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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해 Dec 27. 2022

30대에 일어난 일

결혼 적령기를 넘은 여자가 받은 뜻밖의 청혼

상견례 때 남편의 어머님, 나의 시어머님을 처음 뵈었다.


‘연애는 얼마나 하셨어요?’


커플에게 하는 이 흔한 질문에서 2년이요, 3년이요 그것도 아니면 1년이요 라는 답을 내어놓을 수 있는, 적어도 사계절을 겪어내는 연애기간이 있었다면 결혼을 약속한 연인이 상견례 때 상대의 부모님을 처음 뵙는 일은 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이 오늘부터 1일’이라는 내 연애의 시작점은 2010년 5월 말이었고 ‘우리 사이 백년해로 가봅시다’라며 혼인서약서에 맹세를 한 날은 2011년 1월 중순이었다.


온전히 연애기간으로만 쳐도 짧았을 그 기간, 7개월 안에 연애의 시작과 결혼의 시작이 모두 일어났으니 나는 그 사이 지방에 계시는 시어머님을 뵐 일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뵈지를 못하였으니 간섭도 없으셨다. 그 없는 간섭은 당시 나와 한집에 살고 있으셨던 내 어머니도 마찬가지셨다. 내 어머니는 결혼에 관한 모든 진행을 내게서 보고 받으셨고, 시어머님 역시 남편에게서만 보고 받으셨다. 보고라 해도 될지.. 사실상 우리는 결정하고 통보에 가까운 것을 양가 어른들에게 남발하면서 인연의 결실을 맺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나를 전적으로 믿어줄 만큼 지혜롭고 당차고 꼼꼼한 딸로 보아서가 아니셨다. 나이 든 딸내미의 연애는 내 어머니가 보시기에 손에 놓치는 순간 깨질까 봐 걱정스럽고 아주 조심스러운 그런 것이었다. 어머니의 노심초사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나와 시간을 나누던 친구들이 결혼하고 육아맘이 되면서 이질적인 세상에서 나를 보며 전혀 다른 언어를 쓰다가 이제는 나도 그쪽으로 갈 테야 하니 드디어 너와 공통분모를 가질 수 있겠다며 적극 반겨주는 마음도 있었다.


이렇듯 결혼적령기를 넘어선 여자의 연애는 어디에서도 조건 없는 환대를 받았다.


 지금의 세대를 보면 결혼이라는 단어에 ‘적령기’를 붙이는 거 자체가 꼰대 같거나 구제스럽게 느껴지는데 나의 젊은 시대는 통상적으로 이즈음 가면 괜찮지라는 나이의 적정선이 있었다. 주변 친구나 동료들은 그 적정 즈음엔 대체로 혼자가 아닌 둘이 되었고 나는 그 선을 넘긴 상태에서 지금의 남편과 교제를 하게 되었으니 ‘어떤 사람이야?’라는 질문보단 ‘그래서 결혼은 언제?’라는 질문만 있었다.


그 당시에 말하는 조금 늦은 시기에 결혼을 하게 된 것이 내가 연애에 부지런을 떨지 않았거나 일에 홀릭해서가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결혼에 진심이었던 사람이 바로 나다.

진심이었던 만큼 나름 아주 바지런을 떨었고 쉬이 마음도 열지 않았다.(사실상 그때는 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와 보니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하루 햇살 가득 들어오는 따사로운 날로 기억이 된다. 날씨가 좋아선지 그날따라 기분이 좋으셨던 아버지는 언니를 부여잡고 인생의 병법이라도 하나 전수해주시는 것처럼 조언 같은 잔소리를 내어 놓고 계셨다. 4살이나 아래였던 나는 아직 해당사항이 아니라 여기셨는지 나란 존재는 제쳐놓으신 말씀을 지나가듯 훔쳐 들었다.


