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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nokno Nov 04. 2023

최선과 최악은 같은 말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1)

 사랑 영화와 재난 영화를 좋아한다. 그것만큼 다양한 인간 군상이 나오는 이야기는 없기 때문이다. 2022년에 나온 이 영화는 상영 당시에는 몰랐다가 몇 달 전 추천을 받았는데 자극적인 제목 때문에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상한 것은 영화의 내용과 결말이 전혀 슬프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스탭롤이 올라가자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는 거였다. 그 뒤에 같이 본 사람들과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불판에 올려진 율리에에 대한 거침없는 욕과 실드만 오갔을 뿐 내 감정은 알아볼 길이 없었다. 그래선지 며칠 뒤에도 개운하지 않은 기억이 남아있었고, 일주일이 지난 뒤 지방으로 내려가는 열차 안에서 다시 영화를 봤다. 이번엔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콧등이 찡했다. 역 도착까지 남은 시간 동안 왜 그랬을까 생각해봤다. 영화 속 두 차례 이별과 한 번의 사별 때문은 아니었다. 문득 율리에의 모습이 나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은 무언가를 하기에 정해진 나이가 있다. 십대에는 학교를 다니고, 스무살이 되면 대학교를 간다. 대학교를 졸업하는 스물세살 또는 남자의 경우 스물여섯에 취직 준비를 하고 취직한다. 그리고 초록색 꿈을 안고 사회로 뛰어든다. 서른 중반 정도면 수중에 적어도 몇 천에서 억 단위 금액은 있어야 하고, 사십이 넘으면 자가가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약간 과장되게 말해서 실패하고 무능력한 시람이 된다. 또 자기 계발을 게을리해서도 안 된다. 여가 시간에도 끊임없이 무엇인가 해야한다. 심지어 원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쉼없이 바쁘게 사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나태하게 보내는 시간 없이 노력하면서 살고 있어’ 라는 자세가 다른 사람들의 감탄과 존경을 자아내는 속성이 된 것 같다. 또 단지 그런 시선을 받고 은연중에 자랑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주위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곧바로 숨이 끊어질 것처럼. 

 이런 ‘문화’ 는 삶의 질, 행복의 수준과 직결된다. 1900년대 후반부터 급격하게 형성된 이런 사회의 구조에 맞추어 자라고 기대하는 바를 충족하는 사람은 적어도 행복하게 보인다. 그러지 않은 사람은 덜 행복하거나 행복하지 않다. 하지만 사실, 홍대 한복판에 있는 빌딩에 피부과를 차린 의사와 안데스 산맥 언저리에서 라마와 알파카를 양치기하며 사는 할아버지의 행복의 총량은 동일하다. 쉴 때마다 해외 여행을 떠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는 사람과 인도에서 800원짜리 이발소를 운영하는 사람의 행복의 총량도 동일하다. 사람들의 시선과 선망을 한몸에 받으며 사는 연예인과 일반인의 행복의 총량도 동일하다. 서로의 삶을 비교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나는 이십 대를 그렇게 살았다. 아니 몇 달 전까지도, 아니 지금도 나도 모르게 비교하며 살곤 한다. 남들이 주어진 목표를 하나하나 해내는 걸 보면서 나 혼자 열등감과 자괴감에 빠지고, 해외 어디를 다녀왔거나 서울의 유명한 곳을 다녀온 사진을 보면 부러움과 함께 또 스스로에게 한심함이 들곤 했다. 그것들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금씩 자신을 갉아먹었고 나는 점점 더 아래로, 안으로 침체되었다.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고 종국엔 이제까지 제일 잘 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 별볼일 없다고 생각했다. 바깥으로 나가기도 두려웠다.

그런 나를 끌어내준 친구가 같이 술을 먹던 중 사르트르와 실존주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시 평소 머릿속이 경제 관념으로 꽉 차있는 줄로만 알았던 자산 관리사가 철학적인 주제를 꺼내다니 놀랐었다. 이어서 친구는 자신이 되고자 하는 방향으로 갈고닦고 노력한다면 꿈 속의 그 인물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 하고 있던 것에서 멈추지 말고 끊임없이 노력하다 보면 말이다. 꿈에서 사르트르를 만나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열정적인 논변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실존주의에는 마치 뉴 프런티어 정신처럼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고 대답했다. 다른 어떤 것을 할 수 있을지 선택하기 전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걸 알고 나면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라이프 스타일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내가 언제 자고 일어나야 가장 컨디션이 좋은지, 언제 어느 장소에서 작업을 할 때 가장 능률이 좋은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친구는 곧바로 수긍하면서 그것을 본질주의적인 입장이라고 말했다. 다행히 그 자리에서 실존주의가 낫니 본질주의가 낫니 토론을 벌이지는 않았다. 우리 둘 다 속으로 서로의 입장에서 더는 양보하지 않을 걸 알고 암묵적으로 피해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얼마 뒤 본질주의에 대해 찾아보았는데 친구가 말했던 의미는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에서 벗어나 사람 각각의 개성을 주장했을 뿐이다. 오히려 본질보다는 실존에 더 가까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그때 친구가 말하고 싶었던 ‘본질주의’ 라는 것은 자신이 지금 아는 것을 전부라고 생각하며 쳇바퀴 도는 갇힌 삶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한다. 그 틀을 깨고 넓은 세계로 나와 여러가지를 경험하고 다양한 선택을 하라고. 만약 친구가 이 글을 본다면 나는 네 생각과 달리 갇혀있지 않고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우리 둘 다 끝에 다다랐을 때 마주칠 거라고도 말해주고 싶다. 실존주의가 쉴새없이 단단한 벽에 부딪혀 마침내 뚫어내는 것이라면, 본질에 집중하는 것은 평범한 바위덩이였던 자신을 깎아내고 다듬어 훌륭한 조각으로 만드는 것이므로.

 몇 년 전부터 글쓰기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것은 대부분 경제적인 이유였다. 자본주의의 아성에서 작가는 가난하고, 가난은 모든 불행의 시작이다. 알고 보니 헤밍웨이나 스콧 피츠제럴드 같은 대문호의 재능이 있지 않다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껏 제일 좋아하는 게 뭐냐는 질문에 글쓰기라고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음악을 듣는 것, 영화나 그림을 보는 것,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내 몸을 파헤쳐 심장을 들여다보면 검은 연필이 묻혀있을 것처럼, 내게 글을 쓰는 것은 완전한 자기실현이자 행복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결심해보려 한다. 고통의 파편을 털어내고 언젠가 이 안에 담긴 조각상이 언젠가 빛 받을 날을 기다리며.

 영화의 결말에서 율리에는 사진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정처없이 헤멘 것처럼 그조차 순간의 끌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행복은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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