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적으로 탈출한 윤길옥
▲ 화물차를 운전하기 전 잠시 시간을 내어 찍은 윤길옥씨 사진. 세월호 생존 화물기사인 그는 여전히 화물차를 몰고 있다.
ⓒ 변상철
윤길옥(55)씨는 화물 기사들과 함께 생계를 위해 세월호를 탔다가 참사를 당한 피해자이다. 세월호 침몰 당시 온수가 쏟아져 다리에 화상을 입었지만, 사람들을 구하다가 마지막에 탈출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윤씨는 여전히 막막한 생계의 어려움과 육체적 후유증, 트라우마를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화물차량을 몰고 있는 그를 지난 19일 서귀포의 한 찻집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마침 비가 오는 날이라 그의 컨디션이 걱정되었다. 다행히 밝게 웃으며 들어오는 그의 모습에 안심이 되었다.
- 건강은 어떠세요?
"밥맛이 없어서 하루 한 끼만 먹어요. 새벽 5시쯤 나가서 오후 3시 정도에 퇴근하는데, 일하는 동안에 밥 먹을 시간이 없거든요. 계속 운전해야 하니까. 점심시간을 놓치면 못 먹기도 하고,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쉬자는 마음으로 건너뛰는 게 일상이에요. 퇴근 후 집에 와서 편하게 씻고 혼자 밥을 먹어요. 왠지 다른 사람들하고 섞여서 먹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고요."
- 최근에 어떻게 생활하고 계세요?
"어렵죠. 세월호 사고가 난 후 1년 넘게 병원 생활을 하고 나와서 먹고는 살아야 되니, 2015년도에 25톤 화물차를 겨우 빚내서 샀어요. 그래도 벌이가 시원찮아서 2016년도에 추레라 3대를 추가 대출받아 샀어요. 전액 할부가 되니까 부담 없이 샀는데 막상 돈을 벌지 못하니까 힘들어지게 되더라고요. 한 달에 할부만 해도 900만 원, 기름값 1500만 원, 기사 월급 900만 원 이것저것 다 합하면 매달 3000만 원 이상 지출이 생기게 되는데 감당하기 쉽지 않아요.
일감이 줄어 화물 잡기가 쉽지 않은데 기사들이 술 먹고 나오지 않거나, 아프다고 결근하다 보면 벌이가 엉망이 되는 것이죠. 그러잖아도 화물 업무는 자꾸 줄어드는데 기사들마저 불성실하면 일거리도 하나둘씩 떨어지고, 결국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운영이 어렵게 되더군요. 결국 화물차는 캐피탈 회사에 넘어가고 겨우 차량 1대만 아내 명의로 남겨서 운영하고 있어요(그는 현재 채무가 5억가량 된다고 했다).
- 가족분들도 생계가 곤란하시겠어요.
"사실 아내하고 3년 전에 이혼했어요. 돈 때문이죠. 화물차를 끌면서 어렵다 보니까 처가에서도 돈을 빌리는 상황까지 몰렸거든요. 그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아서 차라리 이혼을 하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이혼 후 캐피탈로 넘어갔던 차량 1대를 구입해서 아내 명의로 옮겨놓고 제가 직접 운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혼은 했지만 먹고는 살아야 하니 이혼할 때 아내에게 부탁한 것이죠. 차주가 아내 이름으로 되어 있어서 모든 수입은 아내 앞으로 가요. 버는 족족 아내 통장으로 착착 들어가는 것이죠. 대신 아내는 나에게 매달 30만 원 정도 생활비를 보내줘요. 그거 가지고 사는 겁니다."
- 직접 화물차 운전을 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요즘은 직접 화물차 몰고 삼다수 공장을 올라갔다가, 오후에는 밀감밭에 밀감 실어 나르고, 무나 양배추 같은 야채도 나르죠. 대목에는 잠 한숨 못 자요. 새벽까지 야채 옮기고 나면 새벽 5시가 되는데 그럼 다시 잠 못 자고 삼다수 공장으로 올라가서 각 항으로 생수를 옮기는 일을 해야 하죠."
"세월호로 인한 가장 큰 피해는 몸이 반응하는 거"
ⓒ 변상철
- 삼다수 공장 일은 고정적인 일인가 봐요.
"아내 명의로 되어 있는 차를 가지고 지입차로 들어가서 일을 하고 있어요(이혼했다지만 그는 전처를 아직도 아내라고 불렀다). 삼다수 공장이 꽤 크거든요. 전국적으로 나갈 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수출도 많이 나가요. 팔레트 하나에 2리터 6개짜리 생수 묶음이 96개가 실려요. 그게 많이 나갈 때는 하루에 3000개에서 5000개가 나가요."
