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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냥깜냥 May 07. 2020

행복을 먹는 꿈

written by 장미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커다란 성공을 했다거나, 어마무시한 부를 축적하고 떠난 삶은 아니었지만, 친구들, 가족들과 즐겁게 보내다 떠난 삶이었다. 마지막으로 눈을 감을 때, 내 손을 잡아주던 가족들의 얼굴도, 그 옆에서 울음을 터뜨리던 친구들의 얼굴도 저승까지 가져갈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눈을 감으니 세상이 뒤집혀 있었다. 거꾸로 돌아선 세상은 온기도 없이 서늘하여 누구든지 한 눈에 저승이란 것을 알 만큼 서늘했다. 서늘한 길 위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발이 올라선다. 나도 모르게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싸늘한 시신 위로 무너져 우는 내 사람들, 이제는 내가 모두 내려놓고 떠나야 할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마지막의 인사를 건넨다. 맨발 위로 뚝, 뚝 차가운 눈물이 떨어진다. 허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이제야 죽음이 참으로도 무섭고, 두려웠다. 이승에 남은 내 몸이 다른 이들에게 실려 갈 때까지 날 위해 울어주는 사람들과 울다 몸이 떠나는 것을 보고 허리를 폈다. 내 몸이 땅으로 돌아가듯, 나또한 가야할 곳으로 가야했다. 한 발짝, 한 발짝 움직이는데 발에 닿는 싸늘함은 쉬이 익숙해질 것이 못된다. 나는 아마도 이 길의 끝을 걸을 때까지 여기에 익숙해지지 못하리라. 계속해서 무섭고, 두려워 몇 번이고 주저앉으리라. 나는 몇 발자국 걷지도 않았지만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싸늘함에 물들어버린 발은 이제 더 이상 감각이 없다. 아니, 온 몸 어딘가가 고장나버린 듯 감각이 없다. 울컥 겁이 나서 뒤를 돌아 달려보기도 했다. 내가 건너온 문이 가까우면서도 멀다. 다 온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못해서 멀찍이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문을 보고 있노라면 야속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화가 치밀어서 소리를 질러보기도 하고, 길에 발을 내리꽂아보기도 했다. 그냥 헛수고였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앞으로 걸을 때쯤에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잘 모르겠다. 사실 이곳에 시간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죽기 전에 느꼈던 공포와는 또 다른 죽음의 공포였다. 아무것도 알지 못해서 오는 공포라는 것은 둘 모두 동일했으나, 그것의 깊이는 사뭇 달랐다. 더욱 까맣고 진한 것이 몸을 감아 휘두른다. 그것을 떨쳐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도 걷는 것뿐이었다.


“저기요!”


계속 걷기만 하고 있을 때 나는 사람을 만났다. 공포에 잔뜩 질려버린 나와 다르게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 사람은 저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며 나를 반겼다. 내가 아는 사람인가 싶어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아도 오늘 처음 본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를 반기듯 나를 반기었다. 안녕하세요. 내가 가까이 가자마자 그 사람은 그렇게 인사를 했다. 그 익숙한 인사말이 오히려 어색해서 나는 목소리를 조금 떨며 대답을 했다. ‘아, 아, 예, 아, 안녕하세요.’라고 말이다. 그 사람은 자연스럽게 나를 이끌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걷느라 많이 힘드셨죠? 저도 오랜만에 사람을 다 보네요. 여기가 이렇게 길고 아무것도 없어서 사람을 만나기가 참 어려운데 말이죠. 상대방의 호응 없이도 말을 참 잘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사람의 말대로 걷는 것에 지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따라 걸었다. 저승길은 혼자 걸어야만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것은 또 아닌가보다, 하고 말았다. 더 이상의 생각은 너무 많은 생각을 낳고, 또 낳아서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저는 당신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부탁이요?

“네, 아주 쉽고 즐거운 부탁이지요.”


나는 갑자기 일어난 상황이 적응이 되지 않아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 사람은 내 대답 따위는 아무 상관도 없었는지 그 부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자신은 행복을 먹고 사는 사람인데, 행복을 전해줄 이가 없어서 찾는 중이라며 내 도움이 간절하다고 말했다. 행복을 먹는 사람이라니, 죽은 사람을 데리고 별 소리를 다 한다고 생각했다. 남들 사는 만큼 살아오면서 그런 꿈같은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세상에 별 걸 다 먹는 사람이 많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실체가 있는 것을 먹었다.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을 요리해서 먹었단 말이다. 실체 없는 누군가의 감정을 먹고 살아간단 사람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눈앞에 이 사람이 장난을 친다고 생각하니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내 어깨 위에 올라와있는 그 사람의 팔을 치우고 소리를 쳤다.


