봐도 예쁜 빛의 다홍색 물. 이제 이해되시죠? 이 컵 자체와 컵 속의 물은 한 사람의 삶을 담고 있답니다. 다음은 어떤 컵을 살펴볼까요? 혹시 보고 싶은 컵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보여드릴게요.

아, 저기 연보라색 컵 말이죠? 색이 참 예쁘네요. A의 컵과 다르게 깔끔한 무광이기도 해요. 하지만 이 컵엔 손잡이가 없어서 조금 더 조심해야겠어요. 물은 진한 회색빛이네요. A의 맑은 다홍빛에 비하면 들여다보기 어렵죠. 물이 컵의 2분의 1쯤 차 있어요. 이번에도 이 아이를 함께 만나볼게요.



***



B는 알람보다 먼저 눈을 뜨고 일어났다. 약 일 년 가까이 익숙해진 기상 시간이었다. 밤사이 와 있던 메시지 알람을 슬쩍 훑고 욕실로 향했다. 오늘도 당연히 움직여야 하니까.

자주 듣는 플레이리스트가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흘러들어왔다. 매일 지하철에 몸을 싣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저 목적지로 움직일 뿐이다.

열아홉부터 익숙해졌어야 했던 출근길. 이 사회 속 흔한 스물과는 아주 조금 다른 길. 나와 비슷한 길을 갔을 스물도 물론 흔할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취직도 좋지만 남들 가는 대학은 너도 가는 게 좋지 않겠니, 와 같은 소리를 질리도록 들었던 나는 아무래도 내 선택이 다른 길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번 역은 OO대, OO대 역입니다. 평소에도 매일 듣는 안내문이지만 오늘따라 이어폰을 뚫고 귀에 꽂힌다. 조금씩 덜컹대는 지하철 속에서 어깨가 살짝씩 스치던 옆 사람도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들 속에 섞인 채 걸어 나갔다. B는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다음 역으로, 그 다음 역으로 계속 실려갔다.

좋은 아침입니다. 상투적이고 익숙한 인사. 살갑게 웃어 보이는 선한 얼굴. 그러나 B와 함께 마주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는 이들도 마냥 웃고 싶은 아침은 아닐 것이다. 정해진 자리에 앉아 파티션을 사이에 두고 타닥타닥 타이핑 소리며 달칵이는 마우스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별 탈 없이 저무는 하루, B는 남들의 퇴근 시간보다 조금 더 이어진 업무를 끝내고 기지개를 켠다. 아직 남은 약간의 사람들을 뒤로하고 가방을 챙겼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내일 봬요. 아침과 변함없이 웃는 얼굴로 건네는 인사. 그대로 회사 밖으로 나와서 역으로 향하려다, 사람들로 숨 막히게 가득 찬 지하철이 오늘은 좀 더 싫었던 것 같다. B는 방향을 틀어 눈에 들어오는 카페로 들어갔다. 따뜻한 밀크티를 주문하고 작은 테이블 앞에 앉아 몇 개의 연락을 확인했다.

과제에 대한 불평, 과 동기들과 있었던 우스운 일 등이 고등학교 친구들끼리 만든 단체 메신저 방에 쌓여 있었다. B는 퇴근했겠다, 오늘 저녁 같이 먹을래? 메시지만 봐도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친한 친구였지만, 오늘은 안 될 것 같다는 말로 약속을 미뤘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정말, 오늘의 나는 정말 안 될 것 같아서.

휴대폰을 보느라 숙이고 있던 고갤 들자 카페 유리창에 비친 내가 보였다. 그다지 지치지도, 그다지 편안하지도 않은 얼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어 했던 걸까. 이게 내가 원했던 것일까?

어른이 되는 것 같아서 좋아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할 수 없고 하면 안 되는 공간에서 하기 싫은 일을 안고 그것을 이끌어야만 했다. 그런 나날들을 이어온 지도 수개월이 지났다. 지금의 나는 가면에 가면을 수십 번 덧쓴 채 스물을 살아내고 있는 것 같다. 단단하게 버텨내야 했고, 그래야만 살아낼 수 있었다. 그 결과 나는 지금 멀쩡한 척 겨우 하루를 견디는 껍데기만 남은 건 아닐까.