- 화물차 운전은 언제부터 하신 건가요?
"1988년부터 화물을 했어요. 그때는 돈을 잘 벌 때였죠. 그러다가 IMF 때 화물차 팔고 대구로 갔어요. 대구에 가서 스트링공장을 차려서 섬유 일을 했습니다. 구미에 있는 한국합섬 실을 받아다가 사업을 크게 했는데 동업하던 사람이 돈을 들고 해외로 도망가는 바람에 공장 차압되고 저는 제주로 야반도주하다시피 도망 왔어요.
그렇게 돌아와서 좌석버스를 1년 정도 하다가, 그 회사마저 부도가 나서 다시 실업자가 되었죠. 어찌어찌 5톤 화물차를 구입하게 되어 육지로 화물차를 몰고 다니기 시작했는데, 세월호가 빵 터져 버렸죠."
- 세월호 참사 당시 자녀들 나이가 어떻게 되었나요?
"아들이 고등학교 막 졸업할 때였습니다. 아들이 취업도 못 하고 병수발 하면서 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옆에서 전부 보더니 세상 살기 싫다고 하더군요. 그러다 군대에 갔는데 제대할 때쯤 세상 나오기 싫다면서 부사관으로 지원해서 직업군인으로 살더라고요.
딸은 더 심해요. 딸은 저와 같은 정신과 약을 먹으며 지내고 있어요. 세월호 때 딸이 고등학교 2학년이었거든요. 고등학교도 정상적으로 다니지 못하고 대학도 진학하지 못했어요. 지금도 딸만 보면 가슴이 너무 아파요(세월호에는 윤씨의 화물차뿐만 아니라 아내와 딸에게 줄 선물도 실려 있었다고 했다).
- 사고 이후에도 화물차 운전은 계속하시네요.
"먹고 살려니 어쩔 수 없죠. 화물차랑 빚이랑 정리되면 서울 올라가서 치료받으면서 제주도는 아주 안 내려 오려구요. 서울에 운전하는 친구들이 있으니까 운전기사 자리는 있을 거예요. 월급 300~400만 원 준다고 하는데 돈을 보면 타고 싶지만 배를 못 타는 게 문제예요. 내가 세월호로 인해 가장 큰 피해는 정신은 살아 있는데, 몸이 반응하는 거예요.
2017년 화물차를 새로 사 올 때 목포에서 배 타고 오는데 파도가 아주 잔잔한 거예요. 기사들 방에 있는데 땀이 줄줄 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파도가 나도 배멀미가 없는 사람인데 땀이 줄줄 나면서 쓰러져 버리는 거예요. 세월호 사고 이후로 그렇게 쓰러지고 나서 어떤 배도 못 타요. 비행기를 타도 마찬가지예요. 비행기 타면 기도를 하게 돼요. 무사히 가게 해달라고."
"종교도 멀어지게 되더라고요"
- 어떤 것이 힘들게 하는 걸까요?
"제 종교가 천주교예요. 세월호 나기 전에는 한 번씩 미사를 갔는데, 사고 이후로는 전혀 못가요. 두려운 죄책감 때문에 가지 못하겠습니다. 성당에 가면 세월호에서 구하지 못한 학생들,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데도 발을 다쳐서 걷지 못해 못 구한 사람들, 냉장고에 깔린 학생들, 그런 생각과 죄책감에 도저히 가지를 못하겠는 거라, 고백성사도 못하고 다 못하는 거라, 자동적으로 종교하고도 멀어지게 되더라고요."
- 세월호 참사 당시 어디에 계셨나요?
"원래 인천에서 배를 자주 타고 다니니까 승무원들하고 친했어요. 사고 나고 나서 여승무원인 박○○하고 둘이 있었어요. 그 승무원에게 나가자고 하니까 자기는 사무장하고 같이 나갈 테니 먼저 나가라고 해서 나 혼자 먼저 나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승무원이 죽어서 나왔더라고요. 그런 기억으로 정말 힘들었어요. 후회되는 게 그 승무원 멱살이라도 잡고 나왔어야 하는데 그걸 못한 게 후회돼요."
- 탈출은 어떠셨어요?
"입구까지 7~ 8미터 정도 되는데 물속으로 들어가니까 입고 있는 구명조끼 때문에 자꾸 천장에 몸이 붙어서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도저히 못 나오겠다 싶어 포기하는 찰나에 이제까지 겪었던 삶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거라. 마침 그날이 우리 아버지 49재날이었는데 제사도 못 보고 가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갑자기 몸이 물 밖으로 튀어나온 거예요.