“장난치지 마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요?”

“왜 말이 안 돼요? 죽어서 여기에 있는 것도 살아있을 때에는 믿을 만한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건 그렇지만….”

“쉽게 생각해요. 이 길을 걷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잖아요.”


저를 따라 가서 그 사람의 행복을 만들어주기만 하면 돼요. 저는 매일 밤마다 맛있는 식사를 하고, 당신은 이 길을 걷지 않아도 되는 거죠. 우리 둘 다 손해 볼 거 없는 거래이지 않아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때요?

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자꾸 솟아올랐다. 더 이상 걷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 단비마냥 달았다. 그 사람은 밝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손을 맞잡아도 괜찮을까? 답이 나오지 않을 계산을 위해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간다. 계속 걸으면 어떻게 될지, 이 사람을 따라가면 또 어떻게 될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자그마한 정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감에 따라 무언가를 하나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사람의 미묘하게 낯익은 얼굴을 한참 바라보기만 하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덜컥 손을 잡았다. 아니, 정신을 차리니 마법을 부린 마냥 손이 잡혀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내가 손을 잡을 줄 알았던 것처럼 빙그레 웃었다.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손을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곧장 내가 걷던 길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내가 맞잡은 손으로 나를 이끌어 길 위를 달렸다. 다리가 쉬지 않고 움직인다. 발이 뜬다. 나는 날고 있었다.

어디를 향해 걷는 걸까. 내 발 밑으로 무한히 이어진 길과 인형처럼 아주 작은 사람들이 보인다. 내가 조금만 더 걸었다면 만났을 사람들일까? 잘못된 선택을 해버린 걸까? 덜컥 겁이 났다가도, 아무 생각 없이 백지가 되기도 하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이미 선택해버렸는데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냥, 저 사람을 따라 지금은 바쁘게 달리자. 혼란스러운 머리는 개연성이 없는 것들을 마구 내뱉는다. 나는 계속 달렸고, 시간이 바뀐 건지, 공간이 바뀐 건지 겨울이 왔다가, 가을이 오고, 여름이 왔다가, 봄이 왔다. 나는 흰 옷을 두르고 있었지만 내 발 밑의 사람들의 옷은 계절에 맞춰 바뀌어나간다. 시간을 뒤집어 나아가고 있는 걸까. 나는 지금 뒤를 향해 달리고 있는 걸까. 행복을 먹는 사람은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그냥 나를 이끌기만 할 뿐이었다.


“자, 이제 다 왔어요. 저기에 자고 있는 사람 보이죠?”

“아, 네.”

“제게 저 사람의 행복을 만들어 주세요. 제가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아주 커다란 행복을요.”


그 사람은 그 한마디만을 남기고,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나는 이제부터 행복해야 할 그 사람의 머리맡에 앉아 가만히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주름으로 가득해진 제 얼굴과 다르게 깨끗하고 밝은 얼굴을 가진 청년이었다. 아마 이제 스물쯤 되었을까? 사회에 첫 발을 내딛던 새내기는 저렇게 깨끗하고 밝은 얼굴이었구나. 밤은 천천히 지나가고 새벽이 찾아오고 있었다. 나는 때 묻어서 잘 기억나지 않는 내 어릴 적의 얼굴을 다시 떠올려보며 한참을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다녀오겠습니다!”


행복을 만들어낼 이의 이름은 휘진이었다. 휘진은 오전까지 깨지도 않고 잠만 자더니, 점심이 지나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나갈 준비를 끝내더니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없는 자취방에 익숙한 인사까지 하고 나서는 표정이 밝았다. 나는 얼른 휘진의 뒤를 따라 붙었다. 후후, 하얀 입김을 만들어내면서 걷는 모양새가 즐거움과 설렘에 잔뜩 젖어있다. 이 애를 이제 어떻게 행복하게 만들어줘야 할까. 밤새 가만히 얼굴을 쳐다보며 고민해보았지만 막상 제대로 된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행복은 뭐지? 어떤 게 행복이지? 그 사람이 먹는다는 행복은 어떤 모양이지? 휘진의 걸음을 따라 걷는데 의문이 자꾸 피어오른다. 그 사람이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않아서 모르는 것도, 궁금한 것도 너무 많았다. 오늘은 그냥 따라다니기만 해볼까? 아무것도 모르니까 하루 정도는 아무 행복도 없어도 봐주지 않을까? 그 사람은 무조건 매일 밤마다 행복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아마 하루 정도는 없어도 괜찮을 거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고 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휘진의 가벼운 발걸음에 맞춰 걸을 수 있을 만큼 말이다.


