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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nokno Sep 28. 2023

첫 책

 어려서부터 부모님은 맞벌이를 했다. 학원 강사인 아빠는 오후에 출근해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돌아오셨기 때문에 평일에는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학습지 교사인 엄마는 아침에 같이 출근하고 밤늦게 8시쯤 돌아오셨으므로 나는 책을 읽거나 숙제를 하면서 기다렸다. 그래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대부분 할머니가 집을 지키고 계셨다. 할머니가 막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고 나도 어렸을 때 극도로 내성적이었던 탓에 친구들과 잘 노는 일이 없어서 각자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할머니가 다리를 주물러달라고 부탁하거나 혼자 있기 무서울 때는 할머니 방으로 가서 같이 TV를 보기도 했다.

 엄마는 심심해하는 나를 걱정해 퇴근길에 이따금 서점에 들러 책을 사 오셨다. ‘저학년 세계 명작’ 시리즈는 전 세계의 유명한 동화를 어린이용으로 엮은 책이었다. 누구나 이름을 들어보았을 동화들, 걸리버 여행기나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닐스의 모험 같은 이색적이고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은 하루의 반을 방에서 홀로 보내던 나를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조용한 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벌떡 일어나 뛰어가서 엄마를 안아주곤 했는데, 엄마가 책을 사가지고 온 걸 알았을 때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른다. 『성탄제』 의 한 장면처럼 한쪽 어깨에 학습지가 가득 든 가방을 멘 엄마가 차가운 손으로 내민 차가워진 책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엄마는 부랴부랴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자마자 부엌으로 가 저녁 준비를 하셨고, 그게 당연한 줄로만 알았던 나는 마냥 신이 나서 방으로 돌아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조금 있다가 엄마가 할머니와 나를 부르면 밥을 먹고 돌아오자마자 다시 읽었다. 처음에는 책상에 올려놓고 책을 보다가 피곤하면 바닥에 깔아놓은 요 위에서 엎드려 보았고, 어깨가 아프면 반대로 누워서 책을 들고 보고, 그러다가 팔이 저리면 책을 바닥에 반만 펼치고 옆으로 한쪽씩 펼쳐봤다.(지금 시력이 양쪽 모두 마이너스인 것은 이때 잘못 들인 습관 덕택이기도 하다).

 책을 자주 읽다 보니 읽는 시간도 점점 짧아졌다. 처음에는 한 권을 읽는데 며칠이 걸렸다. 책상이 한두 권씩 찰수록 조금씩 속도가 빨라졌고 고학년이 될 때쯤에는 사준 날 밤에 끝까지 읽어버리고는 하릴없이 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기웃거리곤 했다. 그때부터는 엄마도 다양하고 어른들도 읽는 책들을 사주셨다.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었다. 특히 유럽 편을 참 좋아했는데, 이탈리아나 영국, 프랑스 편은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표지가 해지거나 찢어진 곳이 많았다. 로마 제국과 카이사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왕정에 맞서 선포한 대헌장과 권리장전, 자유, 평등, 우애를 기치로 내건 대혁명은 딱딱한 교과서에 적힌 우리나라 역사와 비교하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그때부터 유럽에 대해 어렴풋한 선망이 생겼고 눈이 감겨 머리맡에 책을 덮고 잠을 청할 때면 이역만리 떨어진 나라들의 풍경들,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상하며 눈을 감았다. 


 글을 쓰다 그때 읽었던 책들은 어디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외로웠던 어린 시절 좋은 장난감이 되어준 좋은 책들. 혹 본가에 남아있을까 해서 전화해 보니 그때 책장에 색깔별로 차곡차곡 들어찬 책들은 정리와 이사를 거듭하며 대부분은 버리거나 해서 없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 직접 보니 세계 명작 시리즈는 세 권만이, 먼나라 이웃나라는 가장 오래된 두어 권은 사라지고 나머지는 옛날에 보았던 빛깔 그대로 간직한 채 반겨주었다. 그중 한 권을 꺼내 펼쳐보아도 상한 곳은 전혀 없었고 마치 어제 산 것처럼 표면이 매끈했다. 이 책 페이지의 어딘가는 어린 날 불어넣었던 숨결이 아직 남아있을까? 똘망한 눈빛이 쏟았던 따뜻한 열정이 스며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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