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그린북>이 거짓이라고요?
영화 <그린북>을 보고 왔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이 영화는 인종차별이 심했던 1962년을 배경으로 당대 최고의 흑인 음악가와 이탈리아 출신 백인 클럽 매니저의 우정을 다룬다. 결론부터 말하면 영화는 좋았다. 보는 내내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잔잔한 감동을 받았고 눈물도 한 두 방울 흘렸다. 함께 본 친구와 "크리스마스에 보면 괜찮겠다"라고 훈훈한 후기를 나누기도 하고 소개팅녀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혹은 '좋은 소재의' 영화를 보고 싶다는 친구에게 추천을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 날 <그린북>의 이야기가 모두 거짓이라는 사실의 기사를 발견하게 됐다. 세상에. 이 내용이 아예 픽션이었다면 괜찮았겠지만, 실화라고 홍보했는데 실은 거짓이라고 생각하니 흘린 눈물 두 방울이 무척 아까워졌다.
*(스포를 선호하지 않지만) 이 영화의 경우, 먼저 스포를 하고 진실과 거짓을 구분해보도록 하겠다.
클럽 매니저라고 쓰고 클럽의 해결사라고 읽는 토니 발레롱가는 클럽의 내부 사정으로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다. 사랑하는 아내와 토끼 같은 두 아이의 아빠인 토니는 박사의 '운전수'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면접을 보러 간다. 이탈리아 출신의 이민자로 뒷골목에서 거칠게 살았던 토니 발레롱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우아하고 교양 있는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 박사다.
면접장에 들어서자마자 토니의 편견은 시작된다. 자신의 고용주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당시 천대받던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돈 셜리 박사가 으리으리한 집에서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우아한 말투로 일을 제안했지만 토니는 흑인의 집사 노릇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이 영 내키지 않는다. 자신도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으로 딱히 내세울만한 포지션은 아니지만 흑인 밑에서 일하는 것이 싫어 '집사 노릇은 하지 않고 운전수만 한다', '안전히 남부 투어를 마치게 해 줄 테니 지금보다 더 높은 페이를 달라'는 역제안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1962년 당시엔 인종차별이 해결되지 않아 흑인이 인종차별이 특히 심한 미국 남부를 투어 한다는 건, 목숨을 맞바꿔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돈 셜리에게는 탁월한 뒷골목의 '해결사' 토니가 필요한 상황. 돈 셜리 박사는 토니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시점에 8주를 비워야 하는 투어 일정에 대한 양해를 구하고, 토니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토니를 운전수로 고용한다. 투어의 첫날, 토니는 돈 셜리 박사의 소속사로부터 <그린북>이란 여행 가이드북을 건네받는다. '그린북'은 인종차별이 심했던 1960년대 초반, 흑인들이 묵을 수 있는 호텔을 표시한 여행 안내서로 인종차별이 미국 사회에 만연했음을 상징한다.
거친 토니와 우아한 셜리 박사의 동행은 그리 순탄하지 않다. 토니는 흑인의 운전수 노릇을 하는 것이 여전히 내키지 않고, 셜리 박사는 차에서 음식을 먹고, 불편한 소재의 잡담을 건네고, 줄담배를 피우는 토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셜리 박사는 토니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토니가 바른 행동을 하게끔 이끈다. 공연을 하는 동안 밖에서 대기하지 않고, 안에서 함께 참가할 수 있도록 정식으로 토니를 소개하기도 하고 품위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비용을 따로 지급한다. 맞춤법과 작문에 약한 토니가 아내에게 로맨틱한 편지를 쓸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토니는 셜리 박사의 우아함이 답답하지만 싫지 않고, 말도 안 되는 일로 극심한 차별을 받는 셜리 박사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연주도 정말 훌륭하고, 교양도 넘치지만 흑인이란 이유로 초청받은 공연장에서 화장실은 흑인 화장실을 써야 하는 셜리 박사를 지켜보는 것이 점점 불편해진다.
미국 남부로 갈수록 셜리 박사를 향한 차별은 극심해진다. 그린북에 안내된 호텔은 셜리 박사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게 형편없고, 셜리 박사가 갈 수 있는 식당과 장소도 제한된다. 흑인이란 이유로 바에서 백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고 투어 일정을 위해 밤에 이동을 하다가 '흑인 통금시간'에 걸려 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하며 각종 우여곡절이 펼쳐진다. 흑인에 대한 편견을 가졌던 토니는 이미 우정을 느끼기 시작한 셜리 박사가 이런 취급을 당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마지막으로 남은 공연을 앞두고, 토니와 셜리 박사는 폭발한다. 공연의 주인공인 셜리 박사가 공연이 열리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수 없다는 지배인의 이야기 때문이다. 이 식당에서 흑인이 한 번도 식사를 한 적이 없다는 '전통' 때문이란다. 투어 내내 잘 참아온 토니와 셜리 박사는 더 이상 참지 않고 공연을 펑크내고 나와 그린북에 안내된 흑인 식당에 가서 즐겁게 식사를 한다. '예정된 모든 공연 참여'라는 공통 미션은 실패했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돈독해지고, 셜리 박사의 배려로 토니는 가족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혼자 외롭게 살던 셜리 박사는 토니와 친구가 되어 죽을 때까지 우정을 유지한다.
인종차별 시대 당시 흑인이었지만 뛰어난 뮤지션이고, 당시에 박사학위를 3개나 소지하고 있었던 유명한 인물을 다루면서 부실한 사전조사와 유족 동의 없이 백인 고용인이었던 토니 발레롱가의 아들 닉 발레롱가의 말만 믿고 영화를 제작한 사실은 무척 실망스러운 일이다.
셜리 박사 유족은 언론을 통해 "그린북은 전부 거짓"이고, "제작진이 고인의 뜻을 무시하고 발레롱가 아들의 주장만 믿고 함부로 영화를 제작"했다고 항의했다고 한다. 유족들은 두 사람 사이는 결코 가깝지 않았고, 토니 발레롱가가 고용되었을 당시 불성실한 태도 때문에 해고까지 당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토니 발레롱가의 아들 닉 발레롱가가 할리우드와 몰래 접촉해 영화를 만들었고, 각본가로 거액의 돈을 챙기게 된 것이다. 영화 시사회에서 유족들이 닉 발레롱가를 추궁했지만 박사가 생전에 영화화를 허락했다며 반박했지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증거는 내놓지 못했다.
영화를 보면서 '참 따듯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누군가의 거짓말과 무책임한 영화 제작자들의 선택으로 유족들이 상처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황당한 영화로 남게 되었다.
덧, 영화 <그린북>은 91회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포함해 3개의 상을 받았다. 논란이 있었던 영화인만큼 영화 관계자 및 언론의 엇갈린 반응 또한 뜨거웠다. (2019.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