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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nokno Jul 23. 2023

첫 사랑

 학창 시절에는 소설을 많이 읽었다. 특히 판타지 소설. 이영도, 전민희 작가와 같은 1세대로부터 시작된 열풍이 온 소설판을 강타할 때, 나는 문학 감성이 한껏 풍부한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건너온 라이트 노벨이나 요즘의 웹소설과 비슷한 인터넷 로맨스 소설 등 지금처럼 저작권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시절 p2p 자료 공유 사이트에서 재미있는 제목이 보이면 닥치는 대로 읽어 삼키곤 했다.

또 지금과 마찬가지로 한 번 마음에 들면 줄거리를 다 외울 때까지 반복해서 읽었다.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 라자’가 특히 그랬다. 어느 여름 휴일 돌돌거리는 선풍기 옆에서 하루종일 누워 책장을 넘기다 창문 너머로 뉘엿뉘엿 해가 지고 산산한 바람이 불어올 때쯤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나서 벌떡 일어나, 배긴 등을 툭툭치고 화장실을 갔다 오는 길에 음료수를 따른 병을 들고 다시 앉아 첫 페이지를 펴고 다시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렇게 책에 빠져 읽다 보니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이 부분에서는 이렇게 흘러가면 더 재미있었겠는데, 혹은 주인공이 다르게 싸웠다면 이겼을지도 몰랐는데, 혹은 로맨스 소설을 읽을 때는 남자가 이렇게 말을 했으면 잘 사귀었을텐데…. 하교하는 길에도 혼자 심심하면 가끔 이런 상상을 했다. 전설적인 검의 힘을 깨운 주인공이 최종 보스와 조우하는 장면,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 한 마디를 던지는 차가운 성격의 조력자, 도움을 받아 마침내 세상을 구하는 주인공의 모습!

그리고 어느 날, 그렇게 떠오른 수많은 장면 중 하나를 직접 내 손으로 써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용은 웹툰에 자주 나오는, 요즘 표현으로는 ‘능력자 학원물’로, 보통 학생에게는 없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아이들이 특수학교에 입학해 벌어지는 일들을 담은 판타지였다. 

이렇게 처음으로 글쓰기에 발을 들이게 되었지만, 막상 첫 줄부터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몇 번씩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헤메고 있었다. 주변에 글을 쓰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찾아볼 곳은 인터넷밖에 없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면 항상 웹 사이트에서 ‘소설 쓰는 방법’을 검색해서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보를 찾다가 우연히 링크를 눌렀는데 바뀐 화면의 맨 위에 ‘판타지 소설 왕국’이라는 간판이 걸려있었다. 간판에 칠해진 파스텔 색과 기하학적 무늬, 그것을 올려다본 순간 나는 마치 회오리바람에 휘말려온 도로시가 오즈의 나라로 향하는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 곳에서는 회원들이 자신이 쓴 글을 올리거나 다른 글을 감상하고 댓글을 남기고 있었고, 또 다른 곳에서는 판타지 소설을 쓰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인 마법, 검술 같은 체계와 혹은 중세와 근대 시대의 배경을 공유하고 있기도 했다. 모든 글이 판타지인 것은 아니었다. 로맨틱 코미디, 추리, 무협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고 수는 적지만 순문학이나 시와 같은 글이 올라올 때도 있었다. 회원층도 당시 유행하는 판타지나 인터넷 로맨스 소설을 읽으며 자란 10대와 20대가 주류였지만 30대와 40대가 취미로 글을 쓰기도 했으며 실제 소설 작가도 있었다. 

