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해 Feb 24. 2024

형(은 그의 이름 끝 자다)

‘형’(형은 그의 이름 끝 자다)을 알게 되었을 때 꽤나 지쳐 있었다. 그때 유독 지쳤었다 생각했는데 지나 알게 된 건 난 늘 불안했고 그 불안에 눌려 또 늘 피로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확실히 당시에 내 주변은 날 구석으로 몰아넣고 있긴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장례식장을 지켜준 동갑내기 남자친구와 헤어졌고 첫 회사에서 첫 상사로 8년간 모신 분이 경영책임을 운운하며 대표이사 사임 의사를 밝혔다. 아빠를 잃었고 애인도 잃었고 곧 직장도 잃을 처지에 놓인 거다.      


불안은 극에 달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초연해질 일들이지만 한 참 소용돌이 속에 있을 때 소개로 형을 만났다. 주말 오후 약속시간에 가까워지자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비가 올 것도 아닐 것도 같은 헷갈리는 구름을 보였다. 손에 뭔가를 들고 다니길 좋아하지 않지만 예비로 장우산 하나 들고 그와 만나기로 한 역으로 갔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손에 있는 우산이 내내 거슬렸다. 내 몸조차 지탱할 힘이 없는데 우산 하나 때문에 신경이 분산되니 약속자체가 후회되고 이대로 돌아가 침대에 몸을 누이고만 싶었다.      

아침에 억지로 몸을 일으키는 심정으로 명동 역에 내려 계단을 오르니 비가 퍼부었다. 너무 세차게 내리는 비에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잊은 채 그저 멍하니 서있었다. 주머니에서 징하는 울림이 느껴졌다. 낯선 번호인데 ‘형’이란 이름이 화면에 보인다.     

“하얀색 긴팔 티요. 파란색 우산도 들고 있..” 설명이 끝나기 전 그는 날 알아봤다. 계단을 오를 때부터 보고 있었다고 했다. 소개해준 지인에게 들은 모습과 비슷해 눈길을 주었는데 두리번거리지 않는 모습에 혹시나 실수할까 좀 더 지켜봤다고 했다. 우산이 있는데도 바로 자리를 뜨지 않기에 확인 전화를 했고 하얀색 긴팔이란 말을 듣자마자 다가온 거라 했다.    

  

약간의 긴장이 섞인 저음과 살짝 경직된 얼굴과 자신감 있게 뻗은 큰 키였다. 곱상한 하얀 피부도 매끈한 까만 피부도 아닌 보통의 피부색이 오히려 남자다워 보였다. 세상을 아는 듯 보이면서도 순진한 구석이 있는 눈과 마주쳤을 때 낯선 웃음을 지으며 인사대신 물었다. “몇 시 영화였죠?” 첫 만남에 영화라니 노멀한 방식은 아니지만 소개받았다며 연락 온 그에게 나는 대뜸 영화 볼래요? 라고 물었고 그는 시간과 장소와 예매까지 빠르면서도 거북스럽지 않게 진행했다. “지금 가면 맞을 거 같네요.” 그에겐 우산이 없었다. 거추장스러웠던 파란 장우산을 펴니 하늘에 동글동글한 점박이 무늬가 펼쳐졌다. 우산 손잡이를 자신이 들겠다는 추임새와 동시에 생각지도 못한 디자인에 놀란 당혹감이 스쳐가는 게 보였다. 서른의 남성에게 땡땡이 무늬가 그리 버거운 건지 귀엽긴 했다.      


우산은 낯 선 남녀를 가깝게 만들었다. 쏟아지듯 내리는 비에 꼭 붙지 않고선 쓰나마나였다. 형의 오른팔과 나의 왼팔이 맞닿았으나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고 길가에 작은 웅덩이를 피해야 할 때면 더 바짝 밀착할 수밖에 없었다. 극장까지 거리는 짧아도 비라는 장치 덕에 묘한 친밀감이 흘렀다.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내 긴 머리와 내 여린 어깨에 묻은 빗물을 조심스레 털어주었다.  