B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잠시 참고, 다시 내쉬었다. 적막한 카페에 내려앉는 한숨 정도로는 먼지나 조금 흔들릴까. 반쯤 비운 머그컵을 쥐고서 톡톡 가볍게 손끝으로 두드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를 나와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역 쪽으로 걸었다. 집에 도착하면 개운하게 씻고, 먹고 싶던 음식을 먹고, 좋아하는 영화라도 보다가 잠들도록 하자.

잠들기 전은 적어도 편안하게, 마음껏 나로서 숨 쉴 수 있도록.

어느덧 어둑해진 밤하늘 아래, 사람이 가득한 역 근처의 거리. 단정한 로퍼의 굽 소리가 사람들 사이로 섞였다. B는 아침처럼 지하철에 몸을 싣고 수많은 타인의 지친 어깨들과 스치며 하루의 끝으로 향했다.



***



앞서 만났던 A와는 조금 다른 하루를 보내는 B네요. 손님께서 눈에 띄어 고른 만큼 컵이 참 예쁜 빛인 걸 보니, B의 원래 모습은 아마 저희가 본 모습보다 더 활기를 띨 거예요. 주변의 신뢰할 수 있는 친구들로부터 사랑도 많이 받고 있을 것 같고요. 최근에는 계속 안 괜찮은데도 괜찮은 척하며 하루하루를 이어가느라 저희조차 들여다보기 힘들 만큼 물빛이 진해졌나 봐요. 그리고 B의 컵에는 손잡이가 없죠. 손잡이가 있을 땐 손가락을 걸고 적당한 힘으로 들어 올리면 되지만, 손잡이가 없으면 컵을 들 때 더욱 잘 쥐고 있어야 해요. 손바닥 전체로 감싸서 조심히. 지금의 B는 그만큼 많이 힘든 것 같아요.

이만 다른 컵을 볼까요? 저는 밀크 글라스도 참 좋아해요. 모양이 너무 귀엽지 않나요? 저처럼 밀크 글라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말 좋아하죠. 지나가다 밀크 글라스가 있으면 괜히 들러서 살펴보기도 해요.

그러면, 아, 저기 있는 저 별무늬 밀크 글라스 말이죠? 뽀얀 하얀색에 작게 총총 박힌 노란색 별들이 정말 예쁘네요. 이것도 B의 컵처럼 들 때는 조금 조심해야겠어요. 그건 손잡이가 없어서 조심해야 했지만, 이건 물이 굉장히 그득히 차 있어서요. 살짝 휘청하면 쏟을 정도예요. 물빛은 그라데이션이 감탄스러운 노을의 색이네요. 정말 여기에 노을이 담긴 것만 같아요. 옅은 분홍빛에서 진한 주홍빛까지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예쁜 빛깔이에요. 이 컵 속에는 누가 있을지, 이번에도 자세히 볼까요?



***



스탠바이 할게요! 다급한 스태프의 목소리에 C를 비롯한 그룹 멤버들이 마이크와 인이어를 점검하며 일어나 무대 옆의 공간으로 향했다. 해외 투어를 돌고 와서 하는 오랜만의 컴백인 만큼 뮤직비디오 컨셉과 비슷하게 꾸며진 무대가 꽤 화려했다. 사전 녹화에 온 팬들이 저 앞에 잔뜩 있었다.

무대 위로 올라가라는 신호를 받고 계단을 오르면 객석을 가득 채운 팬들이 응원봉을 들고 환호성을 지른다. C는 환하게 웃으며 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곧 멤버들과 나란히 선 채 리더의 구호에 맞춰 수백 수천 번은 더 했을 그룹 특유의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무대를 돕는 모든 스태프와 팬들에게 힘차게 외친다.

무대가 진행되기 전 잠깐의 틈에 멤버들과 C는 팬들을 향해 식사는 했는지 등의 작은 대화를 건네기도 하고, 멤버들끼리 투닥투닥 장난을 치며 팬들을 웃게 하기도 했다. 지금은 이렇게 친근하고 편안한 모습을 보이지만, 곧 스태프의 신호에 따라 대형을 맞춰 서고 녹화와 무대가 시작되면 그 순간 누구보다 가장 빛나는 예술가가 될 수 있었다. 연습실에서도 대기실에서도 셀 수 없이 연습한 안무와 노래를 선보이며 빨간 녹화 버튼이 들어온 카메라 앞에서 조명을 받고 반짝반짝 빛을 낸다.