또 카페에서는 게시판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서 소통할 수 있는 공식 채팅방이 있었다. 카페의 규모가 큰 만큼 저녁 시간대에는 항상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접속해 있었다. 채팅방에서는 주로 판타지 배경이나 설정, 소설 작법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간혹 카페에서 오래 활동하다 친해진 사람들은 오늘 학교나 회사에서 있었던 일로 수다를 떨기도 했다. (사적인 이야기를 하다가도 새로운 사람이 방문하면 누구든지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반갑게 맞아주었고 어떤 글을 좋아하는지, 글을 써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당시 내게 카페는 필요한 정보나 파일을 얻기 위해 가입했다가 목적을 달성한 뒤에는 탈퇴하기 귀찮아 유령회원으로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과 채팅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가 쓴 글을 인터넷 공간에 올리는 것, 사소한 질문 글을 올리는 것조차도 낯설고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얼마 가지 않아 눈 녹듯 사라졌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올린 첫 글은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고 따뜻한 댓글을 써주었고, 채팅방에 들어갔을 때도 모두가 반갑게 맞아주고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그러면서 나는 서서히 분위기에 익숙해질 수 있었고 또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러던 중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닉네임은 시나베이였다. 그녀는 나보다 두 살 아래인 중학교 3학년이었다. 평소 채팅방에서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고, 사람들이 말을 걸면 입에 작약을 가득 문 것처럼 수줍게 대답하곤 했다. 처음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독특하고 이국적인 닉네임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 건 말도 닉네임이 무슨 뜻이냐는 것이었다. 자신이 만든 세계 어느 왕국의 여전사일지, 아니면 정반대로 한적한 시골의 소녀의 이름일지 내심 기대했으나 그녀는 쑥스러운 웃음 뒤에 아무 뜻도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 뒤로 나는 어쩐지 그녀가 좋았다. 이유란 건 없이 그냥 좋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그녀의 맑은 분위기와 청초함을 좋아했던 것 같다. 

밤늦게 학원이나 야자를 끝내고 돌아와 채팅방에 들어왔을 때 목록에 그녀가 있으면 피곤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기분이 들떴다. 나는 별달리 할 말도 없으면서 자꾸만 그녀에게 괜히 말을 걸었다. 시나님, 오늘은 뭐 했어요? 시나님, 이번에 제가 쓴 글 봐줄 수 있어요? 시나님은 무슨 글 좋아해요? 어쩌다 생일을 물어봤을 때는 우리의 생일이 똑같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호수처럼 잔잔한 그녀도 이번만큼은 놀라는 기색이 가득해서 정말이냐고 물었다. 우린 어쩌면 인연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해가 길어질수록 우리가 이야기하는 시간은 조금씩 늘어났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편하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채팅방을 하나 더 만들어 우리의 생일 네 자리를 비밀번호로 설정하고 그녀를 초대했다. 우리 둘만 들어올 수 있는 작고 네모난 방에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알아갔다. 그녀의 이름은 c였다. c는 자신의 이름을 이상하다며 싫어했지만 나는 예쁘다고 생각했고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c는 멍 때리는 걸 좋아했다. 수업 시간에 창밖을 보면서, 비가 오는 날엔 베란다 난간에 기대서. 노트에는 필기 대신 동물 캐릭터를 그림으로 그렸고 마음에 드는 그림 몇몇은 나에게 자랑하기도 했다. 