“휘진아, 여기!”


먼저 강의실에 앉아 자리를 맡아둔 친구가 휘진을 반겼다. 친구도 휘진과 마찬가지로 아직 설렘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잽싸게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휘진이 조잘조잘 주말에 있었던 이야기를 풀어낸다. 나는 그 두 사람의 뒤에 앉아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휘진이 뭘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면 행복해 하는지 알면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내 행복은 별 게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남의 행복을 생각하니 답답하고 어렵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가 따분하면서도 평화로워서 나는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마음이 풀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레 어깨에 힘이 빠졌다. 이제야 평정심을 되찾아서 차근차근 내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나는 죽었고, 한참을 걸었고, 행복을 먹는 사람에게 행복을 전해주겠다는 약속을 해서 지금 스무 살의 청년의 옆에 서있다. 모두 그저 꿈만 같은 이야기지만 현실이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이렇게 계속 행복을 전달해주면서 영원을 사는 걸까? 이 친구의 옆에 평생 귀신처럼 붙어 살아야 하는 걸까? 언제나 나는 미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위태롭게 살아왔지만 지금처럼 당장 코앞의 미래도 예상되지 않은 날은 없었었다.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치열하고 바쁘게 살아갈 때에는 내 앞의 미래가 남들만큼이나 찬란하다고 생각했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천천히 속도를 줄여나갈 때에는 소중한 사람들의 곁을 떠날 준비가 되어있었다. 미래가 크게 두렵지 않은 나이였다. 지금과는 다르게 말이다.

한참을 혼자 고민하고 있을 때, 강의를 담당하는 교수가 들어온 모양이다. 능숙하게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고, 이 강의가 어떤 강의인지 설명을 하고 있었다. 휘진은 교수의 말을 경청하는 듯이 하더니 금방 흥미를 잃고 핸드폰을 꺼낸다. 옆에 있는 친구와 아까까지 그렇게 이야기하고도 할 얘기가 더 남은 모양이다. 핸드폰 메신저로 이야기를 계속 주고받는다. 교수의 말은 제대로 들어 놓아도 공부할 때 어려울 텐데 저게 무슨 짓인가 싶어 어깨를 툭, 툭 건드렸다.


“집중해야지. 핸드폰 보지 말고.”

“…어, 어?”

“교수님 말 들어. 그거 내리고.”


어? 휘진이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나는 휘진의 눈에 내가 또렷하게 보인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꾹 다물었다. 등교할 때까지는 내가 옆에 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별로 신경을 쓰는 것 같지도 않아서 해봐야 목소리 정도 휘진의 귀에 들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데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를 것 같아서 황급히 휘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휘진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제 친구와 저를 번갈아 바라봤다. 다행히 친구의 눈에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친구는 내 쪽을 보며 뭐가 있냐고 물었지만 휘진은 내 손에 입이 꽉 막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을 보고 나서야 입을 놔주었다. 휘진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내게 속삭였다.


“음, 누구세요.”


물으면서도 저가 본 것을 못 믿는 눈치였다. 당연히 답이 오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슬쩍 보이는 얼굴이라 나는 자연스레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내 스스로 내가 남이 보았을 때 못 믿을 존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존재를 부정당한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귀신. 툭, 던진 대답은 그런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대변해주었다. 휘진의 새파랗게 변한 얼굴은 아주 볼만 했다. 강의가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 휘진과 할 얘기가 아주 많아진 것 같다.




“저, 저, 저만 보이는 거죠? 지금 당신 말이에요.”

“음, 아마 그런 거 같은데.”

“왜, 왜요? 저, 저 이제 죽어요?”

“아니. 그런 이야기는 없었으니까 죽지는 않을 걸.”

“근데 당신이 왜 보여요?”

“나도 몰라.”

“네?”

“나도 그냥 부탁을 받아서 네 옆에 있는 거거든. 네가 나를 볼 수 있는지, 왜 남들은 못 보는지에 대한 설명 같은 건 나도 듣지 못했어. 그냥 나는 네 행복을 위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귀신이라고 말한 건 장난이지만.”

“……허어.”


