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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다샤 Aug 13. 2020

[세월호 6년, 생존자 인터뷰 ①] '파란 바지의 의인





▲  남편 김동수의 고통은 곧 아내의 고통이기도 하다. 서로를 의지하며 힘든 시간을 이겨내는 부부의 뒷모습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 김형숙





김동수님은 소위 '파란 바지의 의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던 그 날 마지막까지 배에서 사람들을 구조하다 나왔지만,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수차례 자해와 자살을 시도했다. 그런 그를 돌보는 가족들 역시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이제 생존자모임이 생겨 커다란 위안이 된다고 한다. 그는 현재 제주의 사려니숲길에서 아내 김형숙씨와 함께 숲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지난 3월 28일 국가폭력피해자 기억공간인 수상한집에서 부부를 만나 인터뷰했다.




- 세월호 참사 당시 이야기는 여러 번 하셔서 물어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먼저 세월호 구조를 알아야 하는데 1층에는 철근, 목재를 비롯한 여러 화물과 무거운 중량의 화물차 등이 실렸고, 2층에는 나머지 화물차와 승용차 등이 실렸습니다. 차량들은 이미 여러 번 방송에도 나왔듯이 바퀴에 버팀목으로 고정했고, 화물차들도 앞뒤로 하나씩 와이어로 묶고 바퀴에 버팀목을 넣었습니다. 3층에는 화물기사 숙소, 직원 숙소, 일반인 객실 등이 있고, 선수 갑판 쪽에는 컨테이너 등을 비롯해 가벼운 화물이 실려 있어요. 그 위로 4층과 5층에도 일반인 객실이 있습니다."




- 사고 당시에는 어디 계셨나요?


"2014년 4월 16일 아침 식사를 하고 8시 46분경 아내와 통화하고 기사들이 쉬는 방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급회전하면서 쿵쿵 소리를 내며 기울어졌어요. 창밖으로 보니 컨테이너 화물들이 바다에 떠 있었습니다. 느낌이 좋지 않아 구명조끼를 입고 동료 기사들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해서 나와 보니, 선내 방송으로 대기하라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3층 후미 쪽으로 나와서 난간에 의지해 상황을 살피며 4층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배가 많이 기울어지지 않아 금방 구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진을 찍고 마라톤동호회에 보내기도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9시 15분경 헬기가 상공을 선회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보고 4층 중간지점으로 이동하다 보니 2~3명이 커튼으로 사람들을 끌어 올리는 것을 보고 그곳에서 도와주었습니다.



일반호스로 구조해봤으나 구조가 어려워 소방호스를 던져 사람들을 끌어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몸에 호스를 감아 끌어올렸죠. 10여 명 정도 끌어올리자 통로에 사람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학생 한 명이 급하게 '아저씨, 빨리 와 보세요'라고 해서 앞쪽으로 이동했더니 8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아래에 보였습니다. 대략 8미터 정도 되는데 경사가 져 올라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소방호스로 사람들을 구조했습니다."




- 그렇게 구조활동을 하면서 많이 힘드셨겠어요.


"수 십 명 정도 구조할 때쯤 헬기에서 해경 몇 명이 내려와 상황을 살피고 올라간 후 빈 바구니만 내려줬습니다. 그런데 난간 구조물 때문에 바구니가 온전히 내려오는 것도 힘든 상황이라, 사람을 구하다 말고 쓰레기통을 밟고 올라가 바구니를 잡고 사람들을 태워 올려보내야 했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구조를 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져서 나머지 사람들은 먼저 구조된 사람들이 구조해 줄 것이라 믿고 다시 후미 쪽으로 이동해 다른 사람을 구조하려 했습니다. 그러던 중 배는 더 급속히 기울어졌고, 선실 창문을 통해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봐야 했습니다. 마지막 배가 가라앉기 전 학생들이 '아이 있어요. 살려주세요'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다가가 아이를 끌어올려 구조보트에 넘겨줬습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




▲  비오는 날 제주대병원에서의 김동수씨. 궃은 날이면 더욱 더 세월호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 김형숙




- 정말 긴박한 상황이었는데 탈출하실 생각을 안 하셨나요?