배가 잠기면서 배 안에 있던 공기와 물이 뿜어져 나왔는데 그때 튕겨 나온 거죠. 나와서 보니까 주위에 배는 아무것도 없지. 마침 저 멀리 해군 배가 보여서 거기까지 헤엄쳐 갔어요. 가는 중에 학생들이 탄 고무보트가 나를 발견하고는 다가와서 겨우 안전바를 잡고 질질 끌려서 해경 배에 옮겨 탔어요. 해경들이 나를 부축하는데 너무 화가 나서 손을 뿌리치고 기다시피 해서 난간 쪽으로 갔어요.
함정에서 진도군 어업지도선으로 옮겨탔어요. 보니까 그 안에 세월호 선원들이 있는 거 아니에요? 아니, 우리보다 어떻게 선원들이 있고 선장이 있는가 해서 화가 나는 거예요. 그런데 바닷물에 빠져서 떨리고 다리도 아프고 해서 화도 못 내고 팽목항까지 왔죠. 거기서 병원으로 가서 응급치료를 받았지요."
- 치료를 받으셨나요?
"곧바로 올라갔어요. 한강성심병원에서 한 1년 이상 치료받았죠. 그곳에서 피부이식수술을 두 번이나 했는데 아직 감각이 없어요. 한여름에도 다리가 시려서 양말을 신고 잘 정도예요. 나만 그런가 해서 보니까 같이 화상을 입은 김재영한테 물어보니 그도 그렇게 발이 시리대요.
이게 십중팔구 평생 앓아야 하는 병이 되어 버린 거죠. 근데 2024년까지 치료비가 나온다고 하는데 그 이후에는 내 돈 들여 치료해야 하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됩니까. 어떨 때는 개미가 무는 것처럼 따끔따끔하는데 잠도 못 자요."
▲ 세월호 참사 당시 다친 발을 보여주는 윤길옥씨.
ⓒ 변상철
'사람 목숨이 더 중요하지 대통령이 중요하냐'
- 그래도 빨리 서울로 올라가 치료받으셨네요?
"119 차량이 없어서 군용 병원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는데 군인들이 우리 차를 막고 못 가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왜 못 가게 하느냐고 하니까 VIP가 내려온다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못 가게 하는 거예요. 그러자 그 차에 타고 있던 군인이 '사람이 죽어 가는데 사람 목숨이 더 중요하지 대통령이 중요하냐'며 바리케이드를 차로 치고 그대로 서울로 달렸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고마운 군인입니다.
성심병원에 가니까 기자들이 잔뜩 있어요. 원장이 인터뷰하겠냐고 해서 싫다고 했죠. 다음날부터 박원순 서울시장 등 몇몇이 왔다 갔어요. 나한테 정보원 하나가 붙었어요. 어디 소속인지 모르는 정보원이 따라다녔어요.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하고 보고하는 일을 했습니다. 퇴원할 때까지 아침에 병원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식으로 일을 했어요."
- 제주 화물 운전사들끼리는 모두 아는 사이인가요?
"영천 형이나 오용선 형님이나 다 10년 이상 아는 사람들이에요. 원래는 내가 아침을 안 먹는데 그날 배가 늦게 출항하다 보니 라면이나 한 그릇 먹자고 매점까지 4명이 갔어요. 그때 배가 엎어진 거죠. 내가 심하게 화상을 입었어요. 배가 기울어질 때 온수통 쓰러지지 말라고 그걸 내가 잡고는 매점에 있던 학생들 밖으로 나가라고 피신시켰거든요. 그런데 배가 한 번 더 기울어질 때 온수가 확 쏟아졌어요. 하필 온수통 뚜껑이 잠겨 있지 않았어요."
- 다친 상태에서 나오셨어요?
"발을 다친 상태에서 힘들게 나오는데 3층 프런트에 있던 사람들이 구명조끼를 꺼내달라고 하길래 배 구조를 잘 아는 영선이하고 제가 객실에 들어가 구명조끼를 꺼내주고 그랬어요. 그때까지 발이 달달 떨리더라고요. 그러면서 사람들과 구조함정 오는 것만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이 지나도 안 와요. 그러다 저 멀리 커다란 화물선이 보이는데 그 배도 오지 않고 참 답답하더라고요. 어선들도 많이 왔는데 구하지를 못했어요.