한 번의 녹화가 끝날 때마다 무대 옆으로 내려가 흐트러진 메이크업을 수정함과 동시에 직전의 무대를 모니터한다. 모니터를 하면서 멤버들끼리 신경 써서 맞춰야 할 부분에 대해 상의를 하고 각자 자신이 보완해야 할 점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무대를 보여드리기 위해 오늘도 모두들 노력한다.

C는 최근에 생일을 맞았다. 많은 팬들로부터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축하를 받고 기쁜 하루를 보냈다. 비활동기였기 때문에 비교적 한산한 낮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를 쓴 채 지하철역을 돌아다니며 커다란 전광판에 담긴 생일 축하 메시지를 구경하고 사진도 찍어왔다. 이 모든 사랑에 대한 감사함을 표시하기 위해 밤에는 라이브 어플에서 생방송을 켜서 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방송을 종료한 뒤에는 연습실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 앨범으로 사람들에게 보답해드리고자 더 완벽하게 연습하고 싶은 마음이 강해지는 하루였다.

이렇듯 사람들로부터 받는 애정과 사랑을 당연시하지 않고 매번 소중하게 생각하며 감사를 표하는 C의 올곧음과 뭐든 게을리하지 않고 열심히 해내는 성실함, 사랑스럽고 다정한 배려심, 멤버들과 함께 있을 때 곧잘 볼 수 있는 귀여운 장난기 등 팬들은 C에게서 보이는 모든 모습을 아낌없이 사랑해주었다.

깊은 새벽에 이어진 긴 사전 녹화가 끝나고, 오후에 시작할 본방송에서는 컴백 기념으로 수록곡 무대도 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수록곡에 맞게 의상도 갈아입고 메이크업도 바꾸어야 했다. 그전에 잠시 남는 시간에 멤버들은 끼니를 챙기거나 부족한 잠을 자기도 했다. 하지만 C는 요즘 곡 작업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제 막 조금씩 시작하는 단계라 어려움이 많았지만, 작곡을 익숙하게 하는 멤버들에게서 도움을 받아 차근차근 해내는 중이다. 지금 같은 잠깐의 여유 시간에도 휴대폰 메모장을 켜놓고 가사를 고민하는 것처럼.

데뷔를 한 지도 벌써 2년이나 지났다. 처음 데뷔를 했을 땐 열여덟의 나이였고, 연습생 생활은 열넷에 시작했다. 익숙한 가정의 품을 떠나기에는 너무나도 이른 나이였지만. 조그맣던 키가 쑥쑥 자라고, 앳된 목소리가 안정적으로 변하고, 서툴던 몸짓과 노래들이 노력으로 성장하던 모든 순간에는 팀 멤버들과 함께였다. 부모님에게 애교 많은 자식이 아니었기도 하고, 이르게 만나버린 이 사회에서 어리광을 부리기보다는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다듬는 것에 익숙해져 버려서 오랜만에 통화를 나누어도 덤덤하게 잘 지내고 열심히 하고 있다며 괜찮다는 말만 했던 것 같다.

열넷부터 열여덟까지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데뷔에 대한 불확실함과 불안을 떠안고 자라왔다. 데뷔를 하게 되고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불안은 여전하다. 이 사회는 조심해야 하는 게 많았고,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음악을 직업으로 삼으며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 행복해서 선택한 길이었다.

나는 불안하면서도 행복하고, 반짝반짝 빛나면서도 걱정스럽고, 두려워 떨다가도 단단하게 버틸 힘을 내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살아남아야 하니까, 그러고 싶으니까.

이런 마음들을 왠지 곡에 담고 싶었다. 비단 나와 똑같은 입장은 아니더라도 다른 어느 곳에서 누군가는 이런 감정들을 충분히 느낄 수도 있으니. 어떤 단어가 가장 좋을지 신중하게 고르고 골라서 올해가 가기 전에 들려주고 싶다. 나의 스물은 이러하다고, 편히 듣고 공감해주었으면 좋겠다.