강의가 끝나자마자 친구와 급하게 인사를 나눈 휘진은 내 팔목을 잡아 이끌었다. 다른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구석으로 오고 나서야 강의 시간 내내 궁금하던 것을 묻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나도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으므로 휘진에게 대답해줄 만한 것은 그리 많지 못했다. 휘진은 지금 일어난 일이 다 꿈이라고 생각해보려고 하는지 제 스스로 머리도 몇 번 쥐어박아보고, 뺨도 몇 번을 후려쳐보고 나서야 내 존재를 인정했다. 휘진은 제발 다른 사람들이 같이 있을 때에는 말을 걸지 말아달라며 몇 번이고 부탁을 하고 나서야 다시 친구를 찾으러 나섰다. 나는 그 뒤를 졸졸 쫓아가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다음 강의실에서 미리 자리를 잡고 있던 휘진의 친구는 휘진에게 어디에 갔다 온 것이냐고 물었지만 휘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허허, 웃으며 대답을 넘겼다. 저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왔다는 귀신을 본 이야기는 아무리 친구에게라도 쉽게 할 이야기는 아니었을 테니까. 구석진 곳에서 대화를 하고 난 후에는 나도 딱히 휘진에게 할 말이 없었고, 휘진은 나를 찾을 일이 더더욱이 없었으니 우리의 대화는 그 날 그게 끝이었다. 휘진은 남은 강의를 모두 들은 후에 자취방으로 향했고, 나는 휘진이 가는 데를 그대로 뒤쫓을 뿐이었다. 내가 굳이 말을 걸지 않으면 휘진의 눈에 내가 보이지 않는지 휘진은 나를 본 적이 없는 것처럼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에 들었다.

행복을 먹는 사람을 마주할 시간이 되었다.


“오늘은 어떠셨나요? 행복은 많은가요?”

“음, 잘 모르겠어요.”


휘진이 잠들자마자 내 눈 앞에 있는 공간이 바뀌고, 그 사람이 나타났다. 하얀 식탁보가 깔린 커다란 식탁에 앉은 그는 친절한 얼굴로 나를 반겼다. 나는 그 사람이 내어준 옆자리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비싸 보이는 식기구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가져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행복이 어떤 형태인지도 잘 몰랐고, 오늘 휘진이 행복했는가도 잘 몰랐다. 아마도 나를 마주한 덕분에 정신없기만 했던 하루였지, 절대 행복한 하루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작지만 나쁘지는 않은 행복이네요.”

“네?”

“오늘 당신이 가져온 행복 말이에요.”


내가 가져온 것은 분명히 아무것도 없는데 어느새 접시 위에는 처음 보는 보드라운 색의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그 사람은 익숙하게 식기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그 사람처럼 식기를 집어 들었다. 내 앞에 내 몫으로 놓여진 행복을 조그맣게 잘라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주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혀가 마비되는 것 같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가슴 속이 충만해지는 기분은 그만큼이나 나를 즐겁게 만들었다. 그 사람도 마찬가지였는지 우리는 아무 대화도 없이 식사를 즐겼다. 행복을 먹는다는 말이 우스운 농담과 같았는데 직접 맛을 보고,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현실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행복을 먹는 것은 현실이었다.


“오늘 제가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음, 행복은 생각보다 별 게 아니에요. 친구와 잠깐 즐겁게 대화한 것, 당신이 나타남으로 저가 특별해진 것 같은 느낌. 모두 아주 사소하고 작은 행복이 되죠.”


상쾌하게 일어난 것, 맛있는 것을 먹는 것,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재밌는 미디어를 감상하는 것,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즐기는 것, 그런 것들도 충분한 행복이 될 수 있죠.


“물론 저는 더 커다랗고 대단한 행복이 배부르고 맛있지만요.”

“…….”

“아무것도 모르시는데 이 정도라면 충분히 맛있는 식사였어요.”


내일도 잘 부탁할게요. 그 사람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마자 아침이었다. 눈을 깜박이니 금방 휘진의 방으로 공간이 바뀌었다. 방금까지 있었던 일이 꿈과 같은 기분이었다. 아직 휘진은 일어나기 전인지 자취방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가만히 자는 휘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행복을 직접 맛보니 욕심이 솟았다. 더욱 큰 행복을 쥐어주고 더 맛있는 행복을 맛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어딘가에 중독된 것 같았다. 머리가 팽글팽글 돌면서 평소라면 하지 못할 생각이 점점 들기 시작했다. 오늘은 조금 더 행복할 수 있도록 해야지. 미래에 더욱 더 행복할 수 있도록 이것저것 할 수 있게 하면 더욱 맛있는 행복을 맛보게 되리라.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아직까지 자고 있는 휘진을 기다릴 수 없었다. 나중에라도 행복하려면 부지런한 게 시작이었다.