 ‘결혼도 비즈니스다’


아버지의 이 문장은 파릇하고 푸릇하게 피어날 20대 아가씨의 순순함에 냉수를 끼얹었다. 흘려들으면서도 기가 찼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 돈이 뭣보다 필요했던 시절을 온전히 때려 맞은 시간을 보내셨어도 그렇지 딸내미 앉혀 놓고 결혼이 비즈니스라니! 결혼으로 이윤남 기는 장사를 하시고 싶으신 건가? 평생을 함께 해야 하는 반려자를 상업성으로 따져 만나라 하시니 반기가 들어차면서도 결코 현명한 문장은 아니라 생각하며 넘겼었다.


아버지는 아버지이시고 나는 나인지라 그저 흘려듣고 내길 가는 건 내가 가장 잘하는 행태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나는 나이지 못했다. 역시 아버지는 아버지인지라 말에 힘이 내게 뻗쳤다. 저 문장이 결혼하고도 12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들리는 것은 당시 나를 꽤 흔들었던 것 같다.


 순진과 함께 순수한 마음으로 말랑거리던 중학생시절 마음 푹 적셔지게 읽었던 고전이 ‘제인에어’이다. 아름다운 전 세계 공주를 만나보던 동화에서 벗어나 외모가 주는 매력이 아니라 지성과 감성이 어우러져 서로에게 교감이 되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순수한 정의를 보여주던 제인에어를 읽어내면서 얼마나 설레었는지 꼭 그런 사랑을 만났을 때 결혼의 결실을 맺으리 하며 다짐했었던 내가 스무 살 대학생이 되고 나서 ‘부모님의 보호하심이 이제는 끊기는구나, 노동의 아르바이트를 몇 시간씩 하면서 정말 돈 없으면 사랑이고 뭐고 화가 나겠구나’를 몸으로 체험하고 있을 때 들려온 아버지의 저 문장은 견고하지 못한 나의 가치관을 이리저리 흔들어 댄 것이었다.


 이후 나의 연애는 매끄러울 수가 없었다.

만남을 갖는 거 자체부터 나름의 검열이 먼저 이루어졌다. 마음의 끌림이 있어도 다가가지를 못했다. 그 사람에게 호감이 일어나도 아주 미천한 질문들에 밀려나기 일쑤였다.


 ‘어디 사는지?’ ‘그래서 부모님은 무엇을 주실 수 있는지?’

 

저 질문을 품고 있는 젊은 여인에게 연애의 기회가 널려 있을 리 없었다. 결혼이 비즈니스라면 본디 주고받는 서로에게 이윤이 남겨져야 성사가 되는 것을 경제상식도 없던 나는 혼자서 남는 장사를 하려 했으니 그리 얼탕 하게 넘어올 남정네가 흔하겠는가. 이 어설픈 장사치맘으로 결혼을 위한 연애를 해보겠다고 바둥거리는 것을 보던 주변에서 도움의 손길도 몇 번 있었다. 그리 성사된 만남을 가져보면 서류전형 합격자처럼 보기 좋은 조건들을 채운, 위의 두 질문을 만족시켜주는 이들도 있었다.


 ‘만나볼까? 결혼해도 괜찮을 거 같아.’


이성의 판단아래 연애를 열심히 해보기도 하였다.

저 질문으로 시작했어도 사람을 만나 알아가다 보면 ‘정’이 들곤 했다.


한 번은 키가 훤칠했던 전문직 L을 소개받은 적이 있었다. 단란하면서도 부족함이 없는 집안에서 잘 자란 남자였다. 위트도 적당해 대화도 통하면서 매사 성실한 면이 신뢰를 주었다.  ‘배우자’라는 측면에서 보면 내게는 감지덕지한 그런 이였다.  

그렇게 만남의 시간을 끌다 보니 1년이 금세 지나고 2년째인 어느 날 가족을 만나자는 말이 나왔다. 수순처럼 나를 맞이해 주는 상황에 기뻐해야 하는데 알 수 없는 묵직한 부담감으로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한 발만 더 내딛으면 결혼에 진심인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일만 남았는데 이상하게 그 한 발이 내디뎌지지가 않았다. 세심한 그이는 부담 없이 보자며 누나를 먼저 소개해주었었다. 당시 유학 중이던 누나가 한국에 잠깐 들어온 시기에 맞춰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이만큼이나 좋은 분이셨다.


