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맡으로 드는 햇살이 따스했다
지끈지끈한 머리통 관자놀이를 누르며 나는 얼핏 잠에서 깨어났다
창가 옆 벽시계를 보니 오후 두 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침대 오른쪽 그녀는 온몸에 시트를 둘둘 말아 덮고 헝클어진 머리채에 가려 얼굴이 절반은 안보였다
잠결에 답답했었는지 슈트니 스커트를 어디로 다 벗어던졌는지 자유분방하게 반라 차림으로 엎드려 자고 있었다
반라 차림은 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실내 온도가 필요 이상으로 높아서 잠결에 자기 방으로 착각하고 벗어 버린 듯싶었다
이리저리 살펴본 바로 간밤에 서로 다른 불상사는 없이 잘 넘긴 듯싶었다
갑자기 그녀의 맨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장난스레 흩어져 내려온 머리카락을 살며시 이마 위로 쓸어 올렸다
낯선 손길에 움찔하며 그녀의 미간이 순간 찡그려졌다
얼굴 화장이 다 지워진 콧대와 눈가에 주근깨가 자글자글 하다
그 모습이 왠지 빨간 머리 앤처럼 천진난만하고 귀여웠다
갑자기 안아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차분하게 눌러 참았다
결국 내 엉뚱한 행동 때문인지 그녀도 기지개를 켜며 낯선 늦잠에서 깨어났다
한쪽 눈을 찡그리며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래
시트를 머리까지 잽싸게 뒤집어썼다
"쌤! 생 얼굴에 머리까지 산발했는데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제발 다른 쪽을 좀 봐주세요"
"어쩜~이런 옷도 다 벗겨졌네요"
"네? 벗겨지다니요 저는 손하나 까딱 안 했어요
분명 자발적인 탈의입니다"
잠시 시트 속에서 뭔가를 살피는 듯하더니
"아 그런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ㅎㅎᆢ"
미쳐 덮이지 않아 시트 밖으로 나온 발, 발가락 매니큐어 색깔이 고혹적인 짙은 '바이올렛 핑크'였다
순간 이 여자처럼 매혹적인 색깔이라고 생각했다
우린 내외하듯 조심스레 차례대로 샤워를 마치고 옷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챙겨 입었다
그녀는 등을 돌리고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어젯밤 들어오면서 편의점에서 그녀 모르게 구입한 편강을 커피포트에
듬뿍 넣고 전원을 두세 번 켜고 연거푸 끓여 깊게 우려냈다
그녀의 감기가 더 심해지지 않도록 따듯한 생강차를 마시게 하고 싶은 심정에서였다
화장을 끝낸 그녀가 천천히 내 쪽을 돌아본다
좀 전에 본 생얼굴과 전혀 다른 사람이 내 앞에 앉아 있다
화려하고 활기찬 변신이 정말 놀라웠다
"어디서 생강 향이 나는 것 같아요, 뭐예요 샘ᆢ?"
진하게 우려진 생강차를 머그컵에 한가득 부어 조심스레 건네며 말했다
"콧물감기 더 심해지지 말라고 제가 끓여 봤네요"
"편강은 도대체 어디서 구하셨어요?"
"어제 들어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담배 사며 있길래 같이 샀어요"
그녀는 잔을 받아 들고 잠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눈망울에 물기가 가득하게 차오르는 것을 보고 말았다
내 성화에 못 이겨 그녀는 생강차 두 잔을 연거푸 마셨고 나머지는
대충 식혀서 5리터짜리 물병을 비워 고스란히 담았다
모텔을 나와 큰길에서 양양 쪽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바다 쪽으로 날씨가 찌뿌듯하고 을씨년스럽다
모텔주인 얘기로는 '물치항'이 그리 멀지 않다고 했으니 간격이 뜸한 시내버스를 한참 기다리느니
택시로 가는 게 훨씬 편할 거라고 행각이 들었다
푸른 파도가 밀려오는 해안도로를 따라 50여분을 달렸다
그러나 목적지는 나오지 않았다
미터계의 요금이 6 만원을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녀가 물었다
"기사님 목적지는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한참 남았는데요 왜요?ᆢ" 퉁명스러운 대답이다
"저 기사님 모텔 주인장께서 물치항이 멀지 않다고 해서 택시를 탔는데 말과 현실 사정이 많이 다른 것 같네요"
"목적지까지 가려면 요금이 얼마나 더 나올까요"
"글쎄ᆢ12만 원 정도 나오겠네요"
"넹? 기사님 죄송한데요 목적지까지 그렇게 먼 줄은 잘 몰랐네요
8 만원만 받으세요"
"아니면 여기서 그냥 내려주세요 버스 타고 가야겠어요"
"물치항이 가깝다고 알려주신 그분을 믿은 게 우리 잘못였네요"
아저씨가 황당한 듯 뒤를 한번 힐끗 돌아보더니 대답이 없다
나는 이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며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려주세요 아저씨ᆢ"
아저씨가 말했다
"내참ᆢ가다가 내리면 서로 뭐가 좋겠어요 초행이시라니 제가 손해보지요"
"그렇게 해드릴게요"
그렇게 택시비까지 깎고 물치항 포구 횟집에 다다른 우린 조금은 좀 전의 상황에 어색한 표정으로 마주 앉았다
목적지까지 미터기 요금은 12만 원이 조금 덜 나왔으나
먼 거리였다
"어떻게 택시비를 깎아요ᆢ?"
"쌤ᆢ아주머니 때문에 버스로 올걸 택시로 오는 바람에 거금 날린 셈이 잖아요"
"대충 알려준 모텔 아주머니 아주 못 됐어요"
"그 기사님과 아주머니랑 혹시 부부 아니 신가 모르겠네요?"
"어쩐지 그분들 둘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뜩 드네요
왠지 그 사람들 각본에 속은 기분이 드네요 ㅎㅎᆢ"
"캐리어가 두 갠데 버스 계단 오르내리기도 귀찮고 해서 가깝다니까 편한 택시를 이용하려고 했던 거지요ᆢㅎㅎ"
내 신용카드 결제를 굳이 마다하고 그녀가 현금으로 택시 요금을 지불해서 내가 많이 무안하고 미안스러웠다
그녀는 야무지게 말했다
"제가 회 한 접시 값은 벌었거든요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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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강 : 생강을 얇게 저며서 설탕을 넣고 졸여서 말린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