“휘진아, 어서 일어나! 곧 있으면 해가 중천에 뜨겠어!”

“……으으, 어어?”

“오늘부터 영어 공부도 시작하고, 봉사활동도 다니자. 아직 3월이니까 동아리 활동도 알아보고, 대외 활동은 방학부터 해도 괜찮겠지?”

“뭐, 뭐요?”

“행복해야지. 행복하려면 공부부터 열심히 해야 하는 거야. 학생 때도 그랬잖아.”


나는 스무 살 때 어땠지? 어떤 학생이었더라. 휘진을 깨우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정확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저 떠오르는 것이라곤 스무 살보다 더 미래의 내가 조금 더 무언가 했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것들뿐이었다. 그때 공부를 조금만 더 할 걸, 그때 술은 조금만 덜 마실 걸, 그때 무슨 활동이라도 할 걸, 그런 후회들 말이다. 내가 언제까지 휘진의 옆에 있게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휘진이 이후에 그런 후회는 하지 않았으면 했다. 후회로 가득한 하루는 불행하기만 하니까. 그렇게 후회하는 날 나도, 휘진도, 그 사람도 불행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때부터 이랬던 것 같다. 당장 휘진의 행복을 찾기보다는 미래의 행복을 위해 나는 휘진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어딘가 잘못된 사람처럼 말이다.


“오늘 친구들이랑 술 마시지?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

“알아요. 적당히 마실 거예요.”

“너 오늘 강의는 제대로 안 듣더라. 나중에 행복하려면 더 열심히 들어야 한다고 내가 말했잖아.”

“미안해요. 오늘 다른 생각이 많이 나서.”


나는 언제나 휘진을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휘진은 특이한 존재가 나타나 제 행복을 찾아주겠다고 말하니 웬만한 부탁은 모두 들어주려고 했다. 우리는 조금 이상한 사이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가끔 들었다. 이제 스무 살인 아이다. 세상을 충분히 경험해보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나아가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머리에 치고 들어올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행복의 맛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 말도 안 되는 맛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더 큰 행복을 만들어서 맛보고 싶어졌다. 휘진이 조금 더 세상을 경험해보아도 괜찮을 나이라는 생각은 다시 깊숙이 몸을 숨기러 들어가 버린다. 세상이 조금 비뚤어진 것 같다. 휘진의 표정이 점점 죽어 가는데 나는 행복을 맛봐서 더욱 얼굴이 밝아졌다.


“행복은 생각보다 별 게 아니에요.”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식사를 하던 그 사람이 넌지시 했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아주 사소하고, 별 것도 아닌 것도 행복이라는 이야기 말이다. 물론 나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사소하고, 별 것도 아닌 행복은 지금도 늘 하루에 한 번씩 맛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이 먼저 얘기하지 않았던가. 더 크고 대단한 행복을 원한다고. 난 그것을 위해 휘진이 행복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이 다시 나에게 이 말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어요.”

“모르는 것 같은데.”

“아니에요. 아주 잘 알고 있어요.”

“휘진이 원하는 걸 잘 생각해요. 행복은 거기에서 시작하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의 눈이 너무 진지해서 나는 조심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크게 공감이 가는 말은 아니었다. 휘진이 원하는 것은 지금 당장 놀고, 쉬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렇지만 휘진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은 절대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20대의 출발을 더욱 멋지게 하기 위해 10대의 모든 것을 바친다. 20대의 새 출발에 서 있는 지금은 더 이후의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시기다. 더 큰 행복을 위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한참 걸으면서 내 삶을 되돌아볼 때, 단 한 점의 후회도 없었지만 휘진이 내가 원하는 대로 한다면 나보다 더 나은 결말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뿌듯해졌다. 내가 누군가를 구원한 기분까지 들었다.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했으면 좋겠어요.”

“후회 안 해요.”

“제가 행복을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신이 후회하지 않는 것도 중요해요.”