그 만남 이후 오히려 나는 생각이 많아졌고 한 발을 내딛지 못하는 이유를 알았다. 그이가 참 좋은 것이 아니라 그이가 갖추고 있는 것들이 참 좋았다. 가정환경, 가족 구성원, 결혼 후 살 지역, 부모님이 주실 그이의 몫, 그이의 직업 이런 체크리스트 같은 것들이 만족되어 선택하게 되는 결혼에서 만약 그것들 중 하나라도 결혼 후 불안해지는 일이 생긴다며 그래도 나는 그이가 좋을까? 하는 질문에서 막힌 것이다. 이미 서른을 넘긴 나는 막힌 질문에서 답을 찾아내지 못하고 그이와 헤어졌다. 헤어지고 나서 한 동안 현실적인 미련 때문에 힘들었다. 후회할 짓을 섣불리 한 건 아닌가 그땐 꿈까지 꿀 정도였다.


이렇듯 사랑이 아니었어도 헤어짐은 아프고 힘들었다. 함께 하였던 시간들에 혼자만 쏙 남겨지는 외로움은 다시금 누구에게라도 안주하고 싶어지는 함정이 되곤 하였고,


‘결혼은 현실이니까... 나는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결혼했는데 하고 보니 이게 다는 아니다 싶어. 조건 잘 따져서 한 친구들 보니 시댁에서 집을 턱 사주더라. 시작이 달라’


이런 말들이 돈을 내지도 않았는데 정기 간행물처럼 찾아와 심난하게 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나의 발은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 하는 이들에게 다가가기엔 모래주머니라도 달아 놓은 것 마냥 무거웠고 가지 말라고 잡아주는 보이지 않는 손이 등뒤에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손이 내게 이리 말해주는 것 같았다.

‘결혼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란다. 결혼은 네 아버지가 말씀하신 비즈니스가 아니야. 함께 두 손을 잡고 있으면 차오르는 마음이 있어야지. 결혼엔 적당한 때, 적당한 상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면 족하다’ 하는 마음, 그 마음이 드는 그때! 그때 결혼을 하는 거야. 좀 더 기다리렴. 조급해하지 말고.‘


서른을 넘기고 나서야 나는 철부지 티를 벗고 나만의 가치관을 형성한 어엿한 성인이 되어가는 기분이 들었고, 배우자에 대한 새 기준을 만들었다.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에 함께 있어 주었으면 하는 사람’


삼십 대에 세워진 기준은 잘 다져진 토양에 건강하게 뿌리내렸다. 나의 20대 연애를 함께 으쌰도 하시고 훈수도 놓으시던 부모님의 관심이 확 줄어든 덕도 한몫했을 것이다. 비즈니스는 적기라는 것이 중요할 텐데 아마도 부모님이 보시기에 나는 적기를 지난 재고 혹은 떨이해야 할 무엇이 돼버린 것이다.


부모님의 신념이 약해지고 나의 가치관이 견고해지면서 나는 연애 휴식기를 가졌다. 그리고 이즈음 일도 그만둘 결심을 했다. 지친 것은 결혼을 위한 연애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대학을 다니면서 놓아본 적 없던 아르바이트에서 직장으로 이어진 ‘일’이라는 것에도 에너지가 소모만 되고, 채워지지는 않는 공허함과 헛헛함 그리고 한계가 있었다. 연인과의 이별만큼이나 퇴사라는 결정은 무척 불안했었다. 그야말로 서른 중반에 애인도 없고 직장도 없는 우스개 소리로 하자면  금은동메달은 가져보지도 못하고 목메달 상황이 될 참이었다.


