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비밀은있다1
가연의 감정선이 불안해지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연석은 서두르지 않았다. 경험에서 체득하였으나 연석은 그녀의 감정을 이해하고 배려해 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녀는 오늘 극도로 불쾌해질 것이다. 오늘은 그녀 부모님의 결혼 65주년 기념일이다. 가연의 아버지는 승리자의 만찬처럼 이날을 가족 모두와 기념하기를 원하셨고 그녀는 이런 가족모임을 혐오하면서도 거부하지 못했다. 느릿하게 메이크업을 마치고 어김없이 블랙 원피스를 입었다. 가슴골까지 내려온 얇은 검은색 시스루 속에 하얀 피부가 은근히 비쳤고 발목까지 떨어지는 길이감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둔부에서 흘러내리는 몸 선을 보여주었다. 허리엔 버클이 큰 벨트로 매무새를 마무리하고 그와 함께 집을 나섰다.
가연은 누구보다도 시선 받는 법을 알았다. 오래전부터 말이다.
선인 고등학교. ‘사람을 먼저 생각하다’라는 설립자의 이념이 역사를 거치면서 선택받은 아이들이라는 변질된 의미로 선망과 비아냥을 동시에 받는 학교가 되었다. 가연은 그들 중에서도 선택된 자로 불리었다. 재력만이 기준이었다면 그녀보다 앞선 교우들이 적지 않다. 브레인과 외모의 종합적 고려. 그중 그녀의 외모는 같은 라인에 세울 여인이 없었다. 실크벽지 같은 피부는 교정을 걸을 때마다 햇빛에 반짝거리기까지 했다. 가연은 선인고의 독보적인 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리 불리는 것을 상관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어느 것도 상관하는 법이 없었다. 도무지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그녀였다. 아버지는 그런 가연을 보며 흡족해하셨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딸이 자신을 많이 닮은 듯했다.
조금만 더 무르익으면 아주 유용해질 그녀였다.
“결혼도 비즈니스다. 그런 면에서 넌 최상급이지”
어릴 적 아버지의 단호한 말에 주눅이 들면서도 다행이라 여겼다. 성장하면서 아버지의 만족스러운 눈빛에 마음이 놓이는 스스로가 나약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다른 방식을 찾아본 적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언제나 불편했다.
학교엔 그녀가 익숙해하는 친구가 있다. 고아영. 아영이는 구불거리는 짧은 단발을 하고 있었다. 눈웃음은 귀여우면서도 교태스러웠고 입술은 진주처럼 도톰해 탐스러웠다. 그녀가 퀸이라 불리었지만 남학생들의 고백이 끊이지 않는 쪽은 오히려 아영이었다. 전학 온 첫날 아영이는 심히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교실 창밖을 쏘아보는 모습이 작은 한 마리 박새 같았다. 가연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고 아영이는 고개 들어 그 소리를 찾았다. 그녀와 눈빛이 마주친 아영이는 표정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날 이후 가연과 아영이는 단짝이 되었다. 교정 모든 곳에 함께 있었고 모든 것을 함께 했다. 아영이는 하교 시간이 되면 그녀와 헤어지는 순간이 세상 가장 아쉬운 일인 양 가연에게 폴짝 안기곤 했는데 그럴 때면 가연은 아영이의 정수리를 어색하게 쓰다듬어 주며 빠져나오곤 했다.
아영이의 감정은 언제나 자연스러웠고 표현은 직진이었다. 그런 모습이 적응되지 않는 유일한 것이긴 했으나 그래서 아영이와 가까워지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온전한 마음을 받는 건 그녀에게 낯선 일이었지만 피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더 가질 수 있다면 그리하고 싶은 소망이 물컹하게 올라오는 것은 아영이 덕일 것이다.
고2 가을학기. 아영이는 몰래 학교 밖을 다녀왔다. 교정 벤치로 불러낸 가연에게 따뜻한 캔 음료를 건네었다. 해가 들어간 늦은 저녁 체감온도는 더 내려가 있었다. 오들오들 떠는 가연을 보며 아영이 웃었다.
“달달 떠는 게 꼭 병아리 같아. 퀸은 추운 걸 싫어하니, 그리스로 가자. 난 섬에서 살고 싶거든. 그리스엔 우리가 함께 지낼 섬이 많을 거야. 그곳은 따뜻할 테니까”
작은 박새 같은 아영이 입에서 그녀가 병아리 같다는 말이 나오니 가연은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벤치에 앉아 그리스의 섬들을 그려보았다. 나쁘지 않았다. 함께 지낼 섬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지만 그럴 일이 있을까 싶어 내색하지 않고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추웠지만 바람이 자유로웠다. 그 순간 아영이의 입술이 닿았다. 아니 포개어졌다.
“퀸... 널 좋아해. 아니 사랑하는 거 같아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