    

나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퇴근길에 형이 우리 집 앞으로 찾아왔다. 그와 달리 난 긴장감 제로 상태로 허물처럼 벗어버린 옷가지 마냥 늘어져 있었기에 서둘러 매무새를 단장해야했다. 너무 차려입어도 안 되고 그렇다고 리얼한 집순이 스타일로 나가서도 안 되는 걸 잘 알았다. 머리는 돌돌 말아 똥 머리 모양으로 올리고 옆머리를 흘러내리게 했다. 청바지에 어깨가 꽤 파인 짧은 티를 입고 나가선 그가 어디에 있는지 두리번거렸다. 형은 아파트 주출입구에서 꽤 떨어져 서 있었다. 어둑했지만 한 눈에 형임을 알아보고 달려가 그 앞에 섰다. 숨이 금세 찼다. 나는 형에게 내 안에 그가 차오르고 있음을 고백했고 형은 달려오는 내가 무척 사랑스러웠다고 했다.      


그에게 스며들수록 나는 말이 많아졌다.      


깊이 박혀있는 불안과 피로가 사라진 건 아니나 그러한 감정들이 돋아나 무성히 자라기전 잘라낼 수 있었다. 형은 민감한 사람이었다. 내게 어는 것도 바라지 않으면서 언제나 면밀히 살폈다. 주기적으로 자라는 어둡고 습한 마음을 성실한 정원사가 되어 삭둑 잘라내 주곤 했다. 그가 가진 아픔은 타인을 향한 깊은 이해를 도왔고 그러기에 난 그의 아픔이 편안했다. 항상 평안하길 바라면서도 아픔이 완전히 아물지는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이기적이게도.     

 

그래서였을까, 그도 역시 이기적인 내게 질린 걸까.

아님 잘라내도 때 되면 자라는 음지의 이끼에 지친 걸까.

      

해가 창문을 뚫을 기세로 사무실을 점령해가던 한 낮의 메시지는 그의 성격만큼이나 깔끔하고 간결했다. ‘이제 그만’ 처음 만났던 날의 날씨만큼이나 알 것도 같고 모를 것 도 같은 메시지였다. 끝이란 건가 싶다가도 서운 한가, 내가 무례했던 가, 그도 잠시 늪에 빠진 건가, 아님 남자들이 들어간다는 동굴이 필요한 건가, 형을 만나야 했다. 이유라도 알아야겠다 싶었지만 여지가 남아있지 않을 까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컷다.  

    

그 주 주말에 형을 만났다. 평소와 달라 보이지 않았다. 날 대하는 조심스럽고 배려있는 행동은 여전했다. 다만 어딘가 불편한 기색은 역력했고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분명 내 앞에 앉아있었는데 그 외의 기억나는 게 없다. 그날 그에게 어떤 말도 듣지 못했다. 조르듯 집요하게 물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 남은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 말도 듣지 못했기에 마지막까지 그의 순수한 사랑을 믿으려 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긴 거지. 뭔지 모르지만 그 상황이 내게 부담이 된다고 여겼겠지. 그래서 스스로 떠나기로 자처 한 거야. 이거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얼마 전부터 전화가 뜸해졌지만 바쁘다 했었다. 업무관련, 전공 관련 모임에 나가기 시작한 거 말곤 신상의 어떤 변화도 알아낼 수 없었다. 생각이 꼬리를 무니 입이 더 떨어지지 않았다. 모임엔 여자도 있었다. 대학 동기를 마주쳤다 했다.

    

더는 형에게 수다할 거리가 없었다. 대화 없이 마시는 커피는 쓰기만 했다. 약처럼 사약처럼 나의 성실한 정원사는 결국 내 전부를 잘라냈다.     