그래도 연애의 휴식기만큼이나 퇴사는 절실했다.

졸업 후 바로 취업해 감사한 마음으로 충성을 다했던 일에서 한계점을 느끼니 자존감이 고장 난 비행기 마냥 추락하고 있었기에 통장 잔고는 늘어날지언정 생기는 말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른 중반에 솔로인 나는 내 어머니가 보시기에 참으로 위태로워 보였을 것이다. 퇴사하겠다는 나의 발언에 이번엔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작지만 매서운 내 어머니의 손이 등짝 스매싱으로 날아왔다.


‘니 나이에 직업도 없이 남자를 어떻게 만나려고? 아이고 조금만 참으면 되지 이제와 어쩌려고 남들이 얼마나 한심하게 보겠어.’


어머니의 걱정이 한가득 이었지만 타인의 시선정도는 한 곳으로 밀어 두고 마음 다치지 않을 정도로 큰 나이였기에 나는 몇 번 더 등짝을 맞으며 어머니를 달래 주었다.


드라마처럼 사직서를 쓰고 가방 속에 가지고 다니지는 않았다. 모시던 상사에게 면담을 요청해 의사를 전달하고 다음 수순으로 인사부장에게 전했다. 다시 인사부장이 나의 상사와 짧은 만남을 가졌고 나를 대신할 후임자를 뽑는 공고가 올려졌다. 회사가 매정하다고 10년간 일하면서 여러 번 느꼈을 텐데 그때가 제일 그랬다. 회사가 잘 못한 것이 없는데도 나를 대신하기 위해 면접 오는 이들이 내 파티션 앞으로 걸어 들어오고, 걸어 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편치는 않았다. 사랑하지 않았기에 이별했던 그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먼저 사표를 던졌어도 회사에 미련이 없지는 않았었던 것 같다. 어쩌면 아쉬운 소리를 내며 잡아주었으면 했는지도 모르겠다.


후임자를 위해 일을 정리해 가며 나는 부족한 어학을 채워줄 후보지를 서치하고 있었다. 그리 불안과 설렘으로 하루하루 버텨가던 중 동네에 한 친구가 찾아왔다.


일이 있어 지나는 길에 전화를 걸었고 볼 수 있냐는 물음에 ‘당근’이라며 슬리퍼를 신고 나갔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나갔다. 그날 나는 회색 롱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외출복이 아닌 인터넷에서 저렴하게 구입한, 스판성이 좋아 집에서 입고 뒹굴기 편한 실내복이었다

잠시 지나는 길이라 했고 해가 쓰윽 넘어간 초저녁이었기에 정말 얼굴 보고 인사나 하고 가려나 했다.


집 앞 길을 건너니 친구가 서있었다. 나와 다르게 말쑥한 차림의 친구를 보니 상대적으로 허접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민망함에 웃음이 절로 나왔는데 매너 좋은 친구는 실내복 같지 않다며 토닥여 주었었다. 친구는 그냥 돌아갈 기세는 아니었기에 나는 산책을 제안했다. 5월의 봄날 초저녁은 걷기를 위한 더할 나위 없는 선물 같은 시간이다.


집 근처 공원을 걸으며 나는 이곳을 어찌 지나게 되었는지 물었고, 내게 전화를 해줘서 반가웠다고 말했다. 정말 그랬다. 스스로 계획한 일이지만 누구든 붙잡고 구구절절 말하고 싶었다. 여자는 떠들수록 불안도가 낮아지는 신비한 존재 같았고 나는 딱 그런 사람이었다. 기억하기에 대충 친구는 학회가 있었고 교수님 모시고 저녁식사를 했는데 예약된 식당이 이 근처여서 전화했다 이런 내용이었다. 그 말이 끝나고 나서 나는 결론부터 내 얘기를 털었다.