어느 한쪽이 사정이 생겨서 채팅방에 들어오지 못할 때면 서로에게 길게 쪽지를 써서 보냈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헐레벌떡 로그인을 했을 때, 알림 창에 빨간색 말풍선이 떠 있으면 무작정 가슴이 두근거리기부터 했다. 가끔은 쓸데없는 광고 메시지여서 허탈한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c가 보낸 쪽지였다. 그러면 나는 옷을 갈아입는 것도 잊어버리고 쪽지를 눌러 한 줄 한 줄 정성껏 읽어 내려갔다. 어느 줄에서는 웃긴 대목에서 별안간 깔깔 웃는 바람에 문 밖에서 뭐가 그렇게 재밌냐고 잔소리를 듣기도 하고, 마지막 줄을 읽고 나서는 가슴이 뭉클해져서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기도 했다. 창을 끄면 읽기 전에는 파란색이었던 쪽지가 회색으로 변해있었다. 짧게 피었다 지는 목련처럼 읽은 지 몇 분만에 빛바랜 것 같은 그 모습이 못내 아련해서 나는 한동안 쪽지함을 바라보다, 다시 제목을 눌러 한 글자씩 꾹꾹 읽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 우리는 연락처를 교환했고 학교가 끝날 때나 주말에 c는 종종 전화를 걸었다. c는 여전히 쑥스러움을 많이 탔지만, 그러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언젠가 c와 통화를 하고 있을 때 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 적이 있었다.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니 c는 남동생이 둘 있는데 자기들이랑 안 놀아준다고 칭얼대는 거라고 했다. 평소였으면 그랬냐고, 그럼 있다가 다시 전화하자고 했을 텐데 당시 나는 다소 짜증이 나있던 상태였다. 나는 꼬마애들을 바꿔달라고 해서 누나랑 이야기하고 있을 때는 시끄럽게 굴면 안 된다고, 안 그러면 찾아가서 혼낼 거라고 조근조근 말했다. 숨죽여 듣고 있던 아이들은 말이 끝나자마자 울음을 터트렸다. 짜증을 억누르고 말하려고 애썼지만 어쩔 수 없이 말투에 가시가 묻어 나왔을 것이다.  잠시 후 전화를 바꿔든 c도 조금 있다 울먹이는 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그리고 전화 너머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나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서 있다가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고 몇 번이고 사과했다.

 무더위가 슬슬 꺾어지던 즈음에 나는 너를 만나러 가도 되느냐고 물어봤다. c는 놀란 듯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다음 날, 다음다음 날도 c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즐겁게 이야기하면서도 그 대답은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뒤에야 그녀는 내게 주소가 적힌 문자를 보냈다. 전라북도 무주의 어딘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었다. c는 겨울 방학을 하면 와도 좋다고 했다. 나는 다음 날부터 버스로 통학하던 학교를 걸어 다녔다. 죽고 못 살았던 pc방에 갈 돈도 꾹 참고 모으기 시작했다. 기차표를 사는 방법도 처음 알아보았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무주까지 한 번에 가는 교통수단이 없어 기차를 탔다가 시외버스로 갈아타는 등 복잡했다. 나는 한글 문서로 경로와 버스 번호를 자세히 적어놓고 출력한 종이를 책가방 앞 주머니에 반듯이 접어 넣어놓고 다녔다.

우리는 틈만 나면 만나서 뭘 할지 이야기했다. c는 자기 동네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투덜대면서 시내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주었다. 나는 내가 가는 날 기차역 로비에 서 있을 거냐고 물어봤다. c는 그러겠다고 했다. 나는 기차역에 내려서 c가 활짝 웃으며 반겨주는 풍경을 상상했고, 그녀와 손을 마주 잡고 나가는 장면을 그려보았다.

 학기가 시작하고 몇 번의 시험과 모의고사를 치르는 동안 겨울은 다가오고 있었고 동시에 나는 거센 풍파 속에 있었다. 중2병으로 시작해 현재진행형이었던 사춘기, 사소한 감정에서 시작된 친구들과의 해묵은 다툼, 그것으로 쌓이는 스트레스를 나는 오직 컴퓨터 게임으로만 풀려고 애썼다. 게임에 빠지면 빠질수록 그것에만 매달리게 되었고 c와 다른 것들은 조금씩 눈 밖으로 멀어져 갔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식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집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는 내 눈은 초점이 없이 퀭했다. 우리는 여전히 대화를 하고 있었지만 이전과는 달리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나간 듯했다. 그날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나의 단점들만 눈에 들어왔고 c와의 약속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졌다. 결국 어느 것 하나 정해진 것 없이 방학이 시작되었고, 내가 추운 겨울바람을 피하기 위해 택한 곳은 어두컴컴하고 담배 냄새로 가득한 지하였다.