나중에 들은 사실이지만 해경이 구조를 막아서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배가 기울어진 상태에서 해경에서 망치로 선실 창문이라도 깨줬어야죠. 안 되면 해경 총으로라도 창문을 깨야죠. 터무니없이 해경이 망치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는 해명이 말이 됩니까. 지금도 서귀포에서 해경 차를 보면 발로 차고 막 욕을 해요. 너희들 때문에 죄 없는 학생들 다 죽었잖아 하고 막 욕을 해요. 서귀포 해경도 나 보면 막 도망가고 그랬어요."
- 세월호 관련해 조사를 받으셨나요?
"2014년 병원에 있을 때 세월호특조위에서 나와서 받았어요. 1차로 목포경찰서에서 나와서 조사를 했고, 나중에 다른 곳에서 나와 두 번째로 조사를 하더라고요. 그런데 2차 조사하러 온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왔어요. 내가 누군지, 어떤 피해가 있었는지 전혀 공유가 안 되었더라고요. 그래서 신상정보 알아보지도 않고 올 정도였으니 무슨 조사를 하느냐며 내가 막 욕을 해버렸지요."
- 2015년 6월 18일 보건복지부 제2차 의사상자심사위원회에서 의상자 인정을 받으셨어요. 몇 급으로 인정받으셨나요?
"5급으로 받았어요. 의료급여는 1급으로 되어 있어요. 서귀포에 의상자는 나 혼자로 알고 있는데 서귀포시에서는 의상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제주에서 세월호 관련해서 의상자로 지정된 것은 나와 김동수하고, 재영이하고요."
"우리의 꿈을 앗아간 악마"
▲ 세월호 침몰 후 탈출 과정을 설명하는 윤길옥씨. 그는 세월호 참사 당시 사람들을 구하다가 마지막에 탈출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 변상철
- 왜 세 사람밖에 안 될까요.
"이게 서류가 엄청 복잡하고 힘들더라고요. 내가 의로운 일을 했다, 즉 세월호에서 사람을 구했다는 증인이 있어야 해요. 결국 세월호 생존한 사람에게 물어보고 다녀야 하는데 그게 할 짓이냐고요. 배에서 살아난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나왔지, 서로 자기만 살려고 했겠어요? 당연히 모두 의상자로 해줘야죠. 이걸 증명해서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 6년이 지났습니다. 어떠신가요?
"실감이 안 나요. 엊그제 일어났던 느낌이에요. 4주기까지는 방송국에서 와서 촬영도 하고 그랬는데 5주기부터는 오지 말라고 했어요. 모든 것이 힘드니까 촬영, 인터뷰도 싫다고 했어요. 그런데 용선이 형님이(오용선 대표) 제생지(제주세월호생존자를지지하는모임) 만든다고 해서 따라 나오게 되었어요. 사실 지금도 싫기는 하지만 형님 얼굴 보고 참여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약이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힘든 상황이에요."
- 어떤 약을 드시는 건가요?
"제가 먹는 약이 5가지예요. 우울증약, 수면제, 신경안정제 등등 있는데 그걸 매일 먹고 자야 해요. 일반인이 복용하면 잠이 깨지 않아 응급실에 실려 갈 정도로 독한 약이에요. 그렇게 독한 약을 먹어도 잠이 안 올 정도니까 후유증이 엄청난 거죠."
- 앞으로 어떻게 살기를 원하세요.
"가족들과 화목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약을 먹지 않고 피곤하면 잘 수 있는, 약에 의존하지 않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요. 큰 욕심 없이 남들 사는 것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 세월호는 윤길옥씨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우리의 꿈을 앗아간 악마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우리들의 모든 꿈을 다 빼앗아가고, 우리의 삶도 다 빼앗아간 악마예요. 아직도 곁에 남아 있어요. 가면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아요. 오히려 더 해로운 것 같아요.
진상규명, 보상, 말은 그렇게 해도 내 솔직한 심정은 돈을 몇억씩 줘도 마음 치유는 안 될 것 같아요. 몸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내 상태가 정상이 될 수 있을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것을 국가가 찾아서 해결해줘야겠지요. 특히나 주변에서 생존자를 바라보는 왜곡되거나 잘못된 인식, 시선 같은 것부터 바꿔줘야겠죠.
세월호 사고가 왜 났는지의 진실, 왜 정부에서 구조가 소홀했는지 이런 것들 하나하나 해결해야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 해요. 문재인 대통령도 와서 세월호 문제 해결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못했어요. 그런 해결 하나하나가 우리 마음의 상처를 조금씩 회복시키지 않을까 합니다."