꼭 제 얘기를 명심해주면 좋겠어요. 마지막 말을 뒤로 하고 새로 아침이 밝았다. 나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남들보다 이르게 휘진을 깨웠다. 처음에는 잘 일어나지도 못하더니 이제는 버릇이 된 건지 휘진도 곧잘 일어났다. 이렇게 일어나고 나면 하루 종일 피곤해 보여서 마음이 약해질 때도 있지만 나는 미래를 보며 마음을 다 잡곤 했다. 아침에 일어난 휘진을 보채서 씻기고 아침을 먹였다. 강의가 있는 날은 강의에 데려가고, 그렇지 못한 날은 늘 공부를 하도록 만들었다. 휘진은 내 말에 잘 따라 와주는 착한 친구였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휘진은 평소처럼 곧잘 일어나더니 다시 내 얼굴을 보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지금 일어날 생각이 전혀 없는 몸짓이었다. 나는 곧바로 휘진이 뒤집어쓴 이불을 끌어내리려 했지만 안에서 이불을 꽉 쥐고 있는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씨름을 했을까. 힘이 모자라 먼저 지쳐버린 내가 두 손을 들어버렸다. 갑자기 왜 고집인지 알 수 없었다. 뭐가 문제일까. 제 행복을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 건데 휘진은 만족스럽지 못한 걸까. 그냥 오늘따라 일어나기 힘든 걸까. 갑작스럽게 달라진 태도가 당황스러워서 별 다른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번데기처럼 이불에 싸인 휘진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휘진은 오늘 제 마음대로 할 작정인지 평소보다 오랜 시간을 그렇게 잠을 잤다. 누가 깨우기 미안할 만큼 곤히 말이다.


“다녀오겠습니다.”


아침부터 삐걱거려서 그랬을까. 오늘따라 휘진과의 합이 좋지 못했다. 자기 마음껏 자고 일어나더니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냥 강의를 들으러 나와 버렸다. 내가 하는 이야기는 모두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무시하고 대답조차 해주지 않았다. 왜? 나는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는데. 너는 왜 내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지? 너무 당황해서 나도 계속해서 말을 더 붙일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못 보는 것처럼 나를 무시하고,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떠드는 모습도, 평소보다 느슨하게 강의를 듣는 모습도 평범한 스무 살의 새내기 같아 즐거워보였다. 그제야 나는 내가 하고 있던 일이 조금 무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휘진의 행복을 위해 그렇게 한 건데, 나중의 더 큰 행복을 위해 지금을 조금 혹독하게 보내는 것뿐인데 그게 그렇게 못 참을 만큼 괴로운 것일까? 나는 휘진과 다르게 한 사람의 인생을 모두 보내고 온 이였다. 휘진의 나이만큼 더해진 인생은 충분히 휘진의 행복을 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나를 보지 않고 또래들과 어울리는 휘진이 더 행복해 보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니 도저히 답이 서지 않았다. 오늘은 그 사람에게 물어볼 게 많은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가만히 휘진을 지켜보았다.


“이해가 안 돼요.”

“무엇이요?”

“휘진이 말이에요.”

“아, 네.”

“제가 행복을 만들어주는데 그걸 왜 거부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행복은 굉장히 별 게 아니에요. 아주 사소한 것으로도 사람은 충분히 행복해지고, 맛있는 행복이 만들어지죠. 커다란 행복이 더 맛있다고 지금 당장을 괴롭게 만드는 것도 잘 생각해봐야 할 일이에요. 원치 않은 사람에게 강요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일이지요.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그건 당신의 선택이죠.”

“더 커다랗고 대단한 행복을 원한다고 말했잖아요!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작은 행복이어도 충분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말이 다르잖아요. 나는 당신의 말을 따라 그렇게 한 건데….”

“제가 당신께 직접 커다란 행복을 만들라고 말했나요?”

“…….”

“저는 그게 더 좋다고 이야기 드렸지, 강요한 적은 없어요. 거기에 취한 것은 당신이잖아요.”


정신 차리세요. 제가 계속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행복은 별 거 아니에요. 이만 식사를 끝내도록 하죠. 오늘은 행복이 평소보다 많고 맛있네요. 덕분에 즐겁게 식사했습니다. 그 사람은 산뜻하게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식탁 앞에 앉아있는 사람은 오직 나 혼자였다. 먹다 만 행복이 여느 때와 같이 예쁜 색을 띤 채 접시 위에 놓여 있었다. 확실히 오늘의 행복은 조금 더 크고 맛있었다. 내가 며칠 동안 만들어 온 행복과는 확연하게 다른 크기와 맛이었다. 나는 이제야 다시 행복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장의 행복과 미래의 행복을 위해 내가 취해야 할 위치는 너무 어려웠다. 어느새 휘진의 머리맡에 다시 돌아온 나는 여느 때처럼 휘진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았다. 단 꿈을 꾸는지 자고 있는 얼굴이 밝았다. 아, 너무 어렵다. 행복은 너무 어려운 것이었다.



