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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nokno Jul 15. 2023

레이니데이 인 뉴욕

A Rainy day in New York



우디 앨런과 함께 이 영화를 처음 알게된 것은 지난 2022년 초였다. 평소 영화나 드라마를 성실하게 찾아보는 성격이 아니라 보던 것만 계속 보는 성격이어서 이런 영화가 있는 줄도 모르다가, 티모시 살라메에게 관심이 생긴 뒤로 넷플릭스에서 티모시가 나오는 영화를 검색하던 중 알게 되었다. 또 영화를 보게 된 배경에는 또다른 주연으로 내게 친숙한 셀레나 고메즈가 나오는 것도 한몫 했던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나서 는 23년 7월이 된 지금까지 내 마음속의 영화 1위를 지키고 있다. 유럽의 그것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서구적 아름다움(이것을 한 단어로 '마천루' 라고 부를 수 있을까?)아래. 여행지의 낭만과 우연, 그 위에서 펼쳐지는 로맨스. 우리는 이것들을 우디 앨런이라 부른다.




영화는 시종일관 아름답다. 비 내리는 뉴욕을 배경으로 반듯하게 세워진 대리석과 벽돌 건물 아래 인물들의 서사는 부질없이 흘러가고, 그들이 만나는 모든 거리와 장소에서 끊임없이 반짝이는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것들은 종종 존중이나 역겨움으로 나타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구름처럼 몽글몽글한 감정을 담고 있다. 유명 감독의 인터뷰를 빌미로 뉴욕 맨해튼에 짧은 주말 여행을 즐기러 온 개츠비와 애슐리는 평생 어항 속에 살다가 바다로 흘러들어온 물고기처럼 우연이라는 해류에 휩쓸린다.


우디 앨런의 모든 작품에서, 특히 도시 시리즈에서 여행지의 건축물과 풍경의 묘사가 뛰어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그것에 더해 특히 색감이 예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동시에 그 색감이란 직감적으로 지나간 시대의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색감이나 연출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애슐리가 롤런드 폴라드를 인터뷰하는 장면에서 구름에 싸인 햇살이 창문 안으로 뽀얗게 비쳐 들어올 때, 또 시가렛 홀더를 사서 나오는 개츠비의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사되어 황금으로 반짝일 때 나는 생경한 그리움, 경험한 적 없는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느낀다.


등장인물들의 비주얼이 뛰어난 만큼 패션 감각도 돋보인다. 애슐리는 셔츠 안에 니트와 함께 스커트를 갖추어 입어 단정함을 강조했고, 개츠비는 갈색 재킷 아래 데님 셔츠와 그린 팬츠를 매치해 포멀과 캐주얼의 느낌을 균형 있게 표현했다. 마지막으로 챈은 처음에는 트렌치 코트를 입고 있다가 옷을 갈아입고 나서는 애슐리와 비슷한 니트와 스커트를 입었지만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재질로 캐주얼한 분위기를 풍긴다.

도시의 풍경도 마찬가지다. 영화 초반부에는 일견 유럽의 풍경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극명한 차이가 나는 지점은 다름아닌 글자의 모양이다. 언어의 다름이 아니다. 선이 위아래로 곧게 뻗고 자간이 좁은 형태는 뉴욕의 이미지를 잘 나타낸다. 그 사이에서 눈에 띄는 초록색 지붕에 적힌 'DEAN&DELUCA' 로고 또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가장 감명깊었던 장면은 인터뷰를 하러 간 애슐리와 번번이 엇갈리던 끝에 우연히 같은 택시를 타게 된 챈을 따라 내리는 장면이었다. FIT에서 디자인 전공을 하는 챈은 수업 때문에 미술관에 가야 한다며 같이 가겠냐고 제의했고 개츠비는 투덜거리면서도 승낙한다. 그녀를 따라 들어간 집 안은 실내 장식을 공부했던 어머니와 디자인을 전공하는 딸 답게 고풍스럽고 엄숙한 분위기마저 흐른다. 챈이 옷을 갈아입으러 간 사이 개츠비가 들어간 거실은 한 장의 예술 작품 같다. 아르누보 스타일의 커튼이 창문을 풍부하게 장식하고 있고 앤틱 가구들 위로 고전 화풍의 초상화나 과할 정도로 고급스러운 장식이 달린 거울이 걸려 있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챈은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긴 듯한 포근한 얼굴을 짓는다.


(Chan)That's pretty.

(Gatsby)I love a 'cocktail lounge' piano.

Outside it drizzles, grey.
New York City, enveloped
in the light mist.

Two lovers have a date
to meet at 6 o'clock.

(...)
(Chan)I know! I know!
Under the clock.

(Gatsby)Which clock?

(Chan)The Delacorte clock, where all the
animals go around in Central Park.


노래가 끝난 후 그들은 각자 자신이 상상하는, 연인이 만나는 장면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짧은 대화가 유독 내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이유는 떠올린 상상의 장면이 로맨틱하고 낭만적이어서기도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를 우연히 만나고 또 마치 서로 약속된 대본을 읽듯 자연스레 이야기가 흘러가기 때문인 것도 있을 것이다. 비오는 날 양화대교를 걸을 때, 달려가는 자동차가 만든 자욱한 물안개 사이에서, 반대편 어둠 속에 싸인 당산 철교를 보는 장면을 이야기할 때 그것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그것도 좋지만 해가 지는 5시쯤 서촌의 3층 정도의 높이 건물에서 큰 창문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는 건 어때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존재하는 걸까? 아니면 스크린 안에서만 볼 수 있는 걸까?


