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의 명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정말 유명하죠.
하지만 음악치료사이자 소리로 사람들을 만나는 저는 "나는 듣는다, 고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성, 효율성, 합리성에 중점을 두다보면 내가 지닌 감각을 불신하게 됩니다. 수치와 통계가 절대값이 되면서 점점 내 감각과 멀어집니다.
저는 주로 감각과 많이 멀어진 분들을 만나서 '생각'에서 '소리'로, 그리고 '듣기'로 중심을 옮기는 연습을 하지요.
수업에서 소리와 청각이 우리 존재와 경험에서 얼마나 본질적인지 말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누구나 가만히 듣다 보면 스스로 그렇게 느끼게 됩니다. 나를 둘러싼 세상, 그 세상과 영향을 주고 받는 나를 알게 됩니다.
느끼는 것, 감각으로서 인식하는 것.
그렇게 우리의 존재는 확인됩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대체로 어떻게 '보이는지'에 따라 나의 존재가 규정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더 근원적으로 들어간다면 '들림'에서 존재는 시작됩니다.
갓 태어난 아기의 많은 감각기관은 미숙하지만 왜 청각 기관은 완성되어 태어나는 걸까요?
엄마의 뱃속에서 아기는 이미 수 많은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태어나는 순간 아기는 세상이 떠나갈 듯한 울음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립니다.
또 우리는 갓난아기의 안위를 '소리' 이외에는 가늠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처럼 소리는 존재의 확인이자 관계의 시작입니다.
아기는 자신의 소리에 세상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경험하면서 세상을 인식합니다.
나에게 안전한 곳인지, 또는 불안한 곳인지, 내가 만든 소리의 메아리를 통해 알아갑니다.
에릭슨도 이야기했듯이, 인간의 애착은 '내 울음에 누군가가 반응했는가'에서 시작됩니다.
이러한 일종의 정서적인 공명은 주로 목소리, 억양, 언어의 리듬 같은 청각적인 정보의 교류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볼비나 에인스워스도 아기의 욕구에 대해 민감하고 일관된 반응이 안정 애착을 형성한다고 했죠.
그렇다면 그 일관된 반응은 어떻게 이뤄질까요? 따뜻한 음성, 말투, 언어가 가진 리듬을 이용한 정서의 전달이 주가 될 것입니다.
아기를 키우거나 돌보았던 경험이 있는 분들은 몇 가지 떠오르는 기억이 있으실거예요. 아기가 "아앙~"하고 울면 엄마는 아기의 우는 모습을 흉내내기도 하면서 "우리 00이, 그래쪄요~"라고 대꾸해주죠. 아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지도 못하지만 이렇게 서로 정서를 조율하고 공명합니다.
듣는 것,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귀 기울여 듣는 것'은 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자 존중입니다.
음악치료에서는 서로 함께 음악을 만들기도 하고 내담자가 좋아하는 음악을 함께 듣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바탕에 늘 듣기가 있어요.
특히 누군가를 '살펴 보는' 것 보다 가끔은 '들어 보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소리에는 많은 정보들이 담기거든요.
그래서 들어 보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눈으로 감각하지 못하는 부분을 느낄 수 있어요.
저는 목소리 즉흥 연주에서 특히 이런 경험을 자주 하게 됩니다.
그 사람의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다보면 점차 그 사람의 내면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일 때가 있거든요.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결코 알지 못했을, 그 사람의 마음 상태, 예를 들면 "용기"나 "애씀"의 모습들이 마음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언어로 설명하기에 어려운 것들, 또는 언어가 잘 전달하지 못하는 것들이 마치 블루투스로 정보가 전송되는 듯 온전히 와 닿습니다.
무언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수동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단순히 들려오는 소리를 귀라는 청각 기관으로 감지하여 인식하는 것 이상의 일이죠.
저는 귀 기울여 듣기란 나와 타인, 그리고 세상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Audio, ergo sum.
(나는 듣는다, 고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