삼성동 카페를 나와 마주 서서 인사를 했다. 잘 가, 안녕. 다치지 않은 듯 꼿꼿하게 인사했지만 돌아서 바로 후회했다. 인사 따위 하지 말 것을. 상처 받았음을 고스란히 드러내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만들 것을. 누구와도 한 공간 안에 섞이기 싫어 무작정 걸었다.

 

잃은 것에 대한 상실감과 분노와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한꺼번에 몰려와 어느 것이 진실에 가까운 감정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로인해 차올랐던 가슴 속 따스함이 뜨거운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쌓였던 만큼 쏟아내려는 거 같았다.      


한참을 걸었다. 힐을 신은 채.

삼성동에서 집 방향 길목에 있는 언덕을 지날 땐 이미 다리를 끌고 있었다. 종아리가 부어오고 등과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중간에 버스든 택시든 탈 수 있지만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의 불쾌감이 울적한 기분을 상쇄시키는 것 만 같아 그대로 날 내버려두었다. 울퉁불퉁한 도보에 힐이 휘청거리기도 하고 무심코 밟은 맨홀에 힐이 끼어 아슬 하게 넘어질 듯 몸이 쏠리기도 하면서 안 그래도 더운데 얼굴을 더 달아오르게 했다. 혼자 남겨진 듯 한 막막함 보다 다른 연인이 생겼을 거 같은 배신감보다 당장의 발바닥 통증과 맨홀에 낀 구두를 빼기위해 버둥거릴 때의 수치심이 의외로 더 강했다.   

   

햇살이 곳곳을 비추는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이면서 여전히 분주했다. 대로변과 나란히 줄지은 건물들 사이를 걸을 때 익숙한 카페와 병원과 마켓이 그대로 제 자리에 있었고 차도엔 파란색과 초록색의 덩치 큰 버스들이 가다 섰다를 반복하고 잘빠진 승용차와 그 사이를 눈치껏 넘나드는 택시들도 여전히 혼잡했다. 형은 사라졌지만 내게서 일뿐 누구도 형이 사라진 것에 대해 놀라지도 아파하지도 않았다 아니 어느 것도 형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나조차도 형이 내게서 빠져 나간 것 보다 맨홀에 구두 굽이 부러지지 않은 게 더 다행스러웠다.      

영동대로를 따라 오르막과 내리막을 걸어내고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 통과해야할 터널이 있었다. 처음 이 동네에 이사 왔을 땐 스물에 요절한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의 묘소가 근방이라 광평터널로 불렸는데 개발된 아파트 단지에 사람들이 꽉 들어차면서 지역가치가 왕족을 넘어 일원터널로 바뀌었다. 터널 속 차도 옆으로 좁은 폭의 도보길이 있었다. 킬 힐에 신경 쓴 차림새의 여자가 걸어가기에 자연스러운 길은 아니었지만 이 앞에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차가 터널을 지나칠 때마다 엄청난 굉음으로 날 자극하며 내 속을 소란스럽게 만들려 했다. 쾌쾌한 콘크리트 냄새가 새어나오는 터널 안을 걷다보니 다시금 삼성동 카페에서 마시던 흑연의 커피가 떠올라 비참해지는 기분이 들려했다. 차라리 더워 불쾌했던 길이 나았다. 서둘러 컴컴한 터널을 빠져나와 쏟아지는 햇살 아래 섰다.      

비를 타고 온 사랑이었지만 뜨거운 햇살에 떠난 자리마저 흔적 없이 태워지길 바랐다. 고귀한 광평대군도 실익에 밀려 지워졌으니 형 따위야 무쓸모의 그 어느 것보다 더 가치 없는 것으로 사라지길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형을 생각한다. 비 오는 날이면 파란 우산 속으로 들어왔던 형을 햇살 좋은 날이면 삼성동 카페에 마주 앉아있던 형을 말이다.      


그건 미련도 아픔도 원망도 아닌 내 맘에 어지러이 자라나던 잡초를 다듬어 주던 키 큰 정원사로 머물렀던 시간을 기억하는 거다. 그저 내 시간을 기억하는 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