"10시 31분께 배가 완전히 뒤집힐 때까지 사람들을 구하다 물에 빠졌습니다. 다행히 구명조끼 덕분에 수면 위로 떠올랐고, 어선에 의해 구조된 뒤 해경 123정에 옮겨졌습니다. 제가 해경들과 선원들에게 '배에 사람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해경들은 '곧 특공대가 와서 구조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라는 말만 하고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해경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록하기 위해 바다를 촬영했습니다. 제가 사고 당시 찍은 바다에는 해경이 없습니다. 배에 200~300명이 더 있다고 이야기 해봤지만 소용없었습니다. 11시 18분경 123정에서 어선으로 옮겨 타고 30분가량을 달려 팽목항으로 이동했습니다.




진도체육관에 도착해서도 해양수산부 사람들에게 '사람 수백 명이 배 안에 있다, 어떻게 할 거냐'고 외쳤지만 피하기만 했습니다. 오히려 텔레비전을 통해 '학생 전원 구조'라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완전히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체육관에 있던 마이크를 잡고 '거짓말'이라고 했지만 그것뿐이었습니다." 




- 그날 저녁 체육관에서 나오셨어요. 왜 나오신 거예요?


"체육관에 있을 때 2~3시경부터 화물 기사들은 화물주인(화주)에게서 걸려오는 전화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사람 수백 명이 죽어 나가는 상황이었지만, 화주들에게는 화물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화주들은 화물 기사에게 전화해서 화물의 상태와 보상을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싣고 가던 화물 주인은 저의 안부를 걱정해 줘서 다행이었지만 다른 화물기사들은 밤새 화주들에게 전화로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날 저녁 7시쯤 체육관을 나왔던 것 같아요. 도저히 같이 못 있겠더라고요. 아이들이 배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통곡하는 부모들을 보니 죄스럽고 미안한 자책이 들어서 체육관에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배가 빨리 가라앉을 줄 몰랐고 그렇게 구조를 못 할 줄 예상하지도 못했어요. 어쨌든 나는 살아남았습니다. 가족들은 자식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고 답답했을 텐데 우리만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 너무 미안했어요. 그 배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내가 직접 봤으니... 아직도 그 얼굴들이 떠올라 너무 미안했습니다.



저와 동료 화물 기사들은 세월호 안에서의 상황보다 진도체육관에서의 상황이 더 힘들고 처참했기 때문에 빨리 빠져나오고만 싶었습니다. 그래서 진도군청 공무원에게 '제주도 내려갈 여비를 좀 빌려 달라'고 부탁해서 동료 화물 기사들과 함께 저녁 7시 30분쯤에 나와 우수영항에 있는 모텔에 숙소를 잡고 그날 밤을 보내고 나서 아침 9시 제주행 배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 모텔에서도 잠들기는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모텔에 있는 동안에도 우리 화물 기사들은 지옥에서 빠져나왔지만, 배 안에 남겨진 사람들과 앞으로 닥칠 걱정들로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 다음날 제주로 돌아오셨다면서요. 가족들을 만나시니 좀 어떠셨는지요.


"4월 17일 아침 9시 진도 우수영항에서 배를 타고 제주로 돌아왔어요. 진도를 빠져나올 때 바다에 세월호 부유물로 보이는 구명조끼를 보니까 다시 고통스러워졌죠. 어떻게 제주로 왔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였습니다. 12시 50분경에 제주항에 도착했던 것 같아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맥이 탁 풀리더라고요. 특히 딸아이를 보니 배 안에 남겨진 아이들 얼굴이 떠올라 괴롭기만 했습니다. '내 딸은 이렇게 살아 품에 안겼는데'하는 생각에 마음이 더 힘들었습니다.



제주에 오니까 몸이 여기저기 아프더라고요. 세월호 배에서 어깨를 다치기도 했고, 긴장이 풀려서인지 심리적으로도 불안해서 몸도 아프더라고요. 빨리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자회견이 준비되어 있다면서 기자회견장으로 저를 데려갔습니다. 아마도 제주시 공무원이었던 것 같아요. 힘들었지만 간단하게 기자회견을 했고, 끝난 뒤에 한국병원에 입원했습니다."



"300명이 죽는 걸 본 사람... 치료가 되겠습니까?"




▲  병원에 입원 중인 김동수씨. 일년에 몇번씩 입원하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 김형숙




- 입원해서도 힘드셨다고 들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했지만 마음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음식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몸이 너무 떨려서 병원에 이야기하고 병원 옆 목욕탕에 갔는데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아직도 차가운 데 있는데 아저씨는 따뜻한 곳에 있네요'라는 환청이 들렸어요. 너무 놀라 목욕탕에서 뛰쳐나와야 했죠.