이 글을 쓰기 위해 최근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문득 서울이라면 어떤 단어와 장소로 꾸며질까란 궁금증이 들었다. 레이니데이 인 서울이라면. 장소는 종로 인근이면 좋을 것 같다. 정동, 서촌과 북촌 중에서는 서촌, 익선동, 멀리는 부암동이 떠오른다. 굵지 않은 가랑비가 추적추적, 구불구불한 돌길과 기와 위에 떨어지는 빗줄기는 툭 하고 둔탁한 소리를 낸다. 지붕과 지붕 사이 이어진 전선에 달린 전구에서 호롱불을 흉내낸 발간 빛이 반짝인다. 그 밑에서 남자는 여자를 기다리고 여자는 오지 않는다. 혹은 여자가 기다리고 있고 남자는 다른 여자에게 간다. 내가 원하는 결말은 챈과 비슷하다. 남자가 기다리고 있고 뒤늦게 도착한 여자가 뛰어들듯 안기고 그들은 키스를 나눈다. 뻔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결말이다.


(Gatsby)In my version he's waiting, the music plays. And she never comes. Or she's waiting and he chooses the other woman.

(Chan)Can't they just kiss in the rain?
That sounds pretty good to me, even if it is commercial.



미술관의 좌측에는 로댕의 전시 현수막이 걸려 있고 반대쪽에는 잘 보이지 않으나 고전주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개츠비와 챈은 인상주의와 이집트 미라전을 보았다.  

챈의 제안대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간 둘은 작품을 관람하며 서로의 옛 기억을 더듬는다. 개츠비가 챈의 친언니인 에이미와 사귀던 시절, 데이트 뒤에 언니에게 언제나 자세한 이야기를 듣곤 했던 챈은 그녀의 기억을 개츠비에게 들려준다. 그가 언니를 데리고 피아노 재즈 바나 도박장 같은 데에 데려간 사실이나, 둘이 센트럴 파크의 정박지에서 사랑을 나누었다든가, 언니에게 직접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챈은 개츠비를 매력적으로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개츠비는 에이미와의 사이에 그녀도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Gatsby)These crazy egyptians, they
put all their money on an afterlife.

(Chan)Listen, Gatsby, let me tell you,
you only look once. but once is enough
if you find the right person


이집트 미라관에 들어와 개츠비와 챈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그중에서도 챈의 말은 이집트인들이 미라를 만들며 바랐을 불멸이라는 가치에 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이 생각에는 '운명적인 상대' 라고 번역한 자막도 한몫했다. right person이라는 단어에서는 그렇게 낭만적인 심상이 떠오르지 않기에...). 단 한 번이라도 운명적인 사랑은 서로의 삶 전체를 관통하고 또 잊히지 않을 것을 것이므로. 운명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 '운명적' 이라는 단어는 일견 필연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우연이라 느끼고 그 의미를 해독하려 애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에서 토마시와 테레자가 서로를 원하며 수많은 우연을 밟아나갔듯이. 또 우연은 낭만과도 연결된다. 낭만은 마치 테두리만 그려진 그림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색칠하는 것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운명적인 사랑이 아닌, 운명적이라고 믿는 사랑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전자가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매번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여기며 그것을 시험한다.




손님들도 모두 떠나가고 매장을 정리하는 시간에 개츠비는 홀로 라운지의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개츠비는 챈과의 만남, 어머니의 파티를 다녀온 뒤로 생각과 감정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았고, 결국 다음 날 센트럴 파크를 산책하는 마차 위에서 돌연 애슐리에게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향한 곳은 전날 챈이 이야기했었던 센트럴 파크 델라코트 시계 앞. 짧은 주말 동안 많은 우연이 일어났던 뉴욕,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츠비는 이곳에서 우연히 챈을 다시 만난다. "내가 이런 기회를 놓치겠어?" 라며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하는 챈. 둘은 마치 강한 운명에 의해 이끌린 듯이 재회하고 영화가 끝나게 된다.





제일 좋아하는 영화이고 가장 많이 본 영화이면서도, 볼 때마다 새롭고 기분이 좋아지는 영화다. 아름다운 인물, 아름다운 도시와 풍경, 아름다운 서사들에 영화가 끝날 즈음이 되면 비온 뒤 젖은 감성에 취하고 보기 전에 있었던 일들은 처음부터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일처럼 느껴진다. 또한 그들을 닮아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낡은 것들과 잊혀진 것들을 좋아하는 개츠비와 디자인에 대해 풍부한 감성을 가지고 있는 챈. 만약 내가 여러 개의 생을 가지고 있다면 그중 하나는 미술사학을 전공하고 싶고 또 하나는 디자인을 전공해보고 싶은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영화의 세련된 외관과 디자인에 눈이 간 것 같다. 이 영화는 내 남은 인생에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것이고, 앞으로 우디 앨런이 만드는 영화들도 꾸준히 보며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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