안 졸려? C는 열심히 가사를 지우고 쓰기를 반복하다가 멤버의 물음이 들리자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이따 조금 자면 돼.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곧 방송이 시작될 테니 마이크를 미리 차고 있자는 말에도 고갤 끄덕이며 저장한 메모장을 덮었다. C는 익숙하게 무대에 올라갈 준비를 하면서 지어뒀던 멜로디를 가사 없이 작게 흥얼거렸다. 방송이 끝나면 식사를 챙기고 곧장 연습실로 향할 것이다. C는 연습이 끝나도 연습실에 남아서 곡에 대해 더 고민하고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디 오늘도 누군가에게는 가장 반짝이는 별이 될 수 있길 바라며, 환한 무대를 향해 걷는다.



***



참 기특하고 사랑스러운 C의 모습이네요. 연예인이 아닌 우리들도 익히 알다시피 가혹한 사회잖아요, 여긴. C는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두려워하면서도 주변 사람들과 함께 힘을 내면서 차근차근 성장한 것 같아요. 불안함을 견뎌내는 게 가끔씩 힘들어 보이긴 하지만,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것이 다행이에요. 작지만 단단한 밀크 글라스 속에 보이는 모습은 노을처럼 다채로웠지만, 너무 많은 걸 떠안아서 그런지 물이 넘실대나 봐요. C가 더욱 안정화되어 편한 마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제 마지막으로 한 컵만 더 보고 손님을 보내드릴까 해요. 어느 게 좋을까요. 아까는 제가 예뻐라 하던 밀크 글라스 중에서 골랐으니 이번엔 손님께서 좋아하는 색 중에 골라볼게요. 하늘색을 좋아하시는구나, 그럼 이걸로 할까요? 이 컵도 보통의 머그컵과 같은 모양이에요. 연한 하늘색, 어쩌면 탁한 하늘색이라는 말이 어울릴 차분한 파스텔 톤의 색이네요. 좋아하는 색과 비슷한가요? 이 컵은 처음 봤던 A의 유광 컵과는 다르게, 그리고 두 번째였던 B의 컵과는 같은 깔끔한 무광이에요. 컵 속의 물은, 음, 아주 짙은 검은색이에요. 밤하늘을 좀 닮은 것도 같아요. 몇 방울 남지 않아 말라버릴 것 같은 이 물속도, 잘 헤아리면 볼 수 있을 거예요.



***



D는 소란하게 울리는 알람을 껐다. 오전 6시. 등교 준비를 해야 했다. 하지만 D는 알람 소리로 잠에서 깨어난 게 아니었다. 어제부터 쭉 잠들지 못한 채 혼자 새벽을 보냈다. D는 익숙하고 무감정한 얼굴로 욕실에 들어갔다.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잠들 수 없었다.

등교 준비를 마치고 가방을 챙겨 학교로 천천히 걸어갔다. 어차피 학교 근처에서 방을 얻어 살고 있었기에 금방 도착할 것이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몇 없는 학생들 사이를 지나쳐 근처 카페에서 산 진한 아메리카노를 들고 강의실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 시린 겨울 공기에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책상 위로 포갠 팔 위에 얹으며 엎드렸다. 피곤해, 졸려. 입속으로 중얼거린 말은 내뱉어지지 않았다. 학생들이 하나둘 강의실을 채우고 옆자리에 동기가 앉을 때까지 엎드린 채로 가만히 있었다. 오늘도 못 잤어?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에 엎드렸던 몸을 일으켰다. D는 살짝 웃으며 동기를 향해 고갤 끄덕였다. 머지않아 지루한 강의가 시작되었다.

연속되는 강의가 많은 오늘은 더욱 피곤했다. 강의가 모두 끝났을 땐 이미 저녁을 챙길 시간이었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동기에게 손을 흔들며 내일 보자는 인사를 나누고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나갔던 상태 그대로인 작은 방에 몸을 들이며 가방을 내려놓고 곧장 침대 위로 누웠다. 얼른 씻고 밥도 먹어야 하는데. 레포트도 마무리 짓고, 오늘 적은 필기도 정리해야 하는데. 내일 있을 학생회 회의에 필요한 안건도 정리하고…….