물론 육체적인 고통도 심각했습니다. 구출과정에서 장시간 무리한 힘을 사용해서 어깨, 허리, 옆구리 등 몸 여기저기 이상을 느꼈는데, 결국 팔과 무릎에는 물혹이 생겨서 제거하는 수술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허리와 어깨는 지금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평생 훼손된 상태로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 세월호와 관련해 조사도 받으셨지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제주도 경찰청 정보과 형사가 자주 찾아와 저의 상태도 살폈어요. 언제인지 모르겠는데 목포해경 소속 경찰들이 피해자 조사를 하겠다며 나오기도 했습니다. 찾아온 목포해경에 해경들의 무능과 무책임에 대한 문제들을 거침없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저의 이야기가 매우 불편했던 모양이었습니다. 결국 듣다 못한 해경 한 명이 '김동수씨는 이준석 선장이 살인자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묻더라고요."




- 해경들의 그런 태도에 많이 화가 나셨겠어요.


"자신들의 태도에 반성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누군가에게 책임을 미루려는 태도에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릅니다. 그런 불신들이 저를 더 괴롭게 하더라고요. 그날 이후 정신적 불안 증상은 계속되었고, 안 되겠다 싶어 처음 찾아간 정신과 병원에서 일반 환자 대하듯 문진을 하길래 '전 300명이 죽는 걸 본 사람입니다, 치료가 되겠습니까?'라고 묻자 의사가 아무 말도 못 하더라고요. 그렇게 몇 군데 병원을 찾아다녀 봤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 그래도 병원치료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한두 군데 문제가 아니라서 종합적인 치료를 위해 제주대학병원에 입원을 해봤습니다. 그때는 정신과 치료보다는 몸 상태에 대한 입원이었습니다. 입원 2주 후 엑스레이 촬영을 대기하고 있는데 30분이 지나도 부르지 않길래 '아직 멀었느냐'고 물었더니 직원이 성의 없는 말투로 '판독 중이니 기다리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에 쌓여있던 감정이 폭발해 버렸죠. 그동안 쌓였던 불만과 섭섭함을 큰 소리로 이야기하고 병원을 나와 버렸습니다. 사실 이미 분노조절장애가 심각했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그런 말을 안 해줬던 것이죠."




- 그럼 분노조절장애를 알게 된 것은 언제였나요?


"2014년 9월인가 딸과 함께 자전거 여행을 한 적이 있어요. 여행 중 어느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는데 갑자기 손이 떨리더라고요. 젓가락도 잡지 못할 정도로 갑자기 떨리니까 나도 놀라고 딸도 놀랐죠. 차를 잡아타고 얼른 병원 응급실로 왔는데 병원에서는 담당과장이 안 계셔서 '입원 수속이 어렵다'며 입원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터져 버린 거죠. '이렇게 손이 떨리고 아픈데 입원도 못하게 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굉장히 화를 내며 항의했습니다. 결국 이런 과정이 쌓이면서 분노조절장애가 생긴 것이죠."




- 안산 온마음센터(트라우마센터)에 찾아가 보신 적 있다고 들었습니다.


"안산에 세월호 희생자를 치료하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들었죠. 거길 찾아가 센터 관계자들도 만나고 가족들과도 만나면서 희생자 치료를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주로 내려와 곧바로 제주도청을 찾아갔습니다. 담당 공무원을 만나서 '안산에 세월호 희생자 치료센터가 있다, 우리도 많이 힘들고 치료가 시급하니 트라우마센터처럼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후에 제주도에서 생존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예산 4000만 원을 확보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주도에서는 예산집행을 위해 법인단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평생 운전대만 잡고 있다가 사고가 나서 고통 속에 사는 우리가 도와주는 사람도 없는데 갑자기 어떻게 단체를 만듭니까. 저는 별도 법인 없이 어서 생존자들에게 직접 지원을 해달라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 제주에서의 지원은 결국 어떻게 되었나요?


"나중에 도 지원금을 화물 기사들끼리 나눠서 받았습니다. 그나마 그 돈도 얼마 되지 않았어요. 제가 진상규명이다, 안산 고대병원에 치료받는다 하면서 교통비로 다 쓸 정도로 적은 금액이었습니다. 지금은 제주시외버스터미널 앞에 제주마음치유센터(트라우마센터)가 있습니다. 간단한 물리치료나 공방 공예 같은 것을 하며 심리치료나 직업훈련을 한다고 하지만 실제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시간적 제약 때문에 저같이 근무시간이 정해진 사람은 이용하기가 어렵죠."



