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스 파티 : 더스트
니콜라스 파티의 <더스트>는 호암미술관에서 약 7개월간 열린 전시다.
세계적인 작가이지만 한국에서는 이번이 첫 전시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나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루다가 작년 12월 31일에서야 수원으로 떠났다. 24년의 마지막 날이라 관람객이 거의 없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가족 단위 관람객부터 어르신들, 연인들까지 다양하게 모여 있었다. 그들과 함께 고즈넉한 장소에서 한 해의 마지막 날을 기념할 수 있어서 무척 따뜻하게 기억에 남는다.
나는 동시대 작가를 처음 접하는 경우에는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가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기존의 고정된 인식이나 해석, 혹은 작가의 마음가짐을 알게 되면 나도 모르게 마음 속에서 테두리를 만들어 그 안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일까지 작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찾아보지 않다가 현장에서 서문을 읽은 뒤에 감상을 시작했다.
작품 배치나 공간 구성은 만족스러웠다. 작가가 몇 주 전부터 도착해 직접 꾸미고 장식했다는 공간들은 고딕적인 아치 구조와 석상들로 인해 궁전의 방 같기도 했고 별난 예술가가 기분따라 만들어 놓은 키치한 장소인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신비로운 분위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대담한 색채와 동화적인 분위기로 시선을 끌어당기는 화풍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기존 회화·조각 48점, 신작 회화 20점, 전시를 위해 특별 제작된 파스텔 벽화 5점을 리움의 고미술품과 함께 선보였다.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작가에게 ‘미술사’란 영감을 위한 소중한 보고이자 아카이브라는 사실이다. 그는 시대나 문화, 재료에서 가져온 모티프와 양식을 적극적으로 참조해 독자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른바 ‘재현의 역사’를 현대에 불러와 자신의 방식대로 다시 재현하는 것이 그의 주된 작업 방식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에 새로 선보인 작품들 중 일부는 고미술품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예컨대 십장생도 10곡병에서 비롯된 영생의 상징물들이 초상과 함께 그려지거나, 노백도에서 착안한 ‘주름’과 ‘벌레’ 연작이 등장한다. 여기서 발견되는 동서양의 시대·문화 간 융합과 그로 인한 의미의 혼재는 흥미로운 부분이다.
파스텔이라는 재료 역시 작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다. 물론 파스텔화를 그리는 현대 작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미술관의 한 벽을 가득 채울 정도로 대형 파스텔 작업을 시도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더 중요한 사실은, 작가가 18세기 로코코 시대에 파스텔이 유행했던 이유인 편의성과 환경 제약이 적다는 장점이 아니라 연약함과 일시성이라는 단점에 주목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작가는 6주 동안 용인에 머무르며 미술관 벽에 5점의 파스텔 벽화를 그렸고, 전시가 종료되면 이 벽화들은 전부 지워져 사라질 운명이다. 이는 미술 시장을 포함해, 미술을 바라보는 기준 중 하나인 작품의 영속성·소장 가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중요한 관점이다. 나아가 이러한 존재론적 의식은 단순히 작품 자체에 그치지 않고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연기나 천산만학의 풍경이 상기시키는 ‘문명과 자연의 지속과 소멸’에 대한 사유로도 확장된다.
전시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2층의 붉은 장막 두 개가 아치형 출입구 양옆에 자리한 모습이다. 아치문을 중앙에 두고 양옆에는 ‘렘브란트의 장막’과 ‘카라바조의 장막’이 조용히 걸려 있고, 그 아치문을 통과해 반대쪽 벽을 보면 쿠르베의 폭포가 걸려 있다.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는 피카소의 명언이 떠오르면서, 역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자유자재로 재현하는 작가의 모습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요즘은 미술 작품을 단지 ‘결과물’인 그림만 보고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다. 전시 서문은 물론이고 작품 명과 부연 설명, 조금 심오한 작품들은 도슨트의 설명이 필요하다. 심지어 작가의 경력이나 세계관이 필수적인 부분도 있다. 이번 전시 역시 파스텔이라는 재료의 의미나 고미술품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참조된 회화들이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지 알 수 있다. 이런 경향에 대해 불평 섞인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마치 소설가가 책을 낸 뒤 인터뷰로 작품의 내용을 보충해 완성시키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미술 작품을 처음 본 관객이 작품만으로는 전부 이해하기 힘들고, 반드시 다른 매체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은 얼핏 보면 작품이 불완전하다는 신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에 바뀐 생각은, 현대 미술 혹은 현대의 미술 작가 자체가 하나의 미술 사조이거나 사조의 하위 단계에 놓여 있다고 보는 것이다. 미학적 이유나 정치적 배경 등에 의해 외부에서 그려지고 판매되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고, 그동안 미술이 담당해왔던 ‘정밀한 재현’ 기능도 카메라에게 빼앗겼다. 이제는 작가가 자신의 철학을 구축하고, 이를 관객에게 ‘설득’하거나 ‘체험’시키는 과정이 중요해졌다. 그 결과, 작품이 점점 개인화·개념화·특수화를 향해 가는 것은 필연적인 흐름일 터다. 다만 그 안에서 보편성을 함께 마련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반면 관객은 열린 마음으로 이 ‘타자성’에 한 걸음 더 다가가려는 다정함이 필요하다. 그 타자성이란,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고 고도로 구축된 매력적인 세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