 눈 사이로 매화가 필 즈음에서야 나는 c에게 둘러댈 용기가 생겼다. 그때 시간이 안 됐다고. 방학 때 매일 아침에 보충 수업을 들어야 해서 내려갈 시간도 연락도 못 했다고. 그녀는 그랬냐고, 괜찮다고 할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잘 지냈다. 매일 문자를 주고받았고, 종종 전화를 했다. c는 어느덧 고등학생이었다. 그녀는 학교가 가기 싫다고 했다. 아는 친구가 없어서, 그리고 아이들도 다 노는 애들 같다고 했다. 오빠는 다닐 만 해? 나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한쪽 머리로는 키보드와 마우스에 집중을 하고 있었고 다른 애들도 서로 다 아는 건 아니지 않냐고, 괜찮은 애를 찾아보면 되지. 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알았다고 했다. 그때 불현듯 수많은 생각들이 동시에 올라왔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내 목소리는 짜증이 섞여있었고, 대답을 해줘야만 하는 이 상황이 너무 귀찮았고, c에 대한 감정이 사그라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도 그것을 느낀 것 같았다. 그 뒤로 우리를 이어주던 얇은 실 같은 것마저 툭 끊어진 듯 서서히 연락이 줄어갔다. c가 차지하고 있던 삶의 일부는 그녀가 떠나기 무섭게 학교 과제와 모의고사로 점철되었고 마침내 그녀의 존재조차 기억이 나지 않게 되었다. 

그해 12월, 재수를 결정한 지 며칠 지나서였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c였다. 그녀는 전보다 더 짙어진 목소리로 잘 지내냐고 물어봤다. 나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하다못해 그리움마저도. 그래서 그냥 뭐, 하고서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한번 시작하면 푸념을 멈추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c는 뭔가 느꼈는지 입시에 대한 건 일절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아시안 게임 같은 겉도는 주제들로 떠듬떠듬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다 c가 연초에 고등학교에 들어갔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가 힘들어했던 것까지도 기억이 났다. 학교는 잘 다니고 있냐고, 친해진 애는 있냐고 물어봤다. 하지만 c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전화 너머로 익숙한 남동생들의 칭얼거림이 들렸다. 그제야 가슴 중앙에 한 줄기 찌릿한 것이 지나갔다. 그동안 그녀가 느꼈을 상실감과 안타까움 같은 것들이 미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사랑이 아니라 동정에 가까웠고,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지금 괜찮냐고 말하려는 찰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럼 오빠, 다음에 또 연락할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로 전화는 다시 걸려오지 않았다. c의 마지막 목소리가 어쩐지 울먹이는 것 같았다는 생각을 한 건 그 뒤로 몇 년이 지나서였다. 


그때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지금, 가슴 한구석이 아릴 때가 있다. 일방적이다시피 연락이 끊긴 후 너는 괜찮았을까? 힘들었던 고등학교 3년을 잘 견디고, 지금 어디선가 잘 살아가고 있을까? 혹시 그때 내가 준 상처가 너무 커서 네가 그 뒤로 변해버린 건 아닐까? 네 생각이 나면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옛 아이디로 로그인해, 당시에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일상을 공유했던 먼지 쌓인 블로그에 들어가 본다. 검은 배경의 블로그 화면에 옛날 너에게 쓴 글과 그 아래 네가 남긴 댓글들이 옛 영화처럼 반짝이고 있다. 이제는 쓰는 사람이 거의 없을 쪽지 보관함은 재를 뒤집어쓴 것처럼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그 모든 것들을 다시 보고 읽으며, 나는 그땐 그랬었지라며 아름다운 추억에 젖기보다 아련함과 죄책감을 더 느낀다. 내가 좋아서 네게 손을 건넸고 너는 나를 받아주었는데, 정작 네가 누군갈 필요로 할 때는 내가 없었다는 것이 더없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감정의 파도가 한 차례 지나가고 나면 추억의 장소에 새 글을 썼다. 그렇게 남긴 글이 2014년에 처음, 2016년, 2019년까지 띄엄띄엄 남아있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2023년 오늘 글감을 생각하다 너를 떠올렸다. 조금씩 주기가 길어지고 있었다. 이 글이 끝나고 나면 또 언젠가 너를 기억할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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