**



한동안 휘진과 화해를 하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기만 했다. 소소하게 휘진이 느끼는 행복 덕분에 늘 밤에 식사를 하긴 했지만 내가 만들지 못한 행복이라고 생각하니 먹기 찝찝했다. 일단 화해를 해야 할 텐데 누군가와 싸우고 화해한 게 너무 까마득히 옛날 일이라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던 사이에 휘진은 과에서 가는 엠티까지 가게 되었다. 버스 위에 앉아서 졸졸 따라가는데 어떻게 해야 술을 먹지 않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들었다. 아직 화해를 못해서 말을 걸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괜히 커다란 흑역사를 만들어서 평생 후회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엠티를 간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화해는 이미 뒷전이고 술을 못 마시게 할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남들은 다들 그 시간이 가장 즐겁고 재밌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 속에 이야기하지 못할 부끄러움은 하나씩 가지고 있지 않은가. 나는 휘진도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다.


“휘진아. 휘진아.”

“아, 왜요.”

“오늘 술 적당히 마셔. 너 취하면 큰일이잖아.”

“저 알아서 해요. 신경 쓰지 마요.”


오랜만에 말을 걸었는데 제대로 받아주지 않는다. 서운한 마음이 울컥 튀어나왔지만 금방 입속으로 구겨 넣었다. 괜히 이야기를 덧붙였다가 사이가 더 나빠지는 것은 사양이었다. 휘진은 아무 얘기를 하지 않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냥 몸을 돌려 일행에게 다가갔다. 처음 맞이하는 엠티에 설레어하는 얼굴들이 괜히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이 너무 상했다. 매번 내 말을 들어주던 휘진이 그렇게 직접적으로 거절을 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하루 종일 옆에 붙어 있으려 했는데 그러기도 힘들었다. 나는 그냥 몸을 돌려 휘진과 반대 방향으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걷고, 또 걸었다. 마치 죽자마자 걸었던 그 길을 걷듯이 말이다.


“어딜 그렇게 열심히 가세요?”

“당신은 밤도 아닌데 무슨 일이세요.”

“너무 열심히 걷고 계셔서 와보았지요.”

“전 여기 더 못 있겠어요. 그냥 다른 사람의 행복이나 찾으러 갈래요.”


그거라도 가져다 드리면 상관없으시잖아요, 당신은. 내가 그 말을 하자마자 그 사람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래서 나도 더 말을 못 붙이고 가만히 그 사람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어떠한 감정도 보이지 않을 만큼 미묘한 표정을 한 그 사람은 내게 할 말을 고르는 것처럼 보였다. 휘진의 행복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걸까, 그냥 화해를 하지 왜 자신을 귀찮게 하는 거냐는 말을 할까. 어쨌든 지금 당장 휘진에게 돌아가라는 말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지금 가봐야 휘진이 좋아할 말은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굳이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휘진이 원하는 말은 절대 하지 못하리라.


“휘진 씨. 자신을 부정하지 마세요.”

“네?”

“자신을 부정하지 말아요.”


그 사람의 말에 나도 마찬가지로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사람은 나를 휘진이라 불렀다. 내가 행복을 만들어 주기 위해 따라다니는 스무 살의 휘진과 내가 같은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그제야 나는 내 이름에 대해 생각했다. 죽기 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이름은 무엇이었나. 나는 누구인가. 아주 간단하고 어려운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강타했다. 생각도 못한 이야기를 해서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이 사람이 나에게 장난을 치고 있다는 생각만 계속 불쑥 튀어나온다. 여기는 어디지. 지금까지 나는 무얼 했나. 내가 내 과거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는 모습은 이 사람에게 얼마나 우스웠을까. 나는 내 과거의 행복을 먹은 걸까? 지금 이게 다 뭐지.


“무척 혼란스러운 얼굴이에요.”

“당연하죠. 당신이라면 지금 이 상황이 쉽게 이해가 되겠어요?”

“저는 겪을 일이 아니니 잘 모르겠네요.”


다시 처음부터 생각해보세요. 당신은 누구인지, 죽은 게 맞는지. 길을 걸을 때는 단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탄생을 시작으로 죽음까지 이어진 내 삶의 필름이 머릿속을 재빠르게 스쳐지나간다. 휘진이 살고 있는 스무 살의 내 모습도 또렷하게 보인다. 몸이 가는 대로 행동하고, 하고 싶은 걸 했던 자유로운 내 스물이 떠오른다. 함께 내가 만든 휘진의 스물도 떠오른다. 미래의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 이랬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추잡한 후회가 잔뜩 쌓여서 만들어진 검은 물감이 청춘 위에 어지럽게 칠해진다. 나는 하나하나 내가 원하는 대로 쌓아올린 삶을 나 스스로에게 즐기지 못하게 만든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나는, 나는 실재하고 있는 건가요?”

