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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nokno Aug 26. 2023

첫 죽음

 죽음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주 어릴 때부터 궁금했던 것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TV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사고를 당하거나 때가 되면 사람은 죽어서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했다. 나는 조금만 보고 채널을 돌리려고 들고 있던 리모컨을 내려놓고 홀린 듯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어진 자료 영상에서 수술대에 누워있는 사람이 죽은 직후 입을 통해 연기 같은 무언가가 공중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전문가는 그것을 가리키며 영혼이라고 말했고 패널들은 나와 같은 표정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궁금증은 계속 커져갔다. 만약 내가 죽으면 지금 가지고 있던 기억 그대로 영혼으로 계속 살아가는 걸까? 지금처럼 이곳 우리 집과 동네에서 놀고, 먹고, 잘 수 있는 걸까? 그때는 부모님과 친구들이 아닌 이미 죽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걸까? 나는 엄마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엄마는 무엇이든 안다고 믿었던 때였다. 욕실에서 이불 빨래와 씨름을 하고 있던 엄마는 “죽으면 영혼이 빠져나가지” 하고 건성으로 대답해 주었다. 나는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더 대답해줄 것 같지 않아 그만두었다.

 할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셨다. 하느님을 믿으면 죽어서도 천국으로 올라가 영원히 살 수 있고 그러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했다. 주일마다 할머니를 따라 간 교회에서 나눠준 교지에 그려진 천국의 모습은 구름이 받치고 있는 성전이었고, 목사님들은 그곳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반면에 지옥은 목사님들의 말씀에 의하면 ‘떨어진다’ 고 했으며, 하느님을 믿지 않아 그곳에 가게 되면 뜨거운 불길 속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영혼으로 사는 것과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 것은 비슷한 면이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둘 다 막연한 상상에만 그칠 뿐 무엇이 진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늦은 밤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할 때면 이따금씩 머릿속에서 사후세계에 대한 상상들이 열렬히 맞부딪혔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던 것은 TV에서 보았던 것처럼 몸에서 나온 귀신이 여기저기 자유롭게 떠다니는 것과 할머니가 말한 천국과 지옥이었다. 만약 죽은 뒤 둘 중 한 가지만을 골라야 한다면 어느 쪽이 더 좋을까? 고르고 나면 남은 영생은 그곳에서 지내야 할테니 신중하게 골라야 했다. 영혼 쪽을 고른다고 생각해 보자. 몸을 빠져나와 어디든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다면? 나는 할아버지 영혼이 되어 세상의 명소를 찾아 떠나는 상상을 했다. 마추픽추와 나이아가라 폭포부터 에펠 탑과 타워 브리지까지, 사람들이 땅에 붙어서 그것들을 올려다보는 동안 나는 공중에서 혹은 발밑에서 그것들을 내려다보면서 탄성을 지를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점점 하늘 높이 올라간다. 거대한 건물들은 점이 되었고 한반도는 콩알만하게 보였다.  푸르던 하늘은 어느새 검게 변해있었다. 구름 대신 수많은 별들이 돌처럼 박혀 빛났다. 나는 화성을 지나 더 멀리 날아갔다. 매일 초속 몇백 미터에 달하는 태풍과 대륙 크기만한 번개가 몰아친다는 목성이 궁금했다. 토성을 두르고 있는 신비한 띠는 무엇일까? 아름다운 푸른 색을 가진 천왕성과 해왕성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반대로 천국행은 어떨까? 푹신한 구름 바닥에 첫 발을 내딛어 본다. 정면에 높이 서있는 궁전으로 걸어가는 동안 양 옆으로 늘어선 금빛 테이블에는 먹음직스러운 만찬이 가득 차려져 있고 사람들은 즐거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궁전에 도착하자 앞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 “당신의 아들이 오십니다!” 라고 외치며 문을 열어주었다. 궁전 안은 깜깜했고 저 멀리 하느님이 앉아있는 자리만이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하느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눈이 부셔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내민 손을 붙잡았고 따뜻한 기운이 손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

 그것뿐이라면 좋았겠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확신을 얻기 위해 상상을 이어갔다. 마치 곧 떠나는 여행지의 단점과 혹시 있을지 모르는 주의점을 살펴보는 것처럼 말이다. 불안감은 바로 이 지점부터 찾아오기 시작했다. 죽은 뒤에는 얼마나 더 있을 수 있는 걸까? 현실에서의 삶도 얼마 살지 않았는데 삶 전체보다 더 긴 세월을 머릿속으로 가늠해봐야 했다. 백 년, 천 년, 그렇게 오래 살고도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는 걸까? 보고 싶은 것을 다 본 뒤에는 뭘 하지? 나는 희미한 빛만이 비치는 검은 우주의 끝에서 홀로 떠있는 자신을 상상해 보고 두려워졌다. 천국도 마찬가지였다. 금빛 테이블에는 언제나 만찬이 가득하고 사람들은 웃으며 이야기할 것이다. 매일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마시고 싶은 것을 마시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몇 백, 몇 천년 동안 해야 할 것이다. 또 그곳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을까? 기원전부터 지금까지 죽은 사람들, 아니 기독교 신자들만 있다고 하더라도 몇 백억명의 사람들이 이미 살고 있을 것 아닌가.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끊임없이 사람들은 죽어간다. 천국은 그들 모두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곳일까?

그때부터 나는 사후세계를 떠올리면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마치 신이 인간을 창조하면서 그 이상은 떠올리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라치면 얼른 고개를 휘저어서 잊어버리려고 애썼다. 또 시간이 지나 학년이 올라가면서 더 복잡해지고 많은 일들이 벌어지면서 그 생각들은 차츰 일상과 멀어지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20년이 더 지난 최근에, 할머니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시다 돌아가셨다. 식을 치르면서 예전에 했던 생각들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온전히 천국으로 가셨을까? 오랫동안 당신을 괴롭혔던 지병과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어 편안함에 이르렀을까. 더불어 내가 언젠가 맞닥뜨릴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과 달라진 점은 ‘언젠가 찾아오지만 막연했던’ 그것과는 달리 금방이라도 그 순간이 찾아올 것 같이 직접적으로 와닿는다는 것이다. 살아오면서 너무나 많은 죽음을 보고 들은 탓이다. 개중에는 죽음이라는 큰 대가를 받기에는 사소한 이유로 일어난 사고들도 너무나 많았다. 그 영향인지 조금만 실수했더라도 크게 다치거나 죽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는 때도 있다. 혹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 몸 어딘가가, 특히 심장 부근이 조금만 불편하면 쉽게 불안해지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반대로 현재 삶에 집중하려고 애쓰고 있다. 지금 나는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어떤 생각들로 하루를 채우는가, 나중에 뒤돌아보았을 때 내가 보람차게 보냈다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인가. 언젠가 죽음이 눈앞으로 다가온 순간,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보게 될 내 인생이 보잘것 없이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랑을 받고 싶고 내 손으로 써낸 모든 것들이 사람들에게 가치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죽은 뒤의 나는 잠시 미뤄두고 현재 삶과 현재의 나에게 더 집중하려고 한다. 죽은 뒤의 내가 또다른 삶에 집중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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