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매그트 재단으로

내가 사랑하는 삶, 내가 사랑하는 예술가들, 호안 미로, 샤갈

by knok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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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폴드벙스(Saint-Paul-de-Vence)에서의 아침은 지중해와 맞닿은 니스의 그것과는 또 다른 풍경을 품고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벽에 기대 졸고 있는 듯한 이 산골 도시는 전 세계 어느 곳도 흉내 낼 수 없는 이상적인 자연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구름 아래 산맥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꼭대기에 두꺼운 성벽으로 둘러싸고 있는 요새가 보인다. 모서리에 가지각색 칠이 주름지고 떨어져 나간 덧창과 돌 틈새에 검은 먼지가 켜켜이 쌓인 외벽은 어떤 이야기들을 품고 있을까.

내가 유일하게 안 사실은, 이곳의 하루는 매우 느리게 시작한다는 점이다. 해가 중천에 뜰 때쯤에도 거리는 고요했고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관광객으로 자동차와 자전거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가끔 중년의 남자가 커다란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오는 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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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매그트 재단으로 가기 위해 가까운 버스 정류장으로 걸었다. 가는 길에 ‘Office de Tourisme’ 이라는 글씨와 함께 철도에 안내원이 함께 타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건물이 보였다. 이곳에도 여행자 센터가 있다니 수요가 꽤 있나 보다. 다른 길목에서는 어떤 남자가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들이 꽃이 핀 놀이터에서 웃음을 지으며 놀고 있는 풍경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입가에 웃음이 그려진다. 세상을 더 아름답게 바꾸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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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로 몇 정거장을 간 뒤에 다시 내려 걸었다. 길을 따라 사이프러스 나무가 높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고, 올리브 나무, 플라타너스, 우산 소나무가 다발처럼 핀 풍경을 배경으로 장 클로드 파리(Jean-Claude Farhi)의 철제 작품이 보였다. ‘시크릿 포인트’라는 작품의 이름이 이곳 생폴드벙스의 지역색과 합쳐져 특별하게 느껴진다.

재단 근처로 갈수록 오르막길의 경사가 심해지는데, 그래서 대부분의 관객은 차를 가지고 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미술관은 나 같은 뚜벅이 관객에게도 배려해 주는바, 주차장에서 미술관 입구를 왕복하는 지프가 있다. 점점 뜨거워지는 날씨에 낑낑거리며 올라가는 내게 어떤 남자가 손짓하며 불렀고, 웃는 얼굴로 차에 타라고 말했다. 덕분에 나는 땀을 식히며 매표소 앞까지 편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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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에도 매표소 앞에 길게 줄이 서 있었다. 르누아르 미술관에서처럼 대부분이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었다. 그럼, 늘그막에 이런 데 놀러 오는 게 낙이지. 표를 사서 안으로 들어가자 모래바닥 길이 미술관으로 이어지고 양옆 풀밭에 소나무들이 저마다 미적인 각도로 높이 솟아 있었다. 호암 미술관이 생각나기도 하고, 동양적인 미가 연상되기도 했다.

먼저 짐을 맡긴 뒤 지하에서 관람을 시작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이 마치 이집트 유물처럼 줄줄이 서 있었다. 호안 미로, 마르크 샤갈, 조르주 브라크가 그 뒤를 이었다. 미술관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은 샤갈의 ‘삶(La vie)’ 이었다. 직전에 샤갈 미술관을 다녀왔기 때문일까? 하나의 고유명사로 이루어진 제목은 그 무게가 차원이 다르기에 대개 대가들만이 사용한다. 시야를 꽉 채우는 커다란 화폭에 제목 그대로 작가의 삶이 펼쳐져 있었다. 태양과 염소, 닭, 물고기. 결혼과 춤, 음악. 파리와 비텝스크. 샤갈의 삶은 그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자신의 삶을 채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기억하며, 그것들이 주는 감정을 오롯이 받아들이며 함께 살아가는 삶은 위대하고 고귀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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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공기처럼 너무나 가까이에 있고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 몸으로 들어오기에 소중함을 잊는 것들이 많다. 나와 주변에 있는 것들, 그리고 삶 자체도. 그림은 늘 그것이 무엇인지 떠올리고 그것들이 내게 주는 감정을 소중히 생각하도록 일깨워준다. 그런 한편 내 삶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한때 ‘예술적 영혼은 평생 보고 듣고 읽었던 예술가들의 총체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나의 예술적 영혼은 영감을 주었던 예술가들, 도미니크 앵그르와 오귀스트 르누아르, 프랑수아즈 사강과 스콧 피츠제럴드, 에롤 가너와 딘의 총체인 것이다. 그리하여 예술은 이전 세대의 영감과 발상들이 이합집산하면서 다음 세대로, 그리고 또 다음 세대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에서 스쳐 갔던 많은 인연, 잊어버리거나 모르고 있던 부분을 깨닫게 해준 사람들과 경험들 또한 나의 일부분이고 역사다. 그림을 보는 동안 속으로 그것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IMG_2587.jpeg 예술가를 찍은 사진. 왼쪽부터 순서대로 호안 미로, 마르크 샤갈, 알베르토 자코메티, 앙리 마티스.


다른 섹션에는 사진작가의 작품들도 걸려 있었다. 아놀드 뉴먼이라는 20세기의 유명한 사진작가가 예술가들을 찍은 작품이었다. 그곳에서 알베르토 자코메티와 샤갈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그것들을 그린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구나, 마치 연예인의 얼굴을 보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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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층을 모두 구경한 뒤 계단을 따라 바깥으로 나가면 ‘미로의 미로’라는 공간이 펼쳐진다. 우연히도 호안 미로의 성과 ‘미로’라는 공간의 단어가 똑같아 재미있다. 외국인들도 한국어로 두 단어가 같다는 것을 알면 신기해할 텐데. 이곳은 안도 다다오의 건물처럼 벽을 지나면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새로운 작품들이 등장한다. 비쩍 마른 청동 인간상으로 제일 유명하지만, 호안 미로는 재료와 모양을 가리지 않고 조형물을 많이 만들었다. 물론 제목을 보아도 연관성을 찾기 힘든 것은 매한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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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을 마주하면 늘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누군가 호안 미로의 작품을 보고 빛나는 태양이 아름답다며 칭찬했더니 그가 “그건 그냥 감자인데요.”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다. 나는 그것을 듣고 나서 추상 작품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를(정확히는 그게 무엇인지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대신 작품이 내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에 집중하게 되었다. 사방이 뻥 뚫린 곳에 서 있는 거대한 조형물은 무언가를 가리키거나 종교적인 것을 상징하는 듯한 느낌을 주며, 그 공간을 신비롭고 특별하게 만든다. 벤치에 앉아 그의 작품들 속에 둘러싸여 있으면 마치 그의 머릿속에 들어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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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챙기고 정문 입구로 돌아오자 아까보다 사람들이 더 붐볐다. 대부분은 미술관 옆에 있는 식당의 테라스 좌석에 빽빽하게 앉아서 탄산 음료잔을 앞에 두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한낮의 태양이 뜨겁건 말건, 정말이지 야외를 지긋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그들이 사랑하는 자연 또한 오늘부터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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