“실재하고 있을 수도 있고, 꿈일 수도 있죠.”

“…….”

“눈을 감고 다시 뜨면 어느 날의 꿈이었을 수도 있겠죠. 그리고 죽은 당신이 과거로 돌아와 실재하고 있는 것 또한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에요.”

“…….”

“마법이나 마술 정도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어차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잖아요.”


얼이 빠졌다. 그 사람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냥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휘진에게 가고 있는 것인지, 또 다른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나도 몰랐다. 특별한 경험은 생각보다 너무 어렵고 불쾌해서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행복을 위해 내가 걸어온 길이 갑자기 너무 험난하고 어려워 보였다. 자꾸 걸으니 바다가 나왔다. 태양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기 위해 천천히 준비 중인 듯하였다. 노을이 바다를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죽은 이후에 처음 마주하는 바다였다. 나는 천천히 차가운 바닷물 속에 발을 담갔다. 차가운 냉기가 발을 타고 올라와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이 아까의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휘진과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이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한참을 혼자 생각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시끌벅적하게 다가오는 일행들이 보였다. 아마 휘진과 그 일행인 것 같았다. 휘진은 나를 먼저 발견했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이제야 휘진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인다. 젊은 날의 내가 가졌던 밝고 생기 넘치는 그 얼굴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내 얼굴과 같은 얼굴이다. 거센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의 물결 위에 똑같은 얼굴 두 개가 아른거린다. 나는 이제야 내 스물을 정확하게 마주한다. 후회로 어지럽게 칠해져 가려진 어리석었지만 밝고 환했던 나를 마주한다. 미래의 내가 후회를 할지언정 저 때의 나는 행복했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좋았고, 성인으로서 새롭게 즐기는 경험들이 재밌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미래조차 기대가 되고 흥미로운 나이였다. 나중에서야 이렇게 할 걸, 저렇게 할 걸, 후회가 쌓였어도 단 한 점의 후회도 남지 않았던 그 때의 나를 마주한다.


“내 얼굴이랑 똑같네.”

“…….”

“이제 알았어. 네가 나라는 걸 이제야 알았어.”


그 사람이 이야기했던 행복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 사람이 원한 대단하고 커다란 행복은 지금 휘진이 겪고 있는 한 순간, 순간이겠지. 억지로 미래를 위해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남은 보잘 것 없는 행복이 아니라. 나는 행복을 먹는 꿈은 내 삶을 되돌아볼 수 있게 베풀어준 누군가의 은혜란 것을 깨달았다. 탄생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나는 필름이 단단히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나는 내 젊은 날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달이 떠오르고 밤이 찾아왔다. 마지막 식사를 할 시간이란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감았던 눈을 뜨니 익숙한 식탁과 그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늘 그랬듯이 내가 앉던 자리에 앉았다. 처음으로 보는 하얗고 폭신한 행복이 커다랗게 접시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오늘도 맛있게 먹을게요. 간단히 감사 인사를 남긴 그 사람은 나보다 먼저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나도 오늘은 그 사람만큼이나 즐겁게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정리가 다 된 모양이에요.”

“네, 그런 것 같아요.”

“덕분에 한동안 맛있게 식사를 했어요.”


고마워요. 그 사람이 웃는다. 나도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 웃는다. 미래의 나는 스물의 내가 조금 더 열심히 살기 바랐고, 미래의 나를 조금 더 생각해주기를 바랐고, 후회 없는 삶으로 살아와주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스물의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었고, 지금의 나를 생각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후에 할 후회조차 어쩌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힘든 일도, 어려웠던 일도, 슬펐던 일도, 행복한 일도, 즐거운 일도, 차곡차곡 쌓여 내 삶을 만들어나간다. 그것조차 행복해서 나는 마지막으로 스물을 보았나보다. 오늘도 그 사람은 먼저 자리를 떴다. 나는 혼자 남은 식탁에서 깨끗이 접시를 비울 때까지 꿋꿋하게 식사를 이어나갔다. 다시는 이런 꿈을 꾸지 못할 것이다. 만족스러운 마지막 식사를 뒤로 하고 눈을 감았다.



아침이 되었다. 익숙한 자취방이 눈에 들어온다. 스물의 첫 날에 나는 눈을 떴다.



____ 장미 therosenove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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