"살아난 제가 죄인인 것만 같아 너무 괴로워"




▲  사려니 숲에서 쉬고 있는 김동수씨

ⓒ 김형숙



- 의사상자 신청을 하셨잖아요.


"그랬지요. 아내가 의사상자를 신청했는데 그것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의사상자 신청을 하기 위해서는 서울의 지정병원에 가서 증빙서류를 받아 제출해야 하는데 결국 개인이 다 뛰어다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가지 우여곡절 끝에 2015년 6월 18일 의사상자로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판정된 의사상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소정액의 상금, 저의 의료급여 지원, 고등학생까지의 자녀 학용품 지원이 전부더라고요. 이미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다 졸업한 상태라 결국 생계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 2015년 3월 19일 처음 제주 조천읍 자택에서 생계가 어려워 자해를 시도하셨어요.


"일단 세월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늘 죄책감과 고통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이 있습니다. 늘 그 기억이 나 자신을 덮치는 것 같아 제정신으로 살 수 없습니다. 항상 약을 먹고 살아야 하는 운명이 된 것이지요. 수면제와 안정제, 진통제에 의존해서 살아야 하니 사는 것이 곧 고통입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수입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나마 긴급재난지원금 명목으로 6개월간 120만 원씩 지원이 되었는데, 그마저도 끊겼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당시 저희가 살고 있는 조천 집 연세를 내야 할 때가 다가왔고, 타고 다니던 차도 완전히 망가져 차를 구입해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정말 나쁜 일들이 한꺼번에 몰려왔을 때였습니다. 그러던 참에 그날 화물 기사들도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하소연해서 저도 모르게 자해를 하게 됐습니다."



- 자해를 여러 번 하셨던 것으로 기억해요. '김동수 = 자해' 이렇게 생각할 정도로 자해를 많이 하셨어요.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니까 답답하기도 하고, 제가 제 자신을 통제하기가 어려워 그랬던 것 같아요. 살아난 제가 죄인인 것만 같아 너무 괴로워서 아이들에게 그렇게라도 미안함을 갚고 싶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올바른 해결만이 근본적인 치료"




▲  제주 사려니 숲에서 숲관리 중인 김동수씨

ⓒ 김형숙



- 심리적으로 불안한 김동수님을 위해서 제주도에서 사려니 숲 관리를 하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좀 나아지지 않으셨어요?


"숲에서 일한다고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까요. 나는 세월호 참사에서 살아난 사람입니다. 누구보다 안전이나 사고에 민감한 편이죠.



한 번은 사려니 숲길 입구 도로에서 자동차끼리 부딪치는 사고가 난 적이 있습니다. 차량이 전복되었는데 차가 부딪치자마자 저와 아내가 제일 먼저 뛰어갔습니다. 뒤집힌 차 안에 있는 모녀를 끄집어내자 그제야 사람들이 하나둘씩 몰려오더라고요. 나중에 같이 근무하시는 분이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뛰어나가냐며 놀랐다고 하더라고요."




- 김형숙씨는 남편을 볼 때 세월호 참사 직후와 지금은 많이 달라 보이나요?


(김형숙씨) "당연히 그렇지요. 처음 남편이 구조됐다고 했을 때 엄청 기뻤어요. '파란 바지 의인'이라고 할 때는 굉장히 뿌듯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가만히 있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마음입니다.



내 남편은 끝까지 사람들을 구하다가 나온 의로운 사람인데 왜 저렇게 소외받고 자해하며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매우 후회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 '제주세월호생존자와 그들을 지지하는 모임'(약칭 제생지)이 만들어졌어요.


"나의 고통은 세월호 참사의 올바른 해결만이 근본적인 치료라고 생각합니다. 세월호에서 해경과 국가가 제대로 구조하지 못해 죽은 사람들의 진실을 밝히고 우리 같은 생존자들의 이야기가 진상규명에 올바르게 반영된다면 내가 앓고 있는 병은 자연스럽게 치유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떤 약으로도 치료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나와 같은 생존자들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국가는 언제 나을지 모르는 생존자들의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기한을 두지 말고 치료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체를 만들기 전에는 모든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만 해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해와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썼고, 그럼에도 해결되는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정신적 고통이 더 커졌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이런 단체가 만들어져서 요즘은 마음이 훨씬 편안합니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지지를 하고, 도움을 준다는 말을 할 때 더 이상 혼자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위로와 용기를 얻는 것 같습니다. 모쪼록 제생지가 앞으로도 계속 생존자의 지지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함께 하는 모임이 되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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