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캐롤 편(1/2)
자신을 끔찍이 아끼는 남편, 부유한 시댁 식구들, 보석처럼 사랑스러운 딸아이. 결혼 10년차 캐롤(케이트 블란쳇 역)의 삶은 이 이상 무언가를 더 바라는 일이 죄악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완벽했다. 그녀는 네살짜리 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어머니였다. 그런 그녀가 이혼과 함께 양육권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과 하나뿐인 딸아이를 떠나면서까지 그녀가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을까? 영화 <캐롤>은 '행복한 에고이즘'을 주제로 한다. 주인공 '캐롤'은 이미 결혼으로 삶을 구속당한 여성이 뒤늦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주하고, 그것을 부정하지 않게 되기까지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성정체성은 사람 사이의 복잡적인 상호작용으로 인해 발생한다. 그것은 환경적 요인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개별적으로 '경험'될 수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어느 누구에게나 우연히 찾아올 수 있는 변화인 것이다. 영화 <캐롤>의 중심 주제는 성소수자의 사랑이다. 캐롤은 결혼 후 5년이 지난 뒤에야 자신이 여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계기는 어느 날 우연히 벌어진 하룻밤의 사건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캐롤은 자신의 소꿉친구였던 에비에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하고, 남편보다 그녀에게 더 의지하고 함께 있기를 원하게 된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녀와 함께 있을 때 더 자유롭고, 더 즐겁고, 더 자신다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말만 통할 수 있으면 누구라도' 그 때 당시 캐롤에게 에비는 취향과 감정과 말이 통하는 유일한 상대였다. 겉보기에 완벽한 가정이라는 조건과는 별개로 캐롤 에어드의 삶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캐롤이 결혼 뒤에 자신의 성정체성을 새롭게 경험하는 설정은 상징적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가혹한 우유부단 속에 살고 있다. 자기 자신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삶의 주도권을 쉽게 남에게 넘겨준다. 결혼 생활이 지속되고, 아이가 생기고 나서 뒤늦게 그것을 되찾아 오기란 불가능하다. 캐롤에게 에비가 그랬듯이, 어떤 여성에게는 자신만의 일이나 막연한 자유, 섬세한 취향이 새로운 의미로 발견될 수 있다. 한 여성이 뒤늦게 자신이 진정 원하는 무언가를 새롭게 알게 되는 순간을 '다른 여성과의 사랑'이라는 설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캐롤이 자신의 인생에서 에비를 받아들이기 전까지 그녀의 삶은 남편과 시댁의 삶을 그대로 투영한 것이었다. 그녀는 어떤 여성이든 '누군가의 아내'로 불리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남편과 그의 가족은 우아하고 현명한 여인 캐롤을 자신의 아내이자 며느리로 데리고 있기를 원했다. 그것은 애정보다 소유의 욕망에 가까웠다. 행복한 에고이즘의 첫번째 모습이다. 그들은 크리스마스 말 혼자 남아 있을 그녀를 집으로 초대하고 안부를 걱정하지만, 정작 그들이 필요로 한 것은 '캐롤 에어드'가 아닌 이상적인 아내와 며느리의 역할을 담당할 누군가였다. 캐롤이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삶을 원하는지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캐롤의 남편은 자신이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만을 거듭해서 주장한다. 하지만 캐롤의 사랑은 더이상 그가 아니었고, 남편인 그가 제공해주는 어떤 조건과도 관계 없는 것이란 게 분명해졌다.
그들의 얼굴에는 자신들의 행복만을 생각하는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모두들 거북스러웠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카미유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 에밀 졸라, <테레즈 라캥>
한 가족의 일부가 된 여성에게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새롭게 주장할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역시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했던 <블루 재스민>의 주인공 재스민이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지를 생각해보면 이 권리를 주장하는 것 역시 무리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재스민은 남편 덕분에 상위 0.1%의 상류 문화를 즐기던 여성이었다. 하지만 사기를 쳐서 남의 돈을 빼돌린 남편의 범죄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녀는 몰락 귀족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전까지 남편이 제공하는 사치와 이를 통해 채워지는 욕구에만 관심을 쏟던 재스민은 혼자가 된 뒤에도 오로지 그것을 다시 채우는 데 혈안이 된다. 그녀가 잘 알고 있는 취미, 관심사 대부분이 남편에게서 투영된 것이었다.
"남편 할이 순종마에 빠졌었거든요."
그녀는 남편이 죽은 뒤에야 과거 자신의 관심사였던 인테리어를 공부하기 위해 수업을 등록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오랜 사치의 습관은 그녀가 또다시 다른 남자에 의탁해 신분 상승을 꿈꾸게 만든다. 결혼을 통해 그녀 자신만의 관심사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것을 개발할 자립적인 능력이나 자아일체감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실감각은 완전히 마비된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 있는 동생의 집에 얹혀 살고 있으면서, 자신이 아직도 부유하고 품위 있는 것처럼 꾸며낸다. 과대망상은 거짓말에서 거짓말로 이어지고 모든 사실이 들통나면서 망상 속 세계가 무너지자, 재스민은 자기가 누구인지도 잃어버리게 된다. 결국 재스민은 밤낮으로 보드카에 취해 홀로 벤치에 앉아 아무도 듣지 않는 이야기를 중얼거리는 비참한 모습으로 남는다.
캐롤은 재스민과 달리 달라진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새롭게 마주하게 된 자신을 부정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행복한 에고이즘'의 두번째 모습이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삶을 선택했다. 그 결과로 딸의 양육권을 포기하면서도 자신을 부정하면서 살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 욕망은 세상의 인정을 받는 것도, 남편과 시댁 식구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녀 자신이 말했듯이 자신에게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지금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남편도 가정이 아닌 한 명의 여자라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녀와 함께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스스로 운전대를 잡는 모습이 많이 비추는 캐롤은 한 가구점에 취직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살 집을 구한 뒤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우리는 결혼한 여성이 어떤 욕망을 갖고 있는지 그 내용보다(캐롤의 경우, 자신이 여자를 사랑한다는 사실), 그녀들이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지 않고 남 앞에 드러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극중에서 캐롤은 딸을 끔찍이 아끼는 인물로 그려진다. 어떤 대가를 치르는 일이 있더라도 딸아이를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가 양육권 소송 중에 뜻밖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저는 제 자신을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는 모릅니다. 그래도 제 딸아이에게 무엇이 최선인가는 알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딸을 위해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신과 치료를 받고, 사랑하는 사람과 연락을 끊으면서 어머니로서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 애써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나를 부정하고 싶지 않아요. 양육권을 포기하겠습니다."
캐롤은 불리한 진술을 막으려는 변호사를 막아서며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마친다. 터지는 울음을 참아내며,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를 꺼내는 그녀의 모습은 영화 중 가장 외롭고 안쓰러워 보인다. 그 자리에서 그녀가 원하는 삶을 인정해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가정을 꾸린 남자의 야망이 여전히 제각각인 것처럼, 결혼한 여성의 욕망 역시 저마다 서로 다르다. 모두가 '행복한 에고이즘'에 따라 살아간다. 결혼한 여성에게도 그럴 권리가 있다. 많은 걸 포기해야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은 사랑'을 위해서라면 그런 선택도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