묵직하게 몸을 짓누르는 피곤을 이기고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미리 정리해둔 일정에 따라 해야 할 일에 우선순위를 정하고 하나둘 해치우기 시작했다.

D의 휴대폰 메신저 속에는 대학 친구들이 떠들어서 시끌시끌한 그런 단체 방 같은 건 없었다. 오늘은 조금 잤는지, 밥은 챙겼는지, 지금은 무얼 하는지 등을 묻는 고등학교 친구들의 연락들은 와 있었다. 적막한 방에 울리는 건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는 건조한 소리뿐이었다. D는 문득 그것이 싫었던 듯 조용한 휴대폰을 들고 좋아하는 음악을 작게 재생하기 시작했다. 그 음악 소리를 흘려들으며 마저 할 일을 계속했다. 자정이 넘어도 D의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이러다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아니 차라리 쓰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들처럼 대학교에 가고 공부를 하고, 때로는 의지할 수 있는 친구와 만나서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좋아하는 장소로 가벼운 산책을 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D는 쓰러질 것 같았다. 작년 즈음부터 점점 밤에 잠을 못 자게 되었다. 사실은 작년보다 훨씬, 아주 훨씬 더 예전부터 이어져 온 여러 가지 스트레스들은 또한 여러 방면에서 D를 괴롭혀 왔다. 참고 견디는 게 익숙해서 해소하지도 못하고 켜켜이 차오른 것들이 더 쌓이고 쌓여서 D를 망가뜨렸고 D는 이제야 자신의 힘듦을 인지했다.

내가 힘든 거구나. 내가 지금 힘들구나. 아니 계속 힘들었구나.

사실 거의 지쳤다는 표현이 맞았다. D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 얼마나 버텨온 건지 감히 가늠하기도 힘들 만큼의 시간 동안 D는 많은 걸 감내하고 이만큼 지칠 때까지 겨우 걸어온 것이다.

모두가 꽃답다고 하는 스물에 도착해 지금 이렇게 하얀 겨울까지 보내고 있지만, 이런 나의 스물은 과연 꽃이었을까 싶다. 꽃이 아니더라도 뭐든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의 나는 그 무엇도 아닌 존재 같았다. 여기의 나는 대체 뭘까. 적어도 숨은 쉬고 있는 걸까.

지쳤다. 정말 많이 지쳤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편하게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D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없었지만 아마도 울고 있는 듯했다. 여전히 잔잔한 음악 소리 위로 타이핑 소리가 이어진다. 투명하고 차가운 겨울의 새벽, D는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얼른 끝내서 덮고 싶었다.

모든 것을 끝내 버리고, 또 덮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면 좀, 행복할 것 같은데.



***



이제 마지막 잔에 담긴 이야기까지 다 봤어요. 저와 함께 보낸 시간이 지루하진 않으셨을지 문득 걱정이 드네요. 처음에 말했듯이 모두가 다 다르죠? 하지만 예를 몇 가지만 들어서 보여드린 것뿐이에요. 잔이 이렇게나 잔뜩 있으니까요. 게다가 여기 진열된 게 전부도 아니고요.

그런데 사실은 스물이 아니더라도, 세상 모든 사람의 모든 순간은 전부 길게 연결된 ‘처음’의 연속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답니다. 그래서 모두 처음이기에 무서워하기도 하고 불안해하기도 한다고, 또한 생각해요.

단 하나 욕심을 내자면 누구나 그저 하고픈 것을 하며 매 순간의 지금을 살았으면 해요. 무수히 많은 처음들을, 지금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바람은 제 마음이잖아요. 바라고 또 바라다 보면 언젠가는 이루어지는 날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요.

이만 찻집으로 돌아가 문을 닫을 시간이에요. 당분간은 이곳에 다른 이를 초대하지 않은 채, 늘 그랬듯 먼지를 치우고 진열장을 닦고 잔들을 소중히 다루며 찻집을 여닫을 거예요. 다음에 오실 땐 근사한 차를 내어드릴게요. 오늘 하루 말벗이 되어주셔서 감사했어요.

다음에 또 봬요. 안녕히 가세요!   



____ 다온 writerda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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