곧 연수를 갈 거다. 미국으로 갈까 고민하고 있고 후임자가 뽑히고 인수인계가 끝나면 좀 쉬었다가 바로 뜰 거다. 불안하기는 하다. 그래도 지금 그만두는 것은 잘하는 짓인 거 같다. 이대로 직장생활을 해봐야 몇 년 남지 않은 거 같다. 그땐 이직이 더 어려울 거다. 그러니 지금 가는 게 맞다. 등등 걸으면서 내 얘기를 쉬지 않고 풀어냈던 거 같다.


친구는 응. 그래. 그렇지. 등등 최소한의 추임새를 넣으며 내 이야기를 경청해주었고 듣는 내내 표정은 진지했다. 동네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두 바퀴째 도는 타임이었다.


친구는 느닷없이 내게 말했다.


‘나랑 결혼하고 가’


놀라서 눈이 똥그래진다는 표현을 그때 뭔지 알았다. 이게 무슨 소리? 결혼? 나랑? 네가?

동그래진 눈에는 저 4가지의 질문이 다 담겨있었다.

이보다 더 뜬금없을 수가 없었다. 친구와 나는 말 그대로 아는 지인, 내 친구의 친구정도의 사이였다.


친구의 친구였던 이 동갑아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진심이야?’


헙, 질문을 하면서도 나 왜 이러지 싶었다. 진심이면 어쩔 건데? 정말 이 친구랑 결혼이라도 하게?


머릿속에서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아우성을 쳤다. ‘무슨 소리야. 결혼이라니. 하하 네가 지금 내가 불쌍해서 농담하나 본데 벼랑 끝에 있는 사람 놀리는 거 아니다. 그래, 넌 근래 어떻게 지냈니?’ 하면서 상황을 바로 잡는 게 맞아 보였는데 진심이냐니? 이성과 입이 다르게 놀았고 심장은 더 제멋대로였다. 설렘이 있었다.


‘왜 설레는 거지? 왜 저 말이 좋지?’


좋았다. 찾을 만한 이유 따위는 생각나지 않았고, 그냥 좋았다. 이 친구와 같이 있는 시간이 좋았고 같이 걷는 공원이 좋았다. 진심이냐는 물음에 친구는 망설임 없이 ‘응’이라고 대답했다. 대답에 심장은 주책스럽게 더 날뛰었다.


그는 나의 낡은 기준에는 부합하지 않았다. 지방에서 어머님 혼자 아들들을 키워냈고 대학 근처 원룸에서 친구와 형 둘이 지내고 있었으며 아직 취업을 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실로 결혼을 한다면 예식비용이나 있을지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내가 새로 만든 기준에는 찰떡이었다. 수개월, 수년을 만나도 이리 설레어 본 적이 있었을까. 왜 좋지?라는 질문을 해보는데 그냥 좋아 라는 메이라만 돌아왔다. 그렇게 공원을 세 바퀴 중간쯤 돌면서 친구가 손을 잡았다. 이미 많이 걸어 다리는 슬슬 굳어오고 있었지만 손을 놓고 싶지 않아 나는 더 걸었다.


그렇게 그날 1일이 되었고 결혼까지 7개월이 걸렸다.

결혼 적령기를 막 지나는 여자의 행보에는 방해물이 없었다. 그저 노심초자 깨질까 조심스러워하는 마음들만이 있었다. 결혼을 위한 어지러웠던 날들이 한 번에 정리되었다.

그날 회사 선배가 해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결혼할 사람을 보면 ‘이 사람이구나’ 하는 마음이 먼저 든다고 했었다. 그리 말했던 선배도 형부를 소개받아 만난 첫날  아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하는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고 그다음으로 이 사람 만나려고 7년을 솔로로 지낸 것이 억울하게 느껴졌었다고도 했었다. 연애라도 실컷 해볼걸 하면서 말이다.


결혼하고 가라는 친구의 말에 내가 그랬다.

이 아이랑 결혼하겠구나

이 느낌이 온몸으로 들어찼다.

청혼을 먼저 받고 친구와의 연애가 시